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30화 (30/215)

#30. 정성이 부족하였다

쾅!

은자원의 문을 박차고 어두운 실내로 뛰어들 때, 형운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무사해야 한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한다.’

은자원 내부를 정탐한 홍인모가 말했다.

이곳에 이레가 있다고.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오라비의 일은 일단락되었다.

완전한 마무리는 아니었다 하나, 적어도 은자원을 다시 찾을 이유는 없었다.

아니다.

이유와 과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곳에 있고, 그녀가 있는 은자원이 덧창을 모두 내려 밤처럼 캄캄하다는 사실이었으며, 또한 불미스러운 사건의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모든 일을 연관 지으니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상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급하게 뛰어든 실내.

과연, 그곳엔 그의 상상을 초월한 사태가 진행 중이었다.

“흐으윽,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는 것뿐이었습니다.”

낯선 사내가 은자원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한 여인이 사내의 말에 장단 맞추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난히 하얀 얼굴의 여인.

한동안 형운의 꿈자리를 어수선하게 만든…….

이레였다.

“…….”

뜻밖의 사태에 형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뒤늦게 홍인모의 설명이 들려왔다.

“은랑이 웬 낯선 남자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

은자원 내부의 광경은 딱 홍인모의 설명과 같았다.

‘좀 일찍 말해줄 것이지.’

형운은 신중한 수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이 광경을 말로 설명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 또한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으니.

“아, 나리.”

뒤늦게 형운을 발견한 이레가 반색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표정이 무척…….”

형운은 그제야 자신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흠흠.”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덜어낸 그가 이레에게 물었다.

“그대가 이곳엔 무슨 일이오?”

말을 하고 나니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소? 설마 또 몰래 들어온 거요?”

“아닙니다.”

“그럼?”

바닥에 앉은 사내를 슬쩍 돌아보던 이레가 형운에게 속삭였다.

“오라버니의 패를 이용하였습니다.”

형운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라비의 패라면…….

“팽례의 패를 사용하였단 말이오?”

기가 막혔다.

간택에 남장까지.

그 소란을 떨고도 부족해, 이젠 팽례의 패까지 사용했단 말인가?

이쯤 되면 그녀가 오라비를 찾기 위해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위험을 즐기는 성격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나 그의 오해는 길게 가지 않았다.

“서 선비님께 아무 말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서강율. 그자 말이오?”

“네. 집으로 찾아와 은자원에 꼭 다시 와달라 하였습니다.”

형운의 미간이 펴졌다.

그래, 서강율 그자의 소행이었구나.

그 작자가 개입했다면,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놈의 그 가벼운 입이라면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일도 벌일 수 있을 테니까.

“정말 아무 말도 못 들으셨습니까? 은백이라면 당연히 아시리라 생각했습니다만.”

“못 들었소. 그보다 지금 날 은백이라 불렀소?”

이레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은자원의 맏이란 의미로 은백. 좋지 않습니까?”

“……은백이 그런 의미였던가?”

“네?”

반문하는 이레에게 형운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오. 은백,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구려.”

신기하다.

서강율에게 들었을 땐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같은 호칭을 이레에게 들으니 노하긴커녕 기분마저 좋아진다.

하긴, 같은 이름이라도 뜻은 전혀 다르니.

서강율이 지어준 이름은 은자원의 할 일 없는 사람이란 뜻이었고, 이레는 은자원의 맏이, 또는 우두머리란 의미로 은백이라 칭했다.

‘그러고 보니 서강율, 그자에 대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형운은 나직하게 ‘삭탈관직’을 되뇌었다.

“아무래도 은백께선 정말로 제가 오게 된 경위를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막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려는데 이레의 말을 형운이 막았다.

“그건 됐소.”

나중에 천천히.

기왕이면 둘만 있을 때, 느긋하게 듣고 싶었다.

그래야 서강율 그 작자의 만행을 음미하듯 곱씹을 수 있을 테니까.

그 악랄한 작자를 삭탈관직하였을 때, 쾌감이 더 커질 테니까.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듣겠소. 그보다 지금은 저 사내 이야기부터 들읍시다.”

형운이 이레 앞에 무릎 꿇은 사내를 턱짓하며 질문을 이었다.

“저자는 대체 누구요?”

***

사내의 이름은 강현보였다.

그리고 그는 팽례였다.

동패를 가진 팽례.

정확하게 누구의 팽례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동패를 지닌 팽례라 궁의 출입이 자유롭다 하였다. 어디까지나 외궁까지의 이야기였지만.

“그런 자가 어찌 이곳에 숨어 있었단 말이냐?”

질문을 던지는 형운의 음성에 서늘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강현보와 이레가 만나게 된 경위를 들은 까닭이었다.

그녀가 은자원을 찾았을 때 이곳엔 강현보가 숨어 있었다.

느닷없는 이레의 출현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경황 중에 이레의 입을 막고 위협까지 하였다.

행여 이레가 비명이라도 지를까 두려웠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여인을 겁박해?

강현보를 노려보는 형운의 눈에 찬 서리가 내려앉았다.

이레가 범상한 여인이 아니라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정신을 잃거나 이미 사달이 나도 한참 날 상황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커먼 사람이 불쑥 튀어나와 위협한다.

그런 상황에서 놀라지 않으면 되레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레는 달랐다.

그녀는 놀란 와중에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위협만 거듭하는 강현보를 차분한 목소리로 달래려 노력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진정하고 이야기로 풀어보자 설득했다.

형운이 이레에게 물었다.

“두렵지 않았소?”

“두려웠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뉘인들 두렵지 않을까.

형운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그런데 어찌 그리 차분히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오?”

“위협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지요.”

“목에 흉기까지 겨눴다 하던데.”

강현보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흉기가 아니라 붓이었습니다.”

“붓?”

이레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급한 김에 아무것이나 쥐었는데, 그것이 하필이면 붓이었던 모양입니다. 대나무로 만든 붓대는 차갑긴 하였으나 금속의 느낌이 아니었고, 자꾸만 목덜미 한쪽이 간질간질하니, 이상하다 생각하였지요. 나중에야 그것이 붓인 걸 알았습니다.”

“허!”

형운은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을 겁박하는 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붓으로 위협하는 걸 눈치챘기에 안심하였다, 이런 말이오?”

“네. 차분하게 말을 주고받다 보니, 뒤늦게 흥분이 가라앉았던 모양입니다. 미안하다며 사죄하더군요.”

형운이 은자원에 들어왔을 때 본 기가 막힌 광경의 탄생 비화였다.

이레의 부드러운 회유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강현보는 즉각 무릎을 꿇었다.

이레는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어찌 된 연유인지 물었다.

자상한 목소리에 긴장이라도 풀린 것일까?

강현보는 더듬더듬 사연을 풀어놓았다.

그렇게 시작된 억울한 이야기는 급기야 눈물로까지 이어졌다.

“큰 위협은 없었다는 말은 이해하였소. 그럼 이자가 어찌 어사대에 쫓기게 되었는진 알고 있소?”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현보가 소리쳤다.

“억울합니다!”

궁에서 일어난 불민한 사건으로 궁 안이 발칵 뒤집혔다.

범인을 찾기 위해 나선 어사대가 궁의 구석구석을 이 잡듯 뒤지고 있었다.

그들이 지목한 범인은 다름 아닌 형운과 이레의 앞에 무릎 꿇은 강현보였다.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맹세코,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강현보는 제 결백을 주장하며 두 손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형운은 이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겁에 질려 두서없이 떠드는 강현보보단 이레에게서 설명을 듣는 편이 더 낫다 싶었다.

역시나 그녀는 짧은 시간, 몇 가지 정황만으로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오비이락(烏飛梨落).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던 듯싶습니다.”

덧창을 걷어 올리지 않은 은자원은 밤처럼 캄캄했다.

그 까만 어둠 속에서도 이레의 맑은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공교롭다 했소?”

“저 사내는 팽례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몰래 궁녀들의 침소까지 간 모양입니다.”

형운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겁도 없이 궁녀들의 처소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궁녀들은 왕의 여인이다. 왕의 여인을 넘본 자, 국법에 따라 참형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진정 알지 못했단 말이냐?”

사나운 말에 강현보는 겨우 멈췄던 눈물을 다시 훌쩍이며 고갯짓을 했다.

“모두 오해입니다.”

“오해?”

“전 궁녀들의 처소에 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방에 들어간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좀 전의 설명과 다르다만?”

“제가 간 곳은 궁녀들이 머무는 전각 뒤편의 커다란 삼나무입니다. 그 나무 아래에 서찰만 숨겨놓으려 했을 뿐입니다. 흐으윽, 이 일은 절대 제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벌벌 떠는 강현보를 대신하여 이레가 변명했다.

“이 사내는 팽례입니다. 부리는 사람의 서찰을 기어코 전달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진 사람이지요.”

“그렇다면 그에게 그 일을 시킨 자가 따로 있단 말이로군.”

형운이 강현보에게 물었다.

“누구냐?”

추상과 같은 물음에도 강현보는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몇 번을 다그쳐도 그는 끝내 부린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겁은 많으나 입이 무거운 자였다.

형운이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네 말이 사실이라면, 어사대에 쫓길 이유가 없지 않으냐?”

강현보가 종주먹을 쥐고 제 가슴을 두들겼다.

“억울합니다. 저는 그저 제 소임을 다하기 위해 으슥한 시각, 궁녀들의 숙소 근처까지 이동하였을 뿐입니다. 그곳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만…… 보고 말았습니다.”

“무얼 말이냐?”

“숙소 밖으로 뛰쳐나오는 검은 그림자 말입니다.”

형운은 상체를 강현보에게 기울였다.

“그래서?”

“밖으로 뛰쳐나온 그림자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소란에 어둡던 주위가 금세 환해졌고, 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침 숙소 밖으로 나온 생각시에게 모습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로군.”

형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렇게 강현보의 이야기는 매듭지어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더 들어봐야 알겠지만, 대강의 상황은 파악되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억울해 할만하다.

하지만…….

“너의 무죄를 증명할 증거가 없구나.”

모든 정황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설사, 범인이 아니라 해도 구제할 방도가 없다.

어사대에 잡히는 순간, 고문은 시작될 것이고 그는 없는 사실도 자백하게 되리라.

아마도 온전하게 궁을 나가긴 힘들 것이다.

그때, 이레가 강현보에게 물었다.

“최근 석 달 사이 궁에 몇 번 드나들었습니까?”

“이번까지 도합 두 번입니다.”

“지난번에 들어온 건 언제입니까?”

“두 달도 더 되었습니다.”

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운의 눈가가 의문으로 물들었다.

“왜 그리 묻는 것이오?”

“듣기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때는 대략 석 달 전후. 소문이라 확실하지 않으나, 피해를 본 궁녀가 적어도 셋 이상이라 하더군요.”

“사람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것은 본시 부풀고 와전되어 진실한 것이 드문 법이오. 뜬소문을 무작정 믿지 마시오.”

“평범한 소문이라면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입방아라 치부하고 넘기겠지요. 하지만 이 경우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피해자가 궁녀들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입은 피해가 다름 아닌…….”

이레는 뒷말을 아꼈다.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한 뒷말을 형운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물었다.

“그게 왜 특별하다는 것이오?”

“다른 사람도 아닌 궁녀들의 일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좀처럼 소문이 나지 않기 마련입니다.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일이 생겨도 쉬쉬하고 감추기 마련입니다.”

민간의 여인들이 정조를 잃어도 크나큰 일이거늘.

하물며 궁 안의 궁녀에게 생긴 일이었다.

왕의 여인인 궁녀가 다른 사내에게 정절을 빼앗겼다는 건 곧 그녀의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설사 그런 일이 있어도 숨기고 감추기 마련.

“낭자의 말은 소문이 오히려 실제보다 축소되었다는 뜻이오?”

“그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완전히 뜬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을 토대로 생각하면…….”

이레는 강현보를 보며 말을 이었다.

“두 달 전, 고작 한 번 궁을 방문한 저 사내와 최근 발생한 궁녀들의 사건을 연결 짓기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그건 이자의 출입 기록을 살펴보면 보다 확실해지겠지. 설령 그렇다 해도 그의 혐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오.함께 범행을 모의한 도당이 있을지도 모르오.”

형운의 말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다.

아직은 강현보의 증언뿐, 다른 증거는 없다.

조사가 진행되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나…….

이레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어사대의 조사가 얼마나 가혹한지 익히 알고 있었다.

범인을 찾기보다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문.

과연, 그러한 조사로 이 젊은 팽례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이레가 형운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 차분한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형운이 물었다.

“왜 그리 보시오?”

“나리께서 애써주심이 어떨까 싶어서요.”

“내가 이런 일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오?”

“아닙니까?”

형운을 향한 올곧은 시선.

그녀는 여전히 형운을 어사로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어사가 아니라 말하려던 형운은 뒷말을 삼켰다.

어사가 아니라 하면 진실한 정체가 무어냐 물을 것이고, 그리하면 본연의 모습을 밝힐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되면 지금과 같은 관계가 자칫 어그러질 수도 있다.

목 언저리를 맴도는 말을 애써 지운 형운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사람을 부려 알아보라 하리다.”

“하나 더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무어요?”

“저 사람을 당분간만 숨겨주시면 안 됩니까? 이대로 어사대에 끌려갔다간 진범을 잡기도 전에 초상부터 치를 것 같아 그럽니다.”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떠는 강현보를 보며 이레가 부탁했다.

이번에도 형운은 거절할 수 없었다.

“며칠뿐이오.”

“감사합니다.”

화사하게 웃은 그녀가 제 오라비 자리로 돌아가 종이와 붓을 꺼내 들고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형운 역시 강현보에게 몇 가지 더 질문하고, 그 내용을 종이에 받아 적었다.

강현보는 끝까지 서찰을 보낸 자의 신상을 밝히지 않았다.

일이 잘못되면 죽을 수 있다는 말에도 그저 눈물만 떨굴 뿐이었다.

“답답하군.”

“우직하지요. 자고로 뛰어난 자는 많아도 입이 무거운 사람은 좀처럼 보기 힘들답니다.”

강현보를 변호하는 이레를 형운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이자가 팽례라 그런 것이오?”

“네?”

강현보가 김기대와 같은 팽례라 이리 신경 쓰는 것이오?

이렇게 묻고 싶었다.

연유는 모르겠으나, 강현보를 변호하는 이레가 이상하게 못마땅했다.

하지만 형운은 물음 대신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오.”

불퉁한 대답을 뱉은 형운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책장에 꽂힌 서책들을 둘러보고 여러 두루마리를 살피며 차츰 이레의 곁으로 다가섰다.

강현보에게 들은 내용을 빈 종이에 적던 이레가 고개를 들었다.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오.”

“그러시군요.”

이레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글 쓰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형운은 여전히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이레를 쳐다보는 것도 아니었다.

책을 보거나 두루마리를 펼쳐보며 그저 이레 주변을 서성이기만 하였다.

한 식경이 지나도록 그런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이레가 다시 붓을 내려놓았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런데 어찌하여…….”

“그냥 이러고 싶어 그러는 것이니 신경 쓸 것 없소.”

신경 쓰이게 행동해놓고, 신경 쓰지 말라 한다.

이레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어색한 헛기침을 연발하던 형운이 괜스레 엉뚱한 두루마리를 펼치며 지나가듯 말했다.

“혹시 말이오.”

“네.”

“내게 할 말, 없소?”

“할 말이라 하셨습니까?”

“딱히, 특별한 것은 아니고. 그저…… 단지 몇 마디 말이긴 한데. 허허, 이거 참.”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지금 들고 계신 두루마리, 거꾸로 되었습니다.”

형운은 두루마리를 접어 책장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아무것도 아니오.”

자리에 앉은 형운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두루마리 상태가 영 좋지 않군. 관리하는 자를 불러 한마디 해야겠어.”

“……?”

형운의 별스러운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던 이레는 잠시 쉬었던 붓을 다시 놀렸다.

강현보의 증언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

이레가 은자원을 나선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어둠이 제법 깊었다.

성을 나서니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가마와 호위무사들이 모습을 보였다.

“타시지요.”

천호가 정중히 권했다.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레도 무작정 응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가마와 호위를 거절한 이레는 집을 향해 걸었다.

천호와 백호 그리고 가마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또다시 기묘한 행렬이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레는 돌아오기 직전, 오라비의 책상에서 발견한 서신을 떠올렸다.

그 서신은 서강율이 그녀에게 남긴 것이었다.

최근 궁 안에 궁녀와 관련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오.

사건의 진위와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백방으로 나섰으나. 궁녀들이란 워낙에 조심성이 많고 은밀한 사람들인지라. 사내인 내겐 쉬이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구려.

나로서는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 혹여 은랑이라면 뾰족한 수가 있지 않을까 싶어 이리 부탁하외다.

간단한 인사말 아래엔 그가 파악한 궁녀들의 피해 상황이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피해자는 확인된 수만 다섯.

사안이 사안인 만큼 숨기고 말하지 않은 피해자가 더 있으리라.

딱히 무리할 필요 없소. 귀찮으면 가볍게 흘려버려도 좋고, 이대로 잊어도 좋소. 다만,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다면 잊지 말고 꼭 알려주시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무리하지 말라는 당부로 서강율의 서신은 끝을 맺었다.

“오라버니의 일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다 하더니.”

여인의 몸으로 어찌 팽례의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였는데, 애초에 그런 일을 맡길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다.

“은협, 저는 어사도 아니고 관직에 있는 사람도 아닌데, 어찌 이런 난제를 풀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어사인 형운에게 자세한 내막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오랜만에 그분을 만났건만, 제대로 인사도 못 하였구나.”

형운을 떠올리던 이레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은백께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제 곁을 서성이던 형운의 눈빛.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일까?

***

형운은 우익위 홍인모에게 강현보를 맡겼다.

은밀하고도 안전한 곳에 그를 가두라 명했다.

강현보는 진실을 말하였다 주장하지만,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긴 하루를 갈무리한 형운은 침소로 돌아와 서탁 앞에 앉았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은자원에서 만난 이레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무심한 표정이란.

“왜일까?”

좌익위를 통해 소소한 선물을 하라 명했거늘.

우직한 최치성이라면 분명 그녀에게 선물을 전달했으리라.

그런데 어째서 아무 말이 없는 걸까?

왜?

갑갑함이 가슴을 무겁게 했다.

급기야 형운은 반월문을 열어 최치성을 불렀다.

“좌익위, 거기 있느냐?”

부름이 허공에 번져나가기 무섭게 최치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운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좌익위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치성아.”

“네, 저하.”

부름에 대답하고 고개를 드니, 형운의 표정이 전에 없이 심각하였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이라.

최치성은 바짝 긴장했다.

형운이 그에게 물었다.

“일전에 부탁한 일 말이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김기대의 누이, 그 여인에게 작게 선물하고 싶다 하지 않았더냐.”

“아! 소소한 그 선물 말씀이십니까?”

이상하게 최치성이 답한 ‘소소한’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레의 무표정한 얼굴과 ‘소소한’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교차되었다.

“그래, 그 소소한 선물 말이다. 어떻게 하였느냐?”

“하명하신 대로 진행 중입니다.”

“진행 중이다?”

형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선물을 주었으면 주었지, 진행 중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궁금증이 덩치를 불려갔다.

“무엇을 선물로 주었느냐?”

최치성이 충성심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편을 살피어 꼭 필요한 것으로, 부담되지 않도록,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를 들은 듯한데, 정작 알맹이는 없었다.

형운은 인내심을 담아 다시 물었다.

“……그래서 무얼 하였느냐?”

최치성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좌익위, 온 힘을 다하여 저하의 바람에 부족함 없도록 할 터이니. 믿어만 주십시오.”

여전히 알맹이 없는 대답뿐.

차라리 홍인모에게 일을 맡길 것을 그랬던가.

우익위 홍인모는 머리 회전이 빠르고 눈치가 뛰어나 무슨 일을 맡겨도 능수능란하게 처리했다. 그에 반해 최치성은 순박하고 우직하며 저돌적이라, 간혹 놓치는 구석이 있곤 하였다.

그래도 고작해야 여인에게 작은 선물 건네는 사소한 명이거늘.

설마, 그걸 실수할까.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레의 무표정한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뭔가 선물을 받았으면, 고맙다고 입치레 정도는 할 법한데.

당연히 그런 것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가슴 한구석이 시큰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어쩌면 내 정성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르겠구나.

‘소소함’을 강조하였더니.

융통성 없는 좌익위가 소소하다 못해 뇌리에 남지 않을 만큼 미미한 선물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행 중이라고 한 대목이었다.

대체 어떤 선물인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그렇다고 이제 와 굳이 다그치듯 물어보는 것도 모양새가 그리 좋지 않았다.

“모든 일엔 시와 때가 있는 법이니, 무얼 준비 중인지는 모르나, 너무 늦지 않도록 하여라.”

“네, 저하.”

최치성이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미덥지 못해 형운은 한마디 더 곁들였다.

“또한, 무슨 일이든 적당함이 필요한 법이니. 그래도 명색이 선물이거늘, 너무 소소한 것도 예가 아님을 그대는 명심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최치성의 뒤통수로 서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분께서 저리 말씀하실 리 없다.

소소한 것이 예가 아니다?

역시 부족한 것이려나?

그렇다면…….

고개를 드는 최치성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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