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가을의 길목
재간택일이 정해지고도 남음인데.
궐에서는 아직 아무 소식이 없었다.
보통은 간택 때마다 낙점자가 정해져 간택 전교가 내리곤 하였다.
그러나 이번 간택은 어쩐 일인지 낙점자도 정해지지 않았고, 때문에 간택 전교를 받은 간택인은 아무도 없었다.
소문으로는 재간택에 내정된 어느 권세 높은 가문의 여식에게 작은 문제가 생겼다고 하고, 또 다른 소문에는 내정된 어느 집안의 여식을 두고 궐 내에서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다고도 했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간택에 참여한 이레에겐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초간택에 참여한 간택인들에게 채워진 보이지 않는 족쇄였다.
속내야 어찌 되었든 존귀하신 분의 간택인으로 참여하였으니, 재간택과는 무관하게 몸가짐을 조심하여야 했다.
법보다 무섭고, 성벽보다 견고한 것이 바로 암묵적으로 정해진 관습이었고 틀에 박힌 고정 관념이었다.
늦더위가 요란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에 한낮엔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밤이 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알렸다.
이레는 동창을 열었다.
달과 구름이 한데 어우러졌다.
밤 풍경을 확인한 그녀는 습관처럼 서탁 앞에 앉았다.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간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하는 일.
귀찮을 법도 하건만, 이레는 이 일련의 과정들이 전혀 귀찮지 않았다.
아니, 되려 소중했다.
그러기에 치성을 올리듯 느리고 조심조심 한 단계 한 단계 진행했다.
그것이 비록 백귀일망정 자신을 걱정하고 소중히 여겨주는 할아버지들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다.
고마움을 생각하면 마땅히 절이라도 올려야 하건만.
그저 눈에 보이는 건 서탁뿐인지라.
하여, 할아버지를 만날 수있는 과정에서라도 정성을 다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잘 지내셨습니까?
종이에 쓰인 글이 물안개처럼 흐려졌다.
그 흐릿한 잔상이 깨끗하게 지워지자, 빈자리를 메우듯 새로운 글이 나타났다.
-그래. 너도 잘 지냈느냐?
화할아버지였다.
이어 상과 예의 글도 존재를 드러냈다.
-오늘도 성불하지 못하였느냐?
-별일은 없었느냐?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말씀 속엔 언제나 이레의 안위를 걱정하는 물음이 담겼다.
단양을 다녀온 지, 일주일.
여전히 할아버지들은 이레를 걱정하였다.
이야기의 시작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저 일상적인 하루를 서탁에 쓰는 것에 불과했던 이레가 아니던가.
별채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였으니, 별다른 일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면 세 분 할아버지들께서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내놓으셨다.
이야기책을 써주시는 분도 계셨고, 성현의 말씀을 새겨 주시는 분도 계셨다.
사람 사는 이야기, 조심해야 할 일과 위험한 일들에 대한 조언.
때로는 같은 이야기를 두고 세 분의 견해 차이로 설전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말씀 드린다면 할아버지들이 어찌 생각하실까마는.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이레에겐 그분들의 말싸움마저도 재미있었다.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신기하고 흥미진진했다.
그랬던 일상이…….
-지난 한 달간 큰일이 많아 이젠 안부를 묻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 되었구나.
예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지난 한 달간의 일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아찔할 만큼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널뛰듯 매 순간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수없이 오가야 했다.
그래도 이젠 그 일을 추억으로 곱씹을 수 있었다.
붓을 든 이레의 눈가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어쩌죠? 오늘은 무탈하지 못하였습니다.
글이 사라지기 무섭게 화와 상의 글이 달렸다.
-또 무슨 일이 있었느냐?
-과연 귀의 세계로구나. 도무지 평안한 날이 없어. 무슨 일이냐? 혹, 오라비의 소식이라도 들었더냐?
예가 상을 타박했다. 항상 예의 바른 그에겐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어련히 말하지 않을까. 구태여 물어보는 심사가 대체 무엇이오?
-궁금한 걸 묻지도 못해?
상이 발끈하였으나 화도 예도 답하지 않았다.
답답한 한숨을 쉬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레가 글을 썼다.
-오라비의 소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라. 볼일이 끝나면 돌아오실 겁니다.
그저 마음 다독이려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오라비의 징표를 본 이후, 이레는 더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럼 무슨 사연이냐? 무탈하지 않았다니.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구나.
화의 물음에 이레가 차분히 답했다.
-오늘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뜻밖의 손님?
화의 물음에 이레가 조심스레 글을 이어나갔다.
-점심 무렵 오라버니의 친인이라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
“손님?”
행랑 할멈의 전언에 이레는 큰 관심을 보였다.
객이 집을 찾는 경우일랑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할멈이 언급한 손님은 특별했다.
“작은 사랑채를 찾은 손님이란 말이야?”
“네. 틀림없이 기대 도련님과 아는 사이라 하셨네요.”
“이상하네.”
“그러니까요.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우리 도련님, 관직에 오른 이후로 여태 누굴 집에 들인 적이 없으시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도련님의 벗이라는 분이 도련님 안 계신 집에 찾아오시니. 참말 요상한 일이 아니고 뭐랍니까.”
행랑 할멈의 말처럼 벼슬길에 나간 이후, 기대는 친우들과 거리를 두었다.
어찌하여 저러실까, 처음에는 의아했다.
본디 사람 사귀는 것을 즐기지 않으시긴 했지만, 그래도 저리 딱 주변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오라버니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 이후, 그 모든 선택이 자연스럽게 납득되었다.
할멈의 수다가 이어졌다.
“쇤네는 신기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네요.”
“의심?”
“그렇잖아요. 혹 기대 도련님의 행방을 빌미로 이 집안에 눌러앉아 식객 노릇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이레가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사기꾼 같아 보이진 않더라고요. 생긴 것도 멀끔하고, 무슨 이유로 왔느냐 물었더니, 전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 하지 않겠어요.”
“전할 말이 무엇이라 하던데?”
“직접 주인 어르신을 뵙고 말해야겠다 했어요. 그래서 큰 사랑채로 안내를…… 아가씨, 어디 가세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직접 가서 봐야지.”
어쩌면 손님이 오라버니의 소식을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급해진 이레는 아버지가 계신 큰 사랑채로 뛰어갔다.
큰 사랑채의 중문을 넘어서기 무섭게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때때로 웃음소리도 터져 나왔다.
아버지가 웃으시다니…….
평소 엄하고, 더없이 진지하신 분인지라.
웃기는커녕 작은 미소조차 보이는 일이 드물었다.
오라버니가 사라진 이후엔 그 희미한 웃음기마저 얼굴에서 모두 사라졌다.
그런 분께서 웃고 계신다.
사랑채 대청마루 아래에 선 이레에게도 들릴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웃음에 할머니의 것도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아버지께서 목석 같은 분이라면, 할머니께선 석빙고 같은 분이시라.
일 년, 사시사철, 그분의 시리고 차가운 마음에는 한 치 변함이 없으셨다.
그런데 지금은 웃고 계신다.
웃지 않으려 애쓰지만,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그런 웃음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무슨 소식인데, 저리 좋아하실까.
아니, 아니다.
그보다 궁금한 건 저 두 분을 저리 웃게 하는 오라버니의 지인이라는 사람이다
대체 어떤 조화를 부렸을까.
더운 여름에도 을씨년스런 냉기만 흐르는 이 집에 느닷없이 생기가 흘렀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이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덜컥.
비밀을 간직한 사랑채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그럼, 일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꼭 그리하게.”
대청마루까지 나온 아버지께서 그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생각보다 젊은 사내였다.
낙인처럼 넉넉한 웃음을 입가에 새겨넣은 사내.
산수화가 그려진 부채가 무척 잘 어울리는 사내.
“하하. 이게 누군가?”
이레를 본 사내가 신을 신기 무섭게 달려왔다.
다짜고짜 덥석 손부터 잡으려는 사내를 피해 이레는 재빨리 반보 물러섰다.
그리고 맑은 미소로 그를 반겼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서 선비님.”
텅 빈 제 손을 내려다보며 허탈한 표정을 짓는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서강율.
은자원의 첫 번째 은자였다.
***
“어떻게 한 것이오?”
별채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서강율이 물었다.
활짝 열린 방문.
행랑 할멈이 툇마루에 괜한 걸레질을 하며 서강율을 훔쳐보았다.
미소 지은 얼굴로 할멈을 응시하던 이레가 강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얼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내 손을 피할 수 있는 게요?”
“허락도 받지 않고 대뜸 잡으려 드니, 피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의 손이라도 잡을 재주가 있다오. 그런데 낭자에겐 이 사람의 조악한 기술이 통하지 않는구려.”
“그러고 보니 처음 은자원에서 선비님을 뵐 때도 그러셨지요. 사람을 반기는 선비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남녀가 유별하니 가려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소. 김기대, 그 친구의 누이라는 소리에 반가워 저도 모르게 손을 잡으려 하였는데…….”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설마, 나보다 더 놀랐겠소? 처음이었다오. 잡고자 한 손을 놓친 건.”
“그래도 일전에 한 번 당했습니다.”
“언제? 아! 나루터에서. 그때는 낭자의 당황한 틈을 보아 간신히 성공한 것이었지. 그러면 오늘까지 한 번 이기고, 두 번 진 것이 되는군.”
서강율은 부채질하며 이레의 손을 곁눈질했다.
이레가 손을 서탁 아래로 슬며시 감췄다.
“그보다 무탈하셨습니까? 단양에서 떠나는 모습을 뵙지 못해 걱정하였습니다.”
“내 소식을 은백에게서 듣지 못하였소?”
이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은백이라니요?”
“허허. 그 무심한 사람이 그 중요한 이야기도 하지 않은 게로군.”
“은백이 누굽니까?”
“누구긴 누구겠소. 은자원에서 할 일 없이 빈둥대며 필사나 하시는 그 사람을 뜻하는 게지요.”
할 일 없이 필사나 하는 사람이라면…….
이레의 뇌리로 형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백수라니.
은자원의 서류 정리는 그분이 도맡아 하다시피 하시거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레는 항의하듯 말했다.
“아! 언제나 묵묵히 계시나 누구보다 큰 존재감을 가지신 은백(隱伯). 그분 말씀이군요.”
“우두머리가 아니라…….”
이레는 슬며시 말꼬리를 돌렸다.
“그보다, 단양에선 어찌된 일입니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훌쩍 사라져버려 많이 걱정하였습니다.”
“당연히 있었소. 그런데 정말 은……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서 선비님이 저를 버리고 도망갔다, 라고. 아주 짧고 명료하게 대답하셨지요”
“이런! 어찌 그런 망언을.”
강율은 분통을 터트리며, 쥘부채로 서탁을 내리쳤다.
마치 서탁이 맞는 듯한 모양새라.
이레의 미간에 절로 주름이 그려졌다.
그녀는 구석에 쌓인 책 몇 권을 주섬주섬 가져와 서탁 위에 올렸다.
눈치 빠른 서강율이 호기심을 보였다.
“책은 왜 꺼내시오?”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소중한 서탁이라. 혹여 흠집이라 날까 하여.”
“허허. 내 그런 줄도 모르고 실수하였소.”
“……아닙니다. 말씀 계속하십시오.”
“하여간 그날 난 낭자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 급한 볼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러고 보니 주막에서도 훌쩍 떠나셨지요.”
“그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나중에 보니 남의 잔칫상에서 즐기고 계시던데.”
무심히 이어진 이레의 대꾸에 서강율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하하. 정곡을 찌르는 낭자의 재치엔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소이다. 내 어디 가서 말로 빠지는 사람이 아니거늘. 하하, 참 덥구려.”
“입담이라면 오히려 제가 더 놀랐습니다. 제 할머니와 아버지께서 오늘처럼 웃으시는 건 오라비께서 과거에 붙은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별일 아니었소. 표정이 삭막하시어, 그저 별거 아닌 말씀, 몇 자락 드린 것뿐이라오.”
“그랬군요.”
“…….”
“…….”
“그 별거 아닌 말씀, 궁금하지 않으시오?”
이레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도 궁금하나, 지금은 선비님께서 찾아오신 연유가 더 궁금합니다.”
“그래도 별거 아닌 말이…….”
“볼일부터 말씀하시지요.”
“……별건 아니고, 은자원 일에 대한 것이라오.”
“은자원은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그간 기대. 그 친구에 관한 온갖 음해로 소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오. 그러나 이젠 모두 말끔하게 정리되었소.”
“참으로 다행입니다.”
은자원이 정리되었다니.
진심으로 마음 기뻤다.
오라버니의 자취가 가득한 곳.
뿐만 아니라, 자신의 추억도 있는 곳이 아니던가.
어두운 실내.
작은 등잔불 아래, 책 속에 고개를 파묻은 사내.
멀리서 들려오는 파루의 북소리.
그날, 그 밤.
그리고 약조…….
상념에 잠긴 이레의 귀로 강율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듣고 계시오. 낭자?”
“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아닙니다. 잠시…… 그런데 무슨 말씀을 하시었습니까?”
“은자원의 일 말이오. 내일부터 도와달라 하였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뜬금없는 요구에 이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어찌 은자원의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관직에 오른 것도 아니요, 상궁이나 궁녀들처럼 궁에 드나들 신분도 아니었다.
“소식 못 들었소?”
“무슨 소식 말입니까?”
“어허, 이상타. 분명 기대 그 친구를 대신하여 낭자가 은자원 일을 하게 되었다 들었는데.”
“무슨 착오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외다. 분명 확실하고 분명한 지시가 있었다오. 물론, 일의 성격상 따로 직첩을 따로 받거나 신분패를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오. 낭자, 정말 이 일에 관해 전혀 아는 바 없소?”
“없습니다. 은자원에 관한 것이라면 아무것도…….”
도리질하던 이레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일주일 전, 의도치 않게 뵈었던 존귀한 분의 모습.
세자저하.
친히 오라비의 일을 사과하신 그분께서 팽례의 패를 돌려주며 슬쩍 혼잣말처럼 흘린 말.
‘아니면 그대로 네가 사용하여도 될 터이고.’
설마, 그 말이었던가.
별 뜻 없이 하신 말씀이 아니었던가.
이레의 표정을 살핀 서강율이 씩 미소를 그렸다.
“것 보시오. 역시 뭔가 있었던 모양이오.”
“하지만 그 일은…….”
강율은 접은 부채를 입 앞에 세웠다.
“쉿! 우리 일이라는 게 원래 은밀함이 우선이라, 남 보기엔 이상하고 기묘하며 때로는 뜬금없어 보일 수 있다오.”
“하지만 이번 일은 착오가 분명합니다.”
“왜 그리 생각하시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초간택에 참여한 간택인입니다. 간택에 참여한 간택인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바깥출입을 삼가며. 특히, 사내와의 동석은 피해야 한다.”
“잘 아시는군요.”
“법이란 게 모호한 구석이 많아 해석하기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오.”
“하지만 해선 안 되는 일이라는 건 틀림없이 존재하지요.”
“그렇게 보자면, 이미 해선 안 되는 일이라면 숱하게 한 낭자가 아니오.”
서강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물었다.
이레는 말문이 막혔다.
강율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초간택을 자청하여 궁에 들어가 야밤에 궐내를 활보하였고, 그도 모자라 남장을 한 채 단양으로 향했다.
비록 아무 일도 없었으나, 사내들과 한방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이런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은 둘째치고, 가문의 위신마저 흔들리게 되리라.
“그래도 안 되는 일입니다.”
위험한 일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옳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은자원에 드나드는 일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설마, 제게 또 남장을 하란 말씀은 아니겠지요?”
“그건 내가 반대하오!”
강율이 다시 서탁을 세게 내리치며 큰소리쳤다.
이레는 반사적으로 서책을 몇 권 더 꺼내 그 위에 올렸다.
서강율이 물었다.
“이 서탁이 무엇인데, 그리 애지중지하시오?”
“말하지 않았습니까? 유품입니다. 할아버지의. 단 하나뿐인.”
대답하는 이레의 음성에 뾰족한 각이 서 있었다.
“하하. 유일한 유품이라. 아까는 게 당연하구려. 미안하오. 내 손보다 서탁을 더 아껴 질투가 난 것이니. 부디 이해해주시오.”
이레는 그의 너스레를 못 들은 척 말을 이어나갔다.
“적어도 남장을 하란 말은 아니로군요.”
“아무렴. 그 어설픈 모습을 남이 보았다간 되려 궁의 모든 관심을 받게 될 것이오.”
다행이었다.
남장을 하라는 건 아니니.
한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어설픈 모습이라…….
뒤늦게 실언을 눈치챈 강율의 변명이 이어졌다.
“남장으로 가리기엔 낭자의 미태가 너무 곱소.”
“…….”
“진심이오. 오죽하면 조선 팔도를 두루 다니며 숱한 미인을 본 이 사람이 낮이고 밤이고 틈만 나면 그대 생각만 하겠소.”
“변명은 그쯤 하셔도 됩니다.”
싸늘한 이레의 반응에 강율은 부채로 눈 아래를 가리며 눈빛을 보였다.
“변명 아니오. 진심이오. 믿어주시오.”
“그래서요. 남장이 아니면 대체 어떤 구실로 궁에 드나들 수 있단 말입니까?”
“실은 그게 말이오…….”
부채로 입을 가린 서강율이 귓속말을 전했다.
듣고 있던 이레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세자저…….”
“쉿!”
“그분께서 그런 명을 내리셨단 말입니까?”
“그렇다오.”
“나라의 법도가 반석같이 단단할 진데. 그와 같은 일이 진정 가능하단 말입니까?”
“이건 비밀인데…….”
말끝을 흐리던 서강율이 이레에게 속닥거렸다.
“세자저하께선 원래 기질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때때로 범상치 않은 일을 벌이곤 한다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용인될 리가…….”
“물론, 모든 간택인들이 그러는 건 아니오. 특별히 그분께서 몇 사람을 골라 시험하고 싶다 하셨으니…….”
“반대가 많았을 텐데요.”
“그분의 성정이 워낙 대단하여 논의 끝에 비밀리에 처리하자 한 모양이오.”
서강율의 말을 유추해보면 여러 가지를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첫째, 이번 일이 정식적인 논의와 보고 없이 은밀히 진행될 거라는 점.
둘째는 이 일에 해당하는 간택인은 자신을 포함하여 재간택에 내정된 가문의 여식이 아니라는 점.
한마디로 세자저하께서 지목한 여인들은 재간택과 무관한 사람들이며, 일이 복잡해지는 것을 우려한 관리들은 그제야 대충 타협하여 넘어갔다는 말이었다.
“설마, 이 대단한 일이 단지 저를 은자원으로 들이기 위해 하는 일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겠소. 단지 이번 초간택에서 간택인들이 써 올린 글 중 유독 명문이 많아 세자저하께서 관심이 많으시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은 부분을 털어낼 수 없었다.
“하여간 그렇게 되었으니, 내일부터 가마가 올 것이오. 모르는 일이 있으면 나 은협에게 뭐든 물어보시오.”
구렁이 담 넘듯.
얼렁뚱땅 은자원으로 묶어버리는 서강율의 말재간에 이레는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은협이라니오. 설마…….”
“허허. 은자원의 협객, 은협. 바로 이 몸의 별호라오.”
“……그렇군요.”
예상과 다른 시큰둥한 이레의 반응에 서강율이 진지해졌다.
“왜 난 더 멋있게 바꿔주지 않는 거요? 가령, 우두머리나 두목이나. 그런 말로 말이오.”
“제가 아둔하여 협객보다 더 멋진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강율이 접은 부채를 손끝으로 한 칸 한 칸 느리게 펼치며 원망스런 눈빛을 보냈다.
“내게만 매정하시구려.”
“매정하신 건 오히려 선비님이시지요.”
걸핏하면 사람을 버리고 가시니…….
이레는 뒷말을 꾸욱 삼켰다.
“은협이라 불러주오.”
“선비님.”
“은협.”
절대 물러서지 않을 듯한 강율의 눈빛에 이레가 하는 수 없이 그를 불렀다.
“알겠습니다. 은협.”
“하하하. 그리 친근하게 불러주니 고맙구려.”
강율이 큰소리로 웃으며 서탁을 내리치려 했다.
이레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막으려 했다.
서탁 안에 할아버지들께서 계시다 생각하니. 마치, 할아버지들이 뺨을 맞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수북이 쌓인 책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다행히 강율은 서탁을 치지 않았다.
대신 이레의 손 위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깜짝 놀란 이레가 강율을 보자, 그는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로써 다시 동수요.”
이레가 어이없다는 듯 시선을 회피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이십니까?”
“장난이라니. 난 진지하다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하오. 은랑.”
“전 은랑입니까?”
“은자원의 여랑.”
“…….”
“단옷날 모두가 인정하지 않았소? 이미 낭자는 은자원의 일원이라오.”
*
이레의 이야기가 끝났다.
-허허. 참으로 일이 엉뚱하게 되었구나.
화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예도 웃었다.
-그래서 은자원에 가게 되었단 말이구나.
종알종알 떠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의 말을 들은 할아버지 같은 반응들.
반면, 상은 달랐다.
-뭐? 간택인들을 불러 글을 가르치겠다고? 왕도 아닌 세자가 독단으로?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더냐?
예가 반론했다.
-세자라 하나 대리청정한다 하지 않았소. 또, 윗전 모르게 은밀히 한다 하였고.
-그렇다 해도 아니 될 말이지. 한마디로 개 코 같은 소리다.
뒤늦게 악이 등장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소란이야?
이레가 악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악할아버지.
-내 가족 모임에 잠시 다녀오느라 늦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상이 날뛰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만.
이레가 간략하게 상황을 전했다.
악이 평했다.
-이번만큼은 상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구나. 내 생각도 같다. 아무리 대리청정이라 하나, 세손의 배필을 구하는 중차대한 일. 제아무리 억지를 써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상이 악의 반응을 기꺼워했다.
-드디어 너도 이 몸을 알아주었구나. 하하하. 기분이다. 무덤이 어딘지 대라. 내가 거창하게 제사 지내라 이르마.
악이 비웃었다.
-남의 집 신경 쓰지 말고, 네 조상이나 잘 모시거라.
-무엇이? 무엄하다. 감히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처럼…….
상의 흥분한 글이 이어졌다.
이레는 상의 글이 새겨지는 종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새 종이를 서탁 위에 올렸다.
상의 글은 보이지 않고, 새로 쓴 글만 떠올랐다.
오랜 경험으로 터득한 비법.
간혹, 할아버지들 간의 싸움이 격하여 욕설이 난무하면, 지금처럼 종이를 바꾸는 것으로 정리하곤 하였다.
서탁은 신묘하고도 기이하여, 종이를 가린다.
일단 글을 썼으면, 어떤 식으로든 매듭되지 않으면 그 종이에 내용이 이어졌다.
즉, 중도에 종이를 바꾸면 새로 서탁에 올린 종이엔 그 시점에서 새로 쓴 글만 나타나는 것이다.
상의 욕설 가득한 글은 서탁 아래로 내려진 종이에 담겼으니, 새로 올린 종이엔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서탁을 벗어났으니 상의 욕설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다.
이런 비법은 이레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은 흥분한 듯하니, 빼고 말하자꾸나.
악이 말하자 화와 예가 동의했다.
-적어도 반 시진은 쉬지 않고 험한 글을 써내려 갈 터이니.
-그것이 현명한 대처인 듯하오.
가장 늦게 온 악도 아는 비법을 오로지 상만 몰랐다.
걸핏하면 흥분하는 상에겐 절대 이 비법을 알리지 말자는 게 모두의 암묵적인 합의였다.
-아무튼, 은자원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구나.
악에 이어 화와 예도 의견을 보냈다.
-아이야. 모쪼록 조심하여라.
-만사 불여튼튼이라.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여라.
이레가 스승들의 따뜻한 말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이레와 할아버지들 간의 대화는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흥분한 상의 글이 보인 건, 화의 예측대로 반 시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후후. 조용한 걸 보니, 다들 겁먹은 모양이구나. 괜찮다. 두려워할 필요 없으니. 우리의 인연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설마, 내가 진짜로 그런 일을 할까.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난 보기보다 인지한 사람이니라. 하하하.
***
아침저녁의 바람이 제법 서늘해지던 어느 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형운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높아졌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처소를 청소하고 세간살이를 바꾸는 것은 궁의 오래된 습관이자 법도였다.
여름이 끝나기 전.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세손궁이 분주했다.
여느 때처럼 묵은 먼지와 습기를 털어내고 지금껏 처소를 채우던 세간살이를 새로운 것으로 들여놓고 있었다.
무심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손의 눈에 서탁을 옮기는 궁녀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
세손의 매서운 눈빛에 처소 안의 소란이 일시에 멈췄다.
숨 막히는 고요함을 뚫고 최 내관이 쪼르르 다가왔다.
“이것아, 어쩌자고 그걸 만지는 것이냐?”
질책을 들은 궁녀들은 서둘러 서탁을 제 자리로 돌려놓았다.
“송, 송구하옵니다. 먼지가 있어 털어내고 들이는 참이었나이다.”
형운은 궁녀가 아닌 최 내관에게 말했다.
“서탁만은 손대지 말라 말하지 않았더냐?”
“송구하옵니다, 저하. 얼마 전 새로 궁에 들인 아이들인지라. 세손궁의 법도를 미처 숙지하지 못한 모양이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가 호되게 꾸짖겠나이다.”
최 내관의 말에 형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단지 절차를 몰라 실수한 것인데, 혼까지 낼 필요가 있을까. 적당히 타이르면 될 터.”
최 내관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한바탕 소란을 끝으로 세손궁의 가을맞이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작은 흠집이라도 생겼을까. 서탁을 꼼꼼하게 살핀 최 내관이 형운에게 말했다.
“저하, 정리가 끝나사옵니다. 안으로 듭시옵소서.”
분주함이 사라지자, 예의 고요함이 전각을 가득 채웠다.
홀로 남은 형운은 언제나처럼 서탁 앞에 앉았다.
물끄러미 서탁을 보던 그가 책을 치우고, 종이를 올렸다.
오늘은 혹여 글이 올라오지 않으려나.
그러나 그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서탁은 침묵하였다.
“오늘도 때가 아닌 모양이로구나.”
벌써 여러 날, 서탁의 글을 보지 못했다.
서탁은 참으로 이상하여 어떤 때는 원하지 않아도 글을 보이고, 어떤 때는 간절히 바라도 침묵만 하였다.
때로는 며칠 동안 보이고, 또 때로는 반년이 지나도록 뵈지 않았다.
“벌써 석 달 가까이 되었구나.”
이처럼 오랫동안 글을 보지 못한 건 어린 시절 이후 오랜만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서탁의 아이가 귀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이러했지.”
양화사의 일로 제비꽃 여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이가 생각한 이가 실은 아이가 아닌 여인이었고, 심지어 귀신도 아니었다.
“제비꽃 여인이 귀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이 할아버지라 부른 자들도 귀신이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모두 왕이라 하였는데…….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여인은 몰라도 그자들은 귀신이 분명하리라.”
왕이 여러 명일 수 없다.
게다가 그가 아는 할바마마는 서탁의 그 할아버지들처럼 자상하지도 않았다.
“적적하구나. 서탁의 글이라도 볼 수 있다면 외로움이 덜할 터인데.”
계절이 변하는 중이라 그런 걸까.
괜스레 마음이 뒤숭숭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문득문득 그립고, 자꾸만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은.
답답한 마음에 눈을 감았다.
고요함 때문일까.
멀리서 물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
바람이 출렁이는 배 위에 앉은 것만 같다.
멀리 풍경을 보자니, 맞은 편에 앉은 누군가가 말을 걸 것만 같다.
어설프게 남장한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걸려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슬픔을 간신히 억누른 그 미소에 절로 가슴이 뭉클해지리라.
“내 어찌 이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길고 깊은숨을 뱉은 형운은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아직 남은 일과가 빠듯하였으나, 오늘만큼은 미뤄두고 싶었다.
늦여름.
가을의 길목.
유난히 번잡하고 어지러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