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남산골 하월집
-검은 별이 하늘을 촘촘하게 수놓았습니다. 주근깨 궁녀를 잡은 장 장령님도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지요. 그럼에도 저는 좀처럼 발길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서탁 위로 이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녀의 기억은 전날 밤, 그 다급했던 시간으로 향했다.
*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바람이 사납게 들이쳤다.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시린 기운이 스며들었다.
저도 모르게 으스스 몸이 떨려왔다.
긴 하루의 끝자락.
물을 먹은 솜처럼 다리가 무거웠다.
당장에라도 별채의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묻고 싶었다.
그럼에도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의문은 풀렸다.
불가능한 범행이 가능했던 이유도 밝혀졌으며, 흐릿하던 범인의 윤곽도 또렷해졌다.
장무열, 그 집요한 어사가 나섰으니 범인을 잡는 것도 시간 문제이리라.
그러나…….
모든 것이 명확해졌음에도 이레는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껄끄러운 잔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걸린 느낌.
멀리서 술시말(戌時末)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고민하던 이레는 결국 발길을 돌렸다.
***
남산골의 비탈진 언덕을 작은 인영이 내달렸다.
이레였다.
반가의 여인이란 어떤 상황이라도 침착함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발소리는 물론이고 거친 숨소리조차도 함부로 내선 안 된다 배웠다.
그러나 시급을 다투는 급한 일 앞에 반가의 여인이 무슨 상관이며, 양반의 체면은 다 무어란 말인가.
숨이 턱 끝에 달라붙도록 내달린 끝에 절벽 아래, 웅크리듯 자리한 초가집을 찾을 수 있었다.
가난한 선비들의 고을, 남산골.
그 남산골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하월집이었다.
‘이곳이구나.’
아랫마을 주막에서 들은 이야기가 이레의 귓가에 맴돌았다.
‘하월집을 찾으세요? 당연히 알지요. 근방에 그 집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뭐든 구해주는 곳.
하월집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하월집에서 못 구하는 건 조선 팔도 어디서도 못 구한다고 주모가 귀띔했더랬다.
무에 도깨비방망이를 가진 것도 아닐 터인데.
어찌 원하면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지금 당장 이레가 원하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자신의 서찰을 안전하게 은백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
이 늦은 밤, 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단 한 사람.
“계시오? 안에 계시오?”
하월집 마당을 기웃거리는 이레의 음성에 다급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뉘시오?”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부엌에서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레는 싸리나무를 성기게 엮어 만든 사립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용무를 꺼냈다.
“사람을 찾아왔소.”
삐걱.
부엌문이 열렸다.
명주 두건을 머리에 쓴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이 깊어진 탓이라.
불빛을 등지고 선 노파의 얼굴을 알아보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이레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노파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자네는…….”
언젠가 오라버니와 함께 만난 노파였다.
대광통교에서 잡화를 팔던 잡화전의 주인.
기대와 함께 의미 모를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노파.
노파에게서 향갑을 사던 기대의 모습이 아직도 이레의 눈에 선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노파 역시 이레를 기억하는 눈치였다.
“아가씨가 여긴 어떻게……?”
노파의 얼굴에 놀람이 차올랐다.
그러곤 어찌 된 이유에선지 갑자기 몸을 휙 돌려 부엌으로 돌아갔다.
이레는 사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으로 들어서니,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뒤적이는 노파의 모습이 보였다.
아궁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노파가 말했다.
“오늘 장사는 접었습니다. 날도 어두우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무얼 사러 온 게 아닐세.”
“그럼 더더욱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요.”
노파의 철저한 외면에 이레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찾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 하여 왔네.”
아궁이를 뒤적이던 노파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붉게 달아오른 숯을 뒤적거렸다.
“쇤네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요.”
“팽례, 강현보.”
이레가 짧고 간결하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부지깽이를 내려놓은 노파가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녀는 뒤뜰로 이어진 곳을 향해 목청을 드높였다.
“현보야. 이놈, 현보야.”
“네.”
“초저녁부터 방구석에서 뭐 하는 게야? 손님 오셨다.”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강현보를 부른 노파는 그대로 뒤뜰로 이어진 문으로 나가 버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노파의 외면.
밤늦은 시각에 찾아온 것이 못마땅한 것이려나?
하지만 이레를 대하는 노파의 태도는 언짢은 기색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언짢음이나 성화보다는…….
그래, 회피하는 듯한 느낌이 더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왜?
그러나 이레의 생각은 더 깊게 이어지지 못했다.
“손님이라뇨? 날 찾을 손님이 뉘가 있다고…….”
부엌과 안채로 연결된 문이 열리더니, 비쩍 마른 사내가 걸어 나왔다.
자다 일어났는지 잠이 덕지덕지 묻은 눈가를 연신 비볐다.
“대체 누가 이 시간에…… 아가씨?”
이레를 발견한 강현보는 하품하던 그대로 굳어졌다.
“아가씨, 이 밤에 예까지 뭔 일이랍니까?”
“부탁할 것이 있어 왔네.”
“아가씨, 무슨 그런 말씀이 다 있습니까. 아가씨가 부탁이라뇨.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소인, 아가씨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죽는시늉도 할 겁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뭡니까? 소인이 아가씨를 위해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강현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레는 미리 준비한 서찰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혹시, 이 서찰을 전할 수 있겠는가?”
강현보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나갔다.
“아가씨도 참. 이런 일을 뭔 부탁이라고 하신답니까. 제가 누굽니까. 궁을 수시로 들락거리던 팽례 아닙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서찰을 건네받은 강현보가 짚신을 고쳐 신었다.
당장에라도 뛰어나갈 태세인 그가 이레에게 물었다.
“어느 댁, 뉘께 전해 올리면 됩니까?”
생글생글 순박하게 미소 짓는 그를 향해 이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작은 문제가 있다네.”
“문제라니요?”
“어디 사는 분인지 모른다네.”
“네?”
강현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아야 서찰이든, 물건이든, 말이든 전할 것인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이 밤에 오신 걸 보니, 급한 사정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럼 뉘신지는 아십니까?”
“다행히 그건 알고 있다네.”
강현보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뉘신지요?”
“자네도 아는 분이라네.”
“그럼, 찾기 더 편하겠네요.”
“은자원의 은백님.”
“은백님이라. 은백님이라면…… 혹, 은자원의 그 은백님 말씀이십니까?”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분일세.”
“……!”
강현보의 낯빛이 돌연 하얗게 탈색되었다.
은자원의 은백.
그의 진정한 정체를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분이라면…….”
“표정이 어찌 그리 어두운 겐가? 혹여 자네도 그분이 어디 계신지 모르는가?”
“그건 아닙니다.”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분과 그분이 부리는 자에게 갇혀 지낸 강현보가 아니던가.
문제는 그분의 신분이었다.
사시는 곳이 어딘지 안다고 하여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강현보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서찰, 중요한 용무겠지요?”
“그렇다네.”
“이 야심한 시각에 아가씨께서 저를 직접 찾은 것을 보면 급한 용무일 테고요.”
“그렇지.”
이레의 눈동자에 단호한 결의가 들어찼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밤이 가기 전에 꼭 전해야 한다네.”
그녀의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강현보는 서찰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분께 서찰을 전하겠습니다. 다만…….”
“다만?”
강현보가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팽례 일을 그만둔 지라, 동패가 없습니다. 그분을 뵈려면 평범한 팽례의 패로는 어림도 없는지라. 일단, 동패를 가진 팽례를 수소문해보겠습니다.”
강현보의 말에 이레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형운, 그의 배경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준 엄청난 선물이나 오로원이라고 하는 대장원의 주인이라는 점만 봐도 그 배경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이레는 소맷자락에서 기대의 동패를 꺼냈다.
“이것이면 어떻겠는가?”
“이건?”
강현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동패로도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갈 순 없겠는가?”
이레가 건넨 동패를 두 손으로 받아든 강현보는 고개를 갸웃했다.
팽례의 동패는 확실한데, 그 표식이 기이했다.
샛별과 초승달 아래, 상서로운 짐승의 형상이라니.
“이 팽례는 누구의 것입니까?”
팽례의 패에 새겨진 표식은 팽례의 주인을 뜻함이라.
주인의 권력은 곧 팽례의 권한이 되는지라, 팽례 사이에선 주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지금까지 여러 팽례를 만났지만, 이런 짐승을 표식으로 사용하는 팽례는 본 적이 없었다.
“높은 분의 표식일세. 나로서도 감히 언급하기 어려운 분이라…… 누군지 꼭 알아야 하겠나?”
이레의 물음에 강현보는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어쨌든 동패는 세상 어디든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뜻하니. 가짜만 아니라면 능히 그분께 갈 수 있을 겁니다.”
이레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부탁했다.
“그럼 잘 부탁하네. 가능한 한 빨리, 이 서찰을 은백께 전해야 하네.”
“걱정 마십시오.”
강현보는 짚신을 단단히 동여맸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은백,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그분께 서찰을 보내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그러나 그분께서 밝히지 않은 일인데,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강현보는 이레를 향해 순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꼭 서신을 전하겠습니다.”
***
새벽이 가까워졌다.
세손궁 이 층 누대에 선 형운은 궁을 바라보았다.
길목마다 환하게 밝혀진 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 평온함 이면에는 치열한 위험이 요동치고 있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
그 위험한 적막을 굽어보는 형운의 눈동자엔 짙은 암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저하, 밤바람이 차옵니다. 그만 들어가시옵소서.”
제 주인에게 청하는 홍인모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형운은 뿌리라도 내리듯, 꼼짝하지 않았다.
“사헌부의 상황을 살피러 간 최 내관은 돌아왔느냐?”
“좀 전에 돌아왔나이다.”
“무어라더냐?”
“지금까지 모은 증좌와 증언들을 토대로 내일 주상전하께 보고를 올릴 예정이라 하옵니다.”
“그리고?”
“…….”
“그것뿐이더냐?”
“한양과 경기도, 그리고 경상도의 선비와 유생들이 세자 저하의 비행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하옵니다.”
“글만 읽는 선비와 유생들이 구중궁궐의 속사정을 어찌 그리 알고 나선단 말이냐?”
“선동하는 자가 있는 듯합니다. 좌익위 최치성이 선비들과 유생들을 대상으로 선동하는 자를 찾고 있나이다. 곧 그들을 찾아낼 것이니. 저하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늦을 것이다.”
“…….”
“당장 아침에 있을 조강에 주상전하께 보고가 올라간다 하였지 않느냐? 상소 또한 올라간다 하였지. 궁이 발칵 뒤집힌 이후에 선동하는 자를 찾아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오나 저하. 세자 저하께서 어떤 분이시옵니까? 주상 전하의 유일한 아드님이시옵니다. 주상 전하께서는 이번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절대 귀 기울이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형운은 긴 한숨을 뱉었다.
“할바마마와 아바마마의 사이엔 이미 건너기 어려운 깊은 골이 생겼다. 아바마마와 주상전하께서 서로 얼굴을 마주한 것이 벌써 여러 달이 지났느니. 그러잖아도 아바마마의 일이라면 언짢은 기색부터 보이시는구나. 그런 할바마마께서 이번 일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알 수 없구나.”
“저하…….”
“설사 할바마마께서 오해하지 않으신다 하여도 악독한 소문이 세간에 퍼질 것이 아니겠느냐? 말도 안 되는 그 이야기가 벌써 기정사실인 양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사헌부의 조사결과까지 전해지면, 이후의 정국은 그야말로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위태로울 터.”
궁 안팎이 온통 왕세자와 궁 안의 흉흉한 소문에 관한 이야기라.
이번 사건이 누군가의 모함이라면, 이미 목적을 절반은 달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지경이었다.
“저하. 어찌하면 되오리까.”
홍인모의 물음에 형운은 눈을 감았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구나. 천지가 뒤집히려 하는 이때, 난 대체 무얼 하면 되겠느냐? 어찌해야 하느냐?’
그의 탄식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누구냐?”
“감히 예가 어디라고!”
“잡아랏!”
갑작스러운 소란이 세손궁을 뒤덮었다.
“이건 또 무슨 소란이냐?”
“알아보겠사옵니다.”
홍인모가 누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형운도 전각의 돌계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손궁의 앞마당.
내관과 호위무사로 보이는 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누군가를 잡기 위해 애쓰는 모양인데, 상대가 워낙 재빨라 쉽게 잡지 못하였다.
“무슨 일이냐?”
“침입자입니다.”
“침입자?”
형운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때였다.
형운을 발견한 침입자가 돌연 호위들의 포위를 뚫고 달려왔다.
잡아채는 손길과 칼날을 가까스로 피한 그가 간신히 형운이 선 돌계단 아래에 이르렀다.
스릉, 스르릉.
호위무사들의 검이 일제히 사내의 목을 겨눠졌다.
마른침만 삼켜도 목이 갈라질 위험천만한 상황.
그러나 형운을 바라보는 사내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미 이리저리 매타작을 당한 듯 얼굴 곳곳에 푸른 멍이 가득한 사내.
강현보는 목전을 파고드는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서찰, 아가씨께서 은백께 전하는 서찰입니다.”
아가씨.
그리고 은백.
강현보를 바라보는 형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예가 어디라고 그런 것을 직접 올린단 말이냐.”
최 내관이 강현보가 올린 서찰을 낚아채려 하였다.
순간.
“멈춰라!”
형운은 손을 들어 최 내관을 저지했다.
움찔 놀란 최 내관이 뒤로 물러섰다.
그사이 형운은 뚜벅뚜벅 돌계단을 내려가 강현보에게서 서찰을 건네받았다.
“분명…… 전하였습니다.”
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받았다.”
강현보가 소매에 손을 넣었다.
그의 목에 칼을 겨눈 호위무사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정작 강현보가 꺼낸 것은 작은 헝겊 조각이었다.
“수결을…….”
형운이 최 내관을 바라보았다. 곧 최 내관의 명을 받은 궁녀가 세필붓을 가져왔다.
형운은 강현보에게 서찰을 받았다는 증표로 수결을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큰절을 올린 강현보가 신형을 돌렸다.
그러나 호위무사들의 칼은 여전히 그의 전신을 겨누고 있었다.
“그만. 칼을 거두어라.”
형운의 말에 비로소 호위무사들의 칼이 거두어졌다.
강현보는 다시 형운에게 꾸벅 허리를 접은 뒤, 궁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치료받지 않아도 되겠는가?”
“원래 둔한 몸이라 괜찮습니다요.”
“비록 내가 하지 않았다 해도 네가 다친 일엔 내 책임도 있다. 그러니 부담 느끼지 말고 치료를 받고 가거라.”
“서찰을 무사히 전했다는 소식을 아가씨께 전한 다음에 쉬어도 됩니다.”
“아가씨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강현보는 고개를 저었다.
“짐작도 못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알겠다. 앞으로도 말하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일을 마치고 다시 이곳으로 오너라. 네가 괜찮다 해도 내가 편치 않으니, 완쾌될 때까지 치료해 주어야겠다.”
“망극하옵니다, 세손 저하.”
강현보는 연신 허리를 꾸벅이며 세손궁을 벗어났다.
형운은 그 충직한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과연, 저대로 썩히기엔 아까운 인물이로군.”
목숨을 걸고 세손궁으로 뛰어들어온 인물이다.
은혜를 갚기 위해 제 목숨까지 걸 사람이 이 넓은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그나저나 아가씨라면 분명 은랑일 터인데.”
야심한 시각에 급히 서찰을 보냈다면, 분면 평범한 일은 아닐 터.
형운은 이레가 보낸 서찰을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고요하던 그의 눈동자에 깊은 파문이 일었다.
홍인모가 물었다.
“누가 보낸 서찰이옵니까?”
“은랑이다. 은랑이 정녕 큰일을 해냈구나.”
서찰엔 이번 사건의 내막에 관한 이레의 조사 내용이 담겨 있었다.
더불어 의심 가는 인물과 그 이유에 관해서도 기술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기상천외하였다.
만약 서찰을 보낸 사람이 은랑이 아니었다면, 헛소리로 치부했을 만한 이야기였다.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아바마마를 둘러싼 암울한 상황을 반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둡게 가라앉은 형운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스며들었다.
형운은 빠른 목소리로 홍인모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 즉시 사건이 일어난 궁녀들의 숙소에서 은가비를 찾아라. 감찰 궁녀이니 찾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곳에 없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내야 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홍인모가 떠나자 형운은 이번엔 최 내관을 불렀다.
“지금 당장 할바마마께 갈 채비를 하여라. 오늘 꼭 그분과 독대해야겠다.”
늙은 내관의 주름진 눈이 화등잔만 하게 벌어졌다.
평소 주상전하라면 자다가도 몸가짐을 조심하던 세손 저하가 아니시던가.
주상전하의 성품이 워낙 까다롭고 엄격한 탓이었다.
오죽하면 아들인 세자 저하조차도 아버지인 임금 대하기를 적장의 장수 대하기보다 어렵다 하실까.
그런 주상전하께 독대를 청하시다니.
그러나 형운의 눈빛에 들어찬 형형한 기운을 확인한 늙은 내관은 이내 고개를 조아렸다.
“명 받들겠나이다.”
최 내관마저 물러가자 홀로 남겨진 형운은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게 차오른 새벽이 짙게 깔린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형운은 누구에게 전하는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대의 서찰. 분명 잘 받았소.”
*
화가 물었다.
-정말 다행이구나. 네가 보낸 서찰이 잘 전해졌다니.
-네, 강현보. 그 사람이 고생하였습니다.
팽례 강현보를 떠올린 이레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 아침 일찍, 강현보가 이레를 찾아왔다.
그는 무사히 일을 마쳤음을 보고하였고, 그 증거로 은백의 수결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이레는 은백의 수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강현보의 모습이 엉망진창이었던 까닭이다.
무슨 일이냐는 이레의 물음에 그는 그저 넘어졌다고만 대답했다.
이레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얼굴과 목. 손등에 보이는 시퍼런 멍은 결코 넘어져서 생길 법한 상처가 아니었다.
‘정말 넘어진 것입니다.’
거듭된 물음에도 강현보는 그저 순박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에게 괜한 부탁을 했어.”
이레는 자책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대체 은백은 어떤 곳에서 사는데, 서신을 전하러 간 사람에게 그리 심한 매질을 한단 말인가.”
어쩌면 은백의 가문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엄격하거나 위험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레가 형운을 떠올릴 때였다.
악의 글이 나타났다.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겠구나. 은백이라는 어사에게 네 서찰이 전달되었으니.
상의 글도 나타났다.
-은백은 어사라면서? 장 아무개라는 자는 무려 장령이라 하였으니, 그자의 선에서 해결되지 않았다면 은백이라는 녀석이 나선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걸?
화가 말했다.
-직위가 높다고 반드시 능력도 출중한 것은 아니니. 은백은 정체가 수상하나 수단은 제법 뛰어난 편이니, 분명 무슨 수를 짜내겠지.
상이 반박했다.
-아이의 말 못 들었느냐? 세자의 일이라 했다. 어사가 제아무리 용한 재주가 있어도 어찌 나라를 뒤흔들 사건을 잠재울 수 있단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레가 붓을 들었다.
-저도 쉽게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또한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봤지? 내 말대로잖아.
상의 잘난 척에 화, 악, 예 모두 아무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뭐가 쉽지 않았다는 거냐? 네 말대로라면 은가비인지 조가비인지 하는 궁녀만 잡으면 다 되는 거 아니었어? 도대체 귀신들의 일상이 뭐 이리 복잡하고 해괴해?
이번엔 예가 물었다.
-고녀를 잡는 과정에서 말썽이 있었더냐?
이레가 대답했다.
-오늘 낮에 은협께서 잠시 오셨다 가셨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무척 험악한 사태가 있었다 합니다.
이레는 서강율이 들려준 이야기를 할아버지들에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