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적당한 빌미
밤이 되니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분다.
서탁 앞에 앉은 이레는 전에 없이 심각했다.
붓을 들고 한참 고민하던 그녀가 마침내 글을 썼다.
-할아버지들, 오늘 평안하셨습니까?
곧 화와 예의 글이 보였다.
-아이야, 오랜만이로구나.
-잘 지냈느냐?
이레가 한숨과 함께 붓을 놀렸다.
-아쉽게도 잘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녀의 글이 사라지기 무섭게 악과 상의 글이 나타났다.
-평안하지 못하다니?
-뭔데? 또 무슨 일인데?
예가 자상한 필체로 물었다.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느냐?
이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몹시 곤란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이 물었다.
-무슨 사연인지 한 자락 풀어봐라.
-제가 모종의 이유로 은자원에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은자원?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아직도 하고 있구나. 내 상선을 시켜 궁 안팎을 샅샅이 뒤져보라 하였으나, 그 어디에도 은자원 같은 곳은…….
상의 말이 길어지자 이레는 필담을 나누던 종이를 서탁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새 종이를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악의 흘겨 쓴 글이 떠올랐다.
-은자원에 가게 되었다고? 어떻게 말이냐?
화도 궁금증을 덧붙였다.
-네 오라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궁에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을 터인데.
한동안 날이 궂어 할아버지들과 대화하지 못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레는 그간 겪은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악이 한 식경 가까이 이어진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런저런 이유로 은자원에 가게 되었는데, 정작 궁에서 보낸 가마를 타고 가보니 엉뚱하게 재간택인들이 모인 자리더라. 이런 뜻이지?
이레가 답했다.
-그 과정도 문제입니다. 궁에서 수모와 가마를 보내주었는데, 준비한 차림과 장식에서부터 곁을 지켜주는 호위까지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더구나 어제는…….
어느새 대화에 복귀한 상이 물었다.
-어제는 또 왜?
-수모의 일을 돕는 수모곁시에 호위하는 무사는 무려 여섯으로 늘었고, 북을 치고 꽹과리를 두드리는 자들까지 붙었습니다.
이레의 설명에 상이 헛웃음을 새겨 넣었다.
-허허, 삼정승의 행차도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그자들을 보낸 사람이 세자 저하라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럴 수 있는 분이 세자 저하뿐인지라.
악이 이레의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세자일 리 없다.
화와 예도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내 생각도 같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상의 생각은 셋과 달랐다.
-세자가 그랬다고?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 화통한 성격이구나.
뜻밖의 반응에 악이 물었다.
-어쩐 일로 호의적인 반응인가?
상이 웃으며 답했다.
-야밤에 궁궐을 활보하고 남장에 왕의 팽례까지 출현했다. 그런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잖아?
상의 반응에 이레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참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이런 이야길 했다면, 허풍 좀 그만 떨라 답했으리라.
이레의 궁금증이 이어졌다.
-할아버지들께선 세자 저하께서 한 일이 아니라 생각하시는 거죠?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악이 대답했다.
-간택이 진행되고 있지 않으냐? 아무리 세자의 행실이 대범하다 하여도, 이런 시기에 대놓고 한 사람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지.
상이 악의 말에 호응했다.
-아무렴. 간택에 참여한 다른 간택인을 욕보이는 행실인데. 아무리 대범한 나일지라도 그렇게 표 나게는 못하지.
두 할아버지의 의견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세자의 그런 행동은 간택령의 의미를 퇴색하게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누가 제게 이런 과분한 선물을 주는 것일까요?
화가 의견을 적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나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화의 말을 예가 받았다.
-지나친 호의가 올 땐, 그만큼 큰 것을 가져가기 위함인 것이니.
악과 상도 모처럼 의견을 일치했다.
-지나친 호의가 올 땐, 그만큼 큰 것을 가져가기 위함이니. 마땅히 경계해야겠지.
-원치 않은 만남은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먼저 그 의도를 의심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선의건 선물이건 말이다.
마지막으로 상이 결론을 내렸다.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마라. 그게 맘 편히 사는 법이다.
이레는 할아버지들의 조언을 마음 깊이 새겨 넣었다.
더불어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세자 저하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그녀가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그중 이만한 권세를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까닭이다.
“대체 누굴까?”
깊어지는 밤.
이레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
“이걸 어찌한다?”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
강직한 필체의 현판이 붙은 전각의 한 귀퉁이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세손의 왼쪽 칼, 좌익위 최치성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고뇌의 빛이 가득했다.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원인.
다름 아닌 왕세손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선물이거늘. 너무 소소한 것도 예가 아님을 그대는 명심하라.’
명을 받으면 어김없이 행한다.
그 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완벽하게, 주군이 원하는 방향으로 따르는 것.
그것이 최치성의 신념이었다.
지금껏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데 단 한 번도 고뇌하지 않았다.
주군께선 지금까지 고뇌하지 않아도 될 일만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여인에게 마음의 빚이 생긴 주군께서 선물을 준비하라셨다.
세손 저하의 형편대로 과하지 않게, 여인에게 꼭 필요한 ‘소소한 선물’.
더구나 선물한 이가 뉘인지 함부로 드러나지 않아야 군자라 하셨다.
그 명 또한 충실히 이행했다.
그런데 세손 저하께서 지금까지 한 선물은 지나치게 소소하였다 하셨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여태껏 들인 공이 지나치게 사소하여 왕세손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단 말씀이 아니던가.
최치성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 맺혔다.
처음으로 주군의 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더불어 하늘처럼 높고 고고한 그분의 자존심에 얼룩을 만들고야 말았으니.
이 실수를 어찌 만회한단 말인가.
“무얼 해야 할까. 무얼 해야 그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으려나.”
아무리 염두를 굴려도 그분께서 원하는 바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 무엇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왕세손의 위엄과 권위에 어울리는 하사품이라면…….
어디 풍광 좋은 곳의 땅이나 거대한 저택이라도 하나 마련해야 하나?
최치성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가마 타는 것도 거부하는 여인이 아니던가. 그런 선물을 받을 리 만무하지.”
천호에게서 받은 보고에 따르면 그 여인은 모든 선물을 거부한다 하였다.
심지어 이제는 가마 타는 것도 완강히 거절하였다 했다.
“마련한 사람의 성의를 봐서 대충 받아주면 좋으련만. 그렇다고 안 받겠다는 사람에게 강제로 떠안길 수도 없고.”
어디까지나 선물은 선물이었다.
아니 받겠다는 선물을 받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방도를 모색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홍 우익위에게 물어볼까?”
우익위 홍인모.
눈치 빠르고 영리한 홍인모라면 분명 세손 저하의 깊은 속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치성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될 말이다.
“다른 사람은 다 되어도 그놈만은 안 된다.”
그와 홍인모는 각기 세손의 오른쪽과 왼쪽의 호위를 맡고 있었다.
그분의 좌우 칼이자 수족 같은 존재.
이 정도 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우익위의 힘을 빌리는 좌익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손 저하의 지엄한 명과 선물을 거부하는 이레.
서로 다른 곳을 향하는 두 사람을 떠올리니.
느는 것이 한숨이요, 깊어가는 것은 시름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고민하던 최치성은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그분을 뵙는 수밖에.”
***
늦은 시각.
궁을 나선 최치성이 향한 곳은 뜻밖에도 기루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골목이었다.
사대문 밖의 풍광 좋은 강가.
불야성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골목은 오색 등으로 밤을 낮처럼 환히 밝히고 있었다.
최치성은 그 골목의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기루로 걸음을 옮겼다.
은인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기루로 들어서는 최치성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제발 계셔야 할 텐데.”
이곳엔 그가 있었다.
세상천지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
그러나 행적이 기이하고 신묘하여, 만나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은 분.
최치성이 은인이라 부르는 삿갓 사내를 만난 것은 삼 년 전 겨울이었다.
도모하던 일이 뜻한 대로 되지 않아 방황하던 때였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녔으나, 눈치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더랬다.
천성적으로 아첨할 줄 모르고 사람 보는 눈도 없는 최치성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리 밀리고, 저리 치여 한직만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하루하루가 좌절의 연속이라.
최치성은 자연스레 술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곳에서 은인을 만났다.
술에 취해 흘린 그의 넋두리에 은인은 작은 조언을 건넸다.
‘사람의 마음이란 물과 같다네. 평시에는 개천이나 계곡 물이나 호수나 별 차이 없지. 하지만 가뭄이 닥쳐오면 사정이 달라지네. 개천과 계곡물은 말라도 깊은 호수는 여간해선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법. 기다리게. 언제가 때가 도래하면 자네의 우직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걸세.’
최치성에겐 재빠른 눈치도, 뛰어난 수완도 없지만 대신 남들이 결코 따르지 못할 충직함이 있었다.
삿갓 사내는 그런 최치성의 장점을 한눈에 읽고 있었다.
그의 조언대로 최치성은 그저 묵묵히 변함없는 모습을 지켰고, 오래지 않아 우직한 품성을 마음에 들어 한 세손께서 자신의 곁자리를 내어주셨다.
“무사님이 아니십니까.”
기루 안으로 들어서자 최치성을 알아본 수기녀(首妓女:우두머리 기녀) 호란이 그를 반겼다.
“그분께선 계시는가?”
최치성의 물음에 호란은 복사꽃처럼 환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었다.
“그분이시라면 마침 별채에 계시답니다.”
마치 밀어(密語)를 주고받는 사람처럼 단지 ‘그분’이라는 지칭이 최치성과 수기녀 사이를 오갔다.
호란의 말에 최치성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서둘러 별채로 향했다.
기루의 별채엔 고관대작들을 위한 특실이 있었다.
최치성은 특실들을 지나쳐 기루의 뒷문 밖으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강가에 지어진 작은 정자였다.
그곳에 삿갓을 쓴 한 사내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최치성은 정자 위로 올라섰다.
정자엔 술과 몇 가지 안주가 놓인 술상이 있었다.
잔은 둘인데, 정작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기루에 온 사람이면 으레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기녀도 이곳엔 없었다.
최치성의 인기척에 삿갓 사내가 알은체했다.
“반가운 손님이 오셨군.”
최치성은 마치 제 자리인 듯 주안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개도 숙이지 않은 채, 인사를 건넸다.
그에게 있어 삿갓 사내는 세상에 다시없을 은인이었다.
하지만 일국의 세손을 지키는 몸.
함부로 다른 이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다.
은인도 뻣뻣한 그의 대응에 익숙한 듯 별로 개의치 않았다.
“허허, 우리가 만난 지 고작 여드레밖에 지나지 않았네. 오랜만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을 듯하이.”
넉넉한 웃음을 흘린 삿갓 사내가 고개를 슬쩍 돌리며 말했다.
삿갓이 워낙 커서 여전히 그의 뒷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야심한 시각에 이리 찾은 걸 보니, 무언가 곤란한 일이 생긴 모양이군.”
“일전의 그 일 때문입니다.”
“그 일이라면 자네가 모신다는 존귀하신 분께서 지시하신 ‘소소한 선물’을 뜻하는 겐가?”
“바로 그 일입니다.”
“흠, 동배의 여인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 필요한 것이라면, 가마와 수모가 적당했을 터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군.”
여드레 전.
세손 저하의 명을 받은 최치성은 곤궁에 처했다.
온통 사내 천지인 세상에서 나고 자란 그였던지라.
여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했다.
그런 그에게 세손의 특별한 지시까지 더해지니.
귀한 분의 형편에 알맞으면서 또한 여인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선물하라 하신다.
난제도 이런 난제가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은인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다행히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운 은인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껏 최치성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삿갓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심지어 지난 삼 년의 세월 동안 얼굴 한 번 보여준 적 없었다.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라, 얼굴을 보면 서로 부담스러울 것이란 말만 하였을 뿐이다.
그러기에 최치성은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이가 뉘인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귀한 분을 모신다는 말에 은인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치성의 고민을 들은 은인은 이번에도 적당한 답을 주었다.
가마와 수모를 준비한 것도 알고 보면 은인의 조언 덕분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지만 그쪽에 관해 아는 사람에겐 더없이 특별하게 느낄 수 있도록.
겉보다 속을 채우고, 장신구와 치장도 화려함 대신 여백과 단순함의 미학을 담은 물건만을 골랐다.
여기까지는 은인의 조언대로 했다.
하지만 최치성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것이…….”
최치성은 그 후의 사정을 보탰다.
“그래서 장신구를 화려하게 바꾸고, 호위무사까지 붙였다?”
은인의 입에서 끌끌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최치성이 힐끔 눈치를 살폈다.
“제가 무얼 잘못하였습니까?”
“잘못하였다기보다…… 과하였네.”
최치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장신구와 호위무사일 뿐입니다.”
하늘처럼 존귀한 그분의 신분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그대가 모시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나, 선물을 받는 당사자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게. 그런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잠시 생각한 최치성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쁠 것 같습니다.”
“반대일세.”
은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최치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이자, 은인이 설명했다.
“자네는 자네가 뫼시는 분을 잘 알고 있으니 문제가 안 되겠지. 하지만 막상 선물을 받는 사람은 상대가 누군지 모르지 않는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받기 부담스러운 물건을 자꾸만 준다고 생각해보게.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의심스럽겠군요.”
“그렇겠지. 과한 친절과 선물은 괜한 경계심만 심어줄 뿐이라네.”
은인의 설명에 최치성의 낯빛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세손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기는커녕, 오히려 망친 셈이 되었다.
고작 호위무사를 붙였다는 설명에 이 정도인데, 그 이후에 한 일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아찔했다.
은인이 말을 이었다.
“아마도 그 여인은 선물을 거절하였을 테지?”
은인은 귀신이었다.
앉은자리에서 천 리 밖을 내다보듯, 먼 곳에서 벌어진 사태를 훤히 읽었다.
최치성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서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자칫 잘못하였다간 세손 저하께 무능력한 수하로 낙인찍히리라.
아니,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분께서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최치성에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허허.”
너털웃음을 흘린 삿갓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우리의 인연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알려주겠네.”
***
“감사합니다. 언젠가 이 신세 꼭 갚겠습니다.”
“이 정도를 가지고 신세라 할 수 있겠는가. 언제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또 찾아오시게.”
최치성이 서둘러 떠났다.
삿갓 사내는 낚싯대를 거두고는 주안상 앞에 앉았다.
술병을 들고 잔에 따르려는데 낭창낭창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혼자 마시는 술은 외롭지 않습니까?”
기녀 호란이었다.
사뿐사뿐 걸어온 그녀가 삿갓 사내의 손에서 술을 빼앗아 들고, 빈 잔에 술을 쳤다.
삿갓 사내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호란이 생긋 웃으며 물었다.
“이번엔 좋은 답을 못 얻은 모양입니다. 돌아갈 때 표정이 잔뜩 굳어 있더군요.”
삿갓 사내가 빈 잔을 내려놓았다.
“어려운 일을 하여야 하니, 얼굴이 굳을 수밖에.”
“대체 어떤 일인데, 그런 표정입니까?”
삿갓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일일지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세상에서 더없이 어렵고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네.”
“네?”
“그럴 일이 있네. 그나저나 오늘따라 그대의 미모가 고와 보이는군.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가?”
삿갓 사내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돌리자, 호란은 곱게 눈을 흘겼다.
“하여간 선비님은…….”
호란은 다시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그거 아십니까?”
“무얼 말인가?”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요. 모두가 우러러보는 고관대작부터 허풍 심한 대상인에 사기꾼까지. 그중에서 누가 가장 인상 깊었는지 아십니까?”
“당연히 나겠지.”
삿갓 사내의 너스레에 기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부정은 못 하겠군요.”
“그래, 내 어디가 그리 인상 깊었는가?”
“신비한 면이랄까요?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보여주지 않으니, 궁금증이 생겨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별것이 다 궁금하였군. 보다시피 가난한 문사라네. 오죽하면 남의 말상대나 해주고 공술이나 얻어먹겠는가?”
호란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단지 그뿐이면 제가 선비님께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하면?”
“제 재주 중 하나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직업과 지위를 알아맞히는 것이지요.”
“그대야말로 신출한 재주를 지닌 사람일세. 그래, 그대의 눈에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름도 달라지고, 옷차림과 성격도 매번 변하니. 이런 분은 천하의 사기꾼이거나…….”
“사기꾼이거나?”
“천하를 희롱하는 재주를 가지신 분이겠지요.”
“허허, 희롱이라. 아무래도 그대가 날 너무 크게 본 것 같군.”
“그럼,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려 주시지요.”
“이름? 내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정회숙이라고.”
“일전에 함께 오신 분께선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으로 기억하나이다.”
“허허, 기억력 한번 대단하네그려.”
“그리고 몇 해 전까지는 홍국…….”
“쉿!”
삿갓 사내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세웠다.
“그 이름만은 비밀일세.”
“왜 그렇습니까?”
“내가 그 이름으로 말썽을 좀 많이 부려서 말일세. 그러니 당분간 그 이름은 잊어주게, 부탁함세.”
삿갓 사내가 기녀 호란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
“무엇이?”
되묻는 형운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새겨졌다.
늦은 시각.
좌익위 최치성이 독대를 청했다.
형운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소소하지 않은 선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치성의 대답이 엉뚱하였다.
“나더러 그 여인을 만나란 말이냐?”
물어보는 형운의 음성에 날이 서 있었다.
익히 예상한 반응인지라, 최치성은 대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선물이란 모름지기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 들었습니다.”
“당연히 그러하다.”
“경기관찰사의 여식은…….”
“은랑!”
“네. 은랑은…….”
“그래, 은랑이 왜?”
형운이 최치성에게 상체를 기울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제가 따로 사람을 부려 알아보니, 은랑은 성품이 온화하고 물욕이 없어…….”
“그래, 그런 성품인 것 같더구나.”
형운은 마치 제가 칭찬받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최치성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올곧은 성품이라 세간의 범상한 여인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합니다.”
“그래서 나더러 직접 찾아가란 말이냐?”
최치성은 은인이 알려준 대로 말했다.
“세상의 선물 중 가장 크고 의미 있는 것은 모름지기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마음이라…….”
그러고 보니 제비꽃 여인도 그런 말을 하였다.
“그래서? 마음을 전하는 것과 그녀를 찾아가는 것이 무슨 연관이란 말이냐?”
“존귀하신 세손께서 친히 행차하시니, 이처럼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더불어 돈을 주는 것도 아니요, 포상도 아니니.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전하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틀리지 않구나.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찾아가는 것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느냐?”
무언가 적당한 빌미가 필요했다.
반드시 그녀를 찾아가야 할 사안이며, 동시에 일부러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을 표 내지 않을 만한, 그런 적당한 핑곗거리.
“제가 생각하기엔…….”
최치성의 말이 채 끝나기 전.
그 핑곗거리가 제 발로 굴러왔다.
“저하.”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익위 홍인모였다.
“무슨 일이냐?”
문이 열리자 홍인모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소인, 세손 저하의 명을 올바르게 받잡지 못하였나이다. 죽여 주시옵소서.”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형운의 물음에 홍인모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소리쳤다.
“소인, 저하께서 잡아두라 명하신 팽례를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강현보.
은자원에 숨어 이레를 겁박한 팽례.
궁녀들과 관련한 불민한 사건으로 어사대의 추격을 받는 자였다.
이레의 부탁으로 형운은 그를 숨겨놓고 있었다.
그 일을 홍인모에게 명하였는데, 그만 팽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비록, 그가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곤 하지만 책임을 면치 못하리라.
보고를 올리는 홍인모는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정작 기다리는 호통과 형벌은 없었다.
기이한 침묵에 홍인모가 고개를 들어보니 세손과 좌익위가 묘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형운이 최치성에게 물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최치성의 우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실로 적당한 빌미가 아닌가 생각하옵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대화를 마친 형운이 홍인모에게 말했다.
“잘했다. 과연 내 우익위로구나.”
“……?”
예상치 못한 칭찬에 홍인모는 정신이 혼미해질 노릇이었다.
죄인을 놓친 중죄를 지었음에도 되레 칭찬을 받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가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 상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형운은 최치성에게 명했다.
“네가 계획을 세워보아라. 은밀히, 그리고 빈틈없이 하여야 할 것이다.”
“명 받잡겠나이다.”
큰 소리로 대답한 최치성이 처소를 나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최치성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비로소 형운은 홍인모에게 고개를 돌렸다.
느긋하던 좀 전과 달리 심각한 표정이었다.
“인모야.”
목소리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홍인모는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시옵소서.”
형운의 삼엄한 음성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지금 즉시 좌익위에게 사람을 붙여라.”
홍인모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최치성에게 사람을 붙이라 하셨사옵니까?”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여 홍인모는 다시 확인했다.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좌익위에게 잡것이 들러붙은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