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나도…… 함께 말인가?
보고 싶었소.
짧은 대답이 주는 울림은 심연처럼 깊고도 짙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작해야 사람이 뱉은 말 한마디에 불과하건만.
잔재처럼 남은 여운은 이레를 정신없이 흔들어놓았다.
절로 몸이 굳고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그대를 보고 싶었다 하였소.”
재차 확인하여도 형운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밀려왔다.
“왜…… 어찌하여 그리 말씀하십니까?”
물어보는 이레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라…… 어찌하여서라…….”
형운은 이레의 질문을 곱씹듯 혀끝으로 굴렸다.
“꼭 그런 것이 필요하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야심한 밤.
높고도 견고한 반가의 담장을 남몰래 넘어온 사내가 여인에게 보고 싶다 말하였다.
이것이 어찌 범상한 일일까?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풀기 어려운 난문제라도 만난 듯 형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고민은 잠시.
형운은 이내 답을 내놓았다.
“고마웠던 까닭이오.”
“무엇이 말입니까?”
“은랑, 그대의 노력과 현명함 덕분에 큰 변고를 막을 수 있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겠소?”
그의 음성에 진심이 묻어나왔다.
“당연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연한 일도 아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소.”
“그럼,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러 굳이 이 밤에 예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아마도…… 그런 모양이오.”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는 대답.
이 야심한 시각에 이레를 찾아온 이유가 뭘까?
그녀 덕분에 아바마마와 관련한 커다란 재앙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기쁘고 또 고맙다.
그러나 정말 그뿐일까?
형운 자신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머루처럼 까만 이레의 눈동자가 형운을 오롯이 담았다.
형운의 시선도 이레를 향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스하고도 복잡했다.
가을 초입의 늦은 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서로의 숨결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활짝 열린 동창을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의 침묵의 대화가 이어졌다.
달리 더 할 말도 없었건만.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느덧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미몽에서 깨어난 형운은 낮게 탄식했다.
아쉽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그만 가야겠소.”
“네. 조심히 가십시오.”
“은자원에서 또 봅시다.”
“……네.”
이레의 대답을 들은 형운은 성큼성큼 너른 보폭을 옮겼다.
이내 검푸른 새벽이 그를 삼켰다.
형운의 모습이 시야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이레는 창을 닫았다.
“고작 고맙다는 말을 하러 예까지 오시다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 은자원에 가겠노라 고분고분 대답하였구나.”
어쩌자고 그의 앞에서는 ‘네.’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지.
이레는 서둘러 동창을 열었다.
그러나 형운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바보같이 매번 이러니. 이런 나를 어찌하면 좋을까?”
이레의 입에서 뒤늦은 후회가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네. 내일 하루 더 은자원에 가는 수밖에.”
이건 약조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변명.
“내일, 그곳은 어떠하려나. 은백께선 또 반갑게 맞아주시려나?”
은자원과 형운을 떠올린 이레의 입가에 해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
“저하.”
궁으로 돌아가는 길.
홍인모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냐?”
“외람되오나, 은랑을 만나러 나오신 까닭을 알고 싶나이다.”
“좀 전에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한 게로구나.”
“고맙다라 하신 말씀밖에 듣지 못하였습니다.”
“제대로 들었다. 그 말을 전하러 왔으니.”
“정말 그뿐입니까?”
형운은 홍인모를 돌아보았다.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하였더냐?”
“고마움은 날이 밝은 후에 표하면 충분하지 않았겠습니까? 굳이 이 야심한 시각에 하지 않으셔도…….”
형운은 눈가를 찌푸렸다.
“이번 사태가 얼마나 크게 발전할 일이었는지 잊었더냐?”
자칫하였으면 궁궐이 들썩이고, 이 나라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질 뻔하였다.
아버지인 세자와 관련한 사건이라.
세손인 형운으로선 더욱 이레의 노력이 고맙고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큰일을 하였는데,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냈는데, 고작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러 가는 걸 귀찮아해서야 어찌 인간의 도리라 하겠느냐?”
“분명 그렇긴 하오나…….”
아무리 특별한 사정이 있다 해도 남녀가 유별하거늘.
왕세손께서 여인을 만나러 직접 행차하시는 것은 과한 대응이다.
더구나 왕세손께선 은랑의 집 앞을 반 시진 가까이 서성거렸더랬다.
고작 ‘고맙다’란 말을 하기 위해.
‘다른 때라면 상관없을 일이라, 하필이면 간택이 진행 중이라.’
형운의 입가에 서린 미소의 근원을 짐작한 홍인모는 그저 속으로만 앓았다.
저 마음 너무 깊어지면 아니 될 터인데.
처음 느낀 연모의 정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자신의 뜻이 아닌 이해와 득실로 정해진 세손빈을 멀리하게 되리라.
재간택, 삼간택을 통해 빈궁전의 주인 되실 분께 영영 마음 곁자리 주지 못할까 불안하였다.
***
아침이 밝자 집 앞으로 가마가 왔다.
교꾼과 함께 가마를 호위할 천호와 백호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레는 그들과의 재회가 더는 어색하지 않았다.
천호와 백호 역시 듬직한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가마를 타고 월근문으로 향했다.
과묵한 문지기가 터주는 길을 지나 마침내 은자원에 이르렀다.
덧문이 모두 내려져 있었다.
아! 그분께서 계시는구나.
가벼운 설렘을 느끼며 언제나처럼 한눈을 감고 은자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밤처럼 까만 어둠이 그녀를 반겼다.
홀로 빛을 밝힌 흐릿한 유등 하나.
그 아래 고개를 숙인 형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형운이 고개를 들고 인사를 건넨다.
그가 얼굴을 들고 인사하는 것도 아직 낯설건만, 심지어 오늘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어젯밤의 뜻하지 않은 만남 때문일까.
두근.
가슴 한쪽이 요란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목소리의 여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고! 팔다리 어깨허리, 안 아픈 곳이 없구나. 아이구, 나 죽네.”
끙끙 앓는 소리가 이레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은자원엔 은백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은협이십니까?”
“은랑 오셨소? 어이쿠, 우리 은랑이 오셨는데, 내가 몸이 불편해 마중도 못 나갔소.”
이레가 서강율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어제 은랑의 서찰을 전해 받고 은가비를 잡으러 갔다 하지 않았소? 그 과정에서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복면인들을 만났고…….”
“흉악한 자들이었으나 무난히 물리치셨다 하셨지요.”
“섬뜩하기 그지없는 자들이었소. 물론, 은랑의 말처럼 가볍게 물리치긴 했지만 말이오.”
“어제는 크게 불편한 곳은 없어 보였는데, 그 이후에 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 흉악한 자들과 드잡이했던 게 문제였던 듯싶소. 어제는 흉악한 자들을 잡는데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오늘 다시 확인해보니 여기저기 상한 곳이 많더이다.”
“괴한이 무려 스무 명이 넘었다 하였지요? 그 많은 자와 상대하였으니, 몸 성히 돌아오신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그때,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던 은백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열한 명.”
“……?”
이레가 의문 어린 눈으로 형운을 보았다.
형운은 제 책상에 고개를 묻은 채,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괴한. 어사대의 보고에 의하면 스무 명이 아니라 열한 명이었다 하오.”
형운의 설명에 이레는 서강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묻는 듯한 눈짓에 끙끙 앓던 서강율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열한 명이었나? 워낙 사납고 드센 자들이라. 그래, 스무 명 같은 열한 명이라 하면 적당할 것 같구려. 하여간 내가 무려 열한 명이나 되는 괴한들과 엎치락뒤치락 목숨 걸고 싸우는데…….”
서강율의 현장감 넘치는 설명이 이어질 찰나.
“다섯.”
예의 형운의 무심한 목소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네?”
“열한 명 중 은협이 상대한 자는 다섯이었소. 나머지 여섯은 어사대의 장 장령이 상대했고.”
기어이 서강율의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내가 상대한 다섯이 어사대의 그 독종이 상대한 자들보다 곱절은 더 강한 자들이었지.”
“……그랬겠지.”
심드렁한 형운의 반응에 서강율의 눈이 게슴츠레 여며졌다.
“어째 오늘따라 은백의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이오?”
“난 단지 사실과 다른 허풍을 바로잡고 싶었을 뿐이다.”
“……!”
형운을 향해 눈빛을 세우던 서강율은 이내 팽, 앵돌아진 표정으로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그만두겠네. 누가 자꾸 산통을 깨는 바람에 영 말할 기분이 안 생기는구먼.”
단단히 토라진 서강율을 보며 이레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괴한이 스물이면 어떻고 다섯이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괴한들을 물리치고 달아난 감찰 궁녀를 끝내 잡아들였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뒤돌아 누운 서강율이 삐죽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은랑은 내 고생을 알아주는구려.”
“알고 말고요. 은협께서 감찰 궁녀를 잡지 못했다면, 제 조사는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치부되었을 것이고, 어사대의 오해도 영영 해결되지 못하였을 겁니다. 은협께서 정말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하하하. 역시 날 알아주는 것은 은랑뿐이외다.”
흡족한 웃음을 터트린 서강율은 몸을 일으키며 이레의 손을 덥석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레가 한 수 빨랐다.
그녀는 재빨리 한걸음 물러나 서강율의 손을 피했다.
헛손질을 한 은협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난 단지 날 알아주는 은랑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자 그런 것인데.”
이레가 방긋 미소 지었다.
“말로만 하셔도 충분합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서강율은 은근슬쩍 손을 내밀었다.
이레는 양손을 등 뒤로 돌린 채 맞잡았다.
“마음만으로도 족합니다.”
“……어째 표정과 달리 말투가 서먹하외다.”
그때였다.
천장에서 툭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강율이 고개를 들었다.
“쥐가 있나?”
“은랑.”
불현듯 형운의 부름이 이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네?”
이레가 고개를 돌리자 형운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가 이레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당황하는 이레에게 형운은 서둘러 검은 너울을 씌워주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서강율은 무에 못마땅한 듯 미간을 한데 모았다.
“은백, 너무한 거 아닌가? 조금 허풍을 떨었기로서니, 굳이 은랑의 얼굴까지 가릴 것까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삐걱.
문이 열리며 훤칠한 키의 사내가 은자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본 서강율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저 독종은 여기 또 왜 온 거야?”
***
서강율이 독종이라 칭한 훤칠한 사내.
다름 아닌 사헌부의 장령, 장무열이었다.
“자네가 이곳엔 무슨 용무인가?”
서강율의 날 선 물음에 장무열은 옆구리에 낀 두루마리 뭉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 사건. 함께 처리하고 싶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강율은 거부했다.
“싫다.”
“이유는?”
서강율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답했다.
“첫째, 내가 너와 함께 일하기 싫고. 둘째, 이미 대강 정리된 사건이니 귀찮은 뒤처리를 맡을 이유가 없으며. 셋째, 너 때문에 조금 전 내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으니 내 기분이 무척 좋지 않고. 넷째, 이곳은 은자들만의 은자원인 까닭이다.”
그럴듯한 설명.
그러나 핵심만 설명하자면 싫고, 귀찮고, 밉고, 그러기에 넌 절대 안 된다였다.
팔짱을 낀 장무열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응했다.
“첫째, 공무로 찾아온 것이니 사사로운 호오는 중요치 않고. 둘째, 은가비는 잡았으나 괴한들의 배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며. 셋째, 그대의 기분은 내 알 바 아니고. 넷째, 이곳을 출입하는 데 자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이런 몹쓸 자를 보았나!”
서강율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지금까지 말로 다른 누구에게 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장무열만은 예외였다.
이놈은 마을 입구에 우두커니 선 장승 같은 작자라.
제아무리 대단한 언변과 기교로 희롱해도 도무지 흥분하는 일이 없었다.
“아무튼 안 돼. 이곳은 은자들만 있을 수 있는 곳이다. 안 그런가? 은백.”
서강율은 은근한 시선으로 형운의 협조를 청했다.
형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달리 출입자격이 필요한 건 아니었군.”
은자원은 공식적으로는 전향사의 하부조직.
자격과 명분만 있다면 누구라도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다.
“은백, 지금 규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잖은가. 은자원, 이곳은 바로 우리들 은자들만의 낙원이 아니던가? 정녕, 은백은 이 무례하고 수상한 녀석이 이곳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꼴을 방관하겠단 말인가?”
서강율의 구구절절한 항변에 형운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
“어찌 나를 그런 눈빛으로 보는가?”
“이곳의 질서와 평온을 자주 깨는 사람이 마침 한 명 떠올라서 말이오.”
“……정말 이러긴가?”
“글쎄. 그대가 무얼 말하는지 난 도통 모르겠군.”
믿었던 형운의 배신.
결국, 서강율이 선택한 마지막은 억지였다.
“아무튼, 안 돼! 난 허락할 수 없어. 다른 녀석은 다 돼도, 저 독종만큼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
하지만 그의 마지막 저항마저도 장무열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해가 있는 듯하군. 애초에 난 이곳으로 소속을 바꾸겠다 한 게 아니오. 괴한들의 배후를 함께 찾아보자 한 것이지. 그리고 자격문제라면…….”
장무열은 너울을 쓴 이레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음을 이었다.
“저 여인은 무슨 자격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오? 아니, 그보다 저 여인의 정체는 대체 뭐요?”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서늘한 눈빛에 이레는 가슴이 뜨끔했다.
이 사람 설마…….
괴한의 배후 찾기는 핑계이고, 진짜 목적은 내 정체를 캐기 위함이 아닐까?
구태여 은자원에 들어오려 하는 것만 봐도 그 의도가 수상했다.
이레의 한숨이 깊어졌다.
‘앞으로의 일이 정말 순탄치 않겠구나.’
***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다.
장무열은 상급기관에 문의하고 다시 찾아오겠다며 은자원을 나갔고, 서강율은 독종 때문에 상처가 도졌다며 치료를 핑계로 사라졌다.
비로소 적막과 고요를 되찾은 이레와 형운은 남은 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은가비와 관련한 사건의 정리가 끝났을 땐, 어느덧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일과를 마친 이레가 은자원을 나서며 형운에게 물었다.
“참 특이한 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 말이오?”
“장 장령님 말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형운이 이레에게 물었다.
“어디가 말이오?”
“네?”
“은협, 그자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한 듯한데.”
“물론 서 선비님에 비하면 그렇지요.”
세상에 서강율만큼 특이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은협께서 그리 쩔쩔매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한데, 그분은 앞으로 어찌할까요? 은협께선 기필코 그분의 출입을 막겠다 하시던데, 은백께선 허락하신 것이나 진배없으니…….”
“출입을 허락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하지만…….”
“난 그의 출입을 허락한 적 없소.”
“좀 전에 그분을 평범한 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은협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었소. 그 사람의 인성과 은자원에 출입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요.”
그 말 많은 서강율이 당하는 모습이 통쾌하여 모르는 척 묵인하여 주긴 했지만, 은자원에 다른 이를 들일 생각은 형운 역시 추호도 없었다.
이레의 정체가 발각되는 것도 문제였고, 자신 또한 곤란할 수 있었다.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 임박하였다.
“그럼, 전 이만.”
“내일 다시 만납시다.”
“아! 은백. 저는…….”
돌아선 그에게 이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말하려 했지만, 좀처럼 하지 못한 말.
아쉽고 또 아쉽지만…….
이젠 말해야만 했다.
은자원에 더는 나올 수 없다고.
나올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사실 나와선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마침 이곳에 계셨군요.”
이레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밑 자분치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환관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저분은…….’
이레가 오라버니의 동패를 돌려주러 궁에 왔을 때, 그녀를 능허정으로 안내한 바로 그 내관이었다.
후원의 작은 정자, 능허정.
그곳에서 이레는 뜻하지 않게 세자 저하를 만났다.
내관은 오늘도 같은 용무로 이레를 찾아왔다.
“세자 저하께서 부르시옵니다.”
다만, 이번 만남은 전과 달랐다.
이레에게 세자의 뜻을 전한 환관은 이번엔 형운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함께 모시라는 분부시옵니다.”
“……!”
“두 분 모두, 절 따라와 주십시오.”
형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도…… 함께 말인가?”
세자의 두 번째 만남.
그러나 이번엔 이레 하나만이 아니었다.
은백.
아니, 세손인 형운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