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45화 (45/215)

#45. 허혼령

늙은 내관의 걸음은 특이했다.

두 팔을 소맷자락 속에 넣고, 허리를 조금 숙인 자세로 발을 높게 들지 않고 걸었다.

유난히 좁은 보폭.

그래서인지 발을 재게 움직인다.

그럼에도 신발 바닥이 지면을 긁지 않았다.

다른 내관들과 같은 자세, 비슷한 걸음걸이건만.

늙은 내관의 모습에선 스스로를 군자라 지칭하는 이들보다 더 깊은 품위와 기개가 느껴졌다.

뒤를 따르는 이레는 새삼 늙은 내관에게 감탄하였다.

그의 태도, 걸음걸이, 궁을 가로지르는 모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걸음걸이 하나로 이러한 풍모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연륜이리라.

이레는 이 늙은 내관이 오라버니의 동패로 궁을 찾았을 때, 그녀를 세자에게 이끌었다는 점을 상기했다.

세자 저하의 곁에는 언제나 이 환관이 있었다.

이 엄격한 궁에 완벽하게 적응하였으며, 복잡하고 까다로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올, 발걸음 하나마저 녹아들듯 적응한 내관의 신분은 절대 낮지 않으리라.

이레는 겸손하되 비굴하지 않으며, 제 직분에 맞춰 정확히 행동하는 내관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중도(中道)였고 채우되 넘치지 않는 절도(節度)였다.

소리 없이 감탄하던 이레는 곁을 걷는 형운을 돌아보았다.

긴장한 탓일까?

형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찌푸려진 미간.

굳게 다문 입술.

그의 눈과 얼굴에서 당황과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제나 무심했던 그에게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은자원에서 형운은 난야에 몸담은 수도승 같았다.

그는 고독을 즐겼다. 어둠은 그의 벗이었다.

깊은 숲, 한적한 장소에 뜻하지 않게 펼쳐진 달빛 고인 호수.

애타게 고요함을 갈구하는, 그리하여 외부의 그 어떤 자극과도 멀리하고자 하는…….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홀로 걷길 염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세자 저하와 같은 윗사람을 직접 배알하게 되었으니.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안간힘 쓰는 그에겐 이 뜻밖의 만남이 당황스럽고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려운 자리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형운의 시선에 혼란과 울화가 느껴졌다.

내관이 앞에 있기에 차마 그 연유를 물을 수 없었다.

늙은 내관은 외궁의 한적한 길, 경계가 느슨한 장소만을 골라 걸었다.

여러 크고 작은 문을 지났다.

신기하게도 지키는 자들이 없었다.

어느덧 삼엄한 외궁의 경계를 지나 후원의 가파른 산길에 다다랐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궁녀나 내관은 물론이고 지키는 군졸 하나 마주치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가을빛이 무성한 숲속.

좁은 오솔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고즈넉한 정자 한 채가 나타났다.

능허정.

일전에 세자 저하를 만난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세자 저하께서 그곳에 계셨다.

지키는 호위도 없이 홀로 정자 앞에 선 채 큰 활의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

단단함이 느껴지는 건장한 체구.

화살을 메기고 시위를 당길 때마다 활은 제 몸을 한껏 꺾어야 했다.

그 비명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시위를 당긴 강인한 손가락이 활의 자유를 허락했다.

퉁!

쏘아진 화살은 바람을 가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숲 저 너머로 날아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무언가를 꿰뚫는 짧고 둔직한 소음이 들려왔다.

그 강인하고 거친 모습이 절벽 위에 웅크린 거대한 범 같았고, 날갯짓하는 대붕 같았다.

한없는 자유를 갈망하는 두 어깨와 먼 곳을 응시하는 부리부리한 시선이 참으로 웅장하였다.

세자의 넓은 어깨는 이 넓고 거대한 궁궐마저도 좁게 느끼리라.

“기다리고 계십니다.”

걸음을 멈춘 내관이 길옆으로 비켜섰다.

이레와 형운은 내관의 곁을 지나 능허정으로 다가갔다.

정자의 계단이 나타나자 이레는 얼굴에 드리운 너울을 벗었다.

감히 세자의 앞에서 얼굴을 가릴 수는 없었다.

형운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왔군.”

두 사람을 발견한 세자가 활을 내려놓았다.

형운과 이레를 반기는 세자에게선 좀전의 거친 기세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치열하고 용맹한 두 눈에 인자한 빛이 자리 잡았다.

세자는 능허정으로 올라섰다.

이레와 형운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정자 안엔 음식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세자가 상석에 앉았다.

이레는 그에게 절을 올려 예를 다하려 하였다.

“번거롭다. 쓸데없는 절차는 생략하라.”

세자가 자신의 맞은편을 손짓했다.

형운이 왼쪽, 그리고 이레는 오른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상 위엔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한 그의 성품을 말하듯, 단출한 상차림이었다.

“궁녀들과 관련한 사건에 그대들의 공이 크다 들었다. 덕분에 번잡한 일을 떨칠 수 있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레의 겸손에 세자는 미소 지었다.

“그대를 은자원으로 가라 강요한 사람은 나였으니, 네가 원하여 한 일은 아닌 셈이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없겠지. 고맙구나.”

“송구하옵니다.”

왕세자의 치하에 이레는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응시한 세자는 형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능허정에 들어선 이후, 형운은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발끝에 내리깐 시선과 꼿꼿이 세운 등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세자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두 사람에게 친히 차를 따라주었다.

“이런 날은 술이 제격인 것을.”

세자가 아쉬운 한마디를 흘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능허정에 온 이후, 처음으로 형운이 입을 열었다.

“금주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안타깝다 한 것이다.”

세자는 술을 들이켜듯 찻잔을 비웠다.

이레와 형운도 조용히 그를 따라 차를 마셨다.

이레는 조금씩 차를 비우며 향을 즐겼고, 형운은 차보다 침묵을 즐겼다.

그 말 없는 시위를 모르쇠로 일관한 채 세자는 이레에게 물었다.

“은자원의 일은 어떠하냐?”

“무능하고 어리석어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그 무능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나의 난처함을 덜어주었으니, 다른 자들은 접싯물에 코라도 박아야겠구나. 네가 사헌부 어사들의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표정이 아주 가관이더구나. 하하하.”

세자는 무릎을 치며 통쾌하게 웃었다.

다시 한 잔의 차를 털어낸 그가 스스로 빈 잔을 채웠다.

“내게 장성한 아들이 하나 있다.”

세자가 운을 떼자 형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레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 모습을 미처 보지 못했다.

세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데, 그 녀석의 성품이 나와 같지 않아 가끔은 대하기 불편할 때가 있다. 혹, 세손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느냐?”

“현명하고 인자하며 총명하시옵고, 효심 또한 지극한 분이라 들었습니다.”

“어디서 허튼 소문을 들은 모양이구나. 내가 아는 어떤 자는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사는 사람’이라 하더군. 한마디로 말해 매일 변함없이 지루하다는 뜻이니. 듣고 보니 세손을 제대로 나타낸 말이라 감탄한 적이 있었다.”

말을 마친 세자는 형운을 힐끔, 곁눈질했다.

형운의 표정은 붉으락푸르락했다.

꽉 말아쥔 주먹.

무어라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데, 이레가 곁에 있는 터라 애써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들이 보이는 작은 변화에 세자는 흥미가 생겼다.

그 어떤 무리한 요구에도 언제나 따르겠다, 대답하던 아들이 아니던가.

감정도, 의지도, 제 생각마저도 감추고 숨기던 아이였다.

한데, 이젠 제법 꿈틀대며 반항심을 보인다.

이런 변화의 시작이 어디일까?

세손의 전에 없던 반응이 즐겁고 흥미로웠던 터라.

세자는 다시 이레에게 물었다.

“그럼 저 친구는 어떠하냐? 은자원에서는 은백이라 불린다지?”

느닷없는 물음에 내내 바닥을 향해 있던 형운의 고개가 위로 번쩍 들렸다.

잠시 작금의 상황을 망각한 듯 그는 세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먼 허공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리는 아비의 모습에 형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형운은 이레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어라 대답할까.

입안에 단침이 고였다.

곧이어 이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중하고 침착합니다.”

“그러냐?”

“약속을 천금같이 여기시며, 학처럼 고고하니 가히 선비의 표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내가 아는 사람과 다른 사람 같구나.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사람이라 들었는데 말이다.”

사람을 앞에 둔 채 야박하게 평가하는 세자에게 이레가 항변했다.

“……제가 뵙고 알게 된 은백께선 절대 유약하지 않습니다. 맺고 끊음 또한 분명한 분이십니다.”

“허허, 네 말을 들으니 제법 괜찮은 사내 같구나.”

털털하게 웃은 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디 얼마나 괜찮은 사내인지 알아볼까?”

***

툭.

세자가 검 한 자루를 형운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검을 들고 능허정 아래로 내려갔다.

“비무나 한번 해보자.”

느닷없는 세자의 명에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찌…….”

“왜? 두려우냐?”

은근한 도발.

다른 때라면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이레를 의식한 형운은 마지못해 세자의 맞은편에 섰다.

스릉.

검을 뽑아든 두 사람이 충돌했다.

칭!

손을 맞잡듯 가벼운 충돌.

인사와 같은 첫 합.

그 직후, 세자가 폭풍처럼 사납게 형운을 몰아쳤다.

힘과 기세가 대단하여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형운은 중심을 잃고 몸을 휘청거렸다.

첫 겨룸은 열 합 만에 세자가 승리를 거뒀다.

“허약하군.”

세자의 냉정한 평가에 형운은 툭툭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곧이어 두 번째 겨룸이 펼쳐졌다.

이번엔 형운이 몰아쳤다.

평소의 기질과 전혀 다른, 거칠고 투박한 공격 일변의 검술이었다.

검에 체력을 실으며 사력을 다한 공세.

세자 또한 물러서지 않고 강하게 맞서니, 싸움의 험악함이 마치 영역을 두고 다투는 사나운 맹수 간의 격돌처럼 치열했다.

그렇게 이어진 충돌이 무려 백 합.

이번에도 승자는 세자였다.

“매일 어두운 구석에서 서책만 파고 있으니, 체력이 부실한 게 아니냐. 아무래도 넌 서책이 더 어울리는 모양이다. 돌아가 그 좋아하는 서책이나 보도록 해라.”

세자의 질책이 가쁘게 호흡을 내뱉는 형운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형운의 눈동자에 반항의 기운이 일렁였다.

그러나 내뱉는 말은 마음과 달랐다.

“따르겠나이다.”

짧은 대답과 함께 형운은 그대로 후원을 내려갔다.

내딛는 걸음에 성화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세자가 능허정으로 돌아왔다.

“실력만 조금 살펴본다는 게 그만 지나치고 말았구나. 네게 괜히 못 보일 꼴을 보이고 말았어. 혹여 놀라지는 않았느냐?”

이레가 답했다.

“미욱한 여인이라 보아도 알지 못하나, 용맹한 모습에 감탄하였습니다.”

두려워 겁낼 줄 알았건만.

검술에 관심을 보이는 이레의 대답에 세자는 흥이 솟았다.

“좀전의 그 녀석 검술 보았느냐? 얌전하고 과묵한 겉모습과 달리 실상은 저리 거칠고 사나운 놈이다. 겉과 속이 다른 엉큼한 녀석이니,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얌전히 고개 숙인 이레의 뇌리로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외람된 말이오나 은백을 잘 아십니까?”

“잘 알고 있다.”

세자가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은자원의 은자들은 모두 내가 직접 내정한 사람들이니라. 그러니 잘 알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차를 마시는 세자의 두 눈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

잠시 소란스럽던 숲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이레마저 떠나고 홀로 남은 세자는 조용히 읊조렸다.

“술이 그립구나.”

잠시 후, 늙은 내관이 주안상을 내왔다.

술과 간단한 안주 몇 가지만 차려진 간소한 차림이었다.

“자네도 한잔할 텐가?”

“금주령이 내려졌습니다.”

“다들 금주령 타령이니, 신선의 도락은 언제나 나 혼자만의 몫이로군.”

상선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곧 손님이 당도할 터이니,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하게.”

늙은 내관이 물러가고 얼마 후, 한 사람이 세자를 찾아왔다.

은자원의 은협.

서강율이었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홀로 술잔을 기울인 세자가 그에게 물었다.

“그 일은 어찌 되었는가?”

“사헌부에선 감찰궁녀 은가비의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린 모양입니다.”

“설마 내 궁의 궁녀가 내게 누명을 씌울 줄이야.”

“궁녀가 사내도 여인도 아닌 고녀일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 사건에 공범으로 보이는 다른 궁녀도 연루되어 있다 하던데. 은랑을 습격하였다지?”

“치정 관계인 듯합니다. 은가비와 정을 통한 궁녀인데, 은랑으로 인해 은가비의 정체가 들통 날 지경이자,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모양입니다.”

“저를 강제로 범한 자에게 정을 느끼다니.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로군.”

“궁녀의 삶은 메마르고 외로우니, 한 번 마음이 움직이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은랑이 습격당했음에도 세손은 태연하군. 마음 한구석을 내어준 듯 보이던데, 내 착각인가?”

“세손께선 은랑에게 벌어진 일을 아직 모르십니다. 만약 아시게 되는 날엔 은자원이 한동안 들썩일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비밀로 하게. 그 치밀한 녀석이 알게 되면 은랑은 아마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답답해질걸세.”

“알겠습니다.”

“이번 일에 사헌부와 유생들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더군.”

세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배후에 대해 알아보았는가?”

서강율의 표정이 깊어졌다.

“저하께서 짐작하신 대로 그들의 배후에 그자들이 있는 듯하옵니다.”

탁!

세자가 빈 술잔을 내려놓았다.

“십학사!”

십학사를 언급하는 그의 두 눈에서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영향력이 궁 안팎으로 뿌리내린 줄은 알았으나 이처럼 깊고 치밀한 줄은 몰랐다.”

“은가비를 체포할 때 방해하던 괴한들을 문초하였으나,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십학사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돈이면 못 부릴 자가 없으니. 그들은 단순히 고용된 자들일 테지. 앞으로도 십학사에 관해 촉각을 세우게.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일터. 이 나라를 제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는 자들이 분명하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발본색원하여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삼엄하던 세자의 표정에 느른한 여유가 돌아왔다.

“내 무리한 부탁에 그대의 노고가 크군.”

“노고랄 게 있겠습니까? 타고난 천성이 풍류를 좋아하는 터라,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생활이 그리 불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자네가 그렇다면 앞으로도 외지로만 떠돌게 해야겠군.”

“딱 오 년 만 더 하겠습니다. 그 이후엔 저도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싶습니다.”

“그럼, 딱 오 년만 더 고생하게.”

“이런, 삼 년으로 할걸 그랬습니다.”

“오 년. 더는 못 줄여주네.”

능허정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이 가라앉자 서강율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세손 저하와 비무를 하였다 들었습니다.”

“전과 달리 제법 호방한 기세를 보여 검을 섞어 보았다.”

“어떠하셨습니까?”

세자가 고개를 저었다.

“기백이 부족해. 사내가 그리 힘이 없어서야 어디에 쓰겠는가?”

“세자 저하께옵선 신력을 부리시니, 그 힘을 감히 누가 감당하겠습니다. 무장 중에 그 누구도 저하의 검을 삼십 합 이상 받지 못하였습니다. 세손께서 무려 백 합이나 받아내셨으니, 능히 뛰어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완 달리 기교도 제법 부릴 줄 알더군. 서너 해 후면 그럭저럭 좋은 상대가 될지도 모르겠어.”

“세손 저하와의 비무가 즐거우셨던 모양입니다.”

“그리 보이는가?”

“세손 저하를 말씀하시며 내내 웃고 계시옵니다.”

“내가 그랬는가?”

“기왕이면 칭찬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예끼, 이 사람. 나보고 낯 간지러운 소릴 하란 말인가?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이리 가까이 앉게. 설마, 자네도 금주령 타령하는 건 아닐 테지?”

서강율이 고개를 들었다.

“소신, 감히 세자 저하의 선도행에 앞길을 밝혀보겠나이다.”

세자의 입에서 껄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네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네. 이리와 한 잔 받게.”

***

집으로 돌아온 이레는 한숨부터 쉬었다.

‘결국, 은자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능허정을 떠날 때, 세자는 작별인사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도 은자원의 일을 잘 부탁한다.’

다른 분도 아닌 세자 저하의 명이라.

이레는 감히 못 한다, 거절할 수 없었다.

졸지에 앞으로도 은자원의 은랑으로 지내게 되었다.

기이한 건,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라, 이레는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하였다.

“아가씨!”

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행랑 할멈이 달려왔다.

불편한 다리로 다가오는 모습이 꽤나 다급해 보였다.

“아이고, 왜 이리 늦으셨어요?”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노마님께서 저녁 무렵부터 기다리고 계셔요.”

이레의 눈이 커졌다.

“할머니께서 왜?”

“이유는 저도 몰라요. 아무튼, 어서 들어가 보세요.”

행랑 할멈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여 안채로 들어갔다.

가을 서리보다 차가운 표정의 할머니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늦은 귀가에 관한 질책은 없었다.

이쯤 되면 서강율이 대체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늦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됐다. 일단 앉아라.”

이레가 앉자마자 할머니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오늘 집으로 매파가 찾아왔다.”

“매파라 하셨습니까?”

매파가 대체 무슨 일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이레에게 할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네게 혼처가 들어왔다.”

“제게…… 말입니까?”

무에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여 이레는 다시 물었다.

“이번에 초간택에서 간택인들의 면면을 살피던 중, 너의 행실이 마음에 든 왕실 어른이 있었던 모양이다.”

“…….”

“그분께서 네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마침 그분의 가까운 친인척 가운데 혼인하지 않은 이가 있어, 너와 인연을 맺는 것이 어떠하냐, 의중을 물어보더구나.”

“하지만 할머니도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세손빈 간택에 참여 중입니다.”

“이제 그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초간택에 참여했다 떨어진 간택인들은 혼인을 할 수 있다는 허혼령이 내려졌느니.”

“…….”

“재간택에 낙점된 간택인들에겐 이미 교지가 내려졌다고 하는구나.”

“그럼…….”

“교지가 오지 않았으니, 너는 재간택에서 떨어진 것이다. 그러니…….”

할머니의 주름진 입술이 다시 열렸다.

“혼인할 준비를 해야지 않겠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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