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보고 싶었소
“멈추시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사대문 밖으로 통하는 길목마다 군졸들이 가득했다.
파루가 울리기 무섭게 길을 재촉한 보부상들과 장돌림들은 웅성거렸다.
군졸들이 도성 문을 지키는 일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건 아니었다.
다만, 여느 때와 달리 꼼꼼하고 삼엄한 검문이 문제였다.
이래서야 이른 새벽부터 재촉한 걸음이 헛수고가 될 상황인지라,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거참, 이러다간 입고 있는 속곳까지 뒤지겠소.”
누군가의 볼멘소리에 군졸 역시 하소연했다.
“나라고 이러고 싶겠는가.”
“뭔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범죄자를 찾고 있네.”
“무슨 일인지 몰라도 한두 번 보는 사이도 아닌데, 대충 합시다.”
“우리야 위에서 하라니 시키는 대로 해야지.”
어지간하면 눈인사 한 번으로 길을 터 주던 군졸들인지라.
상인들과 행인들은 투덜대면서도 검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역당 모의라도 했답니까?”
평소 알고 지내던 장돌림의 물음에 군졸은 고개를 저었다.
“범인이 여인이라 하는 걸 보니, 역모는 아닌 모양이네.”
“허,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
“어쨌든 지금부터 검문할 것이니, 다들 일렬로 서서 들고 있는 짐을 내려놓으시오.”
군졸들은 제일 먼저 보부상들과 장돌림들을 관찰했다.
안면 있는 자들은 먼저 통과시키고 새로운 자들은 몸과 짐을 수색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 이른 시각이라.
도성을 빠져나가는 인원이 많지 않은 데다, 범인이 여인으로 특정되어 있어 검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락부락한 보부상들이 지나가고 곱상한 얼굴에 비쩍 마른 사내의 차례가 되었다.
군졸은 사내를 위아래로 쓸어보았다.
이제 갓 성년이나 되었을까.
체격은 호리호리한데, 가슴은 납작하고 어깨도 넓었다.
각진 턱에 어색하게 웃는 얼굴이 영락없는 사내였다.
“어딜 가시오?”
“먼 친척분께서 낙마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함경도로 가는 길이외다.”
“허, 그곳까지 가려면 고생 좀 하겠구려.”
“아무렴, 이른 새벽부터 고생하는 여러분만 하겠습니까?”
“잘 다녀오시오.”
고개를 꾸벅 숙인 젊은 사내는 봇짐을 고쳐 매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 뒷모습에 잠시 시선을 주던 군졸은 이내 관심을 끊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성문을 나와 급한 걸음을 옮기던 젊은 사내가 참았던 한숨을 뱉었다.
“하아, 들키는 줄 알았네.”
젊은 사내.
그는 감찰 궁녀 은가비였다.
이레가 은백에게 주라며 건넨 서찰을 훔쳐 본 은가비는 그 길로 당장 궁을 떠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찰엔 그녀를 범인으로 확신하는 여러 정황이 담겨 있었던 까닭이었다.
물론, 감찰 상궁 은가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자신에게 서찰을 건네주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 서찰을 기초로 조사가 진행되면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서찰엔 범인을 특정하지 않았지만, 범인의 특징 한 가지가 정확하게 명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녀.
범인은 양성인이다.
이 내용을 본 순간 은가비는 곧장 궁을 떠나 도망쳤다.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
그녀는 바로 고녀였다.
궁녀들에게 발생한 불미한 사건을 일으킨 범인 또한 은가비, 그녀였다.
“망할 계집.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더니만.”
검은 너울로 얼굴을 가린 이레를 떠올리며 은가비는 속니를 아드득 갈았다.
지금껏 자신의 범행을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섯 살, 어린 나이로 궁에 들어온 이후.
은가비는 철저히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다.
본디 모든 여인의 몸이 자신과 같은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성장하며 자신의 몸이 남과 다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고, 그 후엔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불안도 잠시였다.
열다섯 살이 지난 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같은 방을 쓰는 궁녀를 볼 때마다 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인의 체취와 따사로운 미소를 볼 때마다 말로 표현 못 할 뜨거운 기운이 배꼽 아래에서 느껴지곤 하였다.
본디 여인으로 태어났으나, 어느덧 사내가 되어 성격도 기질도, 성정마저도 변해버렸다.
이제 은가비에겐 자신의 특별한 신체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하나.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욕망을 어떻게든 채우는 일이었다.
그렇게 처음 정을 주고받은 여인이 바로 주근깨 궁녀였다.
주근깨 궁녀는 처음엔 크게 놀랐지만, 이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이 일을 함구하였다.
그리고 은가비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정작 은가비의 관심은 그녀에게 있지 않았다.
뭐든 처음 한 번이 어려운 법이었다.
은가비는 점차 대담해졌다.
어느새 은가비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라 여기게 되었다.
왕만이 가까이할 수 있는 여인들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으니, 자신이 특별하지 않으면 달리 누가 특별하단 말인가.
이야말로 하늘이 그에게 준 특권이리라.
울컥울컥 치솟던 욕망은 걷잡을 수 없는 탐욕으로 변질하였다.
변명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당연한 것은 어느새 권리로 인식되었다.
급기야 끔찍한 취향에마저 눈을 뜨니.
어린 궁녀들을 대상으로 차마 입에 담기에도 거북한 일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처음 한동안은 별 탈이 없었다.
순결을 잃은 궁녀에겐 죽음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죽음이 두려운 궁녀들은 은가비에게 당한 험한 일에 대해 함구했다.
하지만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급기야 치욕을 이기지 못한 한 궁녀가 자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일로 어사들이 궁녀들의 숙소에 드나들고,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재수 옴 붙은 사건이었다.
평소 소심하고 차분한 궁녀라, 별문제 없을 줄 알았더니.
자결을 하여 일을 귀찮게 만들다니.
그녀만의 둥지에 낯선 사내들이 들락거리는 모습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궁 안팎의 경비가 삼엄해졌다.
하지만 삼엄한 시선은 어디까지나 궁녀들의 숙소 밖을 향한 터라.
안락한 내부에 자리 잡은 은가비는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심지어 그사이 몇 번 더 욕망을 푸는 과감함도 보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건을 뒤집어씌울 만한 사람도 발견하여, 잘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그 계집만 아니었어도.”
오직 이레만이 궁녀를 의심했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들킬 일은 없었을 터인데.
“하는 수 없지. 이대로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자. 그곳에서 사내 노릇을 하며 살면 되겠지.”
지금껏 여인으로 살았으니, 남은 인생은 사내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감찰 궁녀 일을 하며 모은 재산도 적지 않았다.
새로운 인생을 생각하며 걷노라니 어느새 큰 길이 끝났다.
부러 험한 산길을 선택한 은가비는 걸음이 가벼웠다.
예까지 도망친 이상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산길로 들어선 은가비의 입에서 안도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쉬지 않고 걸었던 탓일까?
슬슬 다리도 아팠다.
적당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은가비의 눈에 길가의 너럭바위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낡은 삿갓 쓴 선비.
부채를 살랑살랑 흔드는 선비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자니, 선비가 은가비에게 슬그머니 말을 걸어왔다.
“허, 힘들다. 날이 제법 추워져 두껍게 입고 왔더니,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네그려. 어디 멀리 가시오?”
은가비가 목소리를 굵게 내며 대답했다.
“함경도까지 갑니다.”
“참 멀리도 가시오. 기왕 갈 것이면 좋은 길로 갈 것이지, 왜 이리 험한 길을 택하였소? 그리하였으면 그대를 쫓아온 나도 편했을 터인데.”
선비의 태연한 말에 은가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은가비가 선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던 선비, 서강율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를 쫓아오느라 고생하였다 말했소.”
은가비의 입매가 어색하게 뒤틀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절 쫓아오다니요?”
“허허허.”
넉넉하게 웃던 서강율의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감찰 궁녀 은가비. 그대의 이름이 아니던가?”
“이런 망할!”
은가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서강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지긋지긋한 놈들이로구나. 대체 나와 무슨 원한을 졌기에 이리 따라붙는 것이냐?”
서강율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그러는 너는 어린 궁녀들에게 무슨 원한을 졌기에 그런 짓을 한 것이냐?”
“흥, 나는 일평생 수절 아닌 수절을 해야 하는 궁녀들에게 선의를 베푼 것뿐이다.”
“언제부터 범죄를 선의라 부르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네놈이 무얼 알아? 궁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왕의 여인? 말이 좋아 왕의 여인이고 항아님이지. 알고 보면, 일평생 늙어가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이 궁녀란 말이다.”
“그래서?”
“여인의 행복이라곤 절대 알지 못할 아이들에게 여인의 행복을 알게 한 것이 나다. 그런 나를 핍박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
“핑계 한 번 거창하구나.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덮친 게 선행이면, 과부 보쌈하는 치들은 월하노인이란 말이냐?”
“사내라 여인을 몰라도 참으로 모르는구나. 여인이란 본디 속으로 좋아도 겉으론 싫다 하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군.”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
“한때 여인이었다면, 그래도 여인에 대해 다른 사내들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어찌 질 나쁜 사내들과 똑같은 변명을 하는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이 몸을 내린 하늘에 있을 것이요, 하늘이 이런 몸을 내리고, 또 궁녀들이 있는 곳에 날 데려갔다면 그 또한 필시…….”
은가비의 말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서강율이 매정하게 은가비의 목덜미를 후려쳐버렸기 때문이다.
“변명은 이만 됐다. 헛소리는 뇌옥에서 계속하도록 해라.”
포승줄로 은가비의 손을 묶는 서강율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
“나를 풀어 주시오.”
포승줄에 묶인 은가비가 서강율에게 애원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서강율은 혀를 찼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바란다니. 참으로 뻔뻔한 놈이로고.”
“뭐든 원하는 것을 주겠소.”
“뭐라?”
“그간 모은 재산이 제법 됩니다. 그 모든 것을 암행어사께 바치겠습니다.”
“돈?”
“그렇습니다. 어사께서 보시기에 결코 섭섭하지 않은 금액일 겁니다.”
스윽, 내리뜬 눈으로 은가비를 응시한 서강율이 빙그레 웃었다.
은가비도 그를 따라 웃었다.
서강율은 웃음 끝에 툭 한마디를 뱉었다.
“뇌물죄 추가다.”
“어, 어사 나리!”
은가비의 음성이 다급해졌다.
궁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를 어찌한다?
그때, 서강율이 물었다.
“동료라도 있었는가?”
“동료라니요?”
“함께 온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군. 그럼, 내 앞을 가로막은 저 사내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은가비가 고개를 내밀어 보니,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사내 다섯이 좁은 산길을 막고 있었다.
서강율은 입가에 특유의 미소를 지은 채 비스듬한 시선으로 그들을 쓸어봤다.
“벌건 대낮에 얼굴을 가린 걸 보니, 필시 떳떳하지 못한 무리렷다?”
탁!
쥘부채를 접은 그가 다시 물었다.
“누구냐? 너희를 보낸 자들이.”
복면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칼을 뽑아들었다.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서강율은 느긋했다.
“허, 소도둑 같은 자들이 다섯이라. 제법 기세등등하구나. 허나, 내 앞을 가로막기엔 턱없이 부족해.”
그때, 수풀이 흔들리더니, 복면을 쓴 사내가 여섯이나 더 나왔다.
서강율의 미소가 어색해졌다.
“열하나? 이건 좀 많네.”
***
“쳐라!”
호통과 함께 복면인들이 달려들었다.
“이놈들.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이 몸은 바로 주상전하께오서…… 이봐, 한 놈씩 덤벼라. 사내라는 녀석들이 한 사람을 두고 다섯이나 한꺼번에 달려드는 건 비겁하지 않으냐?”
서강율이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쏟아지는 칼날 사이를 위태롭게 뛰어다녔다.
그사이 다른 여섯이 은가비에게 다가왔다.
꼼짝없이 어사에게 잡혔다 생각한 그는 복면인들의 등장이 반가웠다.
“뉘신지 모르겠으나, 내 이 은혜를 잊지 않으리다.”
“고마워할 필요 없다.”
비정한 목소리로 대꾸한 흑의인이 칼을 들었다.
스릉!
시퍼렇게 번뜩이는 칼날 앞에 은가비의 낯빛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왜, 왜 이러는 겁니까?”
“넌 여기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흑의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찔렀다.
“으아아악!”
은가비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흑의인의 것으로 보이는 짧은 신음성이 들려왔다.
“크윽!”
살며시 실눈을 뜬 은가비 앞에 검은 철릭에 검은 삿갓을 쓴 사내의 등이 버티고 서 있었다.
땅바닥엔 칼 한 자루가 뒹굴고 있었다.
은가비의 목을 노리던 칼이었다.
“뉘십니까?”
은가비의 물음에 검은 철릭의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흑의인 다섯을 상대하느라 숨을 헐떡이는 서강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독한 놈. 여긴 또 어찌 알고 온 것이야?”
“죽어라!”
흑의인들이 일제히 검은 철릭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철릭을 입은 사내는 검집에서 검을 빼지도 않은 채 휘둘렀다.
서걱서걱, 살이 잘리는 섬뜩한 소음 대신 철 뭉치로 단단한 것을 후려치는 퍽퍽 하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순식간에 흑의인 여섯이 쓰러졌다.
그사이 간신히 다른 흑의인 다섯을 처리한 서강율이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집요한 놈. 추종술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칼도 잘 쓰네.”
검은 철릭의 사내, 장무열은 무심한 시선으로 대답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되었다.”
시선만큼이나 무심한 목소리였다.
***
동녘으로 떠오른 태양이 천궁(天宮)의 정점을 향해 숨 가쁜 질주를 이어나갔다.
왕과 왕세손은 궁의 후원을 거닐었다.
평소 어여삐 여기는 세손과의 산책인 탓에 왕의 얼굴에는 모처럼 웃음이 가득했다.
먼 곳에서 둘의 모습을 살피던 김익현은 가슴에 품은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조강에서의 거사는 물 건너갔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한 번 정한 시와 때는 좀처럼 다시 오지 못하는 법.
궁을 발칵 뒤집어 놓을 거사라면 더더욱 천기를 살피고 때를 어기지 않음이 중요했다.
마침 산책이 끝나려는 시점.
보고를 올리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김익현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그를 발견한 세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게 보였다.
무슨 이유로 하필 오늘같이 중요한 때에 주상전하와 독대를 청하였는지는 몰라도, 작은 조막손으로 거대한 물줄기를 막을 순 없으니.
결국, 큰 흐름대로 이루어지리라.
김익현은 너른 보폭으로 왕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집의 영감 아니십니까?”
그의 걸음을 붙잡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김익현의 눈가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오늘따라 어찌 방해하는 자가 이리 많은가.
애써 마음을 억누르며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낯선 당상관이 김익현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무용(無用)한 사람이라, 집의 영감께서 신경 쓸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궁 안에 필요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있다면 알아서 물러나야겠지.”
뼈있는 말에도 사내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아니, 더 짙은 미소를 얼굴 가득 드리운 채 김익현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연유인가?”
“그저 인사를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지금은 공무가 바쁘니, 사사로운 인사는 나중으로 미뤄두게.”
차가운 한마디를 끝으로 빙글빙글 웃는 사내의 곁을 무심히 지나치려 하였다.
그때, 김익현의 귀에 솔깃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그 사람이 잡혔다 하던데 말입니다.”
김익현은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잡히다니? 누가 잡혔단 말인가?”
“궁녀라 하던데. 이름이 뭐라더라…… 아! 은가비. 은가비라 하더군요.”
김익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은가비라면 이번 사건의 진범으로 의심되는 감찰 궁녀가 아니던가.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로군. 자네가 그 소식을 어떻게 접했는지 모르나 알려주어 고맙네. 주상전하와의 독대가 끝나면 내 그 일을 살펴보도록 하지.”
김익현은 몸을 돌렸다.
그러나 사내의 목소리는 끈질기게 그의 목덜미를 잡고 늘어졌다.
“정말 은가비에 대한 조사를 뒤로 미루셔도 괜찮겠습니까? 듣자 하니 그 궁녀의 정체가 참으로 기이하여 살펴본 자들은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던데…….”
“……!”
결국, 김익현은 멈춰 서고 말았다.
그는 신형을 돌려 빙글빙글 웃는 사내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전 그저 집의 영감을 걱정하여 하는 말입니다. 주상전하께 사건의 진상을 보고드리자마자 진범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 진범이 하필이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법한 특이한 존재라면…….”
사내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칫 집의 영감의 노력이 허사가 될까 두렵습니다.”
“…….”
김익현의 눈두덩에 경련이 일었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사내를 쏘아보았다.
“그대는 누구인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집의 영감께서 관심 가질 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내 급한 볼일이 생겨 사헌부에 돌아가야겠네. 일이 끝나면 자네를 다시 한 번 만나봐야겠군.”
“집의 영감의 부름은 무척 기쁘나, 제가 워낙 공사다망하여 과연 그때 궁 안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익현은 능청스럽게 웃는 사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빙글빙글 웃는 웃음을 향해 찬바람을 일으킨 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목적하던 왕을 향해서가 아니라, 사헌부가 있는 방향이었다.
“휴, 눈빛이 여간 대단한 분이 아닐세.”
능청스런 사내, 서강율은 쥘부채를 펼치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식혔다.
“그럼, 볼일도 끝났으니, 나도 이만 물러가 볼까?”
살랑살랑 부채질하며 서강율은 궁궐 동쪽으로 느긋하게 걸었다.
먼발치에서 그를 본 형운의 표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집의 김익현이 물러간 것은 분명 기쁜 일이나, 하필 그 이유가 서강율이라니.
그보다 대체 저자가 무슨 수를 썼는데, 저 집요한 집의가 물러간단 말인가.
‘이번 일이 끝나면 서강율, 저자의 정체부터 밝혀내야겠구나. 그리고…….’
형운은 여러 번 했던 다짐을 다시 상기했다.
‘꼭 삭탈관직해야지.’
*
서탁 위엔 모처럼 웃음과 즐거움을 표하는 글로 가득했다.
이레가 전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서탁의 할아버지들은 모두 제 일처럼 기뻐했다.
화가 물었다.
-과연 네 말대로 은가비란 궁녀를 잡는 과정도 쉽지 않았구나.
상이 물었다.
-그런데 은협이라는 작자는 어찌 알고 은가비를 잡았을꼬? 그리고 장무열이라는 어사는 또 어떻게 뒤를 쫓아갔고?
이레가 답했다.
-장 장령께 전해달라 부탁한 서찰은 무사히 은협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서찰을 받은 은협께선 곧바로 궁녀들의 숙소를 수색하였고, 두 사람이 급하게 궁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예가 물었다.
-두 사람이라면 은가비라는 궁녀와 이름을 모르는 주근깨 궁녀를 뜻하는 것이겠지. 그중 어찌 진범을 알고 쫓았다더냐?
-제가 보낸 서찰에 만약 범인이 궁녀라면 지키는 입장일 거라 적어놓은 것을 신중하게 고려하였다 합니다.
상이 끼어들었다.
-옳거니. 둘 중 하나가 감찰 궁녀이니, 그녀의 뒤를 쫓은 것이로군. 장무열이라는 어사는 늦게 움직인 모양인데, 또 어찌 쫓아갔다더냐?
-그것은 은협께서도 알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다만 예전부터 은협이 있는 곳을 귀신같이 찾아내더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상이 껄껄 웃었다.
-하하. 참으로 신통방통한 작자로군. 그런데 그 얼굴에 검은 자루 뒤집어쓴 자들은 어찌 되었느냐? 그자들도 은가비인지, 조가비인지 하는 자와 한패라더냐?
-그건 은협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 정체를 알아보겠다고 하셨으니. 어떻게든 알아낼 겁니다.
화의 글이 서탁 위로 떠올랐다.
-네 말을 들으니, 이번 일은 너를 비롯한 은자원의 모든 은자들과 장무열이라는 장령이 힘을 합하여 얻어낸 결과로구나. 장하다. 큰일을 해냈어.
상이 즉각 반박했다.
-어딜 다른 놈들의 활약을 아이에게 비교해? 애초에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진범을 밝혀내지도 못했을 텐데.
이레는 겸손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모두의 노력이 모여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악이 물었다.
-그러니까 네 쪽은 고녀의 소행이었단 말이로구나.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께서도 비슷한 일이 있다 하셨지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행히 범인은 잡았다.
상이 급하게 물었다.
-그쪽도 범인이 고녀였냐?
악이 대답했다.
-아니었다. 다만, 지키는 녀석의 소행이더구나.
상이 웃었다.
-하하. 아무렴, 그런 일이 그리 흔할 리 없지.
이레도 웃었다.
-그러게요. 저도 정말로 범인이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습니다.
화가 말했다.
-어찌 보면 불쌍한 아이로구나. 남과 다른 몸으로 태어나 다른 이들은 평생 모를 고민과 고통을 받았을 테니 말이다.
상이 반박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남과 다르다고 그런 요망한 짓을 해서야 쓰겠느냐? 안 그러냐? 아이야.
이레가 답했다.
-저도 남과 다르다 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선 안 된다 생각합니다.
***
어느덧 밤이 깊었다.
할아버지들과 대화를 마친 이레는 붓을 내려놓았다.
“다행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건이 잘 해결되어서.
무고한 분께서 모함받지 않아서.
오라버니께서 목숨 걸고 지키던 분을 지킬 수 있어서.
더는 억울한 궁녀가 발생하지 않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 더는 고민으로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러나 한편으론 그립고 아쉬웠다.
은자원.
오라버니 계셨던 곳.
은자들이 계신 곳.
그 어둡고 따뜻한 곳에 이제 다시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립고 아쉽다.
그때였다.
톡.
작은 울림이 동창 밖에서 들려왔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는가 싶었다.
그러나…….
톡톡.
다시 들려오는 작은 울림.
이레는 동창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새카맣게 물든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문을 닫으려는 찰나.
“이곳이오.”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아래. 고개를 내려보시오.”
이레는 목소리의 요구에 따라 고개를 내렸다.
별채의 창 아래.
한 사내가 뒷짐을 진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를 본 이레가 큰 눈을 깜빡였다.
천만뜻밖의 사람이 그곳에 있었던 까닭이었다.
처음에는 놀람이, 그다음에는 반가운 웃음이 이레의 얼굴에 떠올랐다.
“은백,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근처를 지나던 길에 잠시 들렀소.”
이레는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며 형운에게 속삭였다.
“대체 여긴 어찌 들어오신 겁니까?”
“마침 문이 열려 있더군.”
“문이 열려 있다고 함부로 들어오시면 어찌합니까? 어서 돌아가십시오.”
“싫소.”
형운의 당당한 거부에 이레는 당황했다.
“이러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형운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엇이 큰일이란 말이오?”
“남녀가 유별하니…….”
“괜찮소. 난 은자원의 동료를 보러 온 것이니.”
“그럴 것이면 차라리 낮에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형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오.”
“무얼 참을 수 없었단 말입니까?”
형운이 고개를 들어 이레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 끝.
그가 대답했다.
“보고 싶었소.”
만월의 달빛 아래.
“그대가…….”
곧게 훌쩍 자라버린 자신의 마음을.
사내는 여인에게 정직하게 전했다.
“보고 싶었소. 오늘만은 꼭, 그대를 만나고 싶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