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하루 (中)
은가비는 대청마루에 달린 줄을 흔들었다.
짜랑짜랑.
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궁녀들이 마당으로 모였다.
“번거롭게 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이레는 궁녀들과 은가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은가비가 불만을 입에 올렸다.
“이번 일로 저희가 받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조사를 핑계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사내들이 드나들고, 여기저기 모든 곳을 살피고 뒤지고 다니니, 잠시라도 쉴 시간이 없을 지경입니다.”
“많이 피곤하였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미 어사대에서 증좌를 모두 거둬갔습니다. 더는 털어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방을 뒤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왜 모두를 모이게 한 겁니까?”
이레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이분들의 처소는 고정되어 있습니까?”
“이따금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궁녀라도 위아래, 서열은 분명했다.
상급 궁녀의 경우 대개 혼자 방을 쓰고, 돌봐주는 무수리나 방자도 따로 있었다.
그에 반해 이곳에 모인 궁녀들은 두 명이 한방을 쓰는 직급 낮은 궁녀이거나 막 입궁한 어린 궁녀였다.
이레가 물었다.
“어떤 경우에 방이 바뀝니까?”
“일하는 곳이 바뀌거나 직급이 달라지면 방을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이번 사건이 벌어진 이후엔 어떻습니까?”
“워낙 흉흉한 일인지라. 조사를 위해 사고가 있었던 방과 그 주변 방들을 비워야 했습니다.”
궁녀들이 머무는 방에 변동이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이레는 미리 준비해온 세필과 종이를 꺼내 들고, 은가비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지금부터 사건이 일어난 순으로 당시 사용한 방 위치에 해당하는 원에 서달라 해주십시오.”
은가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
“첫 번째 사건이 벌어진 밤. 각자 머문 방에 해당하는 곳에 서시오.”
궁녀들이 은가비의 명에 따라 부산하게 움직였다.
이레는 간략하게 처소의 약도를 그렸다. 그리고 사고가 있던 방을 표시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궁녀들의 머문 곳을 차례로 표시했다.
작성을 끝낸 이레가 은가비에게 청했다.
“두 번째 사건이 벌어진 밤에 머문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도깨비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
투덜대면서 은가비는 다시 궁녀들에게 명했다.
그렇게 이레는 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사고가 난 방과 궁녀들이 머문 위치를 표시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더 필요한 일이 있습니까?”
마지막 사건까지 세심하게 기록한 이레가 듬성듬성 이 빠진 자국처럼 빈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곳은 왜 비어 있습니까?”
“일과가 끝나지 않아 숙소로 돌아오지 않은 궁녀들입니다.”
“그분들이 어디에 머물렀는지 기억하십니까?”
“대충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은가비가 빈 곳을 채워주었다.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 곳은 다른 궁녀들에게 물어 채웠다.
그러고도 빈 곳이 몇 곳 있었다.
“이곳엔 누가 있으셨습니까?”
“나와 같은 감찰하는 상궁과 궁녀들의 자리입니다.”
이레가 세필을 들었다.
은가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감찰 상궁과 궁녀들까지 조사한단 말입니까?”
“단 한 명도 빠져선 안 됩니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감찰 궁녀가 이번 사건과 관련 있다 생각하는 건가요? 왜? 범인과 내통하여 궁녀를 내어주기라도 하였을까 봐 그럽니까?”
“단순한 기록일 뿐입니다.”
흥분한 은가비가 따지려 들자, 장무열이 나섰다.
“협조, 부탁하오.”
그의 강요 아닌 강요에 은가비도 더는 따져 묻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은가비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머지 빈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모든 칸을 채운 이레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은가비의 물음에도 이레는 생각에 잠긴 채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이레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나.”
은가비가 물었다.
“무언가 발견했습니까?”
수긍하듯 이레는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다 즉시 다시 좌우로 저었다.
“네. 알 것 같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아무래도 좀 더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번거로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뜻을 전한 이레는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장무열과 함께 이곳으로 오기 전, 은자원에서 작성한 두 통의 두루마리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떨떠름한 얼굴로 은가비가 물었다.
“무엇입니까?”
“어제 절 이곳으로 안내한 감찰 상궁께 이 서찰을 전해주십시오.”
“무슨 서찰입니까?”
“가져다드리면 알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레는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장무열과 함께 궁녀들의 처소를 나갔다.
은가비는 이마에 주름을 그린 채, 멀어지는 이레와 장무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곁으로 유난히 주근깨가 많은 궁녀 하나가 다가왔다.
“대체 이게 무슨 소동이랍니까?”
“나도 모르겠네.”
“사람을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피해를 본 건 우리인데 어째 우리가 의심받는 듯해 기분이 영 묘했습니다.”
“그랬는가?”
“대체 사건이 일어난 밤에 어디 있었는지가 왜 중요하답니까? 뭐, 우리 중에 여장한 사내가 숨어있기라도 하였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자가 있다면 우리가 모를 리 없잖은가.”
궁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경우가 대다수다.
낯선 자가 섞여 있으면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느닷없는 성화에 주근깨 궁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당연히 압니다. 그러니 해괴하다는 겁니다. 여기 있는 궁녀 모두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람들이니, 당연히 사내일 리 없고. 그럼 방법은 하나, 사내가 숨어든 것일 텐데. 워낙에 감시가 철저하니 사내가 숨어들 수도 없고 설사 숨어든다 해도 곧바로 발각되었겠지요.”
은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근깨 궁녀의 말이 이어졌다.
“숱한 어사와 감찰들이 이 잡듯 곳곳을 뒤졌는데, 뭘 더 조사할 게 있다고 이리 요란인지. 게다가 증좌라면 이미 발견되었지 않습니까?”
“뭔가 미흡한 게 있는 모양이지.”
“그런데 저 여인, 대체 누굽니까? 어디에서 나온 여인인데, 저리 위세가 등등합니까?”
“나도 모르네.”
“정체도 알 수 없는 여인이 어사와 함께 다니다니. 이상한 일도 다 있네요. 그런데 거기엔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주근깨 궁녀는 이레가 은가비에게 건넨 두루마리를 눈짓했다.
“관심 둘 것 없네.”
“딱히 밀봉된 것도 아니니. 슬쩍 훔쳐본다 해도 모를 것입니다. 어디 한 번 내용 좀 보죠. 궁금하지도 않으십니까?”
“관심 두지 말래도.”
주근깨 궁녀의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자 은가비는 기어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궁금한 게 뭐 그리 많은가?”
“송구합니다. 저는 다만…….”
“궁이 번잡스러우니.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해야 할 것이야.”
“네. 알겠습니다.”
은가비의 서슬 퍼런 기세에 놀란 주근깨 궁녀는 허둥지둥 제 처소로 돌아갔다.
가는 중에도 그녀는 연신 이레를 흘끔거렸다.
은가비는 그 작태를 삼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궁녀들의 숙소를 벗어나, 더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자 장무열은 걸음을 멈췄다.
“알아낸 게 있는가?”
그의 물음에 이레는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황으로 보아 의심스러운 사람이 몇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아직은 밝힐 수 없습니다.”
“어사대를 못 믿는 것인가? 아니,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확실한 물증도 없는데 무고할지도 모를 사람을 함부로 고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번 조사는 어디까지나 호박꽃을 보고 떠올린 엉뚱한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다.
근거도 명확하지 않은 일이니,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사대를 완전히 신임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허상익이 발견한 세자 저하의 관자.
세자를 주요 용의자에서 명백한 범인으로 만든 중요한 증좌였지만, 그 증거를 찾기까지의 과정이 석연치 않았다.
숱한 사람들이 살피고 뒤진 방에서 작은 물건도 아닌 관자를 발견하다니.
마치 누군가 짜놓은 장기판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어사대는 세자 저하를 의심하지 않았던가.
확실한 증좌마저 발견하였으니, 새로운 용의자의 출현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정치의 세계는 언뜻 보기엔 복잡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원칙으로 움직인다.
욕심과 탐욕.
그들이 내세우는 법과 도리, 이치와 명분은 가진 자들의 이득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 그들의 이권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그런 사실을 이레는 어린 시절부터 서탁의 할아버지들을 통해 배우고 익혔다.
물론, 진정으로 성심을 다해 나라를 위해 일하는 관료도 적지 않겠지만, 부귀와 영화를 진정으로 멀리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이레는 남은 두루마리를 장무열에게 꺼내 보였다.
“이것을 은협님께 전해주시겠습니까?”
“은협? 서강율 말인가?”
이레가 내민 두루마리를 빤히 쳐다보던 장무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장무열은 두루마리를 제 품속에 갈무리했다.
“되도록 빨리 전해주십시오.”
장무열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을 마친 이레는 두 손을 내밀었다.
“이제 되었습니다.”
체포해 가십시오.
장무열이 은자원까지 방문하여 이레를 찾은 이유.
그녀를 체포하려 함이었다.
잠시나마 그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진범을 잡기 위한 조사를 그가 허락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조사가 끝났으니, 이제 장무열의 뜻을 따라야 한다.
제발 은백과 은협에게 보낸 서신이 늦지 않기를.
아! 그래도 정체가 드러나는 건 피할 수 없겠구나.
이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어찌 뵐까.
한동안 호사가들의 좋은 얘깃거리가 되겠구나.
우연이라도 좋았다.
은백과 은협.
제발,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가는 길에 마주칠 수 있기를.
이런저런 생각들이 이레의 작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정작 장무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이레는 의아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시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뜻밖의 말이 장무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레의 눈이 커졌다.
“체포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말하지 않았소? 진범을 잡을 수 있다고. 아직 진범을 잡지 못하였소.”
이레를 대하는 장무열의 말투가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걸 알아차릴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얼떨떨해진 이레는 잠시 넋이 나갔다.
“지금 놔주시면 영영 다시 잡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소.”
“그런데 왜?”
서강율마저 혀를 내두를 만큼 집요한 사람이 아니던가.
한번 목표로 한 사람은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런 사람이 왜 이리 순순히 풀어주는 걸까?
그러고 보니 좀 전부터 꼭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은자원에서…….”
이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왜 제 부탁을 들어주셨습니까?”
“그대의 말이 허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네?”
이레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 기괴한 이야기를 설마 이 사람은 곧이곧대로 믿었단 말인가?
어째서?
하지만 장무열은 그 이유까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늦었소. 궁 문밖까지 안내하겠소.”
***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다.
장무열은 정말로 이레를 궁 문까지 안내했다.
꼼짝없이 어사대로 끌려가겠다 생각한 이레로서는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밤이 늦었으니 서둘러 돌아가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잊지 마시오.”
“네?”
“그대에 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둬들인 건 아니니. 때가 되면 반드시 그대의 체포하여 정체를 밝혀내고 말 것이외다.”
거침없이 제 포부를 말하는 장무열에게 이레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장무열은 그대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레는 장무열을 떠올리며 연신 갸웃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구나.”
돌연 은자원에 나타나 체포하겠다며 포승줄부터 내밀던 사람이다.
거칠고 냉정하게만 느껴졌던 그가 되레 이레의 부탁을 들어주고, 이젠 풀어주기까지 했다.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행동이라.
이레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덕분에 무사히 궁을 나올 수 있었으니까.
나중에 그에 대해 은협에게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장무열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은 이레는 오늘 있었던 조사를 떠올렸다.
범인의 윤곽은 대충 드러났다.
만약 그녀의 엉뚱한 생각이 사실이라면, 용의자는 크게 셋.
그중 누가 범인일까?
안배는 해 두었다.
그곳에 범인이 있다면, 그녀가 던진 미끼를 반드시 물게 되리라.
‘은백과 은협에게 보낸 편지가 잘 가야 할 터인데.’
가을이라.
날이 금세 어두워졌다.
대로를 벗어나 골목길로 접어든 이레의 맞은편에 갓을 쓴 키 큰 사내가 나타났다.
이레는 바짝 긴장했다.
좁은 골목.
만약 저자가 흉측한 마음을 먹었다면 막아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늦은 시각이라 우연히 마주친 사내마저도 경계하게 되었다.
다행히 갓 쓴 사내는 이레의 곁을 스치듯 지나쳤다.
힐끔 쳐다보긴 하였지만, 호기심 어린 시선일 뿐.
말을 걸지도 않았고, 위해를 가하려 들지도 않았다.
한참을 걸어간 이레가 뒤를 돌아봤다.
사내의 모습은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한산한 거리.
뒤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도 그녀처럼 쓰개치마를 쓴 여인 하나뿐.
이레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가 들렸던 걸까?
조용히 곁을 지나가던 여인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날이 어둡다 보니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한 모양입니다.”
“저런, 무에 큰일이라도 겪은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그저 괜한 걱정이었을 뿐이지요.”
“야심한 시각이니. 조심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이레의 말에 쓰개치마를 쓴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걸어도 될까요?”
여인이 이레에게 물었다.
이레가 동의하듯 옆으로 길을 터줬다.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길동무를 자청한 여인의 물음에 이레가 대답했다.
“누굴 좀 찾다 오는 길입니다.”
“누굴 찾아요?”
“네.”
“그래서 찾았습니까?”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짐작은 갑니다.”
“그래요?”
여인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쓰개치마를 내렸다.
마침내 드러난 얼굴.
여인을 알아본 이레의 눈가에 놀람이 번져나갔다.
“당신은!”
여인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윽박지르듯 말했다.
“역시, 따라오길 잘했어. 그냥 보냈으면 큰일 날 뻔하였으니.”
여인이 품에서 날붙이를 꺼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이레에게 달려들며 여인이 소리쳤다.
“죽어!”
***
툭!
서탁 위 벼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최 내관이 쌍심지를 추켜세웠다.
“무슨 짓이냐!”
그 호통에 놀란 궁녀가 자라처럼 고개를 쏙 옴츠렸다.
“송, 송구합니다.”
“그 서탁을 저하께서 얼마나 애지중지하시는지 모른단 말이냐?”
세손궁에 머무는 궁녀라면 누구나 아는 주의사항.
서탁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말 것.
그런데 바닥을 걸레질하던 궁녀의 손길에 그만 서탁 위의 서책과 벼루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동궁전에 들렀다 헛걸음하고 돌아온 형운이 마침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최 내관은 서둘러 주위를 정돈했다.
“아무 일도 아니오이다, 저하. 작은 실수가 있어 한마디 하는 중이었습니다.”
형운은 최 내관 뒤에 옹송그려 앉은 어린 궁녀를 건너보았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모양새에 형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닐 터인데. 그만하라.”
“알겠사옵니다.”
“오늘은 일찍 쉬고 싶구나.”
세손의 심기 불편함을 눈치챈 최 내관은 서둘러 궁녀들을 물렸다.
“저하, 무에 필요한 것 없사옵니까?”
“없다.”
“하오면, 소인 밖에 있을 것이오니. 언제든 부르시옵소서.”
“알았다.”
최 내관마저 뒷걸음질로 세손의 침소를 나가자 형운은 홀로 남았다.
궁 안이 흉흉한 탓이려나.
괜스레 마음이 불안하였다.
불안함을 잠재우려 형운은 서탁 앞에 앉았다.
서탁의 먼지를 털고, 서책을 정리하고, 바닥에 떨어졌던 벼루를 들어 살폈다.
찰나.
벼루가 절반으로 뚝 부러져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벼루가…….”
불길한 징조.
서탁과 관계 깊은 물건이라 그런가, 형운은 저도 모르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레.
제비꽃 여인.
“별일 없겠지?”
검은 자줏빛의 칡꽃 같은 어둠이 사위를 잠식해 들어왔다.
잘게 물결치던 불안이 점점 거칠게 파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