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46화 (46/215)

#46. 어긋난 마음

허혼령.

이 세 단어가 몰고 온 파장은 이레를 거칠게 휩쓸었다.

재간택 교지가 오지 않을 것임은 익히 짐작한 바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신의 혼사가 거론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느닷없이 쏟아진 한여름 밤의 폭우.

잔잔한 바닷가 해변에서 만난 뜻밖의 크고 사나운 너울.

“간택에 참여한 간택인은 평생 수절하거나, 행여 혼인을 한다 하여도 해가 바뀐 다음에나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레의 저항에도 할머니는 완고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체면을 중시하는 일부 권세가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다. 재간택인들의 혼사조차도 국법으로 금하지 않거늘. 하물며 초간택에 참여한 간택인의 혼사를 누가 신경 쓴단 말이냐. 아무튼, 그리 알고 있거라.”

단호한 말과 함께 할머니는 별채를 떠났다.

그분의 자리는 비었으나, 그분께서 남기신 말씀은 여전히 이레의 귓가를 맴돌았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 달려갔다.

답답한 마음에 서탁에 글을 남겨보았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서탁에 새긴 글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각.

그녀의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이를 어찌할까.”

새벽.

별빛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이레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

날이 밝았다.

할머니의 걸음이 다시 별채로 향했다.

채 잠에서 깨지 못한 이레는 허둥지둥 일어나 할머니를 맞이했다.

허혼령, 매파, 혼사.

엉킨 실타래 같은 생각의 갈피에서 헤매느라 새벽 늦게야 잠들었던 까닭이다.

“늦게 잠들었더냐?”

이레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각오한 지청구는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그런 말을 들었으니, 마음이 번잡하였을 테지.”

“…….”

“오늘은 숭교방에 다녀와야겠다. 그러니 준비하거라.”

“숭교방이라고 하면 외가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레의 얼굴에 놀람이 먹물처럼 번졌다.

여인이 혼인을 하면 시댁 귀신이라 하여, 친정 있는 곳은 돌아보지도 않아야 한다며 어머니에게 늘 말씀하시던 할머니가 아니시던가.

그런데 오늘은 직접 행차하신다 하니.

이레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곳엔 무슨 일로…….”

“잊었느냐? 오늘이 숭교방 안사돈의 환갑연이 있는 날이거늘.”

“아차!”

그간 여러 가지 일로 정신이 사나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니.

어머니께서 아시면 얼마나 서운해하실까.

어린 시절, 자신을 귀애하시던 외할머니를 떠올리니 미안하고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네 오라비 일도 있고 하여 그냥 넘길까 하였으나, 그래도 사람 사는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지 싶구나.”

할머니의 재촉에 이레는 채비를 서둘렀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다듬었다.

문득 비춰본 면경엔 피곤하고 근심 가득한 얼굴이 우물처럼 고여 있었다.

***

이레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 외가댁이 있는 북촌으로 향했다.

기세등등한 고관대작의 집들이 즐비한 곳이라.

골목에 들어서니 거대한 솟을대문과 높은 담벼락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늘어서 있었다.

그중 할머니와 이레의 목적지는 중심가에 위치한 거대한 고택이었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고택 앞은 외조모의 환갑연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이레 어머니의 친정은 세자빈 홍씨의 먼 일가붙이였다.

세자빈의 아비이자 조정의 실세로 주상전하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는 영의정 대감 덕에 홍씨 집안의 위세는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그 덕을 이레의 외가도 단단히 보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외가의 솟을대문 앞은 선물을 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할머니는 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을 무시하고 곧장 대문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던 청지기가 이레와 할머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쩐 일로 드셨는지요?”

할머니는 무심한 표정으로 서찰을 건넸다.

서찰을 살피던 청지기의 안색이 단박에 변했다.

“아이쿠, 이게 뉘십니까.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다요. 그렇지 않아도 큰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지요.”

청지기의 태도가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잰걸음으로 앞장선 그를 따라 안채로 향했다.

너른 안채 마당엔 먼저 온 사람들로 왁자했다.

“손님이 많군.”

“말도 마십시오. 이틀 전부터 몰려온 손님이 서른두 칸, 행방을 모두 채우고, 마당에 깐 자리마저 부족할 지경입니다요.”

청지기의 설명에 할머니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눈치 없는 청지기의 말이 이어졌다.

어디에서 어떤 귀한 분이 어떤 선물을 보냈는지.

누구는 귀한 산삼을 보내고, 시전의 유명한 상인은 청국 황실에만 들어간다는 도자기를 선물로 보내왔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구하기 어렵다는 홍옥을 선물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청지기의 말이 길어질수록 할머니의 안색은 고목의 등껍질처럼 굳어갔다.

이레는 품에 안은 비단보자기를 한껏 껴안았다.

나름 신경 써서 구한 물건이지만, 청지기가 앞서 열거한 물품에 비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큰 마님, 큰 마님! 벽오동 댁 노마님이 오셨습니다요.”

청지기의 고하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안채 문이 활짝 열렸다.

“아이고, 어쩐 일로 이리 귀한 걸음을 하시었소.”

사람 가득한 방 안에서 노부인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게 누구요? 이렇게 얼굴 보는 게 대체 몇 해 만입니까?”

할머니를 맞는 노부인의 목소리가 정겨웠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썹.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

웃는 상이 복스럽고 온화한 노파였다.

십년지기 벗을 다시 만난 듯 반기는 외조모와는 달리 할머니에게선 쌩쌩 찬바람만 불었다.

“꼭 십오 년 만이지요.”

“어찌 이리 서먹하게 구는 게요. 지금은 머리에 하얗게 흰 서리 앉았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서로 밤을 낮처럼 여기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우리가 아니요.”

사돈이기 전에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동무였다.

어린 시절엔 하루가 멀다고 만났건만.

어른이 되며 양가의 아이들을 성혼시킨 이후로 되레 관계가 소원해지고 말았다.

냉랭한 할머니 대신 노부인은 이레에게 시선을 돌렸다.

“외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해요.”

이레는 비단보자기를 노부인에게 내밀었다.

청지기가 냉큼 나서 대신 받으려는 걸 노부인이 굳이 자신이 직접 받아들었다.

“네가 벌써 이리 컸구나. 널 마지막으로 본 게 삼 년 전이렷다? 정말 많이 컸구나. 곱게 자랐어. 그간 어찌하여 통 걸음 하지 않은 것이야?”

“제가 무심하여 불효하였습니다.”

“불효는. 잊지 않고 꼬박꼬박 보낸 서신은 잘 받았다. 이리 온전히 자라준 것만으로도 고맙구나.”

이레의 하얀 손을 맞잡은 채 놓지 않는 외조모의 모습에 괜스레 코끝이 알싸해졌다.

“내 정신 좀 보게. 반가운 마음에 귀한 손님을 이리 밖에 세워두었구먼. 안사돈,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리고 이레야.”

“네.”

“이곳은 나이 먹은 사람들만 북적이니, 네가 함께 있기 불편하겠구나. 마침 네 또래가 모여 있으니, 별당으로 한번 가보려무나.”

이레에게 따뜻한 눈길을 던진 노부인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안채로 향했다.

노부인의 격의 없는 모습에 할머니의 표정도 처음보다 많이 풀려있었다.

나란히 걷는 두 분을 잠시 지켜보던 이레는 별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

연못을 가로지르는 둥근 다리를 건너 작은 중문을 두 개 넘어가자 비로소 별당이 나왔다.

그곳 역시 선객으로 가득했다.

안채와 앞마당이 나이 많은 사람들로 가득하였다면, 별당엔 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채 모여 잔치의 흥을 즐기고 있었다.

외사촌이라도 있을까 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온통 낯선 사람들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쉽게 무리에 끼지 못하는 이레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형조판서의 여식, 유경이었다.

영빈께서 베푼 다과회에서 이레에게 유난히 친근감을 보이던 아이.

작고 여려 곧잘 긴장하던 태를 보이던 간택인이었다.

“언니도 오셨군요.”

유경은 이레를 별당 안으로 안내했다.

영빈의 다과회에서 만난 간택인들이 그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너도 왔구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이레의 망막에 대제학의 여식, 김명선이 맺혔다.

마치 무에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듯.

명선은 불쾌함이 가득한 눈길로 이레를 쏘아보았다.

이레의 등장을 반기지 않은 건 비단 명선만이 아니었다.

“저 아이는 여기 어쩐 일이냐?”

“몰랐어요? 이 댁이 저 간택인의 외가라 하더이다.”

“아! 그랬었나? 처음에 워낙 수수한 차림을 하여 전혀 상상도 못 하였군. 그런데 이제 간택인이라 칭할 수 없는 처지 아닌가? 적어도 저 여인에겐 말이야.”

간택인들은 이레를 흘끔거리며 묘한 시선을 보냈다.

영빈의 다과회에서는 모두가 간택인이라는 같은 위치였으나, 이젠 처지가 달라졌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 모두가 재간택의 교지를 받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 유일한 한 명인 이레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외할머니의 배려로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자리로 스스로 기어들어 온 꼴이 되고 말았다.

당연하다는 듯 상석에 자리한 명선이 유경에게 말했다.

“난 이곳이 재간택인들만 모인 자리로 알고 있었는데?”

“다과회에 참석한 인연인데. 이리 다 함께 모이면 좋지 않겠습니까.”

“인연이라도 다 같은 인연은 아니지.”

명선의 말에 곁에 앉은 여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내 말이 그 말이외다. 내 초간택에서 떨어진 이와 동급으로 취급당하는 줄 알았으면 예까지 걸음 하지 않았지요.”

어린 여인들의 입에서 나온 말치곤, 제법 야살스러운 말들이 다담상 위를 부유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저러거든요.”

작게 속삭인 유경은 이레의 손을 잡아끌었다.

“언니, 여기 앉으셔요.”

그러나 유경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레를 향한 재간택인들의 매서운 목소리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낯도 두껍네. 나 같으면 당분간은 창피해서라도 집 밖 출입을 안 할 터인데.”

“내 말이 그 말이오. 그리 공을 들였는데, 재간택에서 떨어져서 어쩌누? 그래도 내심 기대했을 것을.”

“하긴 그런 투자를 하였으니. 실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지.”

“대체 무얼 보고 그리 요란을 떨었나 모르겠네.”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것이겠지.”

“가문의 사정이 넉넉지 않다니, 이리 재간택에 떨어졌으니 뒷갈망이 쉽지 않겠어.”

노골적인 재간택인들의 비웃음에 유경은 연신 이레의 안색을 살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레를 여기로 부르는 것이 아닌데.

유경은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정작 이레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들의 모진 말에 일일이 반응하기엔 어젯밤 들은 이야기의 충격이 너무 컸다.

이레에게서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재간택인들의 비아냥도 점점 줄어들었다.

흥미를 잃은 젊은 여인들은 금세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최근 벌어진 궁녀들의 불미스러운 사건의 범인이 깜짝 놀랄 비밀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몇몇 가문의 계집종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 이야기가 이어졌다.

더러는 사내와 정분이 나서 달아났다는 추측도 있었고, 더러는 바깥주인을 유혹한 것이 들통나 안주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끔찍한 말도 들려왔다.

그렇게 쉼 없이 이어진 이야기는 근래 유행하는 장신구와 치장으로 쏠렸다.

곧 있을 재간택에 서로 어떤 치장을 하고 어떤 장식을 할 것인지 정탐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신경전과 경계를 풀지 않던 여인들이 한마음이 된 것은 사내들에 관한 이야기에 이르러서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사내란 그 나이 또래의 여인들이 갖는 가장 큰 관심사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다들 그 이야기 들었소?”

“무슨 이야기?”

“한양의 여인들 사이에 유명한 세 사내에 관한 이야기 말이오.”

“유명한 세 사내?”

“처음 듣는 이야기일세.”

“대체 무엇으로 유명하단 말인가?”

여인들은 곧 흥미를 보였다.

“말 그대로 번듯한 외모와 풍류로 뭇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세 사내에 관한 이야기라오.”

“어떤 사내이기에 그런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말을 꺼낸 여인은 무에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춰가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첫째 사내는 신비공자라 불리는 인물인데, 모습을 보인 것은 고작 서너 번. 그것도 모두 밤에만 나타났다 하더이다.”

“고작 세 번만으로 어찌 유명해질 수 있단 말이오?”

“그 사내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고 미려한지, 먼발치에서 본 여인들조차도 하나같이 상사병에 걸렸다는 소문이오.”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어떻게 한 번 본 것만으로 상사병에 걸린단 말인가?”

“그만큼 기가 막히게 잘 생겼다는 말이겠지요. 처음 등장한 것이 올해 단옷날인데, 동료인 듯한 사내들도 번듯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코 군계일학처럼 빛났다 하더이다.”

“그렇게 말하니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하구먼.”

“재간택인이 다른 사내를 궁금해해서야 쓰겠소?”

“단지 어찌 생겼나 궁금하단 말이지, 내 그 사내와 무얼 어찌하겠다는 뜻은 아니질 않소. 그리고 말이 나와 하는 말이지만. 어차피 세손빈이 되실 분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다른 사내에게 관심 좀 가진다고 하여 무에 큰 흠결이 되겠소?”

여인들의 시선이 명선에게로 향했다.

바로 곁에서 하는 말이라.

분명 들었음에도 명선은 마치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고아한 자태로 찻잔을 기울였다.

여인의 말이 이어졌다.

“두 번째 사내는 한양에서 소문난 유생인데, 인물 훤하고 명석하여, 가히 잠룡이라는 찬사가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사내라더이다. 박학다식하고 특히 산술에 관하여서는 조선은 물론이고, 세상천지에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데. 유일한 흠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점이라오.”

“그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면 장원급제도 어렵지 않을 터. 집안 형편이 조금 어려운 게 무슨 상관이겠소?”

“그런데 아쉽게도 그 사내에겐 이미 임자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소문이오.”

“혼인을 약조한 사람이라도 있다오?”

“그건 아닌데…….”

“약혼한 사람도 아닌데, 임자가 있단 소린 대체 무슨 말이오?”

“한 여인이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그 여인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오.”

“누군데 그렇소?”

말을 꺼낸 사람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아! 그 시전의 점포 중 삼 할을 차지했다는 그 여장부?”

“그런 여인이 붙어있다면 어지간한 여인들은 감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겠네.”

여장부의 이름을 들은 여인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이 샌 듯 낙심한 눈빛을 하던 여인이 처음 말문을 연 여인을 돌아보았다.

“좀 전에 세 사내가 있다 하였지 않았소? 두 명을 말했으니, 이제 마지막 한 사람 남았으이. 마지막은 대체 어떤 사내요?”

“앞서 말한 두 사내가 뜬구름 같은 존재라면, 마지막 세 번째 사내야말로 한양 땅의 여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인물이라 하더이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린 여인이 다시 입술을 뗐다.

“사헌부 대사헌의 막내아들. 이름은 장무열이라 하던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무려 장령이 된 사내라오.”

“사헌부의 장령이라니. 젊은 사내가 어떻게 그리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가?”

“아비가 대사헌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가능한 이야기겠지.”

“주상전하께서 얼마나 꼼꼼한 분이신데. 실력이 없으면 영의정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해도 벼슬을 내리지 않을 분이시라네. 그런 분께서 어찌 배경만 가졌다고 그 높은 벼슬을 내렸겠는가. 분명, 남다른 재주가 있다는 의미겠지.”

“그런데 벼슬이 높은 이유로 여인들이 탐을 낸단 말인가?”

“어디 실력만 빼어나서야 여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겠는가?”

“그럼?”

“나도 한 번 우연히 본 적 있는데, 외모가 그야말로 출중하였소. 훤칠한 키에 사내다운 과묵함. 게다가 눈빛은 한겨울의 들판처럼 차고 시리니. 보는 사람을 애타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더이다.”

“그리 말하니 어떻게 생긴 사내인지 정말 궁금하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지 않겠소?”

“그게 무슨 말인가?”

“소문으로는 그 사내에게 태중 혼약한 여인이 있다 하는데…….”

말을 꺼낸 여인이 명선을 눈짓했다.

한껏 흥미를 돋우던 여인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소문이 사실입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명선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한 채 답답한 한숨만 내 쉴 뿐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 긍정이라.

여인들은 명선의 곁으로 바싹 모여들었다.

“대체 어찌 된 사연입니까? 정말 저 말이 사실이어요?”

명선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무슨 이야기 말인가?”

“사헌부의 장령. 도성을 뒤흔드는 세 사내 중 한 명인 그 사내와 태중 혼약한 사이라는 소문 말입니다.”

명선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라네.”

“맙소사.”

“그처럼 대단한 분과 태중 혼약까지 하였는데, 어쩌다…….”

여인들의 호들갑스런 반응에 명선은 천천히 좌우로 고갯짓했다.

“어찌하겠는가? 부모님의 약조보다 더 중한 것이 나라의 부름인 것을.”

낮은 한숨과 함께 명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저 가혹한 운명을 탓할밖에.”

***

운명이 명선에게 세손빈의 길을 요구하니.

어쩔 수 없이 태중 혼약을 파기하고 세손빈이 되는 간택인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노라.

명선은 가련한 표정과 서글픈 눈망울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였다.

그녀의 애끊는 이야기에 여인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였다.

“어머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세 사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여인이 방 밖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왜 그러는가?”

“좀 전에 말한 세 사내 중의 한 사내가 나타났네.”

“누굴 말하는가?”

“두 사람은 신기루처럼 보아도 잡을 수 없고, 오직 한 사내만이 실체가 있다 하지 않았는가?”

“그럼 명선 아가씨와 태중 혼약한…….”

“바로 그분이 나타났네.”

과연, 여인의 말처럼 한 사내가 별당으로 들어섰다.

훤칠한 키.

멀리서 보아도 뚜렷한 이목구비.

차가운 표정에 시린 눈동자를 지닌 묘한 매력을 지닌 참으로 잘난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성큼성큼 거침없는 걸음으로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을 애써 삼킨 채 여인들은 힐끔힐끔 사내를 곁눈질했다.

다음으로 여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명선이었다.

저 사내가 이곳을 찾아올 이유는 단 하나.

태중 혼약한 명선을 만나기 위함이 분명했다.

어린 시절부터 장래를 약조한 여인이 재간택인이 되어 하늘 같은 분의 곁자리를 지키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이나 할까.

어쩌면 분을 참지 못한 그가 명선을 만나 담판을 짓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여인들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명선과 무열을 번갈아 보았다.

그 사이 장무열은 재간택인들이 모인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방안에 모인 여인들은 숨소리마저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깊은 침묵 속에서 명선 역시 마른침을 삼켰다.

겉으로 평온한 듯하여도 그녀의 심장은 장무열이 나타난 그 순간부터 날뛰고 있었다.

찻잔을 만지는 그녀의 손엔 식은땀이 흥건하였다.

대체 어찌할까?

무열이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가기라도 한다면 어찌해야 하는 거지?

반항하는 것이 옳은 걸까?

그렇지 않으면 고분고분 따라 나가 그 마음을 달래 주어야 할까?

명선을 비롯한 모두가 이후의 상황을 상상하고 있을 때였다.

“이곳에…….”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방안을 살피던 장무열이 입을 열었다.

차분하고 반듯한 외모만큼이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작 그 목소리는 모두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경기관찰사댁의 낭자가 계시오?”

여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명선을 찾으러 왔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정작 그 사내가 찾는 사람은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다.

“경기관찰사댁이라면…….”

“언니, 언니 찾는 거 아니어요?”

유경이 목청을 돋웠다.

사람들의 이목이 이번엔 이레를 향했다.

사내.

사헌부의 정4품 장령, 장무열이 이레를 발견했다.

그가 조금의 주저함 없이 그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소. 잠시 시간 좀 내어줄 수 있겠소?”

딸그락!

방 가장 안쪽에서 요란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명선이었다.

그녀가 든 찻잔이 다담상 위로 맥없이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명선은 그런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이레를 향한 그녀의 눈이 사갈처럼 표독스럽게 돌변하였다.

멀리 떨어진 곳이라.

미처 명선의 눈빛을 보지 못한 이레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장무열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바빠서 곤란합니다.”

“……!”

인연의 추가 한쪽으로 무게를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명선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태중 혼약한 사내와 가문의 영달을 두고 마음의 저울질을 해야 했던 가련한 여인.

그럼에도 자신을 찾아온 사내의 간절한 마음을 어찌 거절해야 할까 고민하였건만.

그런 가련한 여인을 사내는 시종일관 무시했다.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장무열이 바라본 여인은 태중 혼약했던 명선이 아닌 다른 여인이었다.

고작해야 경기 관찰사를 아비로 둔 한미한 가문의 여인.

간택령이 아니었다면 상종할 일 없을 만큼 변변찮은 여인.

그런 여인에게 장무열이 청하고 있었다.

시간을 내어달라고.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아들이자, 뭇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 잘난 사내의 청을 이레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두 여인과 한 사내의 어긋난 마음.

재간택으로 성립된 여인들만의 서열에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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