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은랑이 진정으로 바란 것 (下)
구름이 높아졌다.
세상이 울긋불긋한 색으로 뒤덮이는 등고의 계절.
여문 곡식과 과실은 대지를 향해 겸손한 몸짓을 보이고, 인간은 어김없이 순환되는 자연을 향해 경이와 감탄의 시선을 보냈다.
화사한 가을의 유혹에 풍류를 탐하는 자들이 찬연한 세상으로 발을 디뎠다.
하나, 다 같은 사람이나 생김이 제각각이듯 다 같은 산이라 하나 그 모습 또한 각기 달랐다.
절경은 드물고, 가을 단풍과 어우러진 곳은 더더욱 드무니.
정해진 시각, 가을꽃과 단풍 가득한 곳에서 애틋한 만남을 나누는 두 사람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인 듯합니다.”
이레의 속삭임에 형운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한껏 흐드러진 사람들 사이에 유난히 긴장한 두 남녀가 보였다.
가을 정경에 취하기 바쁜 여느 사람들과 달리,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기 바쁜 어린 연인.
형운은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둘, 모두 눈에 익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오래지 않아 그의 뇌리에 어린 여인이 모시던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 세자 저하의 후궁 중 한 사람.
후궁전에 배속된 어린 궁녀는 금기의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먼 곳에 두어야 할 사내와…….
씁쓸한 감정이 형운의 눈가를 떠돌았다.
“아는 사람입니까?”
이레의 물음에 형운은 시선을 내렸다.
“어찌 아오?”
“은백의 표정이 그리 말하고 있으니까요.”
“…….”
드러내지 마라.
표정도, 감정도, 마음도, 생각조차도.
어릴 적부터 그리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얼굴에는 무(無),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여인은 내 감정을, 내 눈빛을 이리 잘 읽는 것일까?
혹여 시전에서 느낀 그 생소한 감정도 들켰으려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 그에게 이레의 음성이 다시 파고들었다.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무얼 말이오?”
“저들 말입니다.”
이레는 어린 연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형운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궁의 법도는 지엄하니…….”
“제가 아시는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무슨 말을 하였소?”
“세상 완벽한 것은 없고, 완전한 것도 없으니. 매양 정해진 대로만 흘러가야 한다면, 한세상 얼마나 재미없을까.”
“풍류 타령이나 하는 한량 같소.”
“그런 기질이 조금 있으신 분이긴 합니다. 성격도 급하시고.”
상할아버지를 떠올린 이레가 다시 연인을 보았다.
“저리 좋아하지 않습니까.”
“…….”
“그저 나란히 한 계절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저리 설레고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 번쯤은 눈감아 주면 안 됩니까?”
“한 번이 두 번 되고, 곧 열 번 백 번 되며, 한 사람이 열 명, 백 명 되는 법이라오.”
“일벌백계란 말씀이십니까? 참으로 무섭고도 서러운 법도군요.”
진득하게 달라붙는 이레의 목소리를 뿌리치며 형운은 끝내 몸을 일으켰다.
당장 저들에게 달려가려나?
이레의 근심과 달리 그는 산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어딜 가십니까?”
“볼일이 끝났으니, 그만 돌아갈 생각이오.”
“그럼 저분들은…….”
“저분들이라니?”
형운은 이레에게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지금 내 눈엔 은자원의 은랑밖에 보이지 않는데. 달리 또 누가 있단 말이오?”
“네?”
“실은 좀 전에 먼지가 눈에 들어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오.”
형운이 그녀를 향해 한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리 한 눈을 감으니, 세상 만물이 제대로 보이질 않소만.”
그저 지금은 이 아름다운 풍경과 이레, 한 사람만 보기로 하였다.
어색한 연기이건만.
이레의 굳은 얼굴에 미소를 찾아주기엔 충분하였다.
형운은 능선을 타고 오른 바람을 한껏 들이켰다.
“바람이 참으로 좋소.”
이레도 덩달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단풍도 가을꽃도 하늘도 참으로 좋습니다.”
마치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어린아이처럼.
이레는 마냥 신기한 듯 눈을 빛냈다.
“꼭 단풍놀이 처음 나온 사람처럼 말하는구려.”
“처음입니다.”
형운의 표정이 굳었다.
하늘을 보느라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이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은백껜 사소한 일들이 제게는 사뭇 새롭고 새삼스럽답니다.”
가을은 유독 바쁜 계절이라.
오라버니도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하였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제대로 단풍을 즐긴 적이 없었다.
세상이 이리도 화려하였구나.
먼 데서, 저 아래에서 올려다본 것과 직접 걸음 한 가을은 이리도 달랐구나.
가을 풍경 속에 잠긴 이레에게 형운의 목소리가 실려왔다.
“아무래도 저들에게 고맙다 해야겠소.”
“네?”
“이리 은랑에게 사뭇 새삼스러운 일들을 하게 해주었으니까.”
“그런 것이 됩니까.”
가볍게 웃는 이레를 보고 있자니 이상스레 마음이 흐뭇해졌다.
멀리 한산의 비탈진 돌길에 오르니.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있고.
수레를 멈추고 단풍 숲을 사랑하노니.
서리 단풍이 이월 꽃보다 붉도다.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너럭바위 위.
단풍놀이를 즐기던 기녀 하나가 당나라 시인의 시를 노래했다.
꽃처럼 만개한 노랫소리에 청아한 가야금 가락이 얹히니 어깨춤이 절로 일었다.
그러나 흥취는 딱 거기까지였다.
맵싸한 산바람이 절로 달콤한 술을 부르니.
여기저기서 일배일배부일배, 술상이 벌어지고 질퍽한 웃음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 고요한 산이 왁자한 기루처럼 소란스러워졌다.
“그만 갑시다.”
형운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어딜 말입니까?”
“풍악산도 식후경이라 하였소.”
“배고프십니까?”
“나 말고 은랑이 걱정되오.”
“저는 아직 괜찮습니…….”
말이 끝나기 전에 이레의 배에서 꼬르르륵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레의 얼굴이 붉어졌다.
“갑시다.”
형운은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십니까?”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으로.”
“은백, 같이 가시어요.”
해사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이레는 형운의 뒤를 쫓았다.
어린 연인을 품은 가을 산이 두 사람의 뒤로 물러났다.
유난히 하늘이 푸르렀다.
***
“오로원(吾老園)?”
커다란 장원.
거대한 솟을대문 위에 붙은 현판을 올려다본 이레는 탄성을 금할 수 없었다.
“이곳이 진실로 존재하는 곳인 줄 몰랐습니다.”
“오로원을 알고 있소?”
“오라버니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엔 서책에 미친 광인이 있는데, 그 사람이 오로원의 서고에 만 권의 진귀한 서책을 숨겨 두었다고요.”
“서책에 미친 광인?”
“네. 오라버니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김기대…….”
형운은 불끈, 주먹을 말아쥐었다.
감히, 날 광인이라 말하다니.
나타나기만 해봐라.
반드시 삭탈관직하여 이 치욕을 갚아주리라.
“그런데 이곳엔 어찌하여 온 겁니까?”
밥 먹으러 가자 하였는데, 정작 온 곳은 만 권의 책으로 성을 쌓은 곳이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운은 대답 대신 솟을대문 한쪽에 드리운 긴 줄을 잡아당겼다.
이윽고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중년의 사내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길을 터주었다.
형운은 이레를 오로원 안으로 이끌었다.
기암을 쌓아 만든 돌산과 나무가 우거진 외원을 지나니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선 대나무 숲이 나왔다.
바람 소리 가득한 대숲을 지나 연잎 가득한 연못을 건넜다.
돌다리 너머.
넓게 펼쳐진 치맛자락처럼, 붉게 물든 천일홍 꽃밭을 두른 목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어딥니까?”
우아한 풍광에 압도된 이레에게 형운은 느긋한 목소리를 전했다.
“배도 채우고, 마음도 채우는 곳이오.”
만 권의 서책을 담은 오로원.
이 넓은 천하에 고작 몇 사람만이 아는 형운의 안가(安家).
외인에겐 절대 허락되지 않는 금지 중의 금지.
그 구역에 처음으로 들어온 여인, 이레는 동그래진 눈으로 연신 주위를 살폈다.
“이리 끝없이 펼쳐진 천일홍 꽃밭은 처음 봅니다.”
“나도 천일홍은 처음이오.”
“누가 키운 겁니까?”
“아는 사람 중에 꽃에 미친 자가 있소. 그가 매년 저 서고의 앞을 이리 꽃판으로 만들곤 한다오.”
“설마, 저 목옥이 서고란 말입니까?”
이레의 입이 벌어졌다.
웅장한 규모로 자리 잡은 세 칸 목옥.
“저곳에 무려 만 권의 서책이…….”
“만 권이 아니고 이만 권이오.”
“…….”
이레의 입안에 단침이 가득 고였다.
그녀가 무에 바라는 눈빛으로 형운을 올려다보았다.
그 또렷한 눈빛이 어색하여 형운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끈질기게 그의 눈빛을 좇은 이레가 양손을 한데 모으고 절실하게 속삭였다.
“서고…… 한 번만 볼 수 있을까요?”
형운은 말없이 목옥의 문을 열었다.
목옥과 목옥을 다리처럼 잇는 대청마루를 제외한 모든 방이 서책으로 가득했다.
성처럼 견고하고, 탑처럼 치열하게 쌓인 서책의 향연에 이레는 마음을 빼앗겼다.
“제가 꿈이라도 꾸는 걸까요?”
형운은 서책 한 권을 뽑아 이레에게 주었다.
“당신의 손에 들린 그 책이 신기루 같소?”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
책등의 단단함과 책배의 보드라움.
그 어느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놀라기엔 아직 이르오.”
형운은 그녀를 오로원의 더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진수성찬이라는 표현마저도 부족할 만큼 푸짐한 상차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온종일 다니느라 허기졌을 텐데. 듭시다.”
형운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들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그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표정이었다.
“뭘 하시오? 어서 드시오.”
형운이 재차 권했다.
이레는 홀린 듯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경기도의 햅쌀로 지은 밥.
함경도의 미역으로 만든 미역국.
충청도에서 잡았다는 멧돼지고기.
비린내가 없고 수박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강원도 은어.
개성의 송이버섯과 제주의 전복까지…….
이레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음식과 말로만 들었던 요리가 눈앞에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식사는 이미 끝이 나 있었다.
목옥의 대청마루에 찻상이 준비되었다.
천일홍이 가득한 마당에 선 채 형운이 물었다.
“음식은 먹을 만하였소?”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세상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기질 않습니다.”
주위를 둘러본 이레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형운을 보았다.
“왜 그리 보는 것이오?”
“은백이십니까?”
“무얼 말이오?”
“가마와 수모, 호위무사, 그 과분한 배려. 혹, 은백께서 하신 일입니까?”
그동안 궁금하였다.
문중도 아니고, 세자 저하도 아니라면 대체 누굴까.
그 누가 있어 이런 어마어마한 호의를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오로원의 웅장하고 미려한 자태를 본 순간, 알게 되었다.
단 한 명도 없다 여겼지만, 존재했다.
그럴 수 있는 재력과 배포를 가진 사람이.
이레의 물음에 형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내가 한 줄 몰랐단 말이오?”
“……!”
이레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설마, 설마 하였지만, 사실일 줄이야.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에게 물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물이었소.”
“네?”
“그대의 오라비. 내 기필코 찾아준다 하지 않았소? 그 약속 제대로 지키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오. 그래서 그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작은 선물을 준비한 것인데, 아무래도 전달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열심히 일한 모양이오.”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니요. 저는 이미 과분하게…….”
단양.
그 먼 곳까지 걸음 하신 분이다.
그날, 그 밤, 그 덧없는 약속을 지키고자.
자신을 지키고 끝끝내 오라비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힘써주신 분이다.
어찌 불만이 있을 수 있을까.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은혜를 받은 것인데.
뭉클한 마음에 이레는 목이 메었다. 일시 무슨 말을 하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무슨 마음이건 상관없소. 그저 내가 하고 싶었을 뿐이니. 그래서 하는 말인데…….”
“…….”
“마음에 드는 것은 있었소?”
잠긴 목을 간신히 쥐어짜며 이레가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선물 말이오. 그동안 경험한 것, 오늘 본 것. 그중에서 진정 마음에 드는 게 한 가지도 없었소?”
천일홍이 바람에 흔들렸다.
천 일이 지나도 변함없는 연모.
붉은 꽃의 기운이 바람결에 녹아 두 사람 사이로 흘렀다.
꽃과 서책, 노을.
그리고…….
이레의 시선이 형운에게로 향했다.
“……있습니다.”
“…….”
“진실로 마음에 드는 하나가 있습니다!”
이레의 눈가가 초승달 모양으로 여며졌다.
환한 웃음이 그의 눈 속으로 햇살처럼 쏘아 들어왔다.
***
서책에 빠진 이레는 다음을 기약하고 나서야 겨우 오로원을 나섰다.
그 아쉬워하는 표정, 미련 가득한 그녀의 눈빛.
형운은 확신했다.
은랑의 취향은 진귀한 패물도, 값비싼 비단도, 화려한 장신구도 아니라는 것을.
“서책이었어.”
그녀는 서책을 좋아하였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서책을 원하는 것이 분명했다.
정작 이레가 감탄한 것이 붉고 묵향 가득한 풍경 속에 담담히 선 어느 사내의 모습이라는 것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채.
엉뚱한 오해를 품은 형운은 궁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가 다시 환궁했을 땐 이미 밤이 깊어진 후였다.
왕세손의 긴 잠행에 잔뜩 숨죽이고 있던 세손궁은 그제야 활기를 되찾았다.
환복하고 처소에 자리 잡기 무섭게 사잇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저하.”
우익위 홍인모였다.
“들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홍인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운이 그에게 시선을 내렸다.
“양제궁엔 기별을 넣었느냐?”
“네. 하명하신 대로 했나이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홍인모가 말을 이었다.
“은언군께서 궁녀와 마음을 주고받고 계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직 어리고 여려 생긴 일이다.”
“…….”
“이번만은 조용히 갈무리하고 싶구나. 전언, 잊지 않았느냐?”
“네. 양제마마께서 고맙다,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궁이 시끄러운 때다. 괜한 일로 근심을 보탤 필요는 없지. 그 일은 이리 마무리하면 될 것이고…….”
형운은 눈빛을 날카롭게 벼렸다.
“달리 알아보라 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오늘의 외유는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었다.
팽례의 뒷배를 캐는 것과 동시에 이레에게 줄 선물도 알아봐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좌익위 최치성에게 붙은 잡것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예전부터 최치성의 행동과 말에서 이질적인 느낌을 종종 받았다.
최치성의 기질과 말하는 내용이 서로 다른 불협화음을 냈다.
뒷배가 있다 확신한 것은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명하신 대로 좌익위의 뒤를 밟았사옵니다. 또한 그간 그가 만난 자들과 장소를 되짚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상한 행적을 보인 자가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좌익위는 그를 은인이라 불렀다 합니다.”
“은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어 그리 부른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관계가 깊은 모양이구나. 그래, 그 은인이라는 자는 어찌 되었느냐?”
홍인모의 고개가 낮아졌다.
“송구하옵니다.”
“찾지 못하였느냐?”
“장소를 찾아냈으나, 이미 사라진 후였습니다.”
형운이 이레와 함께 오로원에 간 그 시각.
최치성은 다시 은인을 찾아갔다.
세손을 위한 시전에서의 안배가 원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한 까닭이었다.
새로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우직한 호위는 제 뒤를 쫓는 그림자가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른 채 은인이 있는 정자로 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은인은 없었다.
주인 없는 낚싯대와 차갑게 식은 술상.
텅 빈 자리에 물로 그린 짧은 작별의 글만 남긴 채, 최치성의 은인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보고를 마친 홍인모를 형운은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뚜렷한 저의를 품고 좌익위에게 접근한 자이니,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이다. 앞으로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일러라.”
“네, 저하.”
“좌익위는 지금 어찌하고 있느냐?”
“조용한 곳에 가둬 두었습니다.”
“놀랐겠구나.”
“외인에게 내부의 일을 함부로 발설하고, 감히 저하가 아닌 다른 자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형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홍인모의 말은 옳았다.
세손을 지키는 위치에 있는 자가 남의 지시를 따랐으니, 마땅히 삭탈관직하고 죄의 경중을 가려 엄히 다스려야 했다.
하지만 왜일까?
불현듯 이레의 목소리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때로는 모른 척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더구나.”
“저하!”
“인모야.”
“원칙이 흔들리면 빈틈이 생기고, 작은 빈틈으로 위험이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 그리 배웠다. 그러나 그 원칙만큼이나 도리와 인정 또한 중요하다.”
“…….”
“철없는 어린 시절부터 너와 좌익위를 보아왔다. 그동안 너희와 나눈 말과 사연이 능히 오로원의 서책 수를 능가하거늘. 어찌 한 번의 실수로 매정하게 내칠 수 있겠느냐?”
“하오나…….”
“인모야, 네가 진정 치성이의 처벌을 바란다면 그 눈물은 어찌 설명할 것이냐?”
바닥에 엎드린 홍인모의 턱 아래로 눈물이 방울지고 있었다.
형운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치성이는 천성이 순하고 우직하여 사람을 잘 믿고 따른다. 딴마음 품을 아이가 아니니, 마음 다치지 않게 적당히 하여라.”
“명…… 받들겠나이다.”
형운은 꼿꼿하게 세운 등줄기를 느른하게 풀었다.
어깨와 목이 저릿했다.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한 탓이었다.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구나.”
은근한 말로 형운은 홍인모를 물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의 우익위는 여전히 물러가지 않았다.
“무에 더 보고할 것이 남았느냐?”
“도주했던 팽례 말이옵니다.”
“그자가 왜?”
“달아났던 그 팽례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형운의 눈빛이 살아났다.
“힘들게 도망친 자가 죽을지도 모를 곳으로 다시 돌아와? 이유가 무엇이라더냐?”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리하였다 하였습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나간 죄는 달게 받겠다 하였습니다.”
“허허.”
형운의 입에서 기어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궁을 제멋대로 들락거리는 팽례라니. 참으로 신출귀몰한 자로구나.”
“어찌하올까요?”
홍인모의 물음에 형운은 턱을 쓰다듬었다.
“혐의가 아직 풀린 것이 아니니. 당분간은 잡아두어라. 하지만 만약 그가 진정 무고하다면…….”
“…….”
“연서나 나르기엔 참으로 아까운 재주를 지닌 자가 아니냐?”
세손의 뜻을 눈치챈 홍인모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네, 저하.”
“그럼 물러가라.”
이번에도 홍인모는 머뭇머뭇했다.
“왜? 더 할 말이 있느냐?”
형운의 물음에 홍인모는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었다.
“감히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무엇이냐?”
“오늘 무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어찌하여 그런 것을 묻는 것이냐?”
“내내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으시니. 무엇이 저하의 마음을 그리 흡족하게 하였는지, 소신 참으로 궁금하옵니다.”
홍인모의 말처럼 오늘의 형운은 평소와 크게 달랐다.
과묵하고 냉철하던 어제와 달리, 부드럽고 자상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좀처럼 없던 일이라.
홍인모는 감히 물은 것이었다.
“별일 아니다. 그만 물러가거라.”
거듭된 축객령은 단호했다.
더는 머뭇거릴 수 없음인지라.
홍인모는 의문을 품은 채 물러났다.
모두가 사라지고 형운은 홀로 남았다.
밤의 고요가 그를 에워쌌다.
그림처럼 앉아 있던 형운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는 지켜보는 이가 없음을 재차 확인한 그는 서탁 위에 펼쳐둔 서책을 슬며시 치웠다.
오늘의 형운이 어제의 형운과 달랐던 이유.
그가 유달리 많이 웃고, 자상했던 이유가 그곳에 있었다.
서탁에 깔아놓은 종이.
그리고 그곳에 떠오른 글귀.
형운의 앞에서 내내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홍인모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비밀.
-할아버지들, 제가 오늘 어딜 다녀왔는지 아십니까?
익숙한 필체가 빈 종이를 채웠다.
“그래, 그렇게 된 것이로구나.”
제비꽃 여인의 글귀가 형운의 망막을 채웠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