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내가 허락할 수 없네
“누구냐 물었다.”
장무열의 물음에 이레는 얼음이라도 된 듯 굳어버렸다.
어느새 사내는 이레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기척도 없이 접근한 것이다.
어떻게?
사람의 기척을 읽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는 이레였다.
어린 시절부터 별채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였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지내야 했던 터라.
자연 여러 소리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람의 발소리가 들릴 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멀리서 들려오는 인기척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문이리라.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기척을 잘 읽게 된 것은.
그런데 이 사내…….
“누구냐 물었다.”
된서리처럼 차가운 냉기를 뚝뚝 흘리는 이 사내의 기척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물었다, 대체 정체가 무어냐고.”
사내가 같은 질문을 세 번째 던졌다.
질문이 더해질 때마다 사내의 표정은 점차 차갑게 변했다.
“저는…….”
“이분은 다른 곳에서 사건 현장을 살피러 나온 분이십니다.”
뒤늦게 달려온 은가비가 이레 대신 말했다.
이레를 위해 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대답은 오히려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었다.
“사건 현장을 살피러 나와?”
사내의 양 눈썹이 가파르게 기울어졌다.
“소속이 어디인가?”
“…….”
“직책은?”
연이은 질문에 이레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묵묵부답인 이레를 날카롭게 쏘아보던 장무열은 은가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여인, 감찰 궁녀인가?”
“그건…….”
은가비 역시 머뭇거렸다.
장무열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아니겠지. 궁녀의 복색도 아니고, 얼굴마저 가렸으니.”
이레와 은가비를 번갈아 보던 장무열이 다시 물었다.
“감찰 궁녀도 아니면서 감히 궁 안에서 일어난 사건 현장을 살피는 저 여인은 대체 누구냐?”
“그, 그것이…….”
“소속과 직책도 알 수 없는 여인에게 사건 현장을 공개했단 말이냐?”
“…….”
이레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던 터라.
말문이 막힌 은가비는 이레를 돌아보았다.
어서 무슨 말이든 해 보십시오.
간절한 눈빛.
그러나 이레도 대답이 궁색하긴 매한가지였다.
뭐라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은자원의 은자라 답해야 하나?
과연 저 사람이 은자원이라는 곳을 알기는 할까?
그럼, 은백이라는 분의 청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할까?
애초에 은백은커녕 은자원도 모를 테니, 말이 통할 리 없었다.
가만있어 봐.
그러고 보니 은백이 누구인지, 이레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은자원에서 일하는 하급 관원이자 오로원의 주인.
그리고 아마도 어사일 것이라는 추측뿐.
하지만 정작 암행어사인 서강율도 그의 정확한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어사대의 어사인 허상익도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사대의 어사도, 암행대의 어사도 모르는 어사.
그런 존재가 세상에 존재할 리 만무했다.
앞이 캄캄해졌다.
잘 안다 생각한 은백에 대해 기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껏 허깨비를 만났던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 와중에도 장무열의 추궁은 이어졌다.
“얼굴은 왜 가리고 있는 것인가?”
장무열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레에게 다가섰다.
“대답이 없군. 수상하니, 나와 함께 가야겠다.”
그의 눈빛엔 일체의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얼어붙은 설원 같은 눈동자.
어떠한 타협과 변명도 통하지 않는, 날카롭게 벼린 절세의 보검 같은 서늘함.
그의 걸음걸이도 독특했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부드럽고 탄력적이었다.
왜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이제야 이해되었다.
사내는 걸을 때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 이분을 모시고 온 감찰 상궁이 밖에 있습니다. 이분에 관한 건 그 감찰 상궁께 물으시면 될 것입니다.”
은가비가 다시 이레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몸을 던진 그녀의 저항은 장무열의 한마디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비켜라.”
짧은 한마디.
목적을 위해선 무슨 짓도 마다치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음성.
은가비는 감히 더는 나서지 못했다.
“저, 저는 다른 어사 분의 안내를 돕겠습니다.”
은가비가 허상익의 안내를 위해 사라지자 그 빈자리를 장무열이 거침없이 채웠다.
감정 한 방울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지금부터 그대를 연행하겠다. 고변할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 단, 그 해명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장무열이 이레의 손을 잡았다.
순간.
“그 연행, 내가 허락할 수 없네.”
누군가 이레를 당겼다.
그로 인해 장무열의 손은 빈 허공만을 짚어야 했다.
“……넌!”
상대를 확인한 장무열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미한 균열이 일었다.
“암행대의…….”
“쉿!”
이레를 장무열에게서 빼내온 사내가 부채를 입술 위에 세웠다.
“알다시피 내 정체는 비밀일세. 그러니 이제부턴 은협이라 불러주게.”
“은협?”
“그렇지. 은협, 은자원의 협객이란 뜻일세.”
능청스레 제 소개를 마친 서강율이 이레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안 그렇소? 은랑.”
***
“은협? 은랑?”
장무열이 눈빛을 세웠다.
서강율은 마치 그 눈빛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변함없이 차가운 눈빛이로군. 어허, 그렇게 노려보지 말게. 괜히 내 가슴이 다 벌렁거리는구먼.”
“그 여인. 그대가 부리는 사람인가?”
“내가? 이분을? 허허, 어찌 감히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럼 어떤 사이지?”
서강율은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며 대거리했다.
“대답하기 곤란하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라서 말일세.”
“어려워도 설명해라.”
“여러 의미로 깊은 관련이 있지만, 그래도 굳이 그중 하나를 짚어내자면…….”
서강율은 싱긋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만면에 머금으며 이레를 돌아보았다.
“우선은 동료랄까?”
“동료? 여인과 말이냐?”
장무열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더욱더 수상하군. 데려가 조사해야겠다.”
장무열이 다가섰다.
서강율은 마치 어린 자식을 숨기는 어미처럼 이레를 제 등 뒤로 돌려세웠다.
“그건 곤란하다 말하지 않았는가.”
“왜냐? 죄가 없다면 아무 탈 없이 풀려날 것이다.”
“당연히 죄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넘겨줄 수는 없다네.”
“왜지?”
“예전에 어떤 사람에게 약조했거든.”
서강율이 부채를 접어 제 얼굴을 오롯이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다신 이분의 곁자리, 양보하지 않겠다고 말일세.”
“어사가 정당한 법 집행을 거부한단 말인가?”
“그럴 필요 없으니 그러는 것이지. 그보다 그대는 내가 누군지 잊었는가?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대의 모든 것을 낱낱이 털어버릴 수 있다는걸.”
장무열은 조소를 떠올렸다.
“마음대로.”
한 점 거리낄 것 없다는 당당한 태도.
하지만 서강율도 만만치 않았다.
“그대의 일가와 친척도 그렇게 떳떳할까?”
장무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촤락.
서강율이 접은 부채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 이레와 함께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장무열의 곁을 지나갔다.
“그럼,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난 것으로 하세.”
서강율과 함께 걸음을 옮기던 이레가 흘끔 뒤를 돌아봤다.
장무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쏘아보는 눈빛이 얼굴 가리개를 뚫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
“어쩌다 저 악질을 만나셨소?”
“악질이라고요?”
“한 번 무언가에 집착하면 반드시 결딴을 내니, 그게 악질이 아니면 또 뭐겠소?”
장무열을 언급하며 서강율은 치를 떨었다.
“나 또한 예전에 저 작자에게 걸려 석 달이나 고초를 당했다오.”
“은협께서 말입니까?”
믿을 수 없었다.
서강율이 뉘이던가.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사람이 아니던가.
성격도 행동도 종잡을 수 없어, 이레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한데, 그런 그가 무려 석 달이나 고초를 당하다니.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내가 패했소.”
“패하다니요?”
“밑천을 다 털렸단 의미요. 저자의 집착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된 후에야 끝났다오.”
암행어사의 정체는 오직 왕만이 알고 있다.
만약, 그 정체가 드러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음이라.
철저히 비밀로 하는 건 당연지사.
심지어 암행어사의 가족들조차도 그가 암행어사임을 모르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장무열에겐 통하지 않았다.
끈질긴 추적 끝에 그는 끝내 서강율의 정체를 파악하고 말았다.
조사를 시작하고 고작 석 달.
조선 팔도를 정처 없이 떠도는 서강율의 뒤를 집요하게 쫓은 결과였다.
“저 피도 눈물도, 심지어 눈치도 없는 녀석의 눈에 걸렸으니. 은랑도 한동안 조심하셔야겠소.”
“은협이 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줄은 어찌 아신 겁니까?”
“간만에 은자원으로 돌아왔는데, 은랑이 이곳에 갔다 하지 않겠소. 뭔가 흥미로운 일은 없을까 하여 와 보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소.”
“제 과욕이 부른 일입니다.”
“과욕이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요. 오히려 무리한 부탁을 하여 미안하외다. 원래는 이러려고 부른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었구려.”
“아닙니다.”
대답하는 이레는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맺힌 듯 무거웠다.
혹시, 현장을 보면 뭔가 알 수 있는 건 없을까 기대했다.
문서상으로는 알 수 없는 교묘한 비밀.
그러나 실제로 확인한 현장엔 그 어떤 조작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애써 이곳저곳을 뒤질 필요도 없었다.
사건이 벌어진 현장 곳곳에 이미 누군가가 세심하게 뒤지고 살핀 흔적이 역력했다.
가구와 바닥, 벽 심지어 천장까지.
그렇게 살피고도 찾지 못하였으니, 더 살핀다 하여 무언가가 나올 리 만무했다.
‘대체 범인은 어떻게 침입한 것일까?’
끝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
그때,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느닷없는 수런거림이 일었다.
이레와 서강율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슨 일일까요?”
“그러게나 말이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렁이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작은 소동의 중심엔 허상익이 있었다.
“찾았다.”
주 열아홉 번째 방.
가장 최근에 불미스런 사건이 있는 방에서 뛰어나온 그의 두 손 위에 옥으로 만든 관자(貫子)가 놓여있었다.
“무엇인가?”
서강율이 허상익의 앞으로 다가갔다.
“당, 당신은…….”
서강율을 본 허상익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어버버하며 놀라는 허상익의 손에서 서강율은 관자를 빼앗듯 낚아채려 했다.
그 손길을 장무열이 막아섰다.
“멈춰라. 이 증좌는 어사대가 발견했으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 어사대에게 관리하겠다.”
“누가 가져간다 하였는가? 그 관자가 눈에 많이 익어 그러네. 혹시 내 물건인지도 모르니 잠시 보고 돌려주겠네.”
서강율의 너스레에도 장무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 이 물건은 어사대에서 관리한다.”
더 억지 부리면 몸싸움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라.
서강율은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빠르게 밖으로 향하는 서강율을 이레가 잰걸음으로 따르며 물었다.
이내 그녀의 귓가에 긴장한 서강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은랑은 이쯤에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리고 당분간 은자원엔 걸음 하지 마시오. 은백에게도 내가 말해두리라. 아무래도…….”
잠시 걸음을 멈춘 서강율은 궁의 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조짐이 몹시 나쁜 듯하오.”
허상익이 궁녀의 방에서 찾은 관자.
황금으로 테를 두른 푸른 옥색 관자는 바로 세자의 것이었다.
***
무사히 궁을 빠져나온 이레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별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온종일 걷고 서 있었더니,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눅진해진 몸의 무거움도 새카맣게 타들어 간 마음에 비하면 차라리 나음이라.
“휴우…….”
자꾸만 답답한 한숨부터 새어나왔다.
“이를 어찌한다.”
번민하고 갈등하던 이레는 언제나처럼 붓을 들었다.
그녀가 막 인사말을 올리려 하였을 때, 화의 글이 서탁에 떠올랐다.
-아이야, 어찌 지내느냐? 요즘 네 글 보기가 어렵구나.
이레는 서둘러 답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덕분에 무탈합니다. 근래 날이 궂었습니다.
-달이 뜨지 않으면 서탁이 글을 전하지 않는다 하였지. 그래, 다른 일은 없었고?
이레가 답했다.
-실은 오늘 심란한 일을 겪어 마음이 번잡하였습니다.
상이 불쑥 튀어나왔다.
-넌 어째 하루도 편한 날이 없구나. 그래, 오늘은 또 무슨 문제냐?
이레는 잠시 망설였다.
과연 이 이야기를 해도 될까?
세자 저하와 관련한 민감한 이야기.
절대 외부로 퍼져나가선 안 될 이야기들이다.
“상관없잖아. 다른 분들도 아닌 할아버지들인걸.”
-궁 안에 불미스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레는 궁녀들에게 발생한 불미스런 사건과 그에 관련한 모든 이야기를 전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백귀는 상할아버지였다.
-세자가 그런 일을 하였다고? 터무니없는 소리로다. 한 나라의 세자가 뭐가 아쉬워 그런 흉측한 짓을 한단 말이냐?
화가 상의 말을 받았다.
-아무렴, 한두 궁녀라면 모를까. 세자가 어디 홀몸이더냐? 따르는 내관과 궁녀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짐승 같은 짓이 가능할 리 없지.
예의 글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악이 평소보다 일찍 모습을 드러냈다.
-성정이 거칠면 설사 세자가 아니라 세손이라 한들 무슨 짓을 못 할까. 일전에 네 이야기를 들으니 대리청정하는 세자가 호방한 성격에 술과 사냥을 즐긴다 하였지?
이레가 대답했다.
-궁녀들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상황에 오해받기 딱 좋은 성품이로구나.
상이 악에게 물었다.
-악. 설마 넌 세자가 정말 그런 일을 했다 믿는 거냐?
악의 답이 이어졌다.
-천하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소리다. 가능성이 있다면 뭐든 의심하는 게 잘못은 아니니.
-오호라.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
악은 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 이레에게 물었다.
-분명, 사내가 출입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하였지?
-……는 구나. 내 그러지 않아도…….
-네. 경비가 워낙 두터워 외부에서 몰래 침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듯 보였습니다.
-비밀통로 같은 것도 없었을 테고.
-……백귀 중에 네가 제일…….
-숙소 곳곳에 꼼꼼하게 살피고 뒤진 흔적이 있었습니다. 비밀통로가 있었다면 분명 발견되었을 테지요.
-그런데 갑자기 세자의 관자가 발견되었다?
-……의심스러웠느니. 그런데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거냐?
중간중간 상의 말이 끼어들었으나, 이레와 악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심지어 화마저도 상의 거친 글자를 걸러냈다.
-정황이 무척 의심스럽구나. 여러 번 수색했을 장소에서 돌연 관자처럼 뻔한 물건이 나오다니. 이는 남이 파 놓은 함정이 아닌가?
화의 의견에 악이 동의했다.
-혹시, 어사란 자가 고의로 한 행동이 아닐까?
상이 뒤늦게 대화에 합류했다.
-죽으려고 환장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있겠어?
이번만큼은 이레도 상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자 저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증거였다.
일이 잘못되면 단순히 관직을 잃는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게다가 이레는 관자를 발견한 허상익의 얼굴을 보지 않았던가.
그것은 결코 거짓으로 꾸민 표정이 아니었다.
허상익은 정말로 그곳에서 관자를 찾은 것이다.
이레가 들어갔을 때만 해도 텅 비어 있던 방에서 말이다.
악의 글이 떠올랐다.
-하여간 여러모로 석연치 않은 일이로구나. 허허, 그나저나 그곳에서도 이곳과 같은 일이 있었을 줄이야. 참으로 신기하구나.
이레가 악에게 물었다.
-같은 일이라니요?
-나도 얼마 전에 그와 비슷한 사건을 접하였다. 여인들만 있어야 할 곳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불미스런 사건인데. 네가 한 이야기처럼 도무지 범인을 잡을 수 없구나. 도무지 사내가 접근할 수 없는 곳인데, 어찌 이런 일이…….
-악할아버지께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혹, 좋은 소식 있으면 내게도 얘기해 주려무나.
-알겠습니다.
아쉽게도 그날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문밖에서 행랑 할멈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주무셔요?”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작별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이레는 종이를 서탁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별채 문이 열리고 행랑 할멈이 들어섰다.
“글 연습하셨어요? 피곤하실 텐데, 일찍 주무시지.”
“아니야. 오랜만에 날이 좋아서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시장하실 것 같아서 호박죽 좀 쑤어왔어요.”
할멈은 호박죽이 담긴 소반을 내려놓았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반가웠다.
안 그래도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한지라, 출출하던 차였다.
“잘 드시네요. 더 가져올까요?”
“아니야, 할멈. 이거면 충분해.”
식사를 마친 이레와 행랑 할멈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달빛이 참 곱네요.”
“그러게.”
며칠째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그친 후라, 밤하늘은 여느 때보다도 맑았다.
벌레 울음소리를 따라 밤을 더듬던 행랑 할멈의 눈이 문득 담벼락 위로 향했다.
“저런. 저런 곳에 호박이 달렸네요.”
이레도 담벼락 아래 그늘진 곳에 삐죽 고개를 내민 작은 호박을 보았다.
“저 구석에서도 참 열심히 살고 있네.”
행랑 할멈이 몸을 일으켰다.
“제가 요즘 어지간히 게으름을 피운 모양입니다. 저 요망한 것이 저리 자라도록 두었으니 말입니다.”
“요망한 것이라니?”
좀 전에 호박죽을 맛나게 먹은 참이라.
호박을 보고 요망하다 말하는 행랑 할멈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노마님께서 호박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꽃이 요망하기 이를 데 없다고요. 특히, 혼인하지 않은 젊은 여인의 담벼락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버릇처럼 말씀하셨거든요. 저것이 어쩌자고 우리 고운 아가씨 계신 곳에 저리 턱 하니 자리 잡은 것인지.”
할멈이 느린 걸음으로 담벼락으로 다가갔다.
“호박이 아니라 호박꽃을 요망하다 하는 거였군.”
어쩐지 할머니라면 그리 말씀하실 듯하였다.
호박꽃은 본래…… 잠깐!
이레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아침, 궁으로 향하는 가마 안에서 본 서책 중 하나.
가만 안엔 세 권의 책이 있었다.
옛이야기를 담은 고사와 서역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기행문.
마지막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가득한 패설책이었다.
지금 이레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패설책이었다.
패설책의 이야기와 호박꽃이 만나 묘한 생각으로 이레를 인도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어쩌면…….”
이레의 눈동자에 총명한 빛이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