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백로(白露)
9월 9일.
밤에 하얀 이슬이 맺힌다 하여 백로(白露).
백로에 비가 내리면 그해 풍년이 들 조짐으로 여겼다.
반가운 비 소식이었건만, 후원의 산등성이까지 올라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던 여인들에겐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느닷없는 빗줄기에 영빈마마를 위시하여 여섯 명 간택인들의 몸짓이 빨라졌다.
상궁들과 궁녀들은 내리긋는 비를 피하기 위한 장소를 서둘러 물색했다.
때마침 산책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취규정이 있었다.
팔작지붕의 정자는 넓지 않았으나 영빈과 여섯의 간택인,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상궁과 궁녀들이 비를 비하기엔 적당한 장소였다.
“이 늙은이가 귀한 아가씨들을 당혹게 했소.”
영빈이 얼굴에 묻은 빗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간택인들을 둘러보았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큰일이거늘.”
“한동안 비 소식이 없어 백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들었습니다. 잠깐 맞은 비가 무에 큰 탈이겠나이까. 소녀는 그저 이 비가 반갑고 또 반가울 뿐이어요.”
대제학의 여식 김명선이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영빈이 고운 시선으로 김명선을 보다 이번에는 상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참으로 고운 아이가 아닌가. 저 작은 머리에 어찌 저리 커다란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인지.”
영빈의 칭찬에 김명선은 새치름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명선을 응시하던 이레의 눈에도 흐뭇함이 서렸다.
저 귀한 아가씨가 가뭄이 무엇인지,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이 어떤 고충을 겪는지 무얼 알겠느냐마는.
그래도 이 비가 반가운 것을 알고, 제 몸 젖는 것을 개의치 않으니.
저만 아는 철부지 아가씨보다야 그래도 저런 아가씨가 이 나라의 모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장구름이 가득하였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취규정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유, 웬 비람?”
“마마, 괜찮으시어요? 많이 젖으시면 안 되는데. 어쩌지?”
“어서 닦을 것을 찾아오너라.”
미리 취규정에 자리 잡은 사람일랑 보이지도 않는지, 상궁과 궁녀들은 제 주인 챙기는 것만 열중했다.
그들의 무례한 행동에 전각 한가운데 모여 있던 간택인들은 구석으로 밀려나다시피 하였다.
“어느 전각의 사람들인가?”
영빈이 묻자 곁에 선 송 상궁이 대답했다.
“궁녀 중 몇몇이 눈에 익습니다. 아무래도 문 소원(昭媛) 전각의 사람들인 것 같사옵니다.”
“그 인사가 여긴 왜?”
영빈의 눈가가 불편하게 주름졌다.
듣기라도 한 듯 빗물을 닦던 여인이 영빈의 앞으로 나섰다.
“제가 방해를 하였습니까?”
금실로 매화를 화려하게 수놓은 짙은 분홍 당의.
곱게 뒤로 쪽진 머리에는 거대한 진주와 산호로 장식된 비녀가 꽂혀 있고, 가르마 앞쪽에는 황금으로 만든 봉황 첩지가 눈부신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화려한 차림만큼이나 미색 또한 뛰어났다.
두 사람 모두 왕의 후궁이나 한 사람은 저물어가는 노을이고, 다른 하나는 새벽의 푸름이라.
그런 까닭일까?
고작 정4품의 소원이 정1품인 빈(嬪)을 대하는 태도는 무람없었다.
기껏 차리는 예라고는 가벼이 고갯짓하는 것이 전부.
영빈의 곁에 그림자처럼 지키고 섰던 송 상궁이 눈꼬리를 치켜들었다.
“영빈마마 앞입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송 상궁의 호통에 문 소원의 시선이 날카롭게 여며졌다.
“예의라면 분명 갖추지 않았느냐?”
“그게 무슨…….”
“그러는 너야말로 어찌 그런 시선으로 날 보는 게냐?”
문 소원이 웃었다.
가늘게 여민 눈꼬리가 날아갈 듯 기운다.
그 유혹하는 듯한 웃음에 칼이 실려 있었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 한기가 담겼다.
스산한 기운에 눌린 송 상궁이 주춤 물러섰다.
영빈이 문 소원에게 물었다.
“비도 오거늘, 예까진 어쩐 일인가?”
송 상궁을 노려보던 문 소원이 그제야 영빈에게 시선을 주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을 수 없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문 소원의 미소가 깊어졌다.
“재미난 놀이가 시작되었다 들었습니다.”
“재미난 놀이?”
“네. 영빈께서 세자와 세손을 앞세워 웃전 놀이를 한다 하던데, 어찌하여 소첩은 끼워주지 않는 겝니까?”
영빈의 입에서 드물게 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웃전 놀이라니. 예가 어느 자리라고 그런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영빈이 날린 불꽃을 문 소원은 엉뚱한 곳으로 비껴냈다.
삼엄한 질문에 대답 대신 문 소원은 정자 한구석에 얌전히 앉은 여섯 간택인을 돌아보았다.
“그대들이 소문의 그 간택인들인 모양이로군. 한데…….”
문 소원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어찌 그러고 있는 것이야?”
난데없는 벼락에 간택인들 모두 어리둥절했다.
문 소원의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람을 보았으면 인사를 하여야지. 아니 그런가?”
서슬 퍼런 질책에 간택인들은 마지못해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영빈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두게.”
“무얼 그만두라는 말씀이신지…….”
“이제 막 궁에 발을 들인 아이들일세. 궁의 위계와 법도에 대해 무얼 알겠나.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내가 어렵게 만든 자리에 자네가 끼어드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이쯤하고 그만 돌아가시게.”
“왜요? 내가 못 올 데를 온 겝니까?”
“자네…… 진정!”
참다못한 영빈이 호통을 질렀다.
그 한마디에 문 소원이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구머니나.”
뜻밖의 반응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그녀는 아예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아이구, 아이구, 배야…….”
문 소원이 신음하며 배를 틀어쥐자 따르는 궁인들이 허둥거렸다.
제일 먼저 붉은 철릭 차림의 사내가 달려왔다.
“소원마마, 괜찮으시옵니까?”
문 소원의 오라비, 문성국이 호들갑을 떨었다.
소원 전각의 상궁과 궁녀들도 발을 동동 구르며 안달했다.
“이를 어쩌면 좋아. 어의 영감께서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 조심조심하라 하였는데.”
“신중히 모셔라. 귀한 아기씨를 품은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목숨은 없는 것이야.”
작은 호통 한마디에 큰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요란이었다.
“허허…….”
영빈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와중에 악을 쓰던 문 소원은 급기야 배를 움켜쥐고 바닥까지 굴렀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도 상궁! 배가 아프다, 아아악! 배가 끊어질 것 같구나. 아무래도 큰일이 난 것 같아.”
도 상궁은 주위를 재촉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마마를 전각으로 모시질 않고서. 너희는 지금 당장 의녀를 들라 하라.”
문씨의 오라비가 문 소원을 업고 산등성이 아래로 달렸다.
상궁과 궁녀들이 열을 지어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정자를 나선 도 상궁이 영빈 대신 송 상궁에게 따지듯 말했다.
“오늘의 일,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을 것이오.”
“가볍게 넘어가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그 소란인가?”
“보고도 모르시겠소? 영빈마마께옵서…….”
“조금 야단을 치셨지. 설마, 그게 이 소란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겐가?”
“……주상 전하께서 잠자코 계시진 않으실 게요.”
송 상궁에게 하는 으름장인지, 영빈에게 하는 으름장인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협박을 마지막으로 도 상궁마저 제 주인의 뒤를 쫓았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정자는 적막에 휩싸였다.
“미안하오.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해야 할 것 같소.”
속에서 이는 성화를 애써 내리누르는 듯 영빈의 얼굴색이 예사롭지 않았다.
영빈과 그녀를 따르는 궁녀들마저 자리를 뜨자, 너른 정자엔 간택인들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휴,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여섯 명의 간택인 중 가장 나이 어린 형조판서의 여식이 한숨을 토했다.
이레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궁의 법도가 지극히 엄하다 들었거늘.
영빈을 대하는 문 소원의 태도는 무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자에서 벌인 그녀의 행동은 마치 일부러 영빈의 화를 돋우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찌 저럴까?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
***
“권력의 추가 그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오.”
대제학의 여식, 김명선이 간택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비가 그치고 영화당으로 내려온 간택인들은 좀 전의 사태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궁궐 사정에 어두운 간택인들에게 김명선이 아는 체를 했다.
“문 소원의 배가 불러 있잖소. 소문으로는 만약 문 소원께서 아들을 낳으면 세상이 크게 뒤바뀔 거라 하더이다.”
“세상엔 마땅히 이뤄지는 순서가 있고, 궁궐엔 엄격한 질서가 있는 법인데. 세자 저하께서 계시고, 세손께서도 장성하시거늘. 후궁 마마께서 사내아이를 낳는다 한들 어찌 세상이 뒤바뀔 수 있겠습니까?”
이레의 물음에 명선이 입가를 비틀었다.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오. 세상의 모든 일이 순리와 법도대로 이뤄진다면 싸움과 경쟁이 왜 있겠소? 애당초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도 누군가의 변덕 때문이라던데.”
“변덕이라니?”
대제학의 여식은 쯧 혀를 찼다.
“이번 재간택 말이오. 이렇게 이미 간택인이 확정되었음에도 여전히 교지 내리는 것을 미루고 있잖소.”
“잠깐만.”
이레가 명선을 보며 물었다.
“지금 재간택이라 했습니까?”
김명선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평소 같으면 교지를 내리고 공식적인 재간택 일정으로 넘어갔을 터인데. 이번은 무슨 연유인지 차일피일 미루며 다과회나 하고 있질 않소.”
“그런…….”
이레는 뒷말을 마무리 지을 수 없었다.
뭔가 둔탁한 것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이곳에 모인 여인들이 범상치 않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설마 재간택에 낙점된 간택인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럼 나는 뭐야?
여기 있는 모두가 재간택에 오른 여인들이라면 자신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잘못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그 와중에 대제학의 여식, 김명선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나저나 요즘 그대의 위세가 심상치 않소?”
아비의 직급이 곧 자식의 서열이라.
명선은 은근히 이레를 아래로 보았고, 이레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공대했다.
“위세라니요?”
“가마에 수모까지 바뀌더니, 이젠 호위마저 붙이고 다니는구려.”
명선이 가리킨 영화당 마당 한쪽에는 이레를 태우고 온 가마와 교꾼, 그리고 가마 앞뒤로 선 호위의 모습이 보였다.
“문중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
영빈마마의 다과회는 오늘로 네 번째였다.
처음 다과회에서 보였던 이레의 궁핍함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번째 다과회에선 가마와 교꾼, 그리고 수모가 바뀌더니 그다음부턴 입성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야말로 완벽했다.
딱히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수함을 가장한 명인의 작품임을 그 자리에 모인 그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심지어 이레가 신은 패랭이꽃 수자 놓인 당혜마저도 범상한 물건이 아니었다.
뒤꿈치에 찍힌 깨알만큼 작은 인장의 가치가 어지간한 집 한 채와 맞먹는 것인지라.
그러나 정작 이레만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저 문중에서 보낸 옷과 신과 장신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저를 보는 간택인들의 시선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어째서 나를 저런 눈빛으로 보는 것이려나?
내가 무얼 잘못하였나?
이레는 고개를 내려 제 면면을 살폈다.
최치성의 ‘소소한’ 선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형편만큼 부담되지 않도록.
그럼에도 선물한 이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 없게.
하나씩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진행 중이었다.
어제가 탈 것이면, 오늘은 몸에 걸치는 것으로.
내일은 곁을 지킬 사람들을 붙여주는 방식으로 차츰 선물의 깊이를 더했다.
명선은 오늘 이레의 가마를 지키고 선 호위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건장한 체구의 교꾼들도 이목을 끌었지만, 이레의 호위무사들은 그들보다 한술 더 떠, 훤칠한 키와 조각 같은 얼굴로 벌써 궁녀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했다.
“보아하니 저 호위들, 보통 사람들이 아닌 듯한데. 그 모든 것을 문중에서 하였단 소리요?”
“그렇습니다.”
거듭된 물음에도 같은 대답을 내어놓는 이레에게 명선은 기어이 낯빛을 달리했다.
“허.”
“왜 그러십니까?”
“언제까지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 셈이오?”
“꿍꿍이라니요?”
“그럼, 문중에서 저 모든 걸 해주었단 말을 순순히 믿을 거로 생각했단 말이오?”
지금껏 결코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자부했다.
가장 좋은 먹거리와 가장 비싼 것, 가장 진귀한 것과 고급품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그런 명선이라도 이레가 부리는 사치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지경이었다.
집안의 기둥뿌리를 뽑아도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하물며 진정 놀라운 것은 그 온갖 치장을 하여도 전혀 사치스럽게 보이지 않게 한 조화로움이다.
절묘한 색상과 소재의 배치.
원석의 특징을 제대로 살린 보석과 장신구의 선택.
화려하지만 기품 있고, 수수하지만 단아했다.
범상한 여인들은 이레가 걸치고 지닌 것이 얼마나 대단한 줄 모르리라.
치맛자락이 펄럭일 때 언뜻언뜻 보이는 붉은 수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저고리 앞섶에서 찰랑거리는 작은 방울의 의미가 무언지 꿈에도 모르리라.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문중이기에 이 모든 준비를 해준단 말인가?
터무니없는 소리.
이레를 바라보는 명선의 눈빛이 매웠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저 속에 천 년 묵은 여우가 들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말하지 마시오. 괜한 핑계 대지 마시고.”
싸늘한 반응에 이레는 인상을 찌푸렸다.
‘문중이 한 일을 문중이 하였다 하는데, 대체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구나.’
김명선의 유별함은 첫날부터 느꼈지만, 오늘은 특히나 유난했다.
아무래도 호위무사들까지 함께한 것이 눈에 띈 모양이다.
하긴, 자신이 생각해도 과한 면이 있었다.
문중에 말해야겠다.
호의는 고맙지만, 더는 괜찮으니 그만하라고.
그보다…….
이레는 비 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쯤 은자원에 갈 수 있으려나.
분명 서 선비님께서 은자원에 일이 있다 하였는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영빈궁의 송 상궁이 영화당으로 들어왔다.
“내일 예정된 다과회는 사흘 후로 미뤄졌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김명선의 물음에 송 상궁이 조용히 허리를 조아렸다.
“오늘 내린 비로 영빈마마께서 편찮으십니다. 각 문중으로 따로 기별 넣을 터이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송 상궁이 영화당을 떠난 후, 간택인들 사이에 뒷말이 이어졌다.
“오늘 일로 영빈마마의 충격이 크신 모양이야.”
“주상 전하의 성심이 문 소원에게 가 있음인데, 아무리 세자 저하의 친모라 할지라도 그 기세를 꺾을 수 없을 테지.”
“송사 중 제일은 베갯머리송사라더니. 오늘 보니 임금께서 아끼는 후궁의 기세가 등등하오.”
“오죽하면 문 소원의 아이는 틀림없이 사내아이여야 한다질 않겠소. 배 속의 아이만 믿고 두 남매의 방자함이 하늘 높은 줄 모른다 하오.”
누군가 말하자 형조판서댁의 어린 아가씨가 서둘러 입에 검지를 세웠다.
“쉿, 목소리가 큽니다.”
김명선의 눈치를 살피던 소녀는 누가 들을세라 작게 속삭였다.
“대제학께서 문 소원과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있대요.”
“뭐?”
“문 소원께서 대제학의 여식을 비씨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합니다.”
“어머나, 왕실에서도 그리하겠다고 했답니까?”
“이미 조정이 대제학을 비롯한 노론의 세상이거늘. 임금께서도 아끼는 후궁의 말에 귀를 기울이실 테고. 대리청정 중이라 하나, 세자 저하께선 주상 전하의 말씀에 절대 항명하지 않으시니.”
“그럼 세손의 비씨는 저 여인이네요.”
속삭이던 간택인들은 명선을 돌아보았다.
느긋하게 풍경을 둘러보는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만사 불여튼튼이라. 세상일 어찌 될지 모른다지만, 이 기회에 인맥을 쌓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간택인들이 명선에게 다가갔다.
곧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터져 나왔다.
“어머나, 이게 뭐여요? 이 신발은 황 노인의 것이 아니어요?”
“그 귀한 것이 제대로 임자를 만났습니다.”
“어머나 손 고운 것 좀 봐.”
서로 경쟁하듯 명선에게 아양을 떠는 처녀들을 보며 이레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들이 사는 세상이 저러하구나.
아비의 권세와 재력이 곧 자식의 힘과 지위가 되고, 부와 가난이 대물림되고.
신분의 귀천에 따라 높고 귀한 사람으로 나뉘는 세상.
원하든 원치 않든, 치열한 정쟁의 한복판에 선 여인들이니.
그 처신이 얼마나 어려울까.
씁쓸한 얼굴로 이레는 영화당을 내려섰다.
“저…….”
가마에 타려던 이레를 누군가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형조판서의 여식이었다.
이름이 이유경이라 하였지.
이레와 시선이 마주치자 유경은 얼굴을 붉혔다.
“괘, 괜찮으시다면……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다 들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유경에게 이레가 미소를 띠었다.
모두가 같지는 않구나.
이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요.”
유경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변했다.
“언니는 왠지 다른 분들과 느낌이 달라요. 친해지고 싶은데, 제가 소심하여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어요.”
“나,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니 언제라도 편히 말해요.”
“그럴게요. 사실 궁에 올 때마다 긴장되고 겁이 났거든요. 요즘은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고.”
“흉흉한 소문이라니요?”
“수모에게 들은 이야긴데요…….”
유경이 이레의 귀에 대고 뒷말을 속삭였다.
“몇몇 궁녀들이 처소에서 몹쓸 짓을 당하였다 합니다.”
이레의 눈이 커졌다.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답니까?”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그 일로 자결한 궁녀도 있다 하니. 궁의 감찰대와 어사대가 범인을 색출하려 눈에 불을 켜고 있다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갈 생각이에요. 언……니도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수줍은 미소로 일별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이레도 가마에 올랐다.
“궁은 정말 밖에서 보고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곳이로구나.”
고작 하루였지만,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서슬 퍼런 기세 싸움도 보았고, 어린 처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뻗치는 정치도 경험하였다.
그리고 고고하기만 한 궁궐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서도 들었다.
황금으로 둘러싸인 듯 찬란하지만, 또한 칼날 위에 서 있는 듯 위태롭고 살벌한 곳이 바로 궁이구나.
이런 곳에 살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안도하며 이레는 궁 문을 나섰다.
***
‘오늘도 어김없이 집으로 가는구나.’
돌아가는 이레의 가마는 한숨 소리로 가득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빠끔 창문을 열어 수모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울네.”
“네, 아가씨.”
“정녕 은자원을 들어본 적 없습니까?”
수모가 차분히 대답했다.
“지난번에도 묻고, 이번에 또 물으시는 걸 보니 은자원이라는 곳이 아가씨에게 참으로 중요한 장소인 모양입니다.”
“그곳에 꼭 들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송구합니다. 쇤네는 은자원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과 같은 대답.
역시 모르는 모양이다.
아쉬운 얼굴로 창문을 닫던 이레는 불현듯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시어요.”
“절 위한 문중의 마음은 알겠으나. 조금 과합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호위하시는 분 없이 모쪼록 단출하게 왔으면 합니다.”
대답은 여울네가 아닌 호위무사에게서 들려왔다.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단지 다과회에 참석하는 것인데, 호위까지 대동하는 건 과한 것 같습니다. 공연한 일로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가씨, 이건 저희의 임무입니다. 기필코 해내야 하는 일이니, 부디 물리치지 마십시오.”
결연한 대답.
물러설 기미가 조금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레는 창문을 닫았다.
문중에서 갑자기 유난을 떠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대제학 여식의 외침이 뇌리를 떠돈다.
문중에서 이렇게 할 리 없다 했지.
“설마, 문중이 아니란 말인가?”
문중이 아니라면 누굴까?
문득 다과회가 있기 전, 서강율이 찾아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 세자 저하께서?”
세자 저하라면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문중의 유별난 대응이나, 나날이 화려해지는 치장.
게다가 엄중한 호위까지.
“그래, 세자 저하셨어.”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그 냉정한 문중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호의를 베풀 리 만무하지.
세자 저하께서 손을 쓰신 게 틀림없었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세자 저하, 세자 저하셨던 거야.”
형운의 선물은 엉뚱하게도 세자의 공로로 탈바꿈하였다.
이 모든 것이 세손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최치성 덕분이었다.
***
음울하게 가라앉은 영빈의 침소에서 때아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과연 세자의 말씀대로였습니다.”
영빈 앞에 앉은 세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내 세자의 말을 듣고도 의아했는데. 직접 만나보니 과연 세자가 왜 그리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점이 그랬습니까?”
“총명한 규숩니다. 다른 간택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구석이 있더군요.”
생각에 잠겼던 영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예법이 그리 자연스러울 수 있을꼬.”
어미의 중얼거림에 세자가 선 굵은 미소를 지었다.
“자란 과정이 범상치 않습니다.”
영빈은 아들의 말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세자, 그 아이에 대해 잘 아는 모양입니다.”
“어쩌다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지혜롭고 솔직한 아입니다. 속내를 숨기고 셈을 꾸리는 자들과는 거리가 멀지요.”
영빈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처음 볼 때만 하여도 수수하고 꾸밈이 없어 보기 좋았는데, 요즘엔 나날이 차림이 화려해져 이상하다 생각하는 중입니다. 딱히, 꾸밈에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닌 듯싶은데.”
“그리 달라졌습니까?”
“사람이 변한 것은 아니나, 가마며 수모며, 차림까지 보통이 넘더이다. 집안 형편이나 뒷배가 그리 든든하지 않다 들었는데. 혹여 세자께서 돕고 있습니까?”
“그럴 리가요. 제가 어디 그런 것까지 살필 여유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누가 그러는지는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
“그럼 작은 조언 정도는 해주세요. 주상께선 검소한 것을 각별하게 여기시니. 과한 치장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기회가 되면 마마의 조언, 꼭 전하겠습니다.”
대화 내내 여유롭던 세자가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본 영빈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듣자 하니 주상께 오래도록 걸음 하지 않았다 하던데…….”
“제가 미욱하고 부족하여, 함부로 모습 보였다가 그분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 저어됩니다.”
“세자의 뛰어남은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는데, 어찌 주상께서 세자를 보았다고 심기 상할까요. 그러지 말고 한번 찾아가 보세요.”
“……유념하겠습니다.”
고개 숙인 세자의 낯빛이 여전히 불투명했다.
“그런데…….”
세자가 화제를 돌렸다.
“오늘 문 소원이 해괴한 작태로 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들었습니다.”
“아, 그 일 말입니까.”
영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넉넉하게 웃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저 무료한 궁궐 여인네 간의 작은 다툼일 뿐입니다.”
“소자가 나서야 할 때가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세자는 그런 자잘한 일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기력을 써야 할 곳이 천지 사방일 텐데.”
“제 마음 알아주는 분은 오직 어머니뿐이십니다.”
세자는 시원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정작 그의 속마음은 달랐다.
‘과연 자잘한 일일까?’
모든 일엔 징조가 있기 마련이다.
때로 사소하게 여기는 일이 지형을 바꾸고 세상을 뒤집어엎는 천재지변으로 변하기도 한다.
세자는 사소하게 넘기는 하찮은 것들에서 꺼림칙한 냄새를 맡았다.
바로 음모의 냄새.
궁 안에 상서롭지 못한 기류가 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