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26화 (26/215)

#26. 재회

서강율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침 일찍, 행랑 할멈이 이레를 궁으로 데려갈 가마가 당도했음을 알렸다.

복잡한 감정이 이레의 커다란 눈 속에 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기이했다.

어젯밤 서탁의 할아버지들께서 하신 우려와 걱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행랑 할멈이 애가 탄 얼굴로 이레에게 물었다.

“아가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궁에서 왜 아가씨를 부른대요? 아유, 내 정신 좀 보게. 잠시만 기다리셔요. 쇤네, 서둘러 따라나설 준비 하겠습니다요.”

방을 나서려는 할멈의 앞으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 자리가 어딘 줄 알고 그 꼴로 간다 하오?”

문이 열리고 낯선 중년 여인이 들어섰다.

문중에서 새로 보내준 수모였다.

초간택 때의 수모는 겉으로는 냉랭해도 속으로는 챙겨주는 척이라도 했으나, 새로 온 수모는 겉과 속이 모두 차가웠다.

“대체 무슨 요량을 쓰신 겁니까?”

커다란 경대와 대나무 패물함, 그리고 빗접을 든 수모는 인사 대신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한껏 내려보는 수모의 태도에 이레는 눈빛을 세웠다.

반상의 법도가 엄연하거늘.

그대로 보아 넘기기엔 저를 대하고 할멈을 대하는 수모의 교만함이 도가 지나쳤다.

“그보다 자네, 상전에게 예를 차리는 것은 잊었는가?”

당찬 이레의 모습에 수모는 어깨를 움찔했다.

궁색한 양반이라도 양반은 양반이렷다.

수모는 마지못해 고개를 조아렸다.

애써 추스른 입가에 마른 미소가 떠올랐다.

“송구합니다. 쇤네가 황망한 상황에 놀라 법도를 잊고 말았지 뭡니까.”

“말해보게. 무슨 일인가?”

“간밤에 문중이 발칵 뒤집혔지요. 궁궐에서 간택인들을 위한 귀한 자리를 만들었으니, 가마와 수행인을 준비하라는 서찰이 왔습니다.”

“문중으로 말인가?”

“아니면 제가 이른 아침부터 이곳까지 왔겠습니까?”

이레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수모를 바라보았다.

서강율이 가마가 마중 나올 거라 하여, 당연히 궁에서 보내는 가마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중으로 연락이 들어가다니.

“표정을 보아하니 아가씨께서도 아무것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문중으로 온 서찰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수모가 준비해온 경대를 열었다.

짙은 분내와 함께 화장에 쓰이는 용구가 가득했다.

빗접에서 빗을 꺼내 이레의 머리를 빗기며 수모가 말을 이었다.

“저같이 아랫것들이야 자세한 내막을 알 리 없지요. 그저 뜬소문으로 듣자하니, 궁의 높은 어른께서 초간택에 참여한 몇몇 간택인을 궁궐로 불러 다과회를 여시겠다 한 것 같습니다.”

“다과회라 하였는가?”

“모두를 청한 건 아니고, 특별히 몇 분을 골라서 불렀다 합니다.”

“거기에 내가 포함되었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 문중에서도 크게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강율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수모의 말은 전혀 달랐다.

몇몇 간택인에게 흥미를 보인 세자께서 궁으로 그들을 불러 글과 그림을 가르친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다과회라니.

설마, 세자 저하께서 글 대신 다과의 예법이라도 알려주시려는 걸까?

“문중에서 패용하실 패물을 보내셨습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나, 갖고 계신 것보단 나을 것이니. 마음에 드시는 것을 골라 보십시오.”

수모가 대나무 패물함을 열었다.

금과 은, 옥과 산호, 칠보로 만들어진 갖가지 패물과 여러 모양의 머리꽂이가 가득했다.

형형색색의 노리개와 고운 향내 나는 향낭도 있었다.

그러나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것이면 족하다네.”

이레는 기대가 선물한 머리꽂이를 제 머리에 꽂았다.

“그래도 가문의 체면이 있는데…….”

수모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니, 한다 해도 불편할 것이고. 불편한 장신구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편치 못한 자리가 불안해질까 염려스럽네.”

“아가씨 뜻에 따르겠나이다.”

단호한 이레의 말에 수모는 더는 어쩌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레는 면경 속의 제 모습을 확인하고는 방을 나섰다.

집을 떠나기 전, 할머니와 아버지께 인사 올렸다.

서강율에게 들은 바가 있었는지, 두 분은 선선히 허락하셨다.

“어차피 병풍이나 하러 가는 것이니, 크게 마음 쓸 것 없다.”

할머니의 말씀은 언제나처럼 매웠다.

예전이라면 잔뜩 위축되었을 말이건만.

이레는 그 매운 말투 속에 숨은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 말씀대로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오겠습니다.”

뒤돌아 앉은 할머니의 등을 향해 인사를 올린 이레는 서둘러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행랑 할멈이 그림자처럼 이레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 쇤네가 궁까지만이라도 함께할게요.”

노파의 고집에 수모가 야멸치게 눈을 흘겼다.

“괜히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댁네 아가씨 도와주는 일이오.”

할멈은 입이 한 발이나 튀어나왔지만, 대거리하지 않았다.

수모의 말이 과하긴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무릎 병이 깊어 제대로 운신하기도 어려운 처지이니.

아가씨에겐 방해만 되리라.

이레는 할멈을 다독였다.

“걱정 마, 할멈. 내가 할멈이 가르쳐준 말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으니까. 궁에서 조심조심, 차분차분 행동하고 말할 것이니. 아무 걱정 마.”

눈물을 훔치는 행랑 할멈을 위로한 이레는 수모에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피붙이처럼 나를 키운 사람이네. 앞으로 할멈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으이.”

음전한 아가씨의 숨겨진 대찬 모습인지라.

소리치고 겁박하는 것보다 배는 더 큰 위압감이 느껴졌다.

괜한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무마한 수모는 가마의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었다.

“늦었습니다. 제시간에 가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이레를 태운 가마가 집을 떠났다.

초간택 때나 지금이나 문중에서 보낸 교꾼들은 여전히 서툴렀다.

좌우로 출렁이는 가마에 앉으니 속이 진동했다. 그런 차에 가마 밖에서 수모의 불편한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이리 급한 일이면 차라리 간택인의 집으로 직접 연락해 준비하라 할 것이지, 굳이 문중에 알려 준비하게 하니.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도무지 알 길이 없네.”

혼란스러운 것은 이레 역시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이미 흐르는 물길에 몸을 실었음이라.

앞으로 닥칠 일을 미리 근심하기보다 지금 당장 할 일부터 차근차근 챙기는 게 옳으리라.

***

궁궐 후원의 초입.

영화당 마당으로 가마가 하나둘씩 당도했다.

이레의 가마는 다섯 번째로 영화당에 도착했다.

수모의 도움으로 가마에서 내린 이레는 여러 가지 의미로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우선 가마가 도착한 곳이 엉뚱한 장소임에 놀랐다.

서강율의 말에 의하면 응당 이레의 가마는 은자원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가마가 도착한 곳은 궁궐의 후원, 영화당 마당.

그다음으로 놀란 것은 먼저 온 간택인들의 면면이었다.

강율의 정보를 토대로 이레가 짐작한바, 이번 일은 세자 저하께서 임의로 정하신 일.

그러기에 이레와 함께 궁으로 초대받은 여인들은 재간택과는 하등 관계없는 집안의 간택인들.

즉, 이레처럼 재간택과 삼간택에 오를 간택인들의 병풍 노릇이나 하는 여인들이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이레보다 앞서 영화당에 당도한 네 명의 간택인들은 생김이 수려하고, 행동이며 말하는 본새가 고상하고 우아하여 아무리 봐도 병풍 노릇이나 하러 온 사람들 같지 않았다.

그들이 타고 온 가마는 또 어떠한가.

초간택에서는 따로 궁에서 지정한 형식이 있어 모두가 비슷한 모양과 색, 그리고 비슷한 크기의 가마를 탔다.

하지만 영화당 마당에 줄지어 선 가마들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같은 점이라곤 두 사람이 멘 이인교라는 사실뿐.

가마의 꾸밈이나 치장으로 따지자면 이레가 타고 온 것은 앞서 도착한 간택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영화당에 모인 처녀들은 귀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누구보다 우아하고 화려하게 한껏 모양을 냈다.

모든 간택인이 똑같은 색의 치마와 저고리, 그리고 최소한의 장신구를 해야 했던 초간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동안 드러내고 싶어도 드러낼 수 없었던 권세의 차이가 오늘만큼은 고스란히 민낯을 드러냈다.

호화찬란한 무리 속에 초간택 때와 다름없는 차림의 이레가 껴 있으니,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눈에 띌 지경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간택인들은 새로 당도한 이레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들의 시선에 안도의 빛이 배어들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때, 마지막 여섯 번째 가마가 영화당에 당도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받은 가마의 문이 열리고, 대나무 발이 위로 올려졌다.

가마의 곁을 따르던 수모가 당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순간, 지켜보던 처녀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저건 사천 황 노인의 화혜가 아닌가?”

“일 년을 기다려도 신을 수 없다고 하던데. 혹, 그럴듯하게 흉내 낸 위작이 아닐까?”

“그럴 리가. 코끝에 하얀 꽃술을 저리 정교하게 달 수 있는 갖바치는 조선을 통틀어 황 노인뿐이라고요.”

수군대는 목소리에 가마 속 여인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했다.

재물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는 화혜를 신은 여인.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윽고 아름다운 당혜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보라 열두 폭 치마.

소매와 깃을 흰 능수로 덧대고, 만발한 연분홍 매화꽃을 수놓은 붉은 저고리.

단지 입고 걸친 옷과 신발만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허리까지 땋아 내린 풍성한 머리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진주알이 하늘의 별빛처럼 수놓였으니.

아리따운 미색과 더불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귀하고 화려한 치장으로 가득했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늘 세상의 선인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아름답고 미려한 여인이었다.

여인의 아름다움에 잠시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이레는 서둘러 묵례를 건넸다.

새치름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깐 상대 역시 가벼운 몸짓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내 조부께선 전(前) 좌의정을 지내셨소. 그리고 부친께서는 지금 대제학이시지요.”

여인은 나직한 음성으로 자신의 가문을 소개했다.

그러고는 물어보는 눈빛을 이레에게 건넸다.

“이레입니다.”

이레는 밝은 얼굴로 이름부터 밝혔다.

여인은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듣고 싶은 게 달리 있음이라.

남의 신상이 무에 그리 궁금할까 싶으면서도 이레는 대답했다.

“제 아버진 경기관찰사로 계십니다.”

이윽고 여인에게서 반응이 되돌아왔다.

“아.”

참으로 묘한 의미를 담은 탄성이었다.

쓱, 훑는 시선과 함께 대제학의 여식은 그대로 이레를 지나쳐 영화당으로 들어섰다.

옹기종기 모인 어린 처녀들이 그녀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뜻밖의 태도에 어리둥절하던 이레는 뒤늦게 웃었다.

“……그런 것이로군.”

총명한 여인인지라.

짧은 대화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대제학 여식만의 일이 아니었다.

다른 간택인들도 오가는 웃음 속에 서로에 대한 견제가 어려 있었다.

심지어 수모들 사이에도 위계가 존재했다.

이레 앞에선 문중을 앞세우며 허리를 꼿꼿이 하던 수모도 이곳에선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였다.

불현듯 이레의 뇌리로 상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짐승이 만나면 영역을 두고 싸움하고, 사람이 만나면 우열을 두고 다툰다. 서로 비교하고 다투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매한가지. 본성이 그런 것이다. 그러니 너 또한 낯선 자 앞에 서면 절대 얕보이면 안 되는 것이다.

예전엔 그게 무슨 말인가 하였다.

하지만 그 첨예한 충돌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이제야 그 뜻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레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은자원에 가기 위해 온 것이니.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는 간택인들과 자신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딱히 기분 나쁠 이유도, 마음 상할 필요도 없었다.

‘한데 서 선비님의 말씀과 지금의 상황은 전혀 다르니. 어찌 된 영문일까?’

서강율의 말은 그의 수상한 신분만큼이나 혼란한 구석이 많았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언인지…….’

아무렴 어떤가.

할머니 말씀대로 그저 소리 없이 자리 지키는 병풍 노릇이나 하다, 은자원으로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

간택인들 사이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 멈춘 것은 모임을 주최한 영빈마마께서 모습을 드러낸 이후였다.

넉넉하고 자애로운 인상의 여인은 세자 저하의 친어미이자, 주상 전하께서 아끼는 후궁이었다.

중년의 나이가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맵시나 행동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영빈은 영화당에 모인 간택인들에게 일일이 눈인사를 건넸다.

“지난번 초간택에서 인사받고 글도 보았더니, 학식이 깊고 예법에 밝아 크게 궁금함이 일지 뭐요. 하여, 오늘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하였소.”

영빈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가득했다.

간택인들도 저마다 입가를 길게 늘여 미소 지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곳에 온 사연은 제각기 다를 것이나, 기실 그들의 두 어깨에 가문과 집안의 막중한 사명이 담겨 있었다.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 모두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눈앞에 보기 드문 다과가 즐비함에도 그 누구도 함부로 즐기지 못했다.

그에 반해 이레는 마음이 가뿐하였다.

애초에 그녀의 볼일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으니.

부담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은자원에 드나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왕실의 큰어르신 앞이라 조심하고 예를 갖추었지만, 딱히 잘 보이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

그러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서탁의 할아버지들에게서 배운 예의와 범절이 범상하지 않음을.

처음에는 저에게만 엄한 할머니의 눈에 들기 위해 배운 예법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다가서기 위해 서탁의 할아버지들에게 방도를 물었고, 할아버지들은 어른들이 좋아할 법한 예와 법식을 알려주었다.

묘하게도 할아버지들을 통해 배우고 익힌 예법이 궁중의 법도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예법에 익숙했던지라.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궁중의 법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손짓 하나, 웃음 한 자락.

찻잔을 들고, 음식을 먹을 때조차.

단편적인 대응과 행동. 길고 깊은 인상과 여운까지.

자연스럽고 편하되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았다.

마치 왕실에서 나고 자란 듯 자연스러운 모습인지라.

은연중에 시선을 끌었다.

그야말로 낭중지추(囊中之錐).

그러한 이레가 두각을 보인 것은 다과상을 치운 후의 일이었다.

궁궐의 예의와 법도에 대해 여러 말이 오가고, 영빈과 함께 온 궁의 여사(女士)가 모두에게 백지를 나눠 주었다.

“초간택에서처럼 좋아하는 글귀를 쓰시면 됩니다.”

느닷없는 주문에 간택인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영빈은 자상한 미소로 간택인들을 격려했다.

“지난번, 초간택에 나온 글이 곱고 총명해 이 늙은이가 놀랐다오. 욕심 많은 늙은이가 귀한 댁 아가씨들의 글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이리 청하는 것이니. 그저 놀이 삼아, 더러는 할미에게 자랑삼아 써주면 되오.”

영빈의 말에 간택인들은 하나둘, 붓을 쥐었다.

그러나 막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초간택에서야 언질받은 것이 있으니 미리 준비하였지만 이번은 사정이 달랐다.

딱히, 글공부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당장 무엇을 쓰라 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하물며 영빈마마께서 빤히 보고 계시지 않은가.

떨리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었다.

결국, 제일 먼저 글쓰기를 끝낸 사람은 이레였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영빈이 이레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서탁의 할아버지들과 대화하는 것 같아 즐겁기까지 했다.

아무렴, 무섭기가 우리 할머니보다 더할까.

“어이쿠, 이게 뭔가.”

이레의 글을 본 영빈의 입가에 긴 미소가 걸렸다.

香葉嫩牙

佳人皆貴人愉

書卓紙筆墨朋友

煎黃色碗轉曲坐花

夜後邀陪明月晨前命對朝霞

洗盡貴美人不倦將至醉後豈堪

잎새와 향

미인과 귀인

서탁과 지필묵 벗하여

탕관 속에 이는 작은 거품

밤엔 달 아침엔 안개 속의 음차

쌓인 피로 풀어주며 취한 뒤엔 선약

“보탑시(寶塔詩)로군. 참으로 재미난 내용이로고.”

탑처럼 층층이 쌓인 시를 살피던 영빈이 이레에게 물었다.

“이게 무엇이오?”

“당나라 시인, 원진의 일자지칠자시차(一字至七字詩茶)입니다.”

“내 알기로 그 시는 차에 대한 효능을 말함인데, 이 시는 내용이 조금 다른 것 같소.”

“자리가 자리인지라, 사소한 말장난을 하였나이다.”

“가만 보자, 마치 층을 쌓듯 쌓아 올린 것이 참으로 즐겁구려. 그러고 보니 초간택에서 화문시를 쓴 간택인이 있다던데. 혹여…….”

“변변찮은 재주를 기억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자신을 한껏 낮추는 이레를 향해 영빈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른 분들은 어떤 글을 보여 주시려오?”

영빈이 재촉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간택인들은 입고 꾸민 빛나는 장신구와 달리 잿빛이 된 낯빛으로 머리를 바닥으로 숙일 뿐이었다.

누구에겐 불편하고, 또 어떤 이에겐 유쾌한 시화 놀이는 미시가 다 지나서야 끝이 났다.

영빈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번엔 다른 재미난 놀이가 기다리고 있을 게요. 모처럼 궁에 생기가 활짝 피어 이 늙은이가 즐겁소이다.”

“…….”

다음에 또?

초대한 영빈은 즐거운데, 정작 초대받은 간택인들은 사색이 되었다.

몰래 속닥거리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앞으로 적어도 열흘은 더 이 노릇을 해야 한댔어요.”

자리가 자리인지라,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대놓고 불만을 입에 올리는 이 없었다.

미시말(오후 3시).

다과회를 마친 영화당에서 여섯 채의 가마가 궁궐의 각기 다른 문으로 향했다.

***

“이상하다.”

집으로 돌아온 이레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 은자원의 일을 하여야 한다 했는데…….”

정작 그녀가 오늘 한 일이라곤 문중에서 보낸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가 영빈마마를 뵙고, 다과와 시화를 즐긴 것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은자원으로 가기 위한 과정 중의 하나라 생각했는데.

분명 교꾼이나 수모에게 무슨 언질이 있었으리라.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도착하였단 소리에 가마에서 내려 보니 집이었다.

은자원엔 왜 아니 들렀는가, 묻는 이레에게 수모는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은자원이라요? 그게 무엇입니까? 아무튼, 쇤네는 할 일을 마쳤으니 이만 돌아가렵니다.”

“이상하다. 이상해.”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은자원에 몰래 드나들어야 하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공연히 피운 연기인지도 모른다.

“오늘이 아니라면 다음엔 분명 갈 수 있으리라.”

영빈마마께서 기약한 다음이 은자원으로 갈 수 있는 다음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신기한 일이었다.

서강율이 가라 하였을 땐, 마음이 번잡하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세자 저하께서 시키신 일이니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때가 되어도 가지 못하니, 자꾸만 안달이 났다.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처럼 마음이 답답했다.

결국, 이레는 붓을 들었다.

-오늘도 무탈하셨습니까?

이레의 붓이 서탁 위를 휘저었다.

어쩐 일인지 그녀의 인사말이 사라지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이레는 창을 열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글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달무리가 짙구나.”

노을이 하늘 끝으로 낮게 기울더니, 달무리가 유달리 짙었다.

이런 날은 할아버지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포기해야겠다.”

은자원의 일을 알리고 궁궐에 있었던 재미난 일들도 전하고 싶었건만.

날이 이래서야 요원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스스스슷.

예상과 달리 그녀가 쓴 글이 흐릿해지더니 곧 자취를 감추었다.

이레는 반색하며 서탁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글이 사라졌음은 누군가 보았다는 의미.

과연 어느 분께서 보셨을까?

이레는 설레는 마음으로 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글이 떠오르지 않았다.

흔치 않은 일이라.

이레는 다시 글을 적었다.

-비가 오려는지 달무리가 짙습니다.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수레에 가득 쌓일 만큼이나 많습니다.

글을 마치고 붓을 내려놓기 무섭게 글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엔 답변이 돌아왔다.

-.

점 하나.

고작 점 하나뿐이라니.

이레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그려졌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인사도 대답도 아닌 점 하나.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시, 상할아버지께서 장난하시는 건 아닐까?

그녀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새로운 글이 나타났다.

-드디어 하늘이 내게 기회를 주셨구나.

찍어낸 것처럼 반듯한 글씨.

할아버지들에겐 저마다 특유의 필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할아버지도 이처럼 틀에 맞춰 쓴 것처럼 완벽한 필체를 가지지 않았다.

이런 필체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혹시, 불손이십니까?

그녀의 글이 사라졌다.

대답이 돌아왔다.

-내 나를 그리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달무리 짙은 밤.

이레는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불손과 재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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