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27화 (27/215)

#27. 전하지 못한 진심

노을이 유난히 붉었다.

밤이 되자 파도가 밀려오듯 안개가 들어찼다.

아바마마의 변덕으로 다시 은자원에 출입하던 형운은 서둘러 세손궁으로 돌아왔다.

밤안개가 이리 짙은 날은 좀처럼 드물었다.

또한, 밤안개는 이따금 신비한 조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침소로 돌아온 형운은 내관과 궁녀들을 물리고 서탁 앞에 앉았다.

수북하게 쌓인 책들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특별히 골라놓은 백지를 서탁 위에 올렸다.

새하얀 눈 위에 누군가 새겨놓은 발자국처럼.

검은 자욱이 번져나가며 끝내 글을 이루었다.

-오늘도 무탈하셨습니까?

아아!

안부를 묻는 그 몇 글자가 그리도 반가울 수 없었다.

헤어진 누이를 다시 만난 듯, 형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구나.

여전하였구나.

넌 여전히 그곳에 있었구나.

어디 가지 않고 그곳에 있었어.

형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그녀가 백귀가 아님은 이미 확인하지 않았던가.

비록 직접 대면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녀가 살아 있는 사람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서탁에 있다 함은 잘못된 말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아무도 답하지 않는구나.”

제비꽃 여인이 안부를 물었음에도 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서로를 화, 상, 예로 부르는 자들이 앞다퉈 안부를 전하고 말을 걸고 하였을 터인데.

-비가 오려는지 달무리가 짙습니다.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수레에 가득 쌓일 만큼 많습니다.

여인도 답이 없는 서탁에 답답함을 느낀 듯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오늘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글을 접을 듯한 모습에 형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를 기다렸는데, 벌써 작별을 고한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오늘 달무리가 짙었음을 떠올렸다.

혹여 글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먹물 묻힌 붓끝을 종이 위에 세웠다.

무슨 말을 하여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먹 한 방울이 종이 위로 떨어졌다.

스스스슷.

글도 아니건만.

서탁 위에 펼쳐둔 종이는 허겁지겁 먹을 빨아먹었다.

그 모습을 보니 형운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형식적인 인사가 무에 필요할까.

그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았다.

-드디어 하늘이 내게 기회를 주셨구나.

곧 조심스러운 물음이 돌아왔다.

-혹시, 불손이십니까?

“그래. 날 기억하고 있구나. 그래도 날 그리 불러서는 아니 된다.”

-내 나를 그리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역시 불손이셨군요.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보이지 않아 걱정하였습니다.

서탁 속 시간은 멈춰 있는 듯했다.

제비꽃 여인은 마치 어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진 사람처럼 형운을 반갑게, 그리고 친근하게 맞이했다.

-불손!

무람없이 부르는 호칭도 여전했다.

글이 품은 밝은 기운이 형운에게 전해졌다.

늘 씩씩하고 당찬 여인.

궂은일을 겪어 행여 위축이라도 되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먼저 만나자고 한 분이 만남의 장소에도 아니 나오시고, 서탁에서도 흔적을 아니 보이시니. 영영 숨어버리거나 성불한 줄 알았습니다.

“성불이라. 아직도 날 백귀로 알고 있구나.”

멀리서나마 제비꽃 여인을 본 자신과 달리 여인은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백귀로 오해하는 것이리라.

형운은 빠르게 붓을 움직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숨기는 누가 숨는단 말이냐?

-네, 그러시겠지요.

-아무래도 지난번 대광통교에서의 일로 그러는 모양인데, 그때는 사정이 있어 그런 것이다. 원한다면 다시 한번 날을 잡아라. 내가 백귀가 아님을 확실히 증명해 보일 터이니.

-되었습니다. 한 번은 속아도 두 번 속지 않습니다.

-이번엔 틀림없이 증명하마.

“어디 그뿐이냐?”

형운은 서랍 속에 있는 제비꽃 머리꽂이에 시선을 던졌다.

저 머리꽂이가 내 손에 있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아이라 그런가.

혈육을 나눈 누이 같고, 때론 친한 벗인 듯 착각마저 들었다.

상상하는 형운의 눈가가 가늘게 휘어졌다.

-만나자. 마침 네게 줄 것도 있다.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이 물건을 직접 보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가고 말 것이다.

여러 차례 말해도 제비꽃 여인은 도통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찌해야 믿을까.

차라리 사는 곳을 알려달라 할까?

문득, 제비꽃 여인이 할아버지라 부르는 백귀들이 떠올랐다.

어느 날인가, 서로 사는 곳을 묻던 그들을 보며 왜 저러나 했더니.

이제야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갑갑했던 것이리라.

직접 만나 스스로를 증명하려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불손.

-나를 그리 부르지 말라 하였다.

-불손이 싫으시면 이름을 알려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름이라.”

하긴, 마땅히 부를 이름이 없으니.

제비꽃 여인의 마음도 이해되었다.

그렇다고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이름을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뭐라 부르라 할까?

“……은백.”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형운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불손’이나 ‘은백’이나 마음에 들지 않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굳이 더 싫은 것을 따지자면 밉살스러운 사내가 붙여준 은백이란 호칭으로 무게 추가 기울었다.

결국, 형운은 한숨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불손이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마.

이로써 불리는 이름이 셋으로 늘었다.

은백과 불손.

어째서인지 남이 모르는 또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것 같아 흥미로웠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론 불손이라 하겠습니다. 그보다 요즘 왜 보이지 않으신 겁니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걱정했느냐?

나도 네가 보고 싶었구나.

하나, 내가 원하여도 하늘이 원치 않으니 어쩔 수 없었구나.

-바빴느니.

-혹여 누굴 해코지하느라 바빴다는 건 아니시죠?

예전 같으면 발끈할 말에도 이젠 헛웃음만 나왔다.

-내가 남을 해코지할 사람으로 보이느냐? 누굴 도왔으면 도왔지 해코지할 사람은 아니다.

-아! 그런 분이시군요. 뵌 적이 없어 몰라뵈었습니다.

그래, 모르겠지.

아느냐? 나는 너를 도우려 한 적도 있단다.

스스로 빠져나가 결국 얼굴은 못 보았지만 말이다.

제비꽃 여인이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리 바쁘셨습니까?

나는 항상 바쁘구나.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그 누구보다 늦게 잠드는데도, 잠시 한가하게 쉴 틈도 없구나.

-곤궁에 빠진 사람을 도우러 먼 곳에 다녀왔다.

-먼 곳에 다녀오실 정도면 꽤 친한 벗인 모양입니다?

-아니다.

-그럼 혈육입니까?

-그 역시 아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제비꽃 여인이 글을 이었다.

-벗도 아니고 혈육도 아니면서 먼 곳까지 다녀오는 수고를 감수할 만한 분이시라니. 저로선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습니다.

제비꽃 여인의 말에 형운은 잠시 글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이레와 자신의 관계.

스스로도 의문이 드는 사이였다.

전엔 단지 약조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그다음엔 홀로 남은 여인을 버릴 수 없음이라 생각하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약조도 절반은 지켰다 할 수 있고, 의리도 다하였건만.

왜 자꾸만 생각나는 것일까?

형운이 이레와의 관계에 골몰할 때였다.

-아무래도 그분은 여인인 모양이군요.

-그걸 어찌 아느냐?

-벗도 아니고 혈육도 아니지만, 불손으로 하여금 먼 길을 마다치 않게 하니. 그런 관계가 연인 간의 정리가 아니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형운은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무언가 큰 착각을 한 모양이로구나. 나와 그 여인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애초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악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요. 사람의 마음이란 할 수 없다 생각하는 일에 더 절실해지는 법이라고요.

“악?”

낯선 이름이 등장했다.

못 본새 백귀가 늘어난 모양이다.

형운이 물었다.

-대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혹시 그 여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도 불구하고 괜스레 신경 쓰이고, 작은 몸짓에도 눈길이 가며, 돕지 못해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처럼 신경 쓰이니 바로 귀한 사람이란 뜻이 아니겠습니까.

“귀하다?”

형운은 이레를 떠올렸다.

신경 쓰였다.

작은 행동 하나에도 눈길이 가며, 오라비를 찾아주겠다고 한 약조를 지키지 못해 영 마음 불편했다.

그럼 그녀가 자신에게 귀한 사람이란 걸까?

형운은 제 어이없는 생각을 단호히 물렸다.

마음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마음을 따라선 아니 된다.

마음은 구름 같고 안개 같고 바람 같아, 시시때때로 변하고 형태를 달리하니, 마땅히 의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천지간 가장 중요한 것은 변치 않는 것이라.

옛 성현들의 말씀이 그러하고, 나라의 법도가 그러하고, 세손으로서의 마음가짐이 그러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 생각은 오해인 듯하구나.

-그럼 어찌 그리 마음 쓰는 겁니까?

-그건…….

망설이던 형운이 붓을 내렸다.

“이걸 무어라 해야 할까.”

이레에게 느끼는 책임감과 애틋함을 무어라 표현해야 옳을까.

오랜 고심 끝에 내린 두 글자.

긍휼(矜恤).

그저 그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돌보아주고 있는 것일 뿐.

-그 여인에겐 마음의 빚이 있다.

-아! 그런 것이로군요.

답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그리 믿는 것 같지 않았다.

형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이레와의 관계는 제비꽃 여인과는 상관없었다.

그러다 문득 제비꽃 여인이 젊은 여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침, 잘되었다.

세손이란 특별한 신분으로 인해 남에게 함부로 물을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서탁 너머의 사람에게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애초에 제비꽃 여인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니.

설사, 나중에 만난다 할지라도 정체를 숨기면 그만 아닌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느니.

-천지간에 모르는 것이 없다던 불손께서도 모르는 것이 있으십니까?

-여인에 대한 것이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답하는 속도가 전보다 빨라졌다.

관심을 보이는 게 틀림없을 터.

그나저나 이 일을 어떻게 전한다?

-젊은 여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이 마음을 어찌 갚아야 할까?

-그 미안함이 무엇입니까?

-약조를 지키지 못하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네가 아니다.

-저 말고도 더 있단 말입니까? 이제 보니 불손께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마음은 모쪼록 마음으로 갚는 법이지요.

-그리하지 못하니 묻는 게 아니냐.

-그렇다면 마음에 쌓인 빚만큼 소소한 선물을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선물?

-네. 상대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를 선물하여 불손의 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선물이라.”

뭔가를 줄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나쁘지 않다 여겨 구체적으로 물었다.

-어떤 선물이 좋겠느냐?

-그 여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면 좋겠지요. 형편이 되는 대로, 하지만 너무 부담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여인이 좋아하는 것이되, 형편만큼…… 부담스럽지 않은 선물이란 말이렷다.

-네. 어찌,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래. 조금은 도움이 되었구나. 이걸로 지난번 널 도와줬던 일은 없는 걸로 치마.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제비꽃 여인에게서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미간을 찌푸린 형운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이 먹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인 모양이구나.”

그는 아쉬운 얼굴로 서탁을 응시했다.

섭섭하구나.

몇 달 만의 대화인데, 작별 인사할 틈도 주지 않는구나.

그나저나…….

“선물이라.”

서탁 위에 남은 제비꽃 여인의 답을 손끝으로 훑었다.

그리고 얼마 후.

형운은 마침내 자취를 감춘 글씨를 입속으로 되뇌었다.

***

이른 아침.

세손궁의 회랑이 묵직한 무게로 쿵쾅거렸다.

좌익위 최치성.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 좀처럼 보기 드문 흥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세손의 부름이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라 최치성은 바람처럼 달렸다.

“저하, 소인 좌익위이옵니다.”

“들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처소 안으로 들어선 최치성은 몸을 굽혔다.

“불러 계시옵니까.”

서책에 시선을 묻던 형운이 고개를 들었다.

“너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 얼마더냐?”

느닷없는 물음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최치성은 곧 머리를 조아렸다.

“오늘로 십 년하고 두 달이 조금 넘었나이다.”

“무척 오래되었구나.”

“저하를 모심이 십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십 년 같아 오래되어도 오래된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도 십 년 전 처음 만났던 날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나이다.”

탁, 서책을 접은 형운이 최치성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다면 내 너에게 은밀하고도 긴한 명을 내릴 수 있겠구나.”

은밀하고 중요한 명이라는 말에 최치성의 눈빛이 달라졌다.

때가 되었구나.

세손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설사 그곳이 불지옥이라 할지라도 마다치 않으리.

“무엇이든 명령하시옵소서. 소신,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목숨까지 필요한 일은 아니니. 그런 유혈낭자한 말은 아껴두거라.”

“네, 저하.”

형운이 최치성에게 손짓했다.

최치성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오자 다시 손짓했다.

서로의 숨소리조차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비로소 형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 오늘 그대를 이리 부른 것은 경기관찰사의 자식 때문이다.”

“김기대, 그자 때문이옵니까?”

“아니. 그 누이의 일이다. 그 아가씨를 기억하느냐? 단옷날 너와 우익위에게 향낭을 선물한 여인 말이다.”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그 여인에게 무언가 소소한 것으로 되갚음하였으면 하는데.”

“소소한 되갚음이라시면…….”

잠시 망설이던 최치성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감히 어떤 연유인지 여쭤도 되겠나이까?”

“내 그 여인에게 오라비를 찾아주겠노라 약조를 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 약조를 지키지 못하였구나.”

“그 일이라면 저하께선 천심을 다하지 않으셨사옵니까. 더구나 아직 일이 끝난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그 일로 저하의 마음이 어지럽나이까.”

형운이 고개를 저었다.

“과정이 어찌 되었건, 내가 약조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마음이 불편하구나. 그러니 이 불편함을 조금은 덜고 싶어 그런다.”

“제가 무얼 하면 되겠나이까?”

대답하는 최치성의 음성에 열의가 넘쳤다.

명이 떨어지면 저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그 가문을 깨끗하게 정리하리라.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소소한 무언가로 그 여인을 위로하면 내 마음의 빚을 조금 덜 수 있을까 싶구나.”

“……?”

최치성이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소인이 귀가 어두워 하늘과 같은 말씀을 잘못 들은 듯합니다. 다시 한번 알려 주십시오.”

“그 여인에게 소소한 선물을 하고 싶다 하였다.”

“소소한 선물…… 말씀이옵니까?”

“그렇다.”

최치성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빛을 단단히 벼렸다.

소소한 선물이라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소소하지 않으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자신을 새벽부터 불러 은밀히 명할 리 없었다.

“명 받잡겠나이다.”

상명하복.

세손께서 내리시는 명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따지지 않고 받드는 것.

그것이 최치성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었고, 앞으로 살아갈 남은 생의 방향이었다.

우리 저하께서 원하시는데 뭔들 못 할까.

“저하.”

“무어냐?”

“소소한 선물이라시면 어느 정도면 되겠나이까?”

형운은 무심히, 그러나 정확하게 그 규모를 말했다.

“여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야 한다, 내 형편이 닿는 만큼. 또한, 부담되지 않을 정도면 될 듯하구나.”

제비꽃 여인은 이렇게 조언했다.

여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형편 되는 만큼, 여인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하라 하였다.

그 말을 형운은 여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 형편 되는 만큼,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이해했다.

제비꽃 여인의 조언을 절반만 이해한 것이라곤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형운은 무심히 하명했다.

하필이면 명을 받드는 이가 최치성이라.

융통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내는 고지식하게 세손의 말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그는 제멋대로 제 주인의 말을 부풀렸다.

최치성의 우직한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알겠나이다. 저하께 부담되지 않으며 저하의 권위에 누가 되지 않는 것으로, 준비하겠나이다.”

형운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잊지 마라. 소소해야 한다.”

거듭된 소소함이라.

최치성의 눈빛에 비장함마저 깃들었다.

“좌익위, 최치성. 신명을 다하여 반드시 ‘소소하게’ 하겠나이다.”

***

들판의 곡식이 여물어갔다.

단단하게 가시를 세우던 밤톨이 수줍은 속내를 드러냈다.

바람결에 무르익은 열매의 향내가 섞이기 시작했다.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드높았다.

상쾌한 공기에 가뿐해진 마음이라.

이레는 깃털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집 앞에는 그녀를 궁으로 데려가기 위한 가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마만 덩그러니 있을 뿐, 가마를 옮길 교꾼도 곁을 지키는 수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현숙한 느낌의 중년 여인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레 아가씨 되십니까?”

“나를 아십니까?”

수모가 차분하게 허리를 숙였다.

“여울네라 부르시면 됩니다. 오늘부터 쇤네가 아가씨를 모실 것입니다.”

공손하되 비굴하지 않은 모습.

예의와 절도를 갖춘 여인은 수모라기보단 사대부의 안방마님과 같은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문중에 이런 수모가 있었던가?

의구심에 이레는 잠시 머뭇거렸다.

“전에 하시던 분께선…….”

여울네가 홀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은 심한 고뿔에 걸려 더는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가마에 오르시지요.”

여울네는 가마의 문을 열고 발까지 옆으로 치웠다.

전의 수모와는 확연히 다른 공손함이라.

이레는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음?”

가마에 오른 이레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언가 달랐다.

아니, 정확히는 같고도 달랐다.

겉모습은 분명 지난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정작 내부의 꾸밈은 확연히 달랐다.

바닥엔 형형색색의 자수가 놓인 금침이 깔렸고, 사방의 벽엔 휘황한 장식이 그려지고 달렸으며, 지붕 안쪽에도 갖가지 것들이 치장되어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문 안쪽의 발조차도 평범한 대나무가 아니었다.

바뀐 것은 가마 안쪽만이 아니었다.

이레가 가마에 들기 무섭게 여울네가 가볍게 헛기침을 흘렸다.

장한 둘이 나타나 가마를 들었다.

지난번의 교꾼들은 가마의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워 연신 기우뚱거렸다. 그 바람에 가마를 탄 이레는 파도 심한 날 배에 오른 것처럼 심한 멀미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새로 교체된 교꾼들은 한 손으로 가마를 들고도 남을 만큼 덩치가 우람하였다. 가마를 끄는 기교는 또 어찌나 절묘하던지, 마치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레의 입에서 낮은 감탄사마저 흘러나왔다.

문중에서 이번 일에 꽤 신경을 쓰는 모양이구나.

***

세손궁의 담벼락 위로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다.

형운의 명에 단양으로 내려갔다 올라온 홍인모가 세손에게 그간의 일을 보고했다.

“단양 관아의 호방은 끝내 자취를 감추었사옵니다.”

“대단한 놈이구나. 아니면, 대단한 뒷배를 두고 있는 것이려나?”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던 형운은 몸을 의자 깊숙이 묻었다.

“김기대의 흔적은 어떠하냐?”

“아쉽게도 다른 흔적과 단서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형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눈치를 살핀 홍인모가 애써 밝게 말했다.

“사람을 풀어 계속 찾고 있으니, 곧 소식이 올 것이옵니다.”

“기왕이면 좋은 소식이면 좋겠구나.”

오라비의 봇짐을 품에 안고 돌아서던 이레의 작은 어깨가 떠올랐다.

그 커다란 눈에 또다시 실망이 어릴까 저어되었다.

설마, 이레가 오라비가 살아 있다는 생의 징표를 받은 것일랑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홍인모가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저하, 김기대의 누이와 관련한 특별한 명이라도 있었습니까?”

“오라비를 찾지 못해 상심이 클 듯하여, 내 위로의 차원에서 소소한 선물을 하라 했구나.”

홍인모의 물음이 이어졌다.

“무엇을 내리셨는지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형운은 대답 대신 최치성을 바라보았다.

선물하라 명을 내렸을 뿐, 정작 무엇을 선물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최치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손 저하의 형편에 부담되지 않으며, 또한 저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것. 그럼에도 그 여인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골랐나이다.”

형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홍인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는구나.”

홍인모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 영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는 최치성에게 다그치듯 질문했다.

“그래서 그게 대체 무엇이냐?”

최치성이 관심 접으라는 듯 홍인모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알아서 잘하였으니, 너는 걱정 마라.”

“설마…… 엉뚱한 선물을 한 건 아니겠지?”

홍인모의 우려에 최치성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바본 줄 아느냐?”

그 태도가 너무도 당당하였다.

“당연히 바보는 아니지만…….”

홍인모는 말끝을 흐렸다.

오늘따라 유난한 최치성의 웃음이 왠지 모르게 불안하게 느껴졌다.

***

궁궐 곳곳으로 계절이 현현했다.

붉은 단풍이 궁궐의 지붕과 담벼락에 눈처럼 내렸다.

황금빛 낙엽은 땅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형형색색, 가을 색으로 찬란한 후원에 간택인들이 모여들었다.

경쟁의 무게와 깊이를 가늠한 까닭인지.

그들의 차림은 지난번보다 더 화려해졌다.

피 흘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곳은 치열한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갑옷 대신 능수금라로 지은 옷을 입고 창과 칼 대신 집안의 위세와 권력, 그리고 미모로 무장했다.

조금이라도 돋보이기 위해서라면 뭐든 마다치 않았다.

이른 새벽부터 화장하고, 백방으로 사람을 보내 구한 귀한 패물로 몸을 장식했다.

고기도 먹어본 자가 맛을 알고, 물건도 써본 사람이 가치를 안다 하였던가.

사소한 노리개에 달린 보석으로 서로의 서열이 나뉘고, 신은 신발과 몸에 걸친 옷이 자존심의 척도가 되었다.

타고 온 가마가 달라졌고 심지어 수모들의 꾸밈새도 전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사대부의 여인인 듯 치장한 수모들 역시 제 주인의 등 뒤에서 저마다의 대리전을 치르느라 정신없었다.

그 살벌한 기세 싸움의 한가운데로 이레가 뛰어들었다.

맨 마지막으로 당도한 경기관찰사의 여식.

모두의 시선이 이레의 가마로 집중되었다.

위협적인 기세 싸움에 간택인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이레의 가마를 본 어린 처녀들의 눈빛이 분주히 오갔다.

잠시의 휴전이 필요한 시간.

마침 적당한 희생자가 등장했다.

팽팽하게 날을 세울 상대가 아닌 조금은 얕잡아 볼 수 있고 조롱해도 상관없을 존재.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간택인들은 조소 띤 얼굴로 이레의 가마를 힐끔거렸다.

하늘 높은 줄만 알았지, 사람 사이에 높고 낮음이 있는 걸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

양반이라고 다 같은 양반이 아님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 물색없는 아가씨를 어찌 놀려주어야 하나.

그런데…….

후원으로 들어서는 가마의 모습에 간택인들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정확하게는 빈한한 경기관찰사 여식의 가마를 멘 교꾼들의 모습에 그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인교 가마를 멘 두 명의 교꾼.

소맷자락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팔의 근육이 예사롭지 않았다.

형형한 눈빛과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

흡사 가마꾼이 아니라 일당백의 무장 같은 번듯한 모습인지라.

누가 저들을 가마나 메는 가마꾼이라 생각할까.

궁궐의 도도한 궁인들마저도 술렁일 만큼 대단한 교꾼의 모습에 간택인들은 넋을 놓았다.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두 평안하셨는지요.”

가마에서 내린 이레가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여인들의 시선은 이레가 아닌 가마 안으로 쏠렸다.

수모가 걷어 올린 가마의 칠보문 교렴.

가마 속 사면을 감싸고 있는 붉은색 저사.

그리고 주렴의 바깥과 안에 매달린 귀한 사향 향기.

오직 궁에만 들어가는 귀한 물품들이 이레의 가마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귀한 댁 아가씨들의 눈빛이 다급해졌다.

‘경기관찰사댁 형편이 안 좋다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어머니도 저 물품들을 구하려고 그리 애썼음에도 구하지 못했거늘. 저 여인이 어찌 저것들을 가진 걸까요?’

‘분명 무리를 하였겠지요.’

‘무리한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늘. 대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던 간택인들은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한껏 턱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싸움을 하기도 전에 패배한 듯한 이 느낌은 어찌하면 좋을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좋은 날입니다.”

해사한 웃음을 입가에 담뿍 머금은 이레가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감미로운 향내가 꽃잎처럼 나부꼈다.

***

같은 시각.

불현듯 생각난 홍인모가 형운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하.”

“왜 그러느냐?”

“경기관찰사댁 아가씨에게 한 선물 말이옵니다.”

“또 그 얘기더냐?”

“어떤 식으로 전했는지요?”

“글쎄다.”

“짧은 글귀라도 한 줄 덧붙이셨겠지요?”

대답하는 대신 형운은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리해야 하느냐?”

“네?”

너무도 당연한 표정이라, 홍인모는 자신이 말실수라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할 지경이었다.

홍인모가 다시 말했다.

“선물을 직접 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서신을 보내어 누가 하였는지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운이 혀를 차며 그의 세속적인 면을 꾸짖었다.

“무릇 군자는 선행을 베풀 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였다. 더구나 이번 일은 내 마음의 빚을 덜어보고자 한 것이거늘. 어찌 내색한단 말이냐.”

“도리는 마땅히 그러합니다만, 그래도 적어도 누가 보냈는지 정도는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총명하고 눈치 빠른 여인이 아니더냐. 선물을 받으면 뉘인지 궁금해할 것이고, 진즉 나인 줄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무렴, 좌익위가 어련히 알아서 잘했을까.”

최치성이 가슴 뿌듯한 표정으로 형운에게 아뢰었다.

“소신, 완벽하게 했나이다.”

홍인모의 혼잣말이 뒤따랐다.

“저 친구가 저리 장담하니 더 불안합니다. 저하.”

***

이레는 조심스레 가마의 창문을 열었다.

노을빛이 붉었다.

모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감상하는 노을인지라.

한참 넋을 잃었다.

교꾼들이 가마를 잘 멘 덕분인지.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 아늑하고 포근했다.

이레는 턱을 괸 채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감상했다.

문득 그녀의 눈에 궁궐의 지붕이 들어왔다.

저 어디쯤에 은자원이 있을 텐데.

오늘도 은자원엔 가지 못한 채 돌아가는구나.

대체 언제쯤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그나저나 문중에서 날 위해 이처럼 신경 쓰실 줄은 몰랐구나. 일간 고맙다는 인사라도 올려야겠다.”

이레는 노을 속으로 멀어지는 궁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최치성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형운의 진심은 이레에게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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