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은랑이 진정으로 바란 것 (上)
“네?”
이레의 얼굴에 놀람이 들어찼다.
선한 산짐승의 그것처럼 동그랗게 벌어진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형운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걸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까.
오래되어 이제는 잊힌 옛이야기를 품은 듯한 검은 두 눈엔 봄의 화사함과 겨울의 처연함이 공존했다.
기묘한 사물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 이러할까.
그것이 아니라면 신기한 현상을 목도하였을 때.
아니, 아니. 그것보다는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전율에 더 가까운 기분이었다.
표현이야 어떻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레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연유를 알 수 없는 즐거움이 형운에게 생겨났다는 것이다.
고작해야 눈을 동그랗게 뜬 것뿐인데.
왜 그녀의 그 작은 변화가 이리 각별하게 느껴지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팽례, 강현보. 그자가 도망갔다 하였소.”
이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황하고 있구나.
“혹시…….”
잠시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맑고 투명한 망막에 형운의 모습이 온전히 담겼다.
“그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잠시만 풀어달라고 하였다거나요.”
곧바로 이어진 이레의 말에 이번엔 형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소?”
“역시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레의 눈빛이 평소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형운의 말이 이어졌다.
“어제저녁부터 긴요한 일이 있으니 잠시만 나갔다 오게 해달라, 간청했다 하오.”
“당연히 보내주지 않았을 테지요.”
“그의 혐의는 여전히 유효하니. 더구나 나가야 할 이유조차 밝히지 않았소.”
“자칫하면 누명을 쓰고 참형을 당할지도 모를 상황에서도 끝끝내 저를 부린 사람이 누군지 밝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일과 관련한 용무였다면, 밝히지 않았겠지요.”
대강의 상황을 짐작한 이레가 형운을 불렀다.
“은……백.”
여전히 낯선 호칭.
어색하긴 형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낮게 헛기침을 뱉었다.
“흠, 무슨 일이오?”
“제가 궁녀들의 숙소에 갈 수 있을까요?”
그녀에겐 오라비의 것이었던 팽례의 패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패.
그 패로 궁 안에 발을 들일 수 있고 존귀한 분을 배알할 수도 있었지만, 정작 궁내를 자유롭게 활보할 수는 없었다.
“강현보, 그자가 전하였다는 서찰을 찾기 위함이오?”
“……네.”
이레가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팽례 강현보를 형운에게 부탁한 사람.
다름 아닌 이레였다.
이번 일이 잘못된다면 그녀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 전에 이거나 보시오.”
형운은 무심한 표정으로 이레 앞에 묵직한 뭉치를 내려놓았다.
한쪽 면에 거친 나무껍질이 고스란히 붙어 있는 손바닥 크기의 나무판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대가 궁녀들의 숙소에 가서 찾으려 하는 것이오.”
“나무껍질이지 않습니까?”
“그자는 나무 아래에 서찰을 두었다 하였소. 하여, 사람을 부려 그 근처 나무 아래를 모두 살펴봤소.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었소.”
형운은 이레 앞에 내려놓은 나무껍질들을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 게 바로 그것이오.”
이레는 나무껍질을 자세히 살폈다.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엔 아이들의 낙서처럼 보이는 글자와 동그라미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 나무껍질이 모두 다섯 조각.
“이게 바로 그 서찰이었군요.”
형운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어린 궁녀들이 장난삼아 나무에 그림이나 글을 새기는 경우가 있소. 하지만 이것들만은 다른 것과 달리 명확한 의미를 품고 있었소.”
사미선(四未線) O.
오유당(五酉糖) O.
이오고(二午穀) O.
일미분(一未粉) O.
삼유풍(三酉楓) O.
의미를 알 수 없는 삐뚤빼뚤하게 쓰인 숫자와 글자.
글씨를 되짚어보니 부러 못 쓴 것처럼 꾸민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미선, 오유당, 이오고…….”
이레는 눈을 감고 나무껍질에 새겨진 숫자와 글자를 조용히 되뇌었다.
곧 그녀가 눈을 떴다.
“때와 시, 장소를 뜻하는 암구호로군요.”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맞혔소.”
이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마지막의 이 둥근 표식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형운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확인하였다는 표식이오.”
“확인이라고요?”
“궁녀들은 궁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오. 특별한 사유가 있거나 일정 기간이 되면 한 번씩 나가는데, 그조차도 변경되는 경우가 잦소. 은랑 같으면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레가 대답했다.
“약속을 잡는 쪽이 궁녀가 되겠지요. 언제, 어느 때 나갈지 확실해졌을 때, 소식을 보내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렇소.”
“그럼, 이 나무껍질에 새겨진 암구호는 궁녀가 남긴 것이로군요. 그리고 마지막 둥근 표식은…….”
“팽례가 남긴 것일 게요. 확인하였다는 표식.”
말과 함께 형운은 다섯 개의 나무껍질 중 하나를 들었다.
뾰족한 것으로 긁어낸 흔적이 유독 선명하게 보이는 나무껍질이었다.
“이것이 가장 최근에 남긴 암구호요.”
삼유풍(三酉楓)이라 새겨진 나무껍질이었다.
“은백의 말씀대로라면 사흘 후 유시, 단풍과 관련 있는 장소에서 만나자는 의미겠군요.”
“사흘이면 팽례가 들어온 지 꼭 만 사흘이 되니…….”
“바로 오늘이군요. 오늘 유시, 단풍과 관련한 장소에 가면…….”
“사라진 팽례를 만날 수 있을 것이오.”
말을 마친 형운이 이레를 보며 말했다.
“갑시다. 팽례를 만나러.”
그의 목소리에 가벼운 흥분이 담겨 있었다.
***
형운과 이레는 은자원을 나섰다.
나무껍질에 새겨진 오늘 약속 시각은 유시(酉時).
어스름이 깔릴 무렵이었다.
“그 전에 다른 장소들도 살펴봅시다. 혹시 그자에 관한 정보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니.”
이레도 무작정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으리라 판단했다.
그녀는 형운의 뒤를 따라 궁문을 나섰다.
“오셨습니까?”
이레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듬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문 앞.
화려한 가마와 교꾼, 그리고 호위무사로 보이는 사내 여섯이 이레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형운은 고개를 돌려 이레를 보았다.
이 상황이 무엇이냐 묻는 시선.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이레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어떤 복잡한 사정인지 궁금하구려.”
이레는 한숨과 함께 상황을 설명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른 간택인들과 함께 영빈마마의 다과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차분하게 그녀의 설명을 끝까지 들은 형운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은랑을 위해 배려하는 것 같은데, 정작 누가 그런지 몰라 부담스럽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형운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이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가마와 호위무사들이 뉘의 작품인지 짐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최치성, 그의 작품이 분명했다.
내심 걱정하였는데, 생각보다 일을 잘 처리하였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런데 정작 선물을 받은 이레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며 난처해하는 기색이니.
어째서일까?
고작해야 가마와 호위무사를 보낸 정도이거늘.
대체 무엇이 부담스럽다는 것일까?
형운의 고민이 깊어졌다.
***
형운과 이레.
은자원의 두 은자는 나무껍질에 새겨진 흔적을 쫓아 대광통교로 향했다.
다리를 두고 큰길 양편으로 각양각색의 물건들을 파는 시전들이 늘어서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입전이었다.
비단을 파는 곳.
일반 면포를 파는 면포전과 달리 비단 한 필의 가격이 쌀 한 가마니와 맞먹을 정도로 비싼 곳이었다.
입전을 지키는 것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이레가 여인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사람을 찾고 있네. 유난히 키가 크고 깡마른 체구에 눈이 가느다란 청년인데…… 그런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오래간만의 손님이려나, 반가이 맞이했던 여인의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
“그런 사내가 귀한 비단 파는 입전에 무슨 볼일이 있겠습니까? 본 적 없습니다.”
값비싼 비단이니, 주로 상대하는 이는 귀한 댁 마님이나 그런 댁에서 부리는 침모(針母)가 대부분이리라.
사내가, 그것도 허름한 입성의 사내가 이런 곳에 올 리 만무했다.
“번거롭게 하였네.”
돌아서는 이레를 중년 여인이 붙들었다.
“오늘 첫 손님이신데, 이대로 그냥 가시면 어쩝니까요?”
“미안하게 되었네만, 오늘은 물건을 보러 온 게 아닐세.”
“마수걸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날 첫 손님이 잘 들어와야 하루 장사가 잘된다는 뜻입니다. 싸게 드릴 테니, 한번 구경만 해보세요. 구경하는 데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혹시 압니까? 마음에 꼭 드는 보물을 찾게 될는지.”
몇 번의 거부에도 여인은 넉살 좋은 입담으로 이레를 막아 세웠다.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음이라.
이레는 형운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 달리 형운은 그녀를 구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떠 상인의 말에 호응하니.
“마수걸이라. 그런 말이 있는 줄 몰랐군.”
형운이 뒤로 물러나 있는 이레를 비단 쪽으로 슬쩍 밀었다.
“미신이라 하나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으니, 한번 둘러보시오.”
그야말로 적극적인 방조.
“아유,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구경만 해 보시라니까요.”
신이 난 여인이 이 비단, 저 비단을 이레의 어깨에 두르고 걸쳐주었다.
“어머나, 어쩜 이리 어여쁠까. 피부가 진주 분을 바른 듯 뽀얗고 고우니. 무엇을 걸쳐도 어울리고 아무렇게나 둘러도 잘 맞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선비님?”
여인의 물음에 형운은 무심한 듯 시선을 돌렸다.
“내가 뭘 알겠는가. 그러나 듣고 보니 나쁘지는 않은 듯하군.”
“얼마 전 청국에서 들여온 귀한 물건입니다. 오늘은 첫 손님이기도 하니, 특별히 좋은 가격에 드리겠습니다.”
입전의 여인은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폈다.
“오십 냥?”
형운이 물었다.
“어유, 우리 선비님 통도 크셔라. 호호호, 다섯 냥입지요.”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듯하군. 은랑의 생각은 어떻소?”
“색이 고우나 제게는 너무 화려합니다.”
“마침 나도 그리 생각하였소. 지나치게 화려하구려.”
갑자기 돌변한 형운의 모습에 여인이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나 시전에서 보낸 세월이 마냥 허송세월은 아닌지라.
“어머나, 내 정신을 좀 보게나. 쇤네가 이리 어리석습니다. 아가씨께 어울리는 것만 생각하였지, 취향은 고려하지 않았네요.”
안쪽으로 사라졌던 여인이 차분한 색의 비단을 가져왔다.
“이건 어떻습니까?”
여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 정도라면 화려하지는…….”
“죄송합니다. 정말로 마음이 없습니다.”
“관심 없는 줄 내 이미 짐작하고 있었소. 그만 갑시다.”
형운은 미련 없이 신형을 돌렸다.
황당함에 입전의 여인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런 여인을 뒤로한 채 이레와 형운은 점포를 나섰다.
앞서 걷는 이레의 뒷모습을 보며 형운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은랑은 비단엔 관심이 없구나.
그럼, 무얼 마음에 들어 하려나.
***
“나리.”
입전을 나서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레는 걸음을 멈추고 형운을 돌아보았다.
“은백이라는 좋은 호칭을 두고 왜 다시 나리라 부르는 것이오?”
“왜 그러셨습니까?”
“무얼 말이오?”
“조금 전 입전에서 말입니다. 어쩌자고 여주인의 말에 호응하신 겁니까?”
“그야 당연히…….”
이레의 표정을 살핀 형운은 본래 하려던 말을 숨겼다.
“수사를 위해 그런 것이오.”
“수사라 하셨습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려면 내 주머니부터 열라는 말이 있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굳이 비단을 살 필요는…….”
“내 알아서 하리다. 그보다 서두릅시다. 이곳에 입전이 두 곳 더 있다 하니, 어느 곳이 수상한지 살펴봅시다.”
앞서 걷는 형운의 눈빛에 열의가 넘쳤다.
***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시전 거리를 걷는 이레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아.”
앞서 걷던 형운이 고개를 돌렸다.
“어인 한숨이오?”
이레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어사분들은 원래 수사를 이런 방식으로 합니까?”
“무슨 말이오?”
“사건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것은 모두 사들이려 하는 것 말입니다.”
이레는 나무껍질에 새겨진 대로 입전 세 곳, 족두리전 두 곳, 분전 네 곳을 들렀다.
점포에 들어갈 때마다 형운은 조사라는 명목하에 그곳의 물품을 이레에게 권유하고 사려 했다.
이레가 필사적으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상인이 권하는 대로 물건을 샀으리라.
뭔가를 사려고 들지 않은 곳은 엿과 사탕을 파는 백당전이 유일했다.
“면밀한 조사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요.”
“조사가 끝나면요? 되판다 해도 큰 손해를 면치 못할 겁니다.”
“사건과 관련된 물품을 어찌 함부로 내돌린단 말이오.”
형운은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가져다 쓰면 모를까.”
“그 비싼 물건을 부담스러워서 누가 그냥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이레의 말에 형운이 되물었다.
“그 정도에 부담을 느낀단 말이오?”
형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차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여인이 마음이었다.
이레의 취향을 알 길 없어 수사를 빌미 삼은 것이거늘.
이것도 싫다, 저것도 원치 않는다 하니.
도무지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럴 때 제비꽃 여인에게 물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그녀는 서탁의 허락이 있어야만 대화할 수 있었다.
‘좌익위가 준비한 것이 더 있다 하였으니, 조금 더 두고 보자.’
여인이 좋아할 만한 모든 것을 계획하였다 했다.
이레의 취향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오늘 중으로 적어도 한 가지는 찾을 수 있을 터.
그때, 모처럼 들뜬 이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전기수(傳奇叟)입니다.”
“전기수라면……. 이야기 들려주는 사람 말이오?”
시전 구석에서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제법 입담이 좋은 듯, 십수 명의 사람들이 앉거나 선 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형운은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구운몽이구려.”
각색이 많이 되어 원전과 전혀 다른 내용의 구운몽이었다.
“그만 갑시다.”
형운은 전기수의 이야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곳엔 그가 원하는 것이 없었다.
딱히 선물할 물건도 없고, 여인들이 좋아한다는 치장과도 관련 없었다.
이런 곳에서 귀중한 시간을 버릴 수는 없다.
그럴 시간에 한 곳이라도 더 방문하여 이레가 원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이레를 위한 소소한 선물.
처음 시작은 단순히 미안한 마음을 풀기 위함이었지만, 어느새 기필코 달성해야 할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형운이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저…….”
이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잠시만 보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
‘도무지 모르겠구나.’
전기수의 이야기를 듣던 형운은 이마에 주름이 졌다.
전기수의 말재간은 생각보다 좋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조악하게 짜깁기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구운몽.
조금만 생각하면 그 끝이 뻔한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에 이레가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감탄하며, 뭇 청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즐거워한다.
그가 시전들을 돌며 값비싼 비단과 장신구들을 보여주었을 땐 단 한 번도 짓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레의 그 색다른 반응이 썩 보기 좋았다.
또한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그녀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니, 차라리 저 전기수를 따로 고용하여 그녀 곁에 붙여주면 되려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빤히 바라보는 형운의 시선에 이레는 얼굴을 붉혔다.
“기분이 좋아 보이오.”
“제가 그랬습니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가 전기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예전 일이 생각났습니다. 오라버니와 같이 종종 이렇게 시전에 나오곤 하였는데, 운이 좋으면 지금처럼 전기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별채에 갇혀 지내다시피 한 일상이라.
오라버니와 함께 시전 나들이하는 날이 얼마나 각별하고 특별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전기수라도 보게 되면 그야말로 운수 대통한 날이었다.
옛 추억에 젖은 이레는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제가 그 이야기를 하였던가요?”
“무슨 얘기 말이오?”
“오라버니 말입니다.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이라면? 김기대, 그에게서 서신이라도 왔단 말이오?”
“서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호침이 왔습니다.”
“호침?”
“단옷날에 제 오라비가 강요하듯 은자들의 징표로 삼은 침통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침통의 호침을 전해 왔습니다.”
“……과연.”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잘것없는 호침.
그런 물건을 징표로 삼을 사람은 이 넓은 천하를 통틀어도 오직 김기대, 그 엉뚱한 은자 한 사람뿐일 것이다.
‘살아 있었단 말인가.’
다행이었다.
깊은 안도와 함께 이레의 기분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전기수의 이야기에 이렇게 즐거워하는 이유.
아마도 오라비와의 추억 때문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무얼 선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구나.’
형운은 어두운 표정으로 상념에 빠졌다.
그래서 인지하지 못했다.
전기수의 이야기가 전혀 뜻밖의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고 있다는 것을.
“하늘에서 자욱한 구름과 함께 천신께서 내려오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눈부신 서광이 부채처럼 확 펼쳐지질 않는가? 빛과 함께하는 그 풍모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저 깊은 바다를 다 뒤져도 못 볼 미남인지라. 그 모습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구운몽으로 시작하여 서유기를 지나 급기야 봉신연의로 이어진 근본 없는 이야기를 전하던 전기수가 돌연 형운을 가리켰다.
천신의 풍모를 설명하기에 다시없을 사내였다.
“그래, 바로 저분. 저분을 생각하면 딱 안성맞춤일 것이외다!”
그의 손짓에 사람들의 시선이 형운에게로 모였다.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형운은 황급히 삿갓을 눌러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뒤늦은 대응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어쩜 저리 훤칠하실까.”
구경하는 무리 중엔 근처 기루에서 나온 기녀들도 있었다.
안 그래도 형운의 범상치 않은 용모에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연신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던 터라.
기녀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분이 바로 그 천신이시구나.”
“풍모가 남다르다 하였더니. 정말 그분께서 현신하신 건 아닐까?”
“어느 댁 귀한 분이실까. 한양 땅에서 호탕한 호걸들은 죄 만나보았다 했는데.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쭉정이였구나.”
“그러게. 진품은 이곳에 있었네.”
“어디 숨어 계시다 이제 나타나셨어요, 나리?”
“소첩은 매향이라 하온데. 나리의 성함은 어찌 되십니까?”
코끝에서 흘러나오는 간드러진 목소리와 진한 분내가 순식간에 형운을 둘러쌌다.
지금껏 형운이 만난 여인들은 딱 두 부류였다.
자신의 앞에서 감히 고개를 쳐들지 못하는 여인들과 그가 감히 고개를 쳐들 수 없었던 여인들.
이처럼 가까운 곳에서 교태를 부리는 부류는 처음이었다.
하물며 본시 여인과의 만남을 꺼리던 형운이 아니던가.
사방에서 날아드는 시선과 짙은 분내가 단단한 철벽이 되어 그를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다음엔 당황했고, 그다음은 불편했다.
소음, 먼지, 귓가를 파고드는 웃음들.
어지럽고 복잡하고 번잡한 것들의 세상.
그는 사람의 얕은 웃음보단 서책이 품은 심오함을 좋아했다.
단순한 것을 사랑하고, 텅 빈 여백을 편안하게 여겼다.
완벽한 것이 좋았다.
세상의 모든 반듯한 것을 즐겼다.
그러나 지금 그를 둘러싼 것은 흐트러진 세상이었다.
원하지 않은 시선과 허락하지 않은 목소리가 무람없이 다가왔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까지 내몰렸다.
바로 그때였다.
“괜찮으십니까?”
하얀 손 하나가 기녀들의 벽을 뚫고 들어왔다.
어린 새의 그것처럼 길고 가냘픈 손.
힘겹게 뻗어온 그 하얀 손이 간신히 형운에게 닿았다.
그의 오른팔 소매 끝.
수줍게 잡은 이레의 엄지와 검지.
그 작고 하얀 두 손가락에 무슨 힘이 있을까.
그럼에도 그 미약한 끌림에 빨려가듯 형운은 이끌려갔다.
철벽같은 짙은 분내가, 도무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웃음과 교태의 철옹성이 모래성처럼 부서지고 흩어졌다.
여인들의 틈바구니를 벗어나기까진 고작 다섯 걸음.
세상의 모든 것들이 흐려지고 지워졌다.
오직 이레의 뒷모습만 보였다.
그녀와 함께하는 다섯 걸음의 순간이…….
제 오른 소매를 잡고 있는 하얀 손가락의 온기가…….
돌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해사한 웃음이…….
형운의 심장에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