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어서 오시오
푸른 새벽빛이 동창을 파고들었다.
이른 아침, 이레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궁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은자원이 아닌, 영화당으로.
이레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은자원으로 가는 것이면 좋을 것을.’
어둡고 적막한 그곳.
서로의 숨소리마저 고스란히 들리는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저도 모르게 웃음 짓던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될 말이다.
그곳 또한 궁의 일부가 아니던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은자원에 출입하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발길을 끊어야 할 곳.
모든 걸 잊어야 한다.
오라버니의 자취가 남은 그곳도.
고요하고 조용한 어느 사내의 숨결도.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단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수모, 여울네였다.
“채비를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갛게 웃는 수모와 수모곁시를 보자니 이레는 더럭 걱정이 앞섰다.
이번엔 또 어떤 화려한 치장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하려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여울네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어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하라는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은백께서 그리 말씀하셨소?”
“은백이요?”
“아, 아니오.”
저도 모르게 ‘은백’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은 이레는 입가를 길게 늘였다.
그저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졌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모가 말을 보탰다.
“주인께서 말씀하시길, 아가씨께서 기꺼이 받아주신다면 마음 기쁘실 거라 하셨습니다.”
형운을 떠올리던 이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이.”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모와 그녀를 돕는 곁시가 이레의 처소 안으로 들어왔다.
수모가 가져온 경대를 열자 향긋한 분내와 함께 귀한 사향 내가 방안에 진동했다.
수모곁시가 내려놓은 비단 궤에는 천일홍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 빛깔의 치마와 앞섶에 연분홍빛 꽃잎이 수자 놓인 쪽빛 저고리가 담겨 있었다.
가을 풍경을 물씬 풍기는 단아한 입성인지라.
이레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형운의 무심한 표정이 떠오른 까닭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종잡을 수 없을 표정 뒤로 이런 자상함이 숨어 있는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안 보는 척,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이리 보낸 것을 보면 이레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함이라고 하니.
저 자상함의 근원은 분명 그런 마음이리라.
형운은, 이레가 알고 있는 은백은 입 밖으로 내는 말과 속내가 한치도 틀리지 않는 사내니까.
그럼에도 기뻤다.
보내는 이가 뉘인지 모를 때는 마냥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만 하던 것들이 고맙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묵묵히 화장과 꾸밈을 받고 있노라니, 수모가 칭찬을 입에 올렸다.
“예전에도 고왔습니다만, 오늘은 그중 가장 아름다운 듯합니다.”
이레는 면경 속의 제 모습을 응시했다.
수모의 말이 아주 빈말은 아닌 듯, 이레 역시 제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곱게 땋은 머리에 언제나처럼 오라버니가 선물한 머리꽂이를 꽂으며 이레는 해사한 미소를 떠올렸다.
“다 여울네 덕분이오.”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아쉽습니다. 좀 더 모시면 좋았으련만.”
수모의 말에 이레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늘이 마지막이오?”
“그리 들었습니다.”
“하긴, 언제까지 다과회를 계속할 순 없을 테니까.”
이레는 궁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끝’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시원하였다.
궁궐의 내궁(內宮)과 그곳을 살아가는 여인들.
치열한 위계와 살벌한 질서 위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내는 궁의 여인들은 아름다움이란 갑옷으로 무장한 신성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신성한 존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없다.
어쩌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낀 이방인.
그것이 이레가 규정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러기에 다과회에 참석할 때마다 내내 불편하고 어색했다.
이제 마지막이라 하니 속이 시원했다.
다만…….
이레는 옷매무시를 만져주는 수모와 수모곁시를 바라보았다.
이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회자정리라 하였던가.
만나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건만.
어린 시절부터 사람과의 부대낌이 없던 터라.
작은 인연이라도 소중했고, 아쉬웠고, 그리고 헤어짐은 늘 섭섭하였다.
“나오셨습니까?”
대문 밖을 나서니, 언제나처럼 이레를 기다리고 있던 천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뒤로 백호와 가마를 메고 있는 교꾼들의 모습도 보였다.
화려했던 가마는 소박해졌고 곁을 지키는 호위의 수도 천호와 백호, 단 두 명으로 단출해졌다.
그러나 이레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정중했다.
이 사람들과도 이제 끝이구나.
아쉬움을 감추려 입술 끝을 작게 말아 물었다.
그 모습을 잘못 해석한 천호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도 아니 타시렵니까?”
“아닙니다. 수고롭겠지만, 부탁하겠습니다.”
이레의 말에 천호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레는 수모의 도움을 받아 가마에 올랐다.
천호의 호령에 따라 가마가 들려졌다.
노를 젓듯 장단을 맞춰 이동하는 가마 안에서 이레는 전에 없던 물건을 발견했다.
“저것은…… 서책이 아닌가?”
서책 세 권이 가마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가마에 웬 서책이려나?
누가 두고 내린 것일까.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듯 여울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까지 가는 길이 적적할까 싶어 서책을 두었다 들었습니다.”
이레는 조심스레 책을 펼쳤다.
하나같이 구하기 쉽지 않은 진귀한 서책인지라.
곧 그 내용에 빠져들었다.
***
“그게 무슨 말이오? 사내는 들어갈 수 없다니.”
가마를 탄 이후, 내내 서책에 빠져 있던 이레의 귀에 바깥의 소란이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여울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궁 문을 지키고 선 수문장이 끼어들었다.
“사내들의 출입을 엄격히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교꾼과 호위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레는 창문을 열었다.
궁 문 앞은 전에 없이 혼잡했다.
특별히 허락된 관료를 제외한 모든 사내의 출입을 제한했던 터라.
가벼운 실랑이와 낭패한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교꾼이 들어가지 못하니, 아무래도 가마도 이용할 수 없을 듯합니다.”
“예서 멀지 않으니. 걸어가면 됩니다.”
이레는 기꺼이 가마에서 내렸다.
궁녀 하나가 그녀의 안내를 자청했다.
궁을 지키는 병사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고 오가는 사내를 살피는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또 궁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듯했다.
설마, 도주한 팽례의 짓은 아니겠지.
이 일로 정말 은백에게 무슨 변고가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이레는 은자원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분께선 잘 돌아가셨으려나.
그러고 보니 어제 과분한 대접을 받고도 답례도 준비하지 못했다.
“다른 분들은 모두 모여 있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재촉하는 궁녀의 목소리에 이레는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택인들이 모인 영화당에 다다랐다.
마지막 다과회라 그런가.
사방 오색 찬연한 휘장으로 두른 영화당에 모인 간택인들의 꾸밈이 예사롭지 않았다.
전에도 화려했지만, 오늘은 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히려 수수하게 꾸민 이레의 모양새가 눈에 띌 정도였다.
“언니.”
형조판서의 여식, 유경이 이레를 발견하고 반갑게 영화당의 돌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김명선을 중심으로 모인 다른 간택인들은 그저 힐끗 살피는 눈길만 보일 뿐이었다.
그저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레를 세심하게 훑어보는 시선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생각보다 단출한 이레의 모습.
팽팽하게 날을 세운 간택인들의 표정이 다소 느긋해졌다.
이레와 눈이 마주친 김명선의 입가에도 생긋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
상대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가감 없이 속내를 드러내는 그녀의 눈빛은 지독히 교만했다.
명선이 영화당으로 올라서는 이레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빌려 입을 데가 없었나 보오.”
“무슨 말입니까?”
이레의 물음에 명선은 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찻잔에 입술을 담그자 주변에 있던 간택인들이 웃음을 참으며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평범하네. 한데, 그동안 입은 그 귀한 옷들은 대체 어디서 난 걸까?”
“듣자 하니 집안이 풍족한 것도 아니라던데?”
“알게 뭐요, 세손빈 자리에 오르려면 무슨 짓인들 못 할까요.”
“무슨 짓을 하려 해도 뭐가 있어야 하지요. 가진 것 하나 없는 집안에서 무얼 어찌한다고. 그저 이상할 뿐이지요. 딸랑 하나 있는 집을 팔아도 못 살 패물들을 몸에 두르고 다녔으니.”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속닥거리는 간택인들을 보며 이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자 유경이 곁에 앉았다.
“언니 오기 전에 내내 저 얘기만 했어요. 오늘 언니가 어떤 입성으로 나타날까, 또 누굴 대동하고 올까. 그런 얘기요.”
“내 입성이 무에 어떠했는데?”
“지난번에 입었던 치마와 저고리. 노리개와 머리꽂이, 당혜, 그 모든 것들이 귀하디귀한 것들뿐이라. 다들 날을 세웠잖아요. 돌아가는 길에 가마 안에서 여럿 울었다 하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
몰랐다. 그것들이 그리 귀한 것들인 줄은.
“돈이 있다고 쉬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닌지라. 다들 말이 많아요.”
“그랬구나.”
어린 여인들의 경계심은 질투와 시샘, 그리고 유치한 따돌림으로 표현되었다.
이레는 화도 나지 않았다.
아무렴 어떤가.
저런 모습도 오늘로 마지막일 터이니.
이레는 보아도 못 본 척, 쑥덕대는 목소리를 들어도 못 들은 척하였다.
“뉘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명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그 귀한 것들을 빌려준 이, 대체 뉘요?”
“…….”
“또 문중이라 둘러댈 생각은 마시오. 내 이미 알아보고 묻는 것이니.”
“그것이 어찌 그리 궁금한지 모르겠습니다.”
“궁금하다기보단 걱정되어서…….”
“걱정이라 했습니까?”
“변죽 없는 아버지에 자리에 누워 제 노릇 못하는 어머니. 살림살이 옹색한 줄 북촌 사람이면 다 알고 있건만. 어울리지 않게 과한 것을 입고, 걸치고, 타고, 거느리니. 대체 무슨 용 쓰는 재주가 있는 것일까, 혹여 해선 안 될 짓이라도 하여 마련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길게 입가를 늘이는 명선을 보고 있자니,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강직하고 청렴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가 계신 집안이라. 살림살이 넉넉하지 않아도 단 한 번도 아쉬움 없었습니다. 해선 안 될 짓이라니요? 좋은 것을 걸치고, 입고, 거느렸기에 좋은 교육 받고 좋은 생각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뭐라 하였소?”
명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문중이 아니라는 아가씨 말씀, 옳았습니다.”
“무슨 뜻이오?”
“문중이 아니었습니다, 제게 그 좋은 것들을 내어준 사람.”
“그럼 대체 뉘가 있어 그런 것을 주었단 말이오?”
“불필지.”
“뭐요?”
“굳이 아시려 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
분한 듯 명선이 주먹을 말아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 도도함.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내 지켜볼 것이오.”
명선이 씹어 뱉는 음성으로 이레에게 경고했다.
“지켜보지 마십시오. 어차피 오늘로 마지막일 테니.”
한 치도 물러섬이 없는 이레의 모습에 기어이 명선의 입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히! 뉘 안전이라고 그리 오만하게 구는 것이야?”
“…….”
명선이 이레의 귓가에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내가 세손빈이 되어서도 그리 굴 수 있는지 보겠느니. 그리 꼬박꼬박 말을 되받아칠 수 있을지 두고 볼 것이야.”
***
날을 세운 고요가 영화당을 가득 채웠다.
간택인들은 침묵 속에서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송 상궁이었다.
“영빈 마마께서 옥류천의 물줄기가 유난히 고우니. 그곳으로 모두 걸음 하여 가을의 정취를 즐기는 것이 어떠하냐 하십니다.”
기다림에 지친 간택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궁궐의 가을은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웠다.
나뭇가지가 후원의 월문 사이로 고운 자태를 빼꼼 내밀었다.
단풍잎 사이로 나뒹구는 햇살이 고왔다.
치맛자락에 낙엽이 쓸리고, 바람결에 가을 향이 물씬 묻어 있었다.
송 상궁을 따라 후원을 걷고 있노라니, 맑은 물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내 존덕정이란 현판이 달린 화려한 정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궁궐 후원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정자에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영빈 이씨였고, 다른 한 사람은 푸른 용포 차림의 중년 사내였다.
간택인들 사이에서 놀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세, 세자 저하시다."
중년의 나이에 푸른 용포를 입을 사람은 조선 땅에 단 한 분뿐.
주상전하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는 세자저하.
영빈을 뵙는 자리에 세자 저하께서 계실 줄이야.
간택인들은 황망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레의 놀람은 다른 간택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어느 밤, 그녀는 왕의 팽례인 오라버니의 동패를 돌려주려 궁에 걸음 하였더랬다.
그때 뜻하지 않게 세자저하를 만나지 않았던가.
물론 그녀가 이 자리에 있게 된 이유도 세자 저하 때문이었다.
서강율, 은협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상황이 복잡해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저 여인들이 세손의 간택인들이란 말씀입니까?“
영빈에게서 간택인들에 대해 들은 듯 세자가 성큼성큼 존덕정 아래로 내려섰다.
세자의 검은 목화는 거침없이 간택인들에게로 다가왔다.
인의와 예지를 국교와 덕목으로 삼으니, 위아래의 구분이 명확하고 남녀가 유별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러나 세자는 법도에 얽매이지 않았다.
큰 걸음으로 세자가 다가오자 이레를 비롯한 간택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감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머리를 조아린 간택인들의 눈에는 오직 세자의 목화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더러는 겁에 질리고, 더러는 기대를 품은 낯빛을 하고, 또 더러는 경이로움에 바들바들 떨었다.
이레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지나가시옵소서.
그저 무심히 지나가 주십시오.
간절히 기원하였건만.
저벅저벅 걷던 목화가 멈춰선 곳은 이레의 바로 앞이었다.
간택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레의 옆얼굴로 향했다.
어째서?
의문이 담긴 눈길이 이레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정작 이레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정수리로 느껴지는 세자의 눈빛.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돌처럼 굳어버린 이레의 앞에 선 세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따라 가을 풍경이 유난히 곱습니다.”
모후인 영빈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가을 풍경에 녹아들 듯 치장한 이레에게 건네는 것인지.
모든 것이 모호한 말과 상황이었건만.
다만 한 가지.
이레의 옆얼굴을 힐끗대던 간택인들의 시선이 질시와 강샘으로 변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감히 세손빈 간택 자리에 끼어들 분수도 되지 않던 경기관찰사의 여식.
그런 한미한 가문의 여인이 세자의 눈에 들다니.
영원할 것 같은 긴장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조용한 후원에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헌부 집의 김익현을 필두로 한 어사대였다.
사뭇 심각한 표정의 김익현이 세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세자저하.”
세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사대까지 이끌고 이 후원엔 무슨 볼일이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신 감히 여쭙고 싶은 것이 있나이다.”
“무엇이냐?”
김익현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나이까?”
김익현의 청에 세자는 그와 함께 존덕정 뒤편에 자리한 작은 전각으로 향했다.
내내 머리를 조아리던 간택인들은 그제야 겨우 허리를 바로 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네가 감히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
세자의 성난 음성이 옥류천의 물줄기를 삼켜 버리는 듯했다.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간택인들은 다시 우뚝 굳어버렸다.
“이런이런. 다과회의 마지막 날이라 뜻깊은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려 하였거늘. 아무래도 시기가 좋지 않은 듯싶소.”
영빈이 서둘러 간택인들을 이끌고 그곳을 벗어났다.
울울창창한 숲을 빠져나와 영화당으로 다시 돌아왔을 땐 어느새 석양이 짙게 깔린 시각이었다.
이레는 후원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세자저하께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것이 혹여 궁의 소란과 관계있는 건 아니려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유난히 긴 하루가 그렇게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
유시(酉時).
하늘이 붉게 타들어 갔다.
어둑어둑 검은 기운이 하늘 귀퉁이를 물들이는 시각.
그제야 이레는 온종일 원하고 바라던 장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은자원.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오고 싶었던 곳.
은자원에 도착하여 닫힌 대문을 보는 순간, 푹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굳게 닫힌 대문.
그리고 꼭꼭 내려진 덧창.
이레의 입술에 고운 미소가 떠올랐다.
은백께서 계시는구나.
이레는 한눈을 감고 수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이상스레 수를 세는 마음이 급해졌다.
연유를 알 수 없는 아릿한 작열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레는 굳게 닫힌 은자원의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은백은 서책으로 세운 벽 너머에서 무언가를 쓰는 데 열중하고 있으리라.
반갑게 인사를 건네도 무뚝뚝한 태도로 고갯짓하는 것이 전부겠지.
그럼 난 조용히 기대 오라버니의 자리로 가면 그뿐이다.
간간이 틈을 내어 일에 몰두한 은백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며 이레는 어둠 속에 잠긴 은자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예의 희미한 등잔불 아래, 글쓰기에 몰두한 형운의 모습이 보였다.
“은백, 잘 계셨습니까.”
인사를 건네며 더듬더듬 자리를 찾아갔다.
이제 저분께서 무심히 고개만 끄덕이시겠지.
그러나 다음 순간.
“왔소?”
무뚝뚝한 고갯짓 대신 들려오는 목소리.
이레는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의심하는 찰나.
형운이 쐐기를 박듯 선명한 음성을 다시 들려주었다.
“어서 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