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기묘한 행렬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른 시각, 경기관찰사의 별채에서 다부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밤새 고민하던 이레는 방금 어려운 결정을 내린 참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은자원으로 가리라.”
서강율이 말하지 않았던가.
은자원으로 그녀를 데려갈 가마가 올 거라고.
하지만 정작 서강율이 말한 가마에 올랐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은자원이 아니라 궁의 다과회였다.
더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 다과회에 초대된 여인들이 재간택에 내정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은자원에 가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재간택인들의 자리에 끼게 된 것이다.
애초에 마음에도 없는 자리라.
백로 속에 섞인 한 마리 까마귀처럼, 그 자리가 영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래도 처음엔 태평하게 생각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래, 때가 되면 누군가 나를 은자원으로 부를 거야.
그렇게 어영부영 나흘이나 흘렀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영빈마마가 주최하는 다과 모임 외에 다른 곳에서의 부름은 없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할아버지들과 대화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동안 날이 궂어 그분들과 만나지 못했다.
캄캄한 밤하늘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분들이라면 명쾌한 대답을 내어주셨을 텐데.
아쉬움은 깊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부르지 않으면 내가 찾아갈 수밖에.”
은자원으로 가자.
그곳에 가서 자칭 은자원의 협객이라 주장하는 서 선비님께 자세한 내막을 캐묻자.
“생각해보니, 애초에 내가 은자원 일을 한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제 발로 그곳을 찾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서 선비님 때문이다.
처음부터 상황을 제대로 알려 주었다면 이리 혼란스럽게 일이 꼬이지는 않았을 터.
서강율과 얽히면 매번 일이 복잡해지는 듯했다.
지난번 단양에서도 그의 돌출 행동으로 얼마나 고생했던가.
“아무튼, 당분간 다과 모임도 쉰다 하였으니. 지금이 은자원을 찾아갈 절호의 기회야.”
결심을 굳힌 이레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은자원에 가서 제대로 된 내막을 알아보리라.
어찌하여 자신을 은자원으로 부르지 않는 것인지.
궁의 다과회는 다 무엇이며,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그런 자리에 참여시킨 것인지.
또한, 궁의 다과회에 더는 참석할 수 없다 말해야지.
그런 대찬 결심을 하며 이레는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오셨습니까?”
기다리기라도 한 듯 우렁찬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허리를 깊게 숙인 두 명의 무인.
천호와 백호.
어제부터 가마 행렬에 합류한 호위무사였다.
예상치 못한 무사들의 출현에 이레는 적잖이 당황했다.
“얘기 못 들으셨습니까? 오늘은 궁궐 모임이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두 호위 중 연장자로 보이는 천호가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너무도 당당한 대답인지라, 이레는 어리둥절하였다.
모임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천호가 설명했다.
“저희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아가씨의 호위입니다. 그 일은 궁의 일과는 무관합니다.”
“그 말씀은 모임이 없어도 절 호위한단 말입니까?”
천호가 씩 명쾌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맞습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무슨 명을 어떻게 받았는지, 대답하는 천호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아가씨께선 아무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저희만 믿고 계시면 됩니다.”
이레의 거듭된 사양에도 천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지키고 말리라.
다부진 의지와 각오가 확연히 느껴지는지라.
이레는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 부담스러운 눈빛을 회피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설마, 밤새 집 앞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휴식은 충분히 취했습니다.”
말인즉, 밤새 이곳을 지키고 있었단 뜻이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이레를 수행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호위들의 등 뒤로 가마와 교꾼의 모습도 보였다.
그나마 수모가 없어 다행이랄까.
‘이를 어쩐다.’
넘치도록 과분한 대접에 참으로 난감했다.
이럴 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레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가 무얼 실수했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곧 바로잡겠습니다.”
“실수하신 건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호의를 그대로 받기엔 제가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네?”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지금껏 버려진 별채에서 홀로 지내왔던 이레가 아니던가.
궁의 다과회도 부담스럽거늘, 하물며 호위무사라니.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호사였다.
“아, 아가씨…….”
“그럼 제 뜻을 정확히 전했다 생각하겠습니다.”
이레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천호의 곁을 지나쳐 대로로 발길을 돌렸다.
***
이레의 뒷모습이 저 멀리 사라졌다.
호위 일을 시작하고 처음 겪는 사건이라.
백호가 천호에게 다가왔다.
“위장님,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천호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몰라서 묻느냐?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는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저리 완강히 거부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여기서 순순히 물러설 순 없다.”
“그럼 기절이라도 시켜 가마에 태울까요?”
백호의 진지한 물음에 천호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 아니겠지?”
“…….”
답은 없었지만, 백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허락만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이레의 뒷덜미를 후려칠 기세였다.
천호의 입에서 기어이 답답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자식은 부모를 닮고, 수하는 주인의 기질을 닮는다더니.
주인의 단순하고 고지식한 성정을 고스란히 빼닮은 백호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천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물러설 수 없다고 하신 건 위장님이십니다.”
“되었다. 말을 말자.”
“그럼 어찌하란 말입니까?”
“조용히 아가씨의 뒤를 따른다.”
“가마는 어찌할까요?”
“……가마도 함께다.”
그렇게 호위무사들은 가마와 함께 이레의 뒤를 따랐다.
젊은 여인 뒤를 꼬막 연의 꼬리처럼 따르는 기묘한 행렬은 큰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전 거리를 걸을 땐, 천하에 낯 두꺼운 천호도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렇게 긴 꼬리를 단 이레는 성의 동쪽, 월근문(月覲門)으로 향했다.
성문 앞의 경계는 전에 없이 삼엄하였다.
보통은 문지기 한 명만 지키고 있던 곳이건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네 명의 군졸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특히나 군졸들은 성 밖으로 나가는 자들을 철저히 단속했다.
그 단속이 유난한지라.
이레는 성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고민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녀는 곧 품에서 오라버니의 동패를 꺼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레가 내민 동패를 확인한 문지기가 순순히 길을 내어준 것이다.
조용히 감사의 인사를 전한 이레가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백호가 천호에게 물었다.
“도대체 저 아가씨의 정체가 뭡니까?”
되레 천호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나저나 너, 아가씨가 지닌 동패 봤느냐?”
“분명…… 팽례의 패였습니다.”
이레의 동패가 보인 것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예리한 무인의 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백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팽례라니. 팽례 중에 여인이 있단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 역시 여인이 팽례인 건 처음 보았느니.”
그것도 평범한 패가 아닌 궁 출입이 자유로운 ‘동패’였다.
“경기관찰사의 여식이라…….”
천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처음 이 임무를 받았을 때만 해도 시시한 일이라 여겼다.
중앙조정의 고위 관료가 아닌 지방 관찰사의 여식을 호위하는 일.
그것도 딱히 누군가 노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생 서슬 퍼런 날붙이 하나로 먹고살아온 그에게 이번 임무는 흥미를 돋울 만한 아무런 요소도 없었다.
이 정도의 일이라면 딱히 그가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아니, 밑에 부리는 수하들만으로도 넘친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불만과 따분함 대신 의문과 호기심이 떠올랐다.
‘대체 저 여인의 정체가 무어란 말인가.’
***
궁문을 통과하는 순간, 이레는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역시 되는구나.’
오라비의 패를 내밀 때만 해도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미 한 번 팽례의 패를 사용하긴 했지만, 자신의 물건이 아닌지라 불안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기우에 불과했다.
동패를 확인한 수문장은 두말없이 그녀를 궁 안으로 들여보냈다.
오히려 오늘은 굳게 닫혔던 입까지 열어 조언을 덧붙였다.
“궁 안의 분위기가 흉흉하오. 특별히 조심하시오.”
“감사합니다.”
고마움을 표한 이레는 궁 안으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수문장의 조언처럼 궁 안은 묘한 기운으로 술렁거렸다.
곳곳에서 창끝처럼 날카롭게 곤두선 시선이 느껴졌다.
궁을 순찰하는 인원도 평소보다 배는 늘었다.
포청의 종사관은 물론이고 사헌부의 감찰대, 그리고 어사로 짐작되는 사람들의 시선도 있었다.
그들의 삼엄한 눈빛이 궁 구석구석을 훑었다.
이따금 그들의 꿰뚫는 듯한 눈길이 이레를 향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이레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팽례의 패가 있다곤 하지만 공식적인 절차로 받은 물건이 아니었다.
누가 문제라도 삼으면 일이 복잡해지리라.
그런데 이레를 살피는 그들의 눈빛은 이내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향하곤 했다.
간혹,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굳이 다가와 심문하려 들지는 않았다.
이레는 그들의 시선에서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들이 찾는 자는 사내다.’
궁을 오가는 모든 사람, 특히 젊은 관원과 내관들이 지나갈 때마다 병사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만약, 찾는 이가 사내로 특정되지 않았다면 궁인의 복색이 아닌 이레를 그냥 보내지 않았으리라.
사람들의 삼엄한 시선을 뚫고, 낯설지 않은 길을 따라 걸은 이레는 마침내 은자원에 도착했다.
“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은자원의 문 앞에 서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곳에서의 추억이 그만큼 달콤하고 소중하기 때문이리라.
“반갑다.”
낡은 문을 쓰다듬은 이레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수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은자원의 창에 덧문이 내려져 있었다.
내부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을 터.
“열, 열하나, 열둘…….”
이럴 땐 이렇게 한쪽 눈을 감고 수를 헤아린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스물.”
꼭 스물을 헤아리고.
끼익!
낡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캄캄한 어둠 속.
희미하게 밝혀진 유등 하나.
묵직한 묵향이 진동하는 곳.
서책과 두루마리로 가득한 그곳에…….
한 사내가 말없이 붓을 놀리고 있을 것이다.
은백.
서강율이 제멋대로 지은 이름.
하지만 그 말없는 사내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호칭.
은자원의 문을 열자 익숙한 어둠이 몰려왔다.
이레는 미소를 지으며, 그 깊고 농염한 어둠 속으로 서슴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엔 그녀가 바란 누군가의 자취는 없었다.
은은하게 밝혀진 유등도.
그녀의 인사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무심한 사내의 모습도 없었다.
그 대신 어둠 속에서 그녀를 맞은 것은…….
거칠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 두껍고 단단한 사내의 손.
“조용히 하시오. 만약 허튼짓이라도 한다면…….”
귓가를 울리는 낯선 경고의 목소리.
그리고…….
“목숨을 장담할 수 없소.”
이레의 목에 겨눠진 차가운 이물감.
그런데 그 이물감의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
“……피곤하군.”
형운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는 지금 예조 하급 관원의 복색을 한 채, 은자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며칠 전, 아바마마께 은자원으로 가라는 명을 받았다.
더는 가지 말라 할 때처럼, 이번에도 느닷없는 일방적 통보.
형운은 늘 그렇듯 묵묵히 그 말에 따랐다.
내심 반갑기도 하였다.
그 볼품없는 전각에서 느낀 고독이 그립기도 하였다.
그렇게 은자원에 다시 걸음 하길 오늘로 닷새.
기대와 달리 은자원에서의 일이 즐겁지 않았다.
여전히 그곳은 어둡고 은밀하여,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쓸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예전만큼 편안하지 않았다.
왜일까?
전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건만.
어사대에서 가져간 서책과 두루마리도 대부분 돌아왔고, 책상을 비롯한 기물도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리 마음 불편한 것일까?
왜 예전만큼 좋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오래 쉬었던 까닭이리라.
한동안 하지 않은 일을 다시 하려니, 게으른 몸뚱이가 저항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힘들고 괴로워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적응될 터이고.
예전에 느낀 그 한가한 즐거움을 언젠가 되찾을 수 있겠지.
“그나저나 오늘은 유난히 번거롭구나.”
듣자 하니, 궁녀들을 범한 자가 있다 하였다.
무엄하게도 왕의 비호를 받는 여인을 탐한 자.
이미 여러 명이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 간악한 자를 잡기 위해 어사대까지 나섰다.
그러나 밤낮으로 계속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의심되는 자가 특정되었다 했음에도 여전히 잡지 못하다니.’
오늘 새벽.
궁녀 한 명이 또 변을 당하고 말았다.
마침 어린 생각시가 범인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외침은 이내 궁 안팎으로 전해졌고, 즉시 모든 궁문이 굳게 닫혔다.
‘나가는 사람 모두 철저히 단속하고 있으니, 놈은 아직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였을 터.’
숨어버린 범인을 잡기 위해 궁의 병력이 총동원되어 모든 곳을 이 잡듯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범인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달아나고 숨는 기술 하나만은 대단하구나.’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형운의 입장에선 피곤할 따름이었다.
경계 서는 군졸의 수가 워낙 많은지라.
앞서 간 우익위가 적당히 길을 터놓지 않았더라면, 그도 은자원까지 은밀히 가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하루빨리 잡아야 할 터인데.’
그래야 궁녀들의 희생도 막을 수 있고, 은자원까지 가는 걸음도 덜 피곤해질 터였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은자원에 가까워졌다.
은자원을 살피던 형운의 검미(劍眉)가 날카롭게 세워졌다.
……덧문이 닫혀 있다?
은자원의 모든 창에 달린 두꺼운 겹문은 그의 요청으로 특별히 덧댄 것이었다.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
당연히 다른 사람은 덧문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훤히 열려 있어야 할 덧문이 모두 닫혀 있었다.
“우익위, 게 있느냐?”
“소인, 이곳에 있습니다.”
으슥한 그늘에서 우익위 홍인모의 대답이 돌아왔다.
“은자원의 상태가 수상하구나.”
“확인하겠나이다.”
형운의 명이 떨어지자, 홍인모가 은자원의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기둥을 타고 지붕을 걷는 움직임이 야생의 날짐승처럼 가볍고 날랬다.
은자원의 지붕엔 채광을 위한 작은 창이 있었다.
그 창문만은 덧문이 달리지 않았다.
그곳을 통해 내부를 확인한 홍인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이냐?”
곁으로 돌아온 홍인모에게 형운이 물었다.
“그것이…….”
홍인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본 터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미지근한 반응에 형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우익위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은자원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이냐?”
홍인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 은랑이…….”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은랑이라는 이름이 들린 순간, 형운은 이미 은자원의 문을 박차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불길한 상상이 지나갔다.
궁을 어지럽히는 심상찮은 소문들.
간 크게도 궁녀들의 처소를 침범하여 천인공노할 범행을 저지른 범인.
갖은 노력에도 여전히 잡히지 않은 사내.
그리고 자신이 없음에도 굳게 닫힌 덧문.
홍인모는 이곳에 이레가 있다고 하였다.
형운은 심장에 돋아나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잘라냈다.
‘무사하시오. 무사하여야 하오.’
이 순간,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레의 무탈이었다.
만약 놈이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하게 하였다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맹세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하리라.
이레에 대한 염려와 범인에 대한 분노를 품은 채 형운은 은자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은랑, 어디에 있소?”
감정을 애써 내리누른 채 그는 이레를 불렀다.
열린 문을 비집고 밝은 빛이 스며들었다.
어둠에 잠겨 있던 은자원이 속내를 드러냈다.
그곳엔 천만뜻밖의 광경이 형운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