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하루 (上)
한동안 내리긋는 빗줄기에 대지는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했다.
내내 전각에만 머물던 문 소원은 모처럼 후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배 속에 귀한 아기씨가 있으니, 평소엔 문밖을 나서는 것조차 조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오늘 나선 걸음은 그저 단순한 산책이 아니었다.
후원의 후미진 오솔길.
문 소원은 뒤따르는 도 상궁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기다려라.”
도 상궁이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처럼 따르는 궁인들을 떼놓은 문 소원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올랐다.
오솔길 끝에 작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람 소리 가득한 그곳엔 이미 한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헌부 집의 김익현.
“어머나, 집의께서 이곳에 계셨군요.”
먼 곳을 바라보던 김익현은 마치 우연한 만남인 듯 이야기하는 문 소원의 능청을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문 소원이시구려. 산책 나오셨소?”
“네. 내내 갇혀만 있었더니, 여간 답답해야지요.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하여 나왔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쉰 문 소원은 둥글게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본 김익현이 눈가에 잔주름을 만들었다.
“왕자께선 잘 계신 모양입니다?”
“아무렴요.”
문 소원의 붉은 입술이 큰 호선을 그렸다.
“어제는 배를 걷어차는데, 그 발길질이 얼마나 힘차던지. 오수(午睡)를 즐기던 어미가 깜짝 놀랄 지경이었지요.”
“허허, 그렇소이까. 성품이 강하고 힘찬 왕자님인가 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낮에는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요란을 떨어도 밤이 되면 또 얼마나 조용한지. 분명 효심도 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를 위해 더없이 복된 일이 되겠지요.”
“분명 그러할 겁니다. 제가 그리되게 하겠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배 속의 아이를 두고 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김익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후원 저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문 소원이 물었다.
“그런데 그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무슨 일 말이오?”
“궁녀들에게 생긴 불미스러운 사건 말입니다. 그 일에 세자 저하께서 연루되었다 하던데…….”
“허허, 그 소식이 후궁 전각에까지 들어갔소?”
“그 일로 하루가 멀다고 궁 안이 떠들썩하니. 귀를 닫고 지내도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지요.”
“그렇구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설마, 소문이 사실은 아니겠지요?”
“불행하게도 사실인 것 같소. 어제 궁녀의 방에서 중요한 증좌가 발견되기까지 하였으니.”
“저런, 어쩌다 세자 저하께서 그런 일을 벌이셨단 말입니까?”
“곪은 것이 기어이 터진 것이지. 평시에도 범처럼 사나운 기질 탓에 말썽이 잦은 분이었소. 규율과 법도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말보다 몸이 앞서, 늘 경솔하게 행동하시니, 결국 이런 일까지 벌어지는 게 아니겠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입은 안타깝다 말하는데, 정작 문 소원의 두 눈은 웃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호기심과 기대가 절반씩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사대의 수사는 이미 결론이 났소. 어찌 알았는지 소식을 접한 조선 팔도의 유생들이 한양으로 속속 모여든다 하니…….”
“한바탕 비바람이 몰아치겠군요.”
“어디 단순한 비바람으로 그칠까.”
“더 큰 일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김익현이 다시 먼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전의 궁녀에게 손을 댔다는 건 곧 왕의 권위에 도전한다 함이니.”
“그것도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다지요? 아무래도 세자 저하께선 대리청정으로 만족하지 못하시는 모양입니다. 저런, 그러다 전하께서 진노하기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
문 소원은 왕과 왕세자의 관계를 뻔히 알면서도 야살을 떨었다.
물과 기름.
불과 물.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리지 못했다.
기질도 다르고, 성품도 다르고, 품은 뜻도 달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사로운 일에도 반목하는 일이 잦았다.
가뜩이나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왕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상상만으로도 문 소원은 기분이 들떴다.
김익현의 목소리가 문 소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지나치게 당겨진 시위는 결국 활마저 망가뜨리는 법이요. 욕심이 과하면 화가 되고, 의욕이 지나치면 몸을 망치고 만사마저 망치는 법이라오.”
“세자 저하께서 의욕이 과하긴 하였지요.”
“내일 조강에 한양 유생 김 아무개의 상소가 올라갈 것이오. 그와 함께 이 일에 관한 사헌부의 의견을 주상전하께 올릴 예정이오. 그리되면…….”
“세자께 큰일이 벌어지겠군요. 자칫하면 대리청정을 그만두게 되거나…….”
힐끗 김익현의 표정을 살피며 문 소원은 말을 이었다.
“그보다 더 심한 일도 벌어질 수 있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그보다 더 심한 일.
왕세자의 폐서인을 의미했다.
그 무시무시한 말을 후궁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입에 올리고 있었다.
집의 김익현 역시 태연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이 모두가 전통을 잊고 법도를 무시하여 벌어진 일이오. 이 같은 일이 또 있으면 아니 될 것이오.”
문득 김익현의 시선이 문 소원의 부푼 배로 향했다.
반사적으로 제 배를 어루만진 문 소원의 미소가 깊어졌다.
“암요. 그래야지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그런 사람이 아니 되도록 할 겁니다. 제가 꼭 그리할 겁니다.”
***
바람에 상수리가 나무가 나뭇잎을 마주치며 소리를 냈다.
가을 산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문 소원은 가슴 부듯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김익현이 돌아간 후에도 그녀는 쉽사리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기묘한 감흥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
처음 늙은 왕의 품에 안기던 날.
얼마나 두렵고, 또 얼마나 서글펐던가.
그러나 다음 날, 눈을 뜨니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한낱 궁녀였던 그녀에게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금과 은, 값비싼 능라금수가 발치에 걸릴 만큼 가득했다.
왕의 총애가 깊을수록 손에 쥐어지는 것은 늘어갔다.
처음 맛본 권력은 달콤하고 또 치명적이었다.
탐욕이 일만큼, 중독될 만큼.
급기야 아이를 잉태한 그녀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려왔다.
왕의 어미.
왕의 어미가 되는 것이라…….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단침이 고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김익현이 떠난 빈자리를 오라비 문성국이 채웠다.
“오라버니, 오셨소?”
“오늘은 어쩐 일로 전각이 아닌 이런 곳에서 만나자 하였느냐?”
“우리가 무에 못 만날 사람이오.”
“그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던 문성국이 제 누이의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집의가 뭐라 하더냐? 그 일, 우리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다더냐?”
문 소원의 눈초리가 위로 올라갔다.
“목소리를 낮춰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잊으셨소?”
“이곳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다 그러느냐. 그보다 뭐라더냐?”
주위를 둘러본 문 소원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대한 것보다 제법 일이 커질 것 같소.”
“일이 커져?”
“내일 아침 강연에 상소문과 함께 어사대의 보고가 주상전하께 올라간다 하더이다. 때를 맞춰 조선 팔도에서 선비들과 유생들이 한성으로 몰려와 상소를 올린다 하였소.”
“정말 그런 일까지 일어난다더냐?”
“모두 세자가 뿌린 씨앗이지요. 걸핏하면 전하와 조정 대신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만 하였으니.”
“평소의 행실이 밉상이라. 앞으로 두고 보자며 이를 갈며 기다렸는데, 마침 제대로 걸린 셈이로구나.”
나라가 발칵 뒤집힐 사건임에도 문 씨 남매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어찌 보면 조용히 덮고 넘어갈 수도 있는 사건이 이처럼 일파만파 커진 것은 그만큼 세자에게 적이 많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들의 뒷배가 작용한 것이 분명하겠지. 정말 대단하군. 처음 그들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하여도 설마 그런 힘이 있을까, 의심하였는데. 이젠 믿을 수밖에 없겠어.”
“…….”
“십학사, 그들은 참으로 대단…….”
“오라버니!”
“왜, 왜 그러느냐?”
“잊으셨소? 그 이름, 함부로 뱉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말이오.”
“그, 그랬었지. 내 잠시 깜빡하였구나.”
문성국에게 경고한 문 소원은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김익현이 바라본 그곳.
이 나라의 모든 일을 논하고 결정하는 성스러운 장소.
대전이었다.
“곧 큰 물결이 이 궁을 뒤덮을 겝니다. 안타깝게도 대리청정하시는 그분께선 불안한 일엽편주(一葉片舟) 신세라. 크게 다치게 되겠군요.”
“일이 틀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소수라 하나 세자를 두둔하는 세력도 없지는 않고 말이다.”
“산 정상에서 시작된 작은 눈덩이가 비탈을 굴러 눈사태로 변했소. 봄바람이 기세를 타고 폭풍이 되었지요. 재앙처럼 번진 일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문 소원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설사, 뒤늦게 진상이 밝혀진다 하여도 상관없습니다. 한 번 입은 상처는 세월이 지나도 큰 흉으로 남기 마련이니까요.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지요.”
내일 오전, 어사대의 보고가 올라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다.
설사, 그녀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왕과 왕세자의 관계는 확실히 틀어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바람이 불고 있어요. 날 위한. 그리고 내 배 속의 아이를 위해 하늘이 길을 내어주고 있어요. 그 누가 하늘의 뜻을 꺾을 수 있겠소?”
***
희붐하게 날이 밝았다.
파루가 치기 무섭게 이레는 집을 나섰다.
예기치 못한 출타였을까?
오늘은 가마도 그리고 천호와 백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왜 가마가 아니 보일까?’
버릇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레는 이내 아차 싶었다.
없는 것이 당연하거늘.
서강율은 당분간 은자원엔 얼씬도 하지 말라 하였다.
형운에게도 그 소식을 전한다 하였으니.
가마와 호위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처럼 간사한 것도 없구나. 고작 며칠 도움받았다고, 어느새 익숙해지고 저도 모르게 찾고 있으니.”
스스로를 탓한 이레는 쓰개치마를 깊게 썼다.
그리고 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거리를 걸어 마침내 월문에 다다랐다.
언제나처럼 과묵한 문지기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레는 그에게 팽례의 패를 보였다.
평상시에는 패를 확인하는 즉시 말없이 문을 열어주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문지기는 동패를 확인하고도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문지기는 고저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소. 오늘은 입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분위기가 좋지 않음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
“이 패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이레가 물었다.
문지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 패를 가진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궁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소. 단, 궁 안에서의 일은 나도 모르오.”
문지기의 눈가에 걱정이 서렸다.
이레가 궁 안으로 발을 들이자 문지기가 말했다.
“조심하시오.”
“감사합니다.”
***
이레는 곧장 은자원으로 향했다.
실상 그녀가 가고 싶은 곳은 은자원이 아닌 궁녀들의 숙소였다.
하지만 그곳에 가기 위해선 형운이 말한 몇 가지 절차가 필수였다.
그 절차를 따르기 위해 은자원으로 향했건만, 정작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형운은 물론 서강율도 보이지 않았다.
이레는 초조한 마음으로 은자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두 시진이 지나도록, 어느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두 분 모두 오시지 않을 모양이구나.”
한시라도 빨리 궁녀들의 숙소를 찾아가야 하는데.
애가 마른 이레는 안절부절못했다.
혼자 가면 궁녀들의 숙소에 미처 닿기도 전에 잡혀버릴 것이고, 그렇다고 두 분에게 달리 연락할 방도도 없으니.
“어쩌지? 어찌하면 좋을까?”
언제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순 없었다.
이레는 주변이라도 살펴볼 요량으로, 책상 위에 놓인 얼굴 가리개를 쓰고 은자원을 나섰다.
그때.
“그대로군”
등 뒤에서 누군가 알은체를 했다.
낯선 목소리에 놀란 이레가 고개를 돌렸다.
서늘한 검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필이면!’
상대를 확인한 이레의 눈동자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 궁궐에서 가장 달갑지 않은 사내.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
궁녀들의 숙소에서 만났던 어사대의 어사.
장령, 장무열이었다.
‘이 사람이 어째서 이곳에……?’
최악의 장소에서 최악의 인물과 맞닥뜨렸다.
그나마 얼굴 가리개를 하고 있었던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당황하는 이레와는 달리 장무열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과연 이곳에 있었군.”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레를 찾아 예까지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일전의 일로 조사할 것이 있으니. 함께 가야겠다.”
장무열은 이레에게 포승줄을 내밀었다.
“순순히 따라오면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짜고짜 손부터 묶으려 드는 사내.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레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장무열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공무를 방해하는 것인가?”
장무열은 이레의 손을 쳐내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저항하지 마라. 얌전히 있으면 심하게 하진 않을 것이니…….”
초조해진 이레는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전에는 서강율이 있어 요행히 넘어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서늘한 눈동자를 가진 저 사내에겐 그 어떤 핑계도 먹히지 않으리라.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 하였던가.
불현듯 이레의 머릿속에 기막힌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장무열을 떼어 낼 순 없어도, 궁에 들어온 목적만은 어떻게든 달성할 방법.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레가 대뜸 물었다.
“……무슨 소린가?”
“진범.”
“……?”
반짝이는 두 눈으로 장무열을 돌아보며 이레는 말을 이었다.
“궁녀들에게 몹쓸 짓을 한 진짜 범인을 찾고 싶지 않으십니까?”
“…….!”
장무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이번엔 또 무슨 일입니까?”
감찰 궁녀 은가비의 얼굴에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오후 늦은 시각.
궁녀들의 숙소로 젊은 남녀가 찾아왔다.
한 사람은 어사대의 장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검은 너울로 얼굴을 가린 이레였다.
‘이 두 사람이 어쩌다 함께 다니게 된 걸까?’
어제까진 당장에라도 사달을 낼 것처럼 험악한 관계였던 두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들이 동행 방문이라니.
은가비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조사할 것이 있습니다.”
검은 너울로 얼굴을 가린 이레가 은가비에게 말했다.
“조사할 것이요?”
은가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때, 장무열이 앞으로 나섰다.
“수사에 필요한 일이요. 그러니 저 여인 원하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협조 바라오.”
속내를 뚫어보는 듯한 서늘한 눈빛.
반듯하게 다물어진 강직한 입술.
그리고 단정한 콧날.
사헌부의 장령은 그린 듯 선연한 사내였지만, 또한 시릴 만큼 차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사내였다.
행여 눈 밖에 났다간 두고두고 화근거리가 될 사내라는 직감이 은가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은가비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짜고짜 자신을 포박하려던 장무열.
그에게 사정을 설명할 때만 해도 이레는 지금 같은 상황을 기대할 수 없었다.
*
“진범이 따로 있다?”
이레의 물음에 장무열이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그 진범을 잡아낼 수 있단 말인가?”
“확신은 못 하지만 가능할지 모릅니다.”
믿어줄까?
아니면 빠져나가기 위한 핑계로 받아들일까.
십중팔구 의심하고 믿어주지 않으리라.
어사대의 어사 모두가 달려들어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간신히 증좌를 찾아내어 마무리되려던 참인데, 이제 와 진범이라니.
그것도 정체조차 불분명한 여인의 말.
믿지 않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어떻게 할 생각인지 궁금하군.”
놀랍게도 장무열은 관심을 보였다.
이레는 그의 반응이 반가웠다.
서강율의 평에 의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은데.
적어도 제 생각만 하는 벽창호는 아닌 모양이다.
이레는 서둘러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허무맹랑하게 여겨 코웃음 칠 소리였건만.
뜻밖에 장무열의 반응은 범상치 않았다.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던 그는 급기야 고개마저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가능성이 전혀 없는 소리는 아니군. 그래서 진범을 잡기 위해 무엇을 어찌할 생각인가?”
*
이레는 장무열의 도움으로 궁녀들의 숙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더불어 은가비를 만나 원하던 조사에 착수할 기회도 얻었다.
물론, 이레에 관한 장무열의 의심이 모두 풀린 건 아니었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이레가 은가비에게 물었다.
“지금 숙소에 몇 분의 궁녀가 계십니까?”
“오늘은 대전에 별다른 행사가 없어 대부분 있습니다.”
“그분들을 이곳으로 불러 주실 수 있습니까?”
“이유가 무언지요?”
이레 대신 장무열이 말했다.
“조사에 필요한 일이오.”
그의 서슬 퍼런 눈빛에 눌린 은가비는 그저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장무열이 이레를 보았다.
“궁녀들을 모아 질문이라도 할 생각이오?”
“물어볼 말이 있긴 합니다만, 그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할 일?”
이레는 마당 한쪽에 떨어져 있는 나무 작대기를 가져와 맨바닥에 금을 그었다.
중앙에 품(品)자 형태로 동그라미 셋을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사람 두 명이 들어 설만 한 둥근 원을 거미줄처럼 펼쳐놓았다.
“방 배치로군.”
이레가 그린 둥근 원이 이곳의 방 배치임을 장무열은 알아보았다.
둥근 원 하나는 방 하나를 의미하는데, 그 수와 위치가 이곳의 설계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곳엔 몇 번이나 왔었는가?”
“어제가 처음이었습니다.”
“단 한 번만 보고 방의 배치와 수를 정확히 외웠단 말이냐?”
“어제 이곳의 구조만 살펴봤으니까요.”
이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그녀를 보는 장무열의 눈빛은 그럴 수 없었다.
방의 수나 구조는 기억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각 방의 정확한 방위와 벽까지 세밀하게 기억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곧 은가비와 함께 궁녀들이 몰려왔다.
다들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레는 궁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