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35화 (35/215)

#35. 그걸 왜 제게 물으십니까?

“어서 오시오.”

지극히 낮은 음성.

내용도 평범하여 그저 지나가듯 건네는 여상한 인사말에 불과하였다.

하나, 그 평범한 한 마디가 이처럼 큰 울림을 지녔을 줄이야.

아마도 인사말이 특별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가…….

저 말 없는 사내가 하였기에…….

그저 고갯짓하는 것만이 전부라 생각한 저 사내가 건넨 따듯한 한마디였기에.

그렇기에 특별하게 느껴진 것이리라.

은백이 인사를 건네다니.

고개를 들고 봐 준 것만으로도 놀라울 지경인데,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레는 말문이 턱 막혔다.

“무얼 그리 멀뚱히 선 것이오? 어서 앉질 않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이레는 오라버니의 자리에 앉았다.

이게 무슨 일이려나.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형운이 인사를 건넨 것뿐.

그럼에도 단단하게 굳은 은자원의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다.

아니, 아니다.

단순히 인사를 한 것만이 아니다.

콕 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그녀를 대하는 형운의 눈빛과 손짓, 목소리가 이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대체 저분께서 왜 저러시는 것일까?

이레는 돌아서 제 일에 열중하는 형운을 곁눈질했다.

시선을 느낀 것일까?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흠칫 놀란 이레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미 그와 시선이 마주친 후였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어찌 그리 보는 것이오?”

“아닙니다. 그저…….”

“그저?”

“무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일 없소.”

언제나처럼 담담한 대답.

그러나 이레는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음을.

대체 무슨 일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꼬치꼬치 캐물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닌지라.

이레는 궁금한 마음을 고이 접은 채, 제 할 일부터 챙겼다.

오늘도 은자원의 책상 위엔 둘둘 말린 새로운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서강율이 그녀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은협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이 신출귀몰한 은자는 사람이 없는 시간만을 골라 다니는 모양이었다.

여태 한 번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을 보면.

그렇게 오늘도 사람은 없고, 그가 남긴 흔적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레는 서강율이 보낸 두루마리를 펼쳤다.

‘오늘 축시(丑時)말. 또 한 명의 궁녀가 피해를 입었구나. 아! 그래서 사내의 출입을 제한하였던 것이구나.’

오늘 성문을 지키는 경비가 유달리 삼엄하였다.

특히, 사내에 대한 경계가 대단하여, 호위는 물론이고 가마를 드는 교꾼마저 궁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자이기에 이처럼 대담한 일을 벌이는 걸까.’

새벽에 벌어진 새로운 사건의 내막을 살피던 이레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알면 알수록 범인의 대범한 수법에 혀가 내둘러졌다.

범행 이후, 궁의 경계가 강화되고 드나드는 사람들은 더욱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그럼에도 사건이 발생했다.

마치, 자신을 쫓는 어사대와 궁을 지키는 군사들을 조롱하듯.

“무얼 보고 있소?”

나직한 물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다가온 형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 선비님…… 아니, 은협께서 남긴 자료를 보고 있었습니다.”

“은협?”

형운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새겨졌다.

단양을 다녀온 이후, 형운은 유독 서강율에 대한 일이라면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니나 다를까.

형운이 질문을 던지는데, 그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그자가 또 무슨 엉뚱한 일을 사주하였소?”

“지난번에 말한 바로 그 일입니다.”

“궁녀들에게 생긴 불미스런 일 말이로군.”

“오늘 새벽, 또 사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형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일로 궁 안팎이 발칵 뒤집혀 졌는데, 또다시 일을 벌이다니. 간이 큰 작자인가 아니면 잡히려 일부러 애쓰는 자인가. 그건 그렇고. 은협이라는 작자는 그 일을 왜 은랑에게 부탁한단 말이오?”

“여인들과 관련한 은밀한 사건이다 보니, 사내가 파헤치기엔 어려움이 많다 하였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내명부에도 감찰대가 있건만…….”

“저도 그리 들었습니다. 감찰 상궁과 궁녀가 여인들과 관련한 일들을 수사한다고요.”

“그렇다면 은협이라는 작자의 요구가 터무니없다는 것도 알겠구려.”

딱히, 수사에 동원할 여인이 없어 이레를 부른 것이 아니란 소리다.

이레도 형운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서강율이 내세운 명분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은협께선 선입관과 편견 없는 의견이 필요하다 하였습니다.”

“선입관과 편견 없는 의견?”

“네. 궁에서 자란 궁녀들에게서 일어난 사건이니. 그들을 잘 알고 가까이 지낸 감찰 상궁과 궁녀들은 각자의 편견과 선입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지 않을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한데 그대는 유독 은협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소. 특별한 까닭이라도 있소?”

“그것이…….”

이레는 말끝을 흐렸다.

서강율이 보낸 자료 중엔 외부에 절대 알려져선 안 되는 성격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 사건의 주요 용의자로 급부상한 세자저하와 관련한 이야기가 특히 그러했다.

이런 내막을 형운에게 알려도 될까?

그러고 보니 은자원 내부의 관계는 다른 관서와는 사뭇 달랐다.

분명 같은 소속이건만, 각기 신분도 다르고 하는 일에도 차이가 있었다.

돌아가는 모양새로 보아 심지어 동료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서로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형운에게까지 비밀로 해야 하나.

만약, 한다면 어느 수준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이레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 침묵을 형운은 오해했다.

“말하기 싫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오.”

그의 목소리에 불퉁한 기운이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옅게 깔린 무뚝뚝함이 이레의 마음에 걸렸다.

“은백님. 제가 오늘 내용을 보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형운이 제 자리에 앉으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해보시오.”

“사건이 거듭되며 궁내의 경비가 삼엄해졌습니다. 특히, 궁녀들의 처소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관졸들이 배치되어 물샐틈없이 경비한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흉흉한 일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잠시 생각한 형운이 말했다.

“지키는 자가 범인이거나, 남모르는 비밀 통로. 그도 아니면 잠입에 특출나게 뛰어난 사람. 이 정도가 가능한 대답일 듯하오.”

이레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군요.”

“그게 누구요?”

“이곳에 몰래 숨어든 팽례가 있지 않습니까?”

“은랑이 말하는 팽례가 강현보, 그자를 말하는 거라면. 적어도 어제 벌어진 사건과는 무관하오.”

이레의 눈이 커졌다.

“그 사람. 돌아왔습니까?”

형운은 예의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랑의 말처럼, 볼일을 마치자마자 제 발로 돌아왔다 하오.”

이레의 표정이 밝아졌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팽례 강현보의 일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내내 그녀를 신경 쓰이고 껄끄럽게 했다.

“은백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은 이번 사건과는 무관함이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군요.”

“적어도 오늘 새벽에 있었던 사건에 관해서 만큼은 그렇다고 할 수 있소. 그 사람 외에 다른 용의자는 없소?”

“그것이…….”

이레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서강율이 남긴 서찰의 후반부에는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과 내역이 들어 있었다.

그중 유독 한 명이 눈길을 끌었다.

여러 번의 불미스런 사건.

엄격히 통제된 여인들의 숙소.

강현보처럼 신출귀몰한 재주는 없으나, 통제된 곳을 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유력한 용의자.

“누군데 그러시오?”

“감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분입니다.”

몸을 일으킨 형운이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대체 누군데 그러오?”

형운은 이레의 어깨너머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향기, 그의 숨결, 그의 온기가 이레의 귓불 옆에 머물렀다.

가슴이 뛰었다.

할 수 있는 최대한 몸을 옹송그려 보았지만, 등과 어깨에서 느껴지는 형운의 체온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이레의 어깨가 바짝 긴장했다. 서류를 잡은 팔이 뻣뻣하게 굳었다.

호흡을 멈춘 이레는 진공의 시공간 속에 자신을 가둬버렸다.

그저 갈 곳 잃은 눈동자만 또르르르 구를 뿐.

서류를 살피는 그의 턱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를 고심할 때면 버릇처럼 나오는 깊은 눈빛도.

언제나 시선을 피하고, 차고, 무뚝뚝하여 제대로 살피지 못한 사내는 이레의 생각보다 아름답고 고아했다.

행동 하나하나가 미려하였고, 눈빛 하나, 숨결 한 조각마저도 단정했다.

이런 사내와 내가 함께하고 있었구나.

그동안 이런 눈빛으로 나를 보았구나.

이레는 몸을 한껏 움츠린 채, 그저 가만 그를 훔쳐보았다.

어느 순간, 등 뒤에 닿은 그의 체온이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제야 이레는 참았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휴우.

그사이, 제 자리로 돌아간 형운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그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세자저하라…….”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궁녀들의 겁간 사건을 살피고 정리한 이레가 내린 결론이었다.

사내가 존재하지 않는 여인들만의 공간.

외부와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 곳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

처음 한두 번은 경비의 허술한 틈을 타고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사건은 사정이 달랐다.

모든 문과 통로를 어사대와 군사들이 물샐틈없이 감시했다.

그럼에도 사건은 벌어졌고, 피해자가 나왔다.

수사에 해박한 감찰어사들조차 갈피를 잡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일어날 수 없는 사건.

범행 자체가 불가능한 사건.

적어도 글을 통한 간접적인 경험으로는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궁녀들의 거처로 직접 찾아가 물어보기도 어렵고.’

조선 팔도 가지 못할 곳 없고, 만나지 못할 사람 없다던 오라버니의 동패도 이번만큼은 무소용이었다.

차라리 궁녀의 신분이었다면, 좀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련만.

지금 이레의 신분은 세손빈 간택에 참가한 간택인.

애초에 은자원에 있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위치였다.

이레는 서강율의 서찰 말미에 자신의 사견과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마지막 온점을 찍는 순간, 섭섭함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이것으로 끝이구나.’

다과회가 끝났다.

서강율이 강제로 떠맡기다시피 한 은자원의 일도 오늘로 마지막.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은 이상, 더는 나올 필요 없다.

제 할 일을 마친 이레는 몸을 일으켰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작별을 고한 그녀는 형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기대가 생긴 것이다.

들어올 때 반긴 것처럼, 나갈 때도 반가이 배웅해주지 않으시려나?

“…….”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은 무(無)였다.

형운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바쁘게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은백.

오늘이 제겐 마지막 날입니다.

다과회도 은자원의 일도 오늘로 끝이니.

이제 다시 은백을 뵐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고개를 들어 봐주세요.

마지막 작별인사 정도는 꼭 하고 싶습니다.

이레의 바람에도 형운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보고 헛기침도 해보았지만, 형운의 시선은 끝내 책상 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전에 알던 형운의 모습이었다.

그래, 본래 저런 분이셨지.

좀 전에 나를 반기시던 그 일이 특별했던 거였어.

마른 미소를 입가에 올린 채 이레는 은자원의 문을 열었다.

삐거억.

오후의 하늘엔 검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바람에 비릿한 물내음이 실려왔다.

한바탕 쏟아지려나.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소.”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다가온 형운이 등 뒤에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형운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 오기 전에 서둘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소.”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이레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내일 또 봅시다.”

그 부드러운 눈길과 자상한 목소리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

“……바보같이.”

어쩌자고 그리 대답했을까.

별채로 돌아온 이레는 넋 잃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더는 그를 보지 못한다.

은자원에 갈 이유도, 명분도 없다.

아니, 설사 이유와 명분이 있다 한들 적어도 한동안은 은자원 출입을 자제해야 한다.

그녀를 은자원에 부른 사람이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세자저하.

그분께서 궁녀들의 불미스런 사건의 피의자로 몰렸다.

서강율이 남긴 두루마리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고, 어사대와 충돌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다.

“그분께서 범인일 리 없어.”

후원의 작은 정자, 능허정에서 뵌 그분의 당당한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였다.

그런 분이 몰래 궁녀의 방에 숨어들다니.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사실이 무엇이건 간에 당분간 은자원 출입을 금해야 한다.

세자 저하께서 혐의를 받고 있으니, 그 주변을 자세히 뒤지고 다닐 게 분명했다. 관련된 모든 것을 조사하다 보면 자연 은자원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지리라.

그러니 은자원에 가선 절대 안 된다.

하지만 어찌 된 이유에선지 자꾸만 내일 또 보자는 형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어쩌자고…… 바보같이…….”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레는 붓을 들었다.

-할아버지들. 잘 계시는지요.

짧은 인사말을 그린 이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번잡한 마음 탓일까.

필체가 엉망이었다.

설상가상, 서탁에 쓴 글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레는 동창을 열었다.

소리 없이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도 할아버지들을 뵙기 어렵겠구나.”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졌다.

오늘 같은 날, 할아버지들의 글을 보면 미몽에 갇힌 듯 흐릿한 마음도 조금은 선명해질 것 같은데.

이레는 서탁에 고개를 대고, 혼잣말하듯 붓을 움직였다.

-이상하다. 궁녀. 불가능. 그분은 왜 갑자기 변하신 걸까. 어렵고도 또 이상하구나.

하염없이 속의 말을 끄집어내 낙서하듯 쓰고 또 썼다.

스르르.

종이 위에 그려진 글이 사라졌다.

이레가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곧 텅 빈 백지 위에 그녀의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글이 떠올랐다.

-무엇이 그리 어렵고 이상한 것이냐?

드디어 간절히 기다리던 답이 왔다.

그런데 할아버지들의 글씨가 아니었다.

반듯하고 정갈한 필체.

-불손!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 반기는 것 같군.

-진실로 반갑습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넌 날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제가 그랬습니까?

-썩 물러가라 한 적도 있었지. 할아버지들 만나는 데 방해가 된다면서.

-철없던 시절의 투정이었습니다. 부디 잊어주십시오.

-실없는 소리. 그보다 오늘은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불손의 물음에 이레는 한숨부터 쉬었다.

“기쁜 게 아니라 우울합니다. 어지럽고, 혼란스럽습니다.”

불손의 물음이 이어졌다.

-요즘 날이 궂어서 그런지, 너와 자주 만나게 되는군. 그래, 그동안 별일은 없었느냐?

“별일이라…….”

많았다, 무척.

나날이 새로운 일과 고민이 쏟아졌다.

아마도 불손이 아니라 할아버지들이었다면 수다 떨듯 하루의 일과를 죄다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불손이라.

백귀에 불과하건만, 어째선지 그에게만은 말을 고르게 된다.

“사내인 불손에게 궁녀들에 관하여 묻기도 마땅치 않고, 다과회도 맞지 않을 것 같으니.”

두 가지 모두 여인이나 좋아할 법한 이야기라.

이레의 고민이 계속되는 와중에 불손의 글이 이어졌다.

-오늘따라 글이 늦는군.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렷다. 무슨 일이냐? 누가 좋은 물건이라도 주었더냐? 아니면…… 누구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이레는 마침 떠오르는 일이 있어 글을 썼다.

-그러고 보니 신경 쓰이는 일이 있긴 합니다만.

이번엔 불손의 침묵이 길었다.

-……누구냐?

“내가 누군지 말하면 알 수는 있습니까?”

피식 웃은 이레는 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불손께서 고민하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내가 먼저 물었다.

“하여간 대쪽 같은 분이시네.”

이레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불손의 질문을 유연하게 받아넘겼다.

-제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 언급하기 어렵습니다.

-……가족?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니요?

-……아니다.

“오늘따라 이분도 이상하네.”

은자원의 그분도 예전과 다르더니, 불손도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달랐다.

“가을은 사내의 계절이라. 가을만 되면 사내들의 마음이 싱숭생숭 변한다더니, 산 사람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네.”

왠지 모르게 실망한 듯한 불손에게 이레가 다시 물었다.

-전 답했습니다. 이번엔 불손 차례입니다. 고민하시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고민하던 일이라니?

-마음을 빚을 갚고 싶다 하였지요. 그래서 선물을 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선물, 하셨습니까?

-했다.

-그 여인, 기뻐하였습니까?

-그런 모양이다.

-다행입니다. 그렇게 고심하시더니 용케 바라는 걸 찾으신 모양이군요.

-네가…… 너의 도움이 컸다.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래, 그 여인은 어떤 선물을 바라던가요?

-서책이었다.

“서책?”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별난 분이시군요. 하필이면 선물로 서책을 원하다니요.

이레의 글이 사라졌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번에도 불손의 침묵은 길었다.

유달리 긴 침묵에 이레가 다시 붓을 들었다.

그때였다.

백지 위에 느릿느릿 글이 떠올랐다.

매사 칼 같은 불손 답지 않게 몹시 흔들린 필체였다.

-아니란 말이냐?

-네?

-서책 말이다.

불손의 글에 이레는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그걸 왜 제게 물으십니까?

이레의 물음에 불손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그는 짧게 한 마디만 남겼다.

-아니다.

어디가 불편하기라도 한 듯, 삐뚤빼뚤 엉망인 필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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