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암운(暗雲)
“가마가 왔다고?”
섬돌 아래에 선 행랑 할멈을 향해 이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쇤네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른 새벽부터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그 망할 가마가 떡 하니 버티고 있질 뭡니까.”
행랑 할멈의 주름진 입가가 불만으로 실룩거렸다.
이레가 간택령에 참가한 이후부터 생긴 버릇이다.
가마만 나타나면 수모에게 이레의 곁자리를 빼앗기니.
쥐며 부서질까, 놓으면 날아갈까 호호 불며 키운 귀한 아가씨가 남의 손으로 넘어갈까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가마를 보는 노파의 눈매가 고울 리 없었다.
“그럴 리 없는데…….”
그렇다고 할멈이 잘못 본 것은 아닐 테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레는 반신반의하며 별채의 작은 대문을 나섰다.
문밖에는 할멈의 말대로 가마와 함께 천호와 백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이레를 본 천호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아가씨를 모시러 왔습니다.”
“다과회는 끝나지 않습니까? 더는 궁에 볼일이 없습니다.”
어제저녁, 집으로 돌아온 이레는 그간 수고해 준 사람들과 작별을 고했다.
수모는 눈물을 비췄고, 수모곁시는 어깨를 흐느꼈다.
천호와 백호도 이레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이레 역시 미리 준비한 작은 선물을 건네며, 섭섭함과 고마움을 표했다.
그렇게 다시는 영영 만나지 못할 사람처럼 헤어졌건만.
요란한 작별인사가 무색하리만큼 천호와 백호는 태연히 다시 나타났다.
“다과회는 끝났지만, 다른 일이 아직 남았다 들었습니다.”
“은자원 말씀입니까?”
다과회 외의 다른 볼일이라면 틀림없이 은자원을 말하는 것일 터.
하지만 그 일 역시 어제 마무리 지었다.
비록 역량 부족으로 사건을 해결하진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더는 무리다.
“아무래도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저는 궁에 갈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제게 명을 내리신 분께선 분명 아가씨를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런 명을 내리셨는진 모르나, 전 볼일이 없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선 이레의 등 뒤로 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틀림없이 아가씨께서 거절하실 거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라 하시더군요.”
이레가 걸음을 멈추고 천호를 돌아보았다.
천호가 다가와 작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보고 싶지 않으시오?”
“……?”
앞뒤 말을 잘라버린 전언.
이레의 미간에 의문이 차오르는 찰나.
다음 말이 이레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사건 현장.”
“……!”
***
가야 하나, 가지 말아야 하나.
선택은 온전히 이레의 몫이었다.
어찌할까?
이성적인 잣대로 보면 당연히 가지 않는 쪽이 옳았다.
지금의 궁은 위험하다.
간택인의 신분으로 궁을 활보하다 혹여 아는 사람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일이 커질 수도 있었다.
더구나 수사관은커녕 그 무엇도 아닌 사람이 사건 현장을 살핀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이처럼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백 가지도 넘었다.
반면, 가야 할 이유는 오로지 두 가지뿐이다.
책임감과 호기심.
당연히 이성의 판단에 따라야 했다.
그것이 현명했다.
하지만 이레는 어느덧 가마에 오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대부 여인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예법과 금기.
정체된 삶은 그녀에게 늘 순종을 요구했다.
선택과 능동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파도였다. 아무리 애써도 결국 가야 할 곳으로 끌려가고 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레의 삶이 달라지고 있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그녀는 선택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고, 또한 감정에 조금씩 솔직해졌다.
보이지 않는 족쇄에 얽매여 문밖을 벗어나는 작은 일상조차도 허락받아야 했던 겁많은 여인.
순종적이던 여인은 고치를 벗어난 나비처럼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이레의 가마 위로 금빛 가루를 흩뿌렸다.
교꾼이 아닌 천호와 백호가 멘 가마는 그녀를 궁 앞까지 인도했다.
“들어가십시오. 그분께서 기다리십니다.”
두 호위의 배웅을 받으며 이레는 궁으로 발을 디뎠다.
이곳에서부터는 남의 도움이 아닌 제힘으로 걸어야 한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은자원.
“은백이셨습니까?”
은자원 앞.
그녀를 기다린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은백이 절 부르셨습니까?”
“내가 아니면 또 누가 그대를 부른단 말이오?”
“…….”
당연히 서강율이라 생각했다.
물론, 가마도 호위도 형운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강율이라 어림짐작한 까닭은 천호의 전언 때문이었다.
사건 현장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물음.
이레를 은랑이라 칭하며 그녀를 은자원의 일원으로 만든 사람도 서강율이고, 궁녀 사건을 부탁한 사람 역시 서강율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건 현장 운운하는 천호의 말에 자연스레 서강율을 떠올렸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부른 사람은 은백, 형운이었다.
“현장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은백께서 전한 말입니까?”
“그렇소.”
이레는 말간 눈으로 형운을 응시했다.
“왜? 이상하오?”
“은백께선 그 사건에 관심 없으셨지 않습니까?”
“이젠 관심이 생겼소.”
형운이 진지한 표정으로 뒷말을 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많이.”
이레가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민할 필요 없소. 그저 하고 싶었던 대로만 하면 그만이니.”
“규방에 갇혀 지내다시피 한 사람에게 어찌 이처럼 대단한 일을 맡기십니까?”
이레는 묻고 싶었다.
저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대체 무얼 기대하고 계신 겁니까?
“하급 관원, 김기대 말이오.”
“갑자기 오라버니의 얘기는 왜 꺼내십니까?”
“그가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오.”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가령…….”
형운이 이레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속내를 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
이레는 먼 허공으로 고개를 돌려 애써 외면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이레와 눈높이를 맞췄다.
“2년 전, 예조의 하급관원 김기대가 대문장가 이호섭 선생을 만났다지.”
“그랬습니까? 그게 무에 잘못되었는지요?”
“사람이 사람을 만난 것이 무에 잘못이겠소. 다만, 속세를 등지고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숨은 사람을 용케 찾아낸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
“어쩌다 우연히 만난 것이겠지요.”
“어쩌다 우연히 만나기엔 만남의 장소가 매우 특별했소.”
“그랬습니까?”
“이 일은 어떻소? 1년 전의 일인데, 조선 최고의 화공이자 오만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유화검이란 사람이 있소. 그 사람 역시 모종의 이유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 선언했었지. 한데, 김기대를 만난 이후, 다시 붓을 들었다지 뭐요.”
“오라버니께선 참으로 신통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나도 그리 생각했소. 그런데 어느 날, 김기대가 술에 취해 은자원을 찾아왔소. 그리고 말하더군. 이 모든 사건을 해결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 자신의 누이라고.”
“오라버니께선 사람은 좋은데 허풍이 조금 심합니다. 은백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랬소?”
“당연하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여인인 제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본디 이야기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면 부풀려지기 마련입니다.”
이레의 말에 수긍하듯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당연히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 일이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난 그의 허풍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오. 제 누이를 지나치게 아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한 망상이라고. 단양, 그곳에서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는 진실로 그렇게 믿었다오.”
“…….”
“은랑, 그대는 결코 범상한 여인이 아니오.”
이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넓은 궁 안엔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있질 않습니까. 제가 그런 분들보다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랑은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이레의 물음에 형운은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니까.”
“네?”
“여인이라 궁녀들만 드나들 수 있는 사건 현장을 불편 없이 살필 수 있고, 또…….”
“또?”
“은자원의…… 은랑이니까.”
흔들림 없는 형운의 눈동자가 당황한 이레의 얼굴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
자신을 향한 형운의 신뢰.
그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형운이 기대하는 그 무엇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책임감.
그러나 마음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있기엔 형운의 눈빛이 갈급하게 느껴졌다.
객쩍게 머뭇대는 대신 이레는 형운에게 물었다.
“현장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가마를 탄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결정했다.
형운과 서강율.
두 사람은 자신과 오라비를 위해 먼 단양까지 걸음했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이렇게 애써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인들 못 할까.
과연 도움이 되기는 할까?
다만, 최선을 다하리라.
“혼자 찾아가긴 어려울 것이오.”
“물론, 저 혼자 힘으로는 어렵겠지요. 마땅히 안내해 줄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이레는 그 안내자가 형운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쉽게도 아니었다.
“사람을 준비 두었소.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 꼭 해야만 하는 절차가 있소.”
“절차라고요?”
“그렇소, 절차. 일에는 뭐든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제가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대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오.”
은자원 입구에 버티고 섰던 형운이 옆으로 물러섰다.
“이제 네 차례다.”
곧 은자원 안쪽에서 비쩍 마른 몸집의 사내가 쭈뼛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는…….”
눈치를 살피는 사내, 팽례 강현보였다.
갇혀 있어야 할 그가 무슨 연유에선지 풀려났다.
이레는 형운을 바라보았다.
의아함이 담긴 그녀의 눈짓에 형운은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궁을 출입한 기록과 그간의 행적을 비교한 끝에 그가 이번 사건과 무관함을 증명할 수 있었소.”
“그럼 더는 쫓기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어사대의 조사도 마쳤으니, 더는 쫓기지 않아도 되오.”
형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형보는 이레에게 넙죽 절을 올렸다.
“다 아가씨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느닷없는 인사치레에 당황한 이레는 옆으로 돌아섰다.
“내가 무얼 한 게 있겠나. 감사하려거든 이분께 하시게.”
“물론 나리께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 제일 먼저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었습니다. 아가씨 덕분에 소인이 이리 몸 성히 살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 말하니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착각이 드는군. 죄가 없으니 무사한 것을.”
“아가씨, 소인 비록 배움도 짧고, 생각의 깊이도 얕으나 은혜가 무엇인지 사람의 도리가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주신 목숨,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아가씨, 언제라도 제가 필요하시면 찾아주십시오. 성심을 다하여 보답하겠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감사합니다, 아가씨.”
강현보는 연신 바닥에 코가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형운이 끼어들었다.
“회자정리라 하였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당연한 것. 이별의 시간은 짧은 것이 좋으니, 그만 일어서라.”
형운의 축객령에 강현보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이레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남산골 하월집입니다.”
“응?”
“소인의 집입니다. 언제든 소인이 필요하시면 찾아주십시오.”
마지막까지 제 사는 곳을 큰소리로 외치는 강현보를 형운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은혜를 갚으려면 제가 찾아올 것이지. 구태여 찾아오라는 것은 무슨 심보란 말인가.”
“양반가의 여인을 외간 사내가 어찌 함부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구태여 찾아오라는 것이지요.”
이레는 연신 손을 흔들며 은자원을 떠나는 강현보를 향해 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형운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찌푸려졌다.
그 표정을 보지 못한 이레는 맑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다행입니다.”
“무어가 말이오?”
“저 사람 말입니다. 자칫하였으면 모함을 받고 큰 벌을 받을 뻔하였는데, 다행히 혐의를 벗고 목숨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앞으로의 삶은 그리 무난하지 않을 것이오.”
“그건 또 무슨 까닭입니까?”
“저 팽례의 주인. 칭병을 핑계로 요양을 떠났다 하오.”
“그것과 저 팽례의 삶이 무난치 못한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어디로 떠났는지, 얼마나 지내다 돌아올 것인지. 부모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하였으니…….”
“저 사람. 버려진 겁니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업(業)으로 삼아온 일을 한순간에 잃어버렸으니. 앞으로 입에 풀칠할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오.”
“계속 팽례 일을 할 순 없는 겁니까?”
“전주인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팽례이거늘. 함부로 다른 주인을 섬기는 걸 전주인이 용인하지 않을 것이오.”
이레는 멀어지는 강현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현보의 모습 위로 제 오라버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괜찮을 겁니다.”
이레는 강현보에게 하는 것인지, 실종된 제 오라비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저 팽례, 틀림없이 무탈할 겁니다.”
형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분명 그럴 것이오.”
***
팽례와 작별한 이레가 형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첫 번째 절차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지요. 이제 다음 절차를 알려주십시오.”
“저기 보이는 저 문으로 가시오. 그곳에 그대를 안내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그렇군요. 그럼.”
이레가 빠르게 신형을 돌렸다.
“잠깐.”
부르는 소리에 이레는 걸음을 멈췄다.
“남은 절차가 더 있습니까?”
형운은 대답 대신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왜, 왜 이러십니까?”
“이게 두 번째 절차요.”
형운이 소맷자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색 너울.
“그대는 간택인이 아니오? 얼굴이 드러나면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길 수 있소.”
그는 돌처럼 굳은 이레에게 손수 얼굴 가리개를 해주었다.
가까워진 간격.
따뜻한 온기로 전해지는 그의 손길.
불쑥 다가온 숨소리.
눈앞을 꽉 메운 그의 얼굴.
선명하고 맑은 두 눈.
창졸간에 벌어진 사태에 이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손길이 전신을 휘감은 넝쿨이라도 되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뭐라 말이라도 해야 하나?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였을 땐, 이미 볼일을 마친 형운이 세 발자국 물러난 후였다.
“이젠 괜찮을 듯하오. 무사히 잘 다녀오시오.”
그의 말에 이레는 ‘네’하고 짧게 대답하는 것 외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바보처럼.
***
이레가 은자원을 떠났다.
뒷짐을 진 채 그녀가 떠난 공간을 바라보는 형운의 곁으로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우익위 홍인모였다.
그는 자신의 주군을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손궁의 궁주인 형운과 궁인인 홍인모는 단순한 주종의 관계가 아니었다.
함께 노는 동무였고, 함께 걷는 수하이며, 늘 함께 하는 칼이었다.
그들은 목적을 함께하는 집단이자, 혈육처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엮인 끈끈한 관계였다.
그러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세손이 얼마나 크게 동요하고 있는지.
전에 없던 일이다.
형운은 늘 한결같았다.
크게 흥분하는 일도, 크게 슬퍼하는 일도 없었다.
호수에 인 잔물결처럼.
연못에 그려진 파문처럼.
그저 잔상 같은 흐릿한 반응만을 보였을 뿐이다.
그것이 그가 이 황금으로 지어진 궁이라는 감옥 안에서 살아온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이레의 뒷모습을 보는 형운의 모습은…….
곁에 선 홍인모에게까지 선명하게 전해져 오는 많은 감정.
가을밤, 깊은 풀숲에서 일제히 일어나 정신없이 산란하는 반딧불이의 빛줄기들처럼.
소리 없이 조용하게, 하지만 타오르듯 분명하게.
얼어붙은 주군의 삶에 생동의 빛이 일렁이는 건 분명 좋은 징조였다.
다만, 그 동요의 원인이 여인이라는 점이 홍인모를 불안하게 했다.
예법과 규율이라는 테두리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분이라 생각했건만.
이대로 영영 상처받지 않는 길을 선택하였다 믿었건만.
아니었다.
누군가를 저리 갈망하다니.
감정이라는 독에 매료될까 두렵다.
중독되어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형운을 보는 홍인모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해졌다.
“저하…….”
“무엇이냐?”
“소신, 감히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무엇을 물으려는 것이냐?”
“은자원의 여랑. 은랑을 대하는 저하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
“은랑, 그분은 저하께 여인이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