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그대는 누군가?
“은랑. 저하께 그분은 여인이옵니까?”
허를 찌르는 질문.
형운과 홍인모 사이에 묵직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은자원의 구석구석,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홍인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간택이 진행 중입니다. 은랑이 비록 간택인이라 하나 그 집안과 배경을 살피건대 삼간택은 물론이고 재간택에도 오르기 힘들 것이옵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막상 매정한 실상을 입에 올린 홍인모도 입안이 텁텁하긴 마찬가지였다.
괜한 말을 꺼냈는가 싶어 그는 주군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제 주인의 너른 등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러다 대답하는 목소리엔 잔물결이 일었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찌하여 마음을 두시는 겁니까?”
“그저…….”
긴 한숨이 형운의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이렇게 해야 숨을 쉴 수 있으니까.
인모야.
너는 모르느니.
이미 오래전부터 내 숨구멍은 저 여인에게 있었다.
서탁 너머.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엉망인 글씨로 처음 만난 그 아이.
제비꽃 여인.
물안개와 함께 서탁에 깃든 나의 백귀.
굳어버린 일상에 작은 숨통을 마련해준 여인.
이따금 찾아와 호기심만 불러일으키고 말없이 사라지니.
말라버린 가뭄에 잠시 내린 단비처럼.
나날이 갈증만 더 커졌다.
세상 그 무엇을 바라고 원해도 다 이루고 가질 수 있음에.
그러나 진실로 원한 그 여인만은 서탁에 너머에 갇혀 영영 얻을 길이 없었다.
아무리 원해도 만날 수 없고, 간절히 바라도 볼 수 없었다.
그저 다음 만남을 고대할 뿐.
언제나 궁금했다.
서탁 속의 이 여인은, 이 백귀는 어쩌다 서탁에 갇혔을까?
나이는 어찌 되고, 어떻게 살았을까?
왜 백귀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언제나 있지도 않은 자신의 일과를 말하는 걸까.
나중에야 알았다.
여인이 백귀가 아님을.
살아 있는 사람임을.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또한, 얼마나 기뻤는지.
그녀가 백귀가 아님이.
실제로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임이.
얼마나 즐겁고 반가웠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일상을 함께 즐겼다.
그녀의 하루가 나의 하루 같았고, 그녀의 아픔이 나의 아픔 같았고, 그녀의 즐거움이 나의 기쁨 같았다.
비록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누이 같고 형제 같았다.
그 아이, 그 여인을 직접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만나자.
만나서 그간 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하자.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 가득이다.
묻는 김에 할아버지들에 관해서도 물어보자.
비록, 서탁이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을 수 있을지언정, 내 발길마저 막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제비꽃 여인과의 재회는 그리 쉽지 않았다.
운명이 그러하듯,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곤 하였다.
그즈음, 텅 빈 백지에 먹이 스며들듯,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레.
이따금 은자원을 찾아와 말없이 오라비를 기다리던 여인.
실종된 제 오라비를 찾겠다며 궁으로, 단양으로.
간택인이 되는 것도 모자라 남장까지 하며 필사적으로 애쓰던 여인.
그 작은 바동거림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간택이 진행 중인데, 왜 하필 이때 다른 여인을 보게 되었는가.
내내 굳어있던 감정이 왜 하필 지금 싹을 틔우려 하는가.
애석하고 답답하였다.
운명이로다.
서탁이 그러하듯, 정작 원하는 것은 가지지 못하는 운명인 게지.
그렇게 한탄했다.
달무리 진 밤.
제비꽃 여인과 이레의 관계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날.
제비꽃 여인이 자신의 경험을 할아버지들에게 전한 날.
서탁은 요망하여, 중요한 내용은 모조리 전하지 않았다.
거리의 시전, 오로원(吾老園), 천일홍…….
이 모든 내용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다.
중요한 장소와 시간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서탁은 글 대신 긴 침묵을 토해냈다.
그럼에도 형운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할아버지들에게 전한 생생한 감상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비꽃 여인이 이레라는 사실을.
그때의 충격과 놀람과 기쁨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하리오.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함께 자란 홍인모.
이 친구도 영영 알지 못할 테지.
앞으로 어찌할 것이냐고?
무얼 원하느냐고?
모른다.
다음은 어찌 될지, 나도 알지 못한다.
처음으로 행하는 무대책에 어이없는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었다.
아무렴 어떤가.
지금은 제비꽃 여인이 이레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를 언제라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을.
“저하.”
소리 없이 웃는 형운을 향해 홍인모가 걱정을 내비쳤다.
형운은 서둘러 웃음을 갈무리했다.
“괜한 걱정 마라. 내 알아서 할 터이니.”
“하오나…….”
“신경 쓸 것 없대도. 그보다…… 궁의 분위기는 어떠하냐?”
물어보는 형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비정한 하늘은 그에게 서탁의 비밀 한 가지를 알려준 대신, 크나큰 다른 것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관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또한, 다수의 선비와 유생들이 한양으로 온다는 보고도 있었사옵니다.”
“심상치 않구나.”
형운을 흘끔 곁눈질 한 홍인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분도 아닌 세자 저하십니다. 그분께서 무엇이 아쉬워 대전의 궁녀에게 손을 대시겠습니까? 조사하는 자들에게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마땅히 세자저하에 관한 의심을 거둘 것입니다.”
홍인모의 말에도 불구하고 형운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네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구나. 하나,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되게 하고, 터무니없는 억지를 그럴듯한 사실로 둔갑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는 흉물이다.”
형운은 궁 깊은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 맞은 용마루와 기와지붕이 불길하고 흉흉한 악룡의 굽은 등줄기와 비늘처럼 느껴졌다.
굶주리고 마른 늙은 용이 궁궐은 꽉 휘감고 놓지 않는 듯했다.
궁궐.
내가 나고 자란 곳.
날 가두고 억제한 좁은 새장.
나는 오히려 내 둥지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제비꽃 여인.
그대, 은랑이여.
부디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그곳을 살펴주오.
형운은 눈을 감고 염원하였다.
“그리하여 이 억지스러운 일이 무사히 지나가길.”
***
이 나라를 지탱하는 엄한 법칙 중 가장 삼엄하게 지켜지는 것이 바로 여인과 사내의 엄격한 구분이었다.
아이의 태를 벗으면 성별에 따라 하는 일, 있어야 할 곳, 지켜야 할 예법이 서로 다름이라.
그 구분이 지극히 선명하여, 한 장소에 남녀가 함께 있는 것마저도 금하였다.
그처럼 엄격한 법도는 궁이라 하여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궁이기에 엄격함을 벗어나 살벌하기까지 했다.
그러기에 궁녀들을 관리 감독하고 체벌하는 일도 여인이 맡았다.
그처럼 특별한 일을 하는 상궁을 감찰 상궁이라 불렀다.
사건 현장을 보기 위해 필요한 세 번째 절차가 바로 그 감찰 상궁을 만나는 일이었다.
형운이 말한 장소에서 중년의 감찰 상궁이 이레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언질을 받은 듯, 감찰 상궁은 이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심지어 이름조차 알려 하지 않았다.
“가시지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앞서 걸은 감찰 상궁은 이레를 궁녀들의 숙소로 안내했다.
궁녀들의 숙소는 궁의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과 북쪽.
이렇게 네 곳에 존재하였는데, 감찰 상궁이 안내한 곳은 궁의 남쪽에 위치한 대전소속의 궁녀들이 생활하는 곳이었다.
‘경비가 정말 대단하구나.’
숙소까지 오는 동안 이레는 많은 단계를 거쳐야 했다.
감찰 상궁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레가 여인이 아니었다면 결코 수월하게 지날 수 없는 관문들이었다.
이런 경비를 뚫고 궁녀들의 숙소에 숨어든다는 건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리라.
‘처음부터 경비가 이렇게 삼엄하진 않았을 거야.’
거듭된 사건으로 차츰 경계를 강화하다 보니 어느새 철옹성처럼 단단해진 것이리라.
“여기서부턴 이 사람이 안내할 것입니다. 예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볼일 보시고 나오십시오.”
궁녀들의 숙소 앞에 다다르자 감찰 상궁이 또 다른 궁녀를 소개했다.
“은가비라 합니다.”
은가비라 자신을 소개한 젊은 여인 또한 이레를 안내한 중년 여인처럼 감찰업무를 하는 궁녀였다.
세자궁 소속의 감찰 궁녀 은가비는 날렵하고 탄탄한 느낌의 키가 큰 궁녀였다.
그녀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숙소를 이곳으로 옮겨 생활하고 있다 하였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많이 시달린 듯, 이레의 정체를 궁금히 여기는 눈치는 있어도 구태여 먼저 질문하지는 않았다.
“은랑이라 합니다. 궁녀와 관련한 불미스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왔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이레는 은가비의 안내에 따라 숙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궁녀들의 숙소는 좌우로 길게 늘어진 둥근 형태를 하고 있었다.
출입구는 동쪽과 서쪽에 있었고, 남쪽으로 작은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찬찬히 주위를 살피던 이레는 건물의 배치가 교묘함을 눈치챘다.
벽과 건물이 병풍처럼 어긋나게 배치되어, 문밖에서 내부를 훔쳐볼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궁녀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함이구나.’
설계한 이의 세심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문 안쪽, 궁녀들이 생활하는 숙소는 다소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우물 정(井) 모양의 중앙 건물을 중심으로 여러 방이 품(品)자 형태로 이어졌다.
수없이 많은 쪽문과 복도, 비슷해 보이는 구조가 흡사 홀림길 같았다.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십중팔구 길을 잃을 지경이었다.
“궁녀들의 품계와 하는 일에 따라 머무는 곳을 달리하다 보니 이런 형태가 되었다 들었습니다.”
이레는 은가비의 안내에 따라 범행 장소를 살펴볼 수 있었다.
궁녀 두 명이 함께 사용하는 방은 네 평 남짓했다.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범행 장소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은가비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러 번의 조사와 감찰로 어지간한 기물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속이 텅 빈 수납장과 이부자리 정도.
이레는 차분한 시선으로 실내를 훑었다.
사건이 일어난 현장.
조사 나온 어사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레는 달랐다.
눈으로만 실내를 쓱 훑은 그녀는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건성인 듯한 이레의 태도에 은가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전 열다섯 번째 방과 전 스물한 번째 방, 그리고 주 열아홉 번째 방입니다. 다른 범행은 이곳이 아닌 다른 숙소에서 벌어졌습니다.”
궁녀들의 방엔 상(尙) 몇 번, 전(典) 몇 번, 주(奏) 몇 번으로 품계와 소속을 분명히 했다.
상은 궁내의 일과 궁녀들을 통솔하는 상궁들의 방이었고, 전은 종7품과 종8품으로 손님 접대나 잔치를 관장하고 등불과 촛불을 켜고 끄는 일까지 광범위한 일을 맡았다.
주는 주로 음악에 관한 일을 하는 궁인을 가리켰다.
은가비는 범행 장소를 차례로 안내했다.
“사건을 목도한 사람은 없습니까?”
“새벽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을 당한 궁녀들마저도 손발이 묶이고 눈을 가린 채 일을 당해 범인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보통 궁녀 두 명이 함께 방을 쓴다 했습니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한 명뿐이라 하던데, 어찌 된 연유인지 아십니까?”
“특별한 연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함께 방을 쓰는 사람이 번(番)을 서거나, 외박을 허락받아 궁 밖으로 나갈 땐 혼자 남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범인은 그렇게 혼자 남은 궁녀만을 노렸군요.”
“그렇습니다.”
이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혼자 남은 궁녀를 표적으로 했다?
이 말은 숙소의 궁녀 중 누가 처소에 있고 누가 없는지 정확하게 아는 자의 소행이라는 이야기.
더구나 이 미로 같은 곳을 헤매지 않고, 목표한 곳을 곧장 찾아야 했다.
단순히 운이 좋아 매번 혼자 있는 궁녀의 방을 찾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레의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은가비가 설명을 덧붙였다.
“혼자 남은 궁녀를 노리는 탓에 한동안 숨어서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때엔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지 않더군요.”
은가비가 이레에게 물었다.
“피해 궁녀들과 만나시렵니까?”
“아닙니다. 되었습니다.”
은가비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피해자의 진술을 듣는 것이 관례인데. 어찌하여 만나지 않겠다는 겁니까?”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였을 텐데. 굳이 저까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피해자 진술이라면 서강율이 남긴 문서를 통해 이미 충분히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레는 범행이 일어난 다른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갔던 범행 장소처럼 다른 사건 현장 역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만 되었습니다.”
“벌써요?”
“네.”
“정말 더 보지 않으셔도 됩니까?”
성의 없어 보이는 이레의 태도에 은가비가 재차 확인했다.
사건 현장을 보러온 사람이 잠시 우두커니 서서 주위만 대충 보고 돌아가다니.
이럴 거면 뭐하러 왔나 싶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은가비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레는 미련 없이 방을 나왔다.
사실 사건 현장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이레의 머릿속엔 하나의 의문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몇 번이나 같은 사건이 재발할 수 있었을까?
삼엄한 경계 속.
뚜껑 닫힌 항아리처럼 밀폐된 것이나 다름없는 궁녀들의 숙소.
이레의 눈으로 확인한 현장도 서강율이 남긴 문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숙소와 출입문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고, 내부의 구조가 복잡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보고와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출입문만 확실하게 지키면 이곳은 완벽하게 외부와 격리된다.
‘혹시, 내부에 숨겨둔 비밀 출구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하였다면, 진작에 발견되었으리라.
사건 현장에 빈틈없이 남겨진 사람들의 흔적.
얼마나 꼼꼼하게 이곳을 뒤지고 다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출구가 아니라면 내통자가 있다는 것인데……. 그 또한 성립하기 어렵고.’
생각하면 할수록, 또 알면 알수록 괴이쩍은 사건이었다.
이레는 은가비에게 궁녀들의 일상에 대해 물었다.
일과를 마치고 이곳으로 돌아오는 시간.
잠드는 시각과 일어나는 시간.
그리고 밤사이 내부의 경비는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질문.
처음엔 또박또박 대답하던 은가비는 질문이 끝없이 이어지자 귀찮아하는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사실 이 사건은 종결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그리 사소한 것까지 챙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궁녀의 속곳 숫자까지 물을 기세라.
은가비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서책에 은가비의 대답을 빼곡하게 써내려가던 이레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니요?”
***
이레의 물음에 은가비는 어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설마, 아무것도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은가비는 아차 싶은 듯 제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아닙니다. 그저 떠도는 헛소문인지라.”
“딱히 트집 잡으려 하는 건 아니니, 부담 느끼지 말고 말해주세요.”
“정말로 별 이야기 아닙니다.”
은가비는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레는 방법을 달리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절 이곳으로 데려온 분께 직접 물어볼밖에.”
이레의 생각은 적중했다.
같은 감찰 업무를 보는 궁인이라 하더라도 상하(上下)의 경계는 엄격했다.
행여 무슨 책이라도 잡힐까 두려운 듯 은가비는 결국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은 어느 높으신 분께서 실수하신 거라는 소문이 궁 안에 파다합니다.”
“그래요?”
이레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자 은가비는 한층 편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실 이번 사건은 밝혀진 것만 일곱 번입니다. 그나마 처음 몇 번은 쉬쉬하였는데, 얼마 전 큰일을 당한 궁녀가 목을 매는 바람에 외부로 알려지게 된 것이지요.”
“……그랬군요.”
“그 후로 궁 안팎이 발칵 뒤집혔지요. 어느 간 큰 자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다들 궁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사대의 수사망에 한 분이 포착되었다 합니다.”
은가비의 음성이 다시 낮아졌다.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분의 행적이 묘하게 묘연하였다 합니다. 어사대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모른 척 눈을 감고 있었다 합니다.”
“그분께서 무엇이 부족해 대전의 궁녀를 노리겠습니까?”
대전의 궁녀는 왕의 여인이다.
왕을 보살피고 그 뒤를 말없이 따르고 시중드니.
먹고 마시고, 입고, 걷고, 만나고, 자는 모든 일에 궁녀들의 세세한 손길이 머문다.
내관이 왕의 수족이고, 문무백관이 왕의 뜻과 번민이라면, 대전의 궁녀는 능히 왕의 그림자이자 옷이다.
왕의 뼈이며 피와 살.
궁인은 왕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다.
세자가 대전의 궁녀를 탐하였다 함은 곧 아버지인 왕의 권위를 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세자께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은가비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건 또 모르지요. 사내들의 우악한 마음을 우리 같은 여인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솔직히 그분과 관련한 소문 중 흉흉한 것들이 어디 한두 가지랍니까. 듣자 하니 민가의 담을 넘는다는 소리도 들리더군요.”
“설사 그렇다 한들, 군졸들이 이리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데 그분이 어찌 그런 일을 하신단 말입니까?”
“하늘처럼 높으신 분이니. 힘과 권력으로 위압하면 삼엄한 경비와 철벽같은 방비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나름일 리 있는 말이다.
대리청정하는 세자께서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무엇일까.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짐작조차 못 하는 미련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레가 만난 세자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그분의 눈 속에 형형했던 총기를 이레는 분명히 기억했다.
“궁 밖에서야 천하에 다시 없을 성군으로 알려졌지만, 궁 안의 사람들은 그분의 괴팍한 기질을 모르는 사람이…….”
“증좌가 있습니까?”
이레가 은가비의 말을 잘랐다.
“네?”
“지금 언급한 그분이 사건의 범인이라 확신하는 증거. 있습니까?”
“지난번 사건 때, 그분께서 술에 취해 이 근방을 휘적휘적 걸어 다니시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이레의 질문이 이어질 때였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내가 이곳을 몇 번이나 왔는지 알긴 하느냐? 어찌하여 매번 이리 번거롭게 만드는 것이야! 절차? 네놈들의 눈엔 이 패가 보이지 않느냐?”
문밖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차례 실랑이하는 소리가 나더니, 얼마 후 사내 둘이 궁녀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저분들은 사헌부의 관원들이 아니신가?”
은가비가 날랜 동작으로 사내들에게 달려갔다.
한 사람은 이십 대 중반의 젊은 사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중년의 사내였다.
그중 완고한 표정의 중년 사내는 이레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사, 허상익.
사헌부의 비방주.
‘하필이면!’
이레는 서둘러 건물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저 사내를 만나게 될 줄이야.’
단양에서 만났던 어사, 허상익.
당시 어설픈 남장을 하였던 이레로서는 여간 불편한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보통 암행어사로 알려진 특명사신과 달리 궁 안에서 어사라 불리는 조직은 따로 있었다.
궁의 기강을 바로잡고 내외부를 감찰하는 조직, 바로 사헌부였다.
조선 초, 사헌부의 명칭은 어사대였다.
이후에 사헌부로 명칭이 변경되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헌부를 어사대로 불렀다.
어사대의 어사는 바로 이 사헌부의 관원을 지칭하며, 특수한 과정을 거쳐 왕이 직접 임명하는 암행어사와는 그 계보가 전혀 달랐다.
“나리 오셨습니까.”
은가비가 허상익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험, 험!”
평소엔 거만하기 짝이 없던 그가 오늘은 무슨 이유에선지 불편한 헛기침부터 흘렸다.
“오늘은 높으신 분을 안내하러 왔네.”
허상익의 말에 은가비는 주위를 살폈다.
그의 곁에 선 젊은 사내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높으신 분이시라면……?”
“장령 나리일세.”
놀랍게도 허상익과 함께 온 젊은 사내가 훨씬 더 높은 관직의 어사였던 것이다.
정4품의 장령(掌令)은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 종2품), 집의(執義: 종3품) 바로 아래의 관직이었다.
허상익이 모시는 권문이 종5품의 지평(持平)이니, 권문보다 높은 관직이었다.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레는 놀람을 속으로 삭였다.
‘젊은 사람이 위세가 대단하구나.’
키가 크고 말끔한 인상의 사내는 문사와 무사의 느낌이 절반씩 섞어 놓은 듯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사물을 꿰뚫는 듯 깊고 짙은 눈매가 인상적인 그는 오라버니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일 만큼 젊은 사내였다.
그런데도 정4품이라니.
단순히 능력이 좋은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필시 대단한 뒷배를 가졌으리라.
‘그나저나 이제 어찌한다?’
느닷없는 어사들의 등장에 무작정 숨었는데, 하필 막다른 곳이었다.
‘더 조사하고 싶은 게 남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곳에서 잠시 지켜보다 틈을 보아 빠져나가자.’
어사들과 부딪혀서 좋을 일 없으니, 저들이 방을 수색하는 동안 조용히 사라질 셈속이었다.
이레는 숨을 죽인 채 어두운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그때였다.
“그대는 누군가?”
차가운 물음이 허공을 흔들었다.
놀란 이레가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눈빛이 곧장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허상익과 함께 온 사내.
사헌부의 장령, 장무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