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생(生)의 징표
-신수가 그려진 팽례의 패는 왕의 소식을 전하는 자. 즉, 너의 오라비는 왕의 팽례였을 터.
“왕의 팽례.”
지난밤.
서탁을 통해 알게 된 동패의 비밀.
할아버지들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오라버니는 왕의 팽례다.
왕의 긴요한 서신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왕의 팽례라는 그 특별한 의미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팽례.
남의 서신을 전하는 사람이니, 드러난 신분은 그리 높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 서신이 다름 아닌 왕이 내린 것이라면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뛸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그 높고 지엄하신 분의 명을 받드는 기분은 어떤 것이려나?
오라버니는 어찌 참으셨을까.
그 말 많던 사람이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을까.
참기 어려웠겠지.
하지만 남에게 함부로 발설할 수 없음이라.
정체가 드러나면 자칫 삿된 속내를 품은 자들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누이동생에겐 조금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슬쩍 이나마 동패를 보여주셨으니.
그런 사정도 모르고 오라버니를 놀렸구나.
저를 알아주지 않는 미련한 누이의 모습에 얼마나 가슴 답답하였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날이 밝았다.
이레는 아버지에게 아침 문안을 올리고, 외출을 청했다.
무려 일주일이나 사라졌던 여식이 고작 이틀 만에 다시 문밖을 나선다 하니.
당연히 역정 내실 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너 하고픈 대로하거라.”
허락하는 김시묵의 표정엔 실망도 포기의 기색도 없었다.
다만, 믿고 있었다.
두 달 넘게 수십 명을 부리고 각지를 훑어도 종적조차 찾지 못한 기대의 흔적을 이레가 가져왔다.
여식에 대한 신뢰가 마음의 둑을 무너트렸다.
영특하고 특별한 누이를 두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기대의 말을 이제야 인정하였다.
부친을 허락을 얻은 이레는 서둘러 차비를 하고 궁으로 향했다.
남장도 하지 않았고, 행랑 할멈과 함께 가지도 않았다.
가진 것이라곤 오직 오라비의 동패뿐.
그렇게 이레는 궁 문 앞에 섰다.
예전엔 자주 드나들었던 문.
그러나 오라비가 사라진 이후엔, 단 한 걸음도 허락하지 않은 문이었다.
“이보시오.”
이레가 수문장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를 알아본 수문장은 와락 인상부터 구겼다.
“한동안 보이지 않아 이제 포기하였나 했더니, 또 왔구먼.”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오라비 찾는다며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 애원하였으니. 넌더리가 날 만도 했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궁은 허가된 사람이 아니면 절대 들어갈 수 없소. 그 어떤 사정이 있어도 아니 되오.”
수문장은 단호했다.
이레도 더는 그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 오라비의 동패를 보였다.
‘이 패가 있으면 천하에 못 갈 곳이 없고, 못 만날 사람이 없단다.’
지금 믿을 건 오라버니의 장담뿐.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려…… 음?”
고개부터 저으려던 수문장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동패?”
그의 미간이 한데 모였다.
“이걸 대체 어디에서…… 아니오. 잠시 기다리시오.”
수문장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안쪽에 기별을 넣었다.
얼마 후 짙은 녹빛 관복을 입은 젊은 내관이 나타났다.
“패를 가져왔다 들었소.”
이레는 그에게 다시 동패를 보여주었다.
동패를 확인한 내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수문장과 마찬가지로 이레와 동패를 심각하게 번갈아 보길 여러 번.
“하는 수 없지. 따라오시오.”
마침내 이레는 수문장을 지나쳐 궁 안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종종걸음치는 내관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행여 놓칠세라 이레는 걸음을 재촉했다.
“저…… 괜찮다면 지금 어딜 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젊은 내관이 흘끔 이레를 돌아보고 말했다.
“난 그저 궐 밖에서 온 팽례를 특정한 장소로 안내하는 역할만을 한다오. 그 밖의 일은 전혀 모르오.”
진심이었다.
젊은 내관은 아는 것이 없었다.
알아서도 안 되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궁궐이라 불리는 거대한 황금 고치에서 살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원칙이자 지혜였다.
이레가 그에게 다시 물었다.
“동패를 지닌 사람 중에 여인도 있습니까?”
“낭자가 처음이오.”
“그런데도 연유를 묻지 않으십니까?”
내관이 고개를 저었다.
“불문곡직(不問曲直). 동패를 가졌으니 그대는 궐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고, 난 그대를 안내해야 할 책무가 있소. 그 밖의 일은 내 소관이 아니오.”
내관은 이레를 월근문 안쪽의 작은 전각으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기다리면 동패의 주인이 사람을 보내실 것이오.”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시시때때로 다르다오. 일다경이 될 수도 있고, 한 시진이 될 수도, 하루나 일주일. 한 달이 되는 경우도 있소.”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밀약(密約) 없이 동패를 내밀었으니, 당연한 절차 아니겠소. 아무튼, 난 더는 모르오.”
이레의 물음을 매정하게 물리친 내관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게 된 이레는 난감하기만 했다.
“난 그저 이 동패의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설마, 동패를 보이자마자 끌려가듯 궐 안으로 들어오게 될 줄이야.
“다음 사람이 오면 사정을 설명하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자칫하면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동패에 새겨진 기린이 유난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다.
다음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때에 맞춰 궁녀들이 음식이며 다과를 내왔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던 터라.
입에 무얼 넣고 목구멍으로 넘길 정신이 없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고 불편했다.
어느덧 서편 하늘에 노을이 그려졌다.
노을 끝에 서린 어스름이 짙어질 무렵.
고대하던 다음 사람이 나타났다.
머리 위로 하얗게 서리가 내린 나이 든 내관이었다.
이레는 낯선 내관이 반가웠다.
이제 그에게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 돌아가야지.
그러나 이번에도 이레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따라오시게.”
짧은 말을 끝으로 내관은 무작정 앞서 걸었다.
“죄송합니다만, 무언가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제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전 그저 동패를 돌려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레가 그의 뒤를 허겁지겁 따르며 몇 번이나 사정을 설명했지만, 내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계속된 청에도 걷기만 하던 내관이 어느 즈음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서부턴 사방에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으니. 입을 잘못 놀렸다간 염라국의 주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냉정한 경고에 이레는 입을 닫았다.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이미 스스로의 의지로 어찌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관은 궐의 내궁과 외궁을 거쳐 후원으로 향했다.
풍경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고요한 곳을 지나 어느덧 비탈진 산을 올랐다.
울창한 숲속.
연못에 핀 한 송이 연꽃처럼, 고고한 자태의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기다리게.”
매정하게 돌아선 늙은 내관이 이레를 돌아보며 한마디를 더했다.
“무지는 곤궁을 부르고, 욕심은 재앙을 초래하며, 오만은 적을 만드는 법. 자고로 경거망동은 죽음을 부르니, 매사에 조심하고 겸손하시게.”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꾸벅 숙인 고개를 들었을 때, 내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덧 사위가 어두워졌다.
밤이 내린 숲은 풀벌레 소리로 자글자글했다.
멀리서 부엉이가 울었다.
밤의 소란이 떠들썩하게 부풀어 올랐을 때, 혼란을 짓누르듯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둘이 아니었다.
어둠을 가르며 정자를 향해 몰려온 정렬된 발소리들.
칼과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횃불과 무기를 든 수십의 병사가 정자를 포위하듯 에워쌌다.
그리고 누가 호령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정자를 향해 등을 보인 채 돌아섰다.
그 누구도 정자에 앉은 이레를 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듯, 보지 않으려는 듯.
사소한 곁눈질조차 없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를 갖추어라.”
이레는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그녀는 지금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시선을 낮게 내리고 가능한 고개를 깊게 조아렸다.
부산한 발소리가 정자 위아래를 오갔다.
쿵 하고 묵직한 물건 놓이는 소리와 진동도 전해졌다.
그 모든 절차가 끝나자 비로소 정자에 오르는 차분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느긋한 발소리에 맞춰 이레의 심장도 쿵쿵 울렸다.
앞이 캄캄해졌다.
상상한 가운데 가장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흠.”
내려다보는 시선과 함께 들려오는 짧은 탄성.
그 후,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날 찾은 아이가 너더냐?”
힘 있고 강인한, 호방하면서도 여유 넘치는, 실로 사내다운 음성이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위엄과 무거운 기세에 이레는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고개를 들라. 바로 앉아도 된다.”
이레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여전히 시선은 아래를 향했다.
의자에 앉은 사내의 검은 목화가 보였다.
사내가 말했다.
“말이며 행동이며. 너는 이미 내가 올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구나.”
목소리에 흥미가 묻어 있었다.
두근대는 심장을 간신히 달래며 이레가 답했다.
“송구합니다. 세자저하.”
동패가 부른 사람.
그는 왕의 아들이었으며, 또한 왕을 대신하여 이 나라를 다스리는 이.
다름 아닌 왕세자였다.
***
‘세자셨어.’
동패의 주인.
기린이 새겨진 동패를 오라비에게 내어주신 분.
오라비가 섬긴 진정한 주인.
왕세자 저하셨다.
어쩌면…… 하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은자원에 드나들 때, 오라버니가 수시로 동궁전을 다녀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왕의 팽례라.
이 나라 왕은 연로하시어 오래전부터 영민하신 세자께서 대리청정하신다 들었다.
왕이 아니되 왕인 사람.
그래도 혹 왕께서 직접 오라버니를 부린 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하였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궐의 후원.
그것도 제법 가파른 산으로 안내되었을 때, 이레는 동패의 주인이 왕이 아닌 세자라 짐작했다.
그분의 강건한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짐작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 것을 가지고 왔다 들었다.”
이레는 오라비의 패를 두 손으로 공손히 올렸다.
잰걸음이 다가와 이레의 손에 들린 동패를 세자에게 전했다.
“과연 내 것이 분명하구나. 한데…….”
세자의 물음이 이어졌다.
“이 동패는 분명 사내에게 주었는데, 정작 동패로 날 불러낸 너는 그렇지 않구나. 이게 대체 무슨 연유냐?”
이레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동패는 본디 제 오라비의 것이었습니다.”
“오라비라. 과연 그자에게 누이동생이 있다 하였지. 그대가 그자가 말한 누이인가 보구나.”
“송구합니다. 제 오라비는 두 달 전, 원행 떠난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여, 날 찾아왔다? 오라비의 실종을 따지고 책임을 물으려 함이더냐?”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감히 그럴 생각은 추호도…….”
“하면, 무슨 연유로 날 찾아왔느냐?”
“그저 궁금하였습니다.”
복받치는 설움을 속으로 삭이며 이레는 말을 이어나갔다.
“모두가 아니라 하였습니다. 제 오라비가 궁에서 일하고, 긴한 일을 한다 하여도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부정하였습니다. 제 오라비를 그저 무능력한 자라 손가락질하였습니다. 은자원이라는 곳도. 그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궁금하였습니다. 제 오라비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무어를 위해 그리 애썼는지……. 그것이 사무치게 궁금하였습니다.”
이레의 긴 설움을 세자는 짧고 명료하게 해석했다.
“역시 따지러 왔구나.”
칼로 베듯 무심한 단정(斷定).
이레의 전신이 꼿꼿하게 굳어졌다.
세자의 서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동패가 내게 이어진 것을 눈치챘다면, 네 오라비의 억울한 사연도 내 탓이라 여겼을 터. 무얼 하는지, 무얼 하였는지. 정당하게 밝히지 못한 연유를 묻고자 함이 아닌가?”
세자 곁에 선 상선이 엄한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무엄하구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세자가 손을 저었다.
상선이 허리를 접고 물러났다.
세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과연 무엄하구나. 그러나……!”
“…….”
“자격이 있다. 너는 그의 혈육이니 마땅히 그를 부린 내게 따지고 물을 당연한 권리가 있느니.”
“황공합니다.”
세자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랜 정적 끝에 세자가 입을 열었다.
“김기대. 그자는 나의 사람이었다. 나의 팽례였고, 내 말을 전하기 위해 조선 팔도를 누볐느니.”
나의 사람.
세자의 말에 이레의 눈동자에 눈물벽이 세워졌다.
저 존귀하신 분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나의 사람, 나의 팽례라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게으르고 무능한 하급 관리가 아닌, 세자저하의 비밀 서한을 전하던 귀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셨다.
오라버니 참으로 장하십니다.
참으로 큰일을 하셨습니다.
세자가 다시 물었다.
“또 궁금한 것이 있느냐?”
이레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 오라비의 소식이 단양에서 끊기었습니다. 무슨 일로 그리되었는지, 누가 오라버니를 노렸는지. 그리고 지금 오라버니께서 어디에 계신지 알고 계시나이까?”
“그것은 알려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행방은 나 또한 궁금하구나.”
긴 한숨 끝에 세자는 이레에게 명했다.
“고개를 들라.”
이레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곤륭포 입은 풍채 좋은 중년 사내의 모습이 담겼다.
짙은 눈썹과 오뚝한 콧날.
선 굵고 강인한 기질이 심유한 눈빛과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인상을 풍겼다.
세자가 말했다.
“네 오라비 일은 나로서도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구나. 내 너에게 참으로 몹쓸 짓을 한 셈이 되었어.”
“저하.”
상선이 급히 나섰다.
무릇 군왕에게 실수란 있을 수 없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일 또한 있어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자는 거침이 없었다.
상선을 물린 그가 이레에게 말을 이었다.
“그 어떤 말로도 혈육을 잃은 널 위로할 수 없으리라. 그의 일은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은밀한 속사정이 있기에 떳떳하게 밝힐 수조차 없으니, 남들이 욕하고 험담하여도 변명조차 할 수 없을 터. 세자인 나로서도 네게 할 수 있는 것이 그저 미안하다 이 말뿐이로구나.”
“……저하.”
“김기대. 네 오라비는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사내였다.”
비록 말뿐이었으나.
비록 누군가에게 크게 알리지도 못할 헛헛한 칭찬에 불과했으나.
세자의 따뜻한 몇 마디에 말에 이레는 가슴에 얼어붙은 무언가가 녹아내림을 느꼈다.
묵은 체증처럼 가슴께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한순간에 풀어졌다.
오라버니, 보고 계십니까? 듣고 계십니까?
저분께서 당신을 인정하셨습니다.
고맙다, 안타깝다.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오라버니께서 이 말을 직접 들으셨다면, 아마 기쁘고 좋아 아이처럼 웃으셨겠지요. 눈만 마주치면 이 얘길 꺼내시겠지요.
그래도 좋습니다.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 오라버니…….
조용히 눈물만 떨구는 이레의 어깨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세자였다.
가만가만 이레의 어깨를 토닥인 세자가 그녀의 손에 둥근 패를 쥐여주었다.
“이 패를 찾기 위해 네가 얼마나 고생하였을지 능히 짐작되는구나. 장하다.”
“…….”
“본디 이 패는 내 것이나, 네가 간직하는 게 좋겠다. 김기대. 그가 돌아와 날 만나고자 할 때 필요할 터이니.”
세자는 조용히 혼잣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그대로 네가 사용하여도 될 터이고.”
***
객 떠난 정자에 고요가 깃들었다.
세자는 난간에 걸터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안주도 없고, 말벗도 없으나 외롭지 않았다.
함께 할 추억이 있으니.
“보시게, 친구. 오늘 그대의 손녀를 보았네. 참으로 곱더군. 당돌하나 예의를 잃지 않고, 차분함에 총기마저 더하였으니. 과연 입이 마르도록 자랑할 만하더군.”
찰랑찰랑.
잔 가득 고인 술을 입안에 깨끗하게 털어버렸다.
“김기대. 그 아이가 그대의 손주임을 알고 가까이 두고 크게 쓰려 하였는데, 그만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네. 나중에 그대를 만나면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다시 한 잔 술로 울적함을 비워냈다.
“다만, 기필코 내 그 아이의 복수를 잊지 않겠네.”
세자의 눈에 노여움이 깃들었다.
“십학사. 너희의 뿌리가 과연 얼마나 깊고 넓은지 모르나, 설사 이 나라 조선을 송두리째 뒤집는 한이 있어도 발본하고 색원하리라.”
세자는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 밤은 몹시도 추웠으나 풍성하고 따스하였는데, 오늘은 찬 바람 한 점 없어도 덧없고 쓸쓸하구나.”
씁쓸한 미소가 석 잔 술로 흐려졌다.
“그나저나 그 아이, 초간택에서 못 받은 절을 이곳에서 받은 셈이군.”
***
뭔가에 홀린 듯 이레는 넋이 나갔다.
궁을 나선 이후 어떻게 집까지 오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집까지 바래다준 사람이 있었던 듯도 한데.
다부진 체격과 말투만 기억나지 얼굴이며 나이며, 무엇 하나 생각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단지 패를 돌려주러 간 걸음이었다.
그 참에 혹여나 오라비 소식 들을까 기대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세자저하를 만났다.
그분께 오라비를 인정받고,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과연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면 믿어줄까?
아버지라면, 할머니라면 알아주실까?
아마도 믿지 않으시겠지.
덧없는 말뿐이라.
증표나 문서조차 없으니.
문득 서글픔이 몰려왔다.
바보 같은 오라버니.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간 자랑 못 해 안달하시더니,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오라비에 대해 알면 알수록 오라버니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아 서글펐다.
“아가씨!”
별채로 돌아와 맥없이 앉은 이레에게 행랑 할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편한 다리로 엉거주춤 걸어와 별채 툇마루에 엉덩이 걸친 노파는 연신 밭은 숨을 내쉬었다.
“밤이 늦었는데. 쉬지 않고 왜 나왔어?”
“아가씨께서 온종일 보이지 않으니, 쇤네가 불안하여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겠습니까?”
“미안.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아버지에게 허락받고 나갔는데, 못 들었어?”
“그래도 안심이 되어야지요. 쇤네가 함께 갔어야 했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설명하고 나갈 틈이 없었어.”
“그래도 이 늙은이에게만이라도 귀띔 좀 해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아가씨는 보이지 않으시는데, 노마님은 찾으시지. 쇤네가 정말 죽을 맛이었어요.”
“할머니께서 날 찾으셨어?”
“말도 마셔요. 저녁 무렵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드셨는지. 생전 찾지 않으시는 분을 찾으시니.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긴장으로 온몸이 꼿꼿해졌다.
“그래서?”
“곤하게 주무시어 차마 깨우기 어렵겠다고 말씀 올렸네요.”
“다행이다.”
긴장했던 등줄기가 다시 느른해졌다.
“내일 날 밝는 대로 건너가 보시어요.”
“고마워. 할멈.”
이레는 행랑 할멈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만 쉬시어요.”
힘겹게 몸을 일으킨 할멈은 별채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러다 뒤늦게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
“아이고, 이 정신머리 좀 봐요. 정작 말씀드릴 건 쏙 빼먹고, 괜한 입방정만 찧었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가씨 안 계실 적에 웬 아파(牙婆)가 집엘 찾아왔지 뭐여요.”
“방물장수?”
워낙에 소박한 살림 덕에 집안을 드나드는 방물장수는 따로이 없었다.
궁금한 마음에 묻자니, 행랑 할멈이 손사래를 쳤다.
“안 산다고, 살 물건 없다고 그리 말렸는데도, 기어이 집에 들어오질 않겠어요. 그냥 물 한 사발만 얻어먹겠다고요.”
“그런데?”
“물 한 사발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어찌어찌 집 안으로 들여놨지요. 그런데…….”
주위를 살피던 할멈이 돌연 목소리를 낮췄다.
“그 아파가 글쎄 아가씨를 아는 눈치였습니다.”
“나를 알아?”
“네. 그러곤 아가씨 드리라며 저 물건을 두고 갔지 뭡니까.”
할멈은 별채 안, 서탁 위에 놓인 작은 비단 보퉁이를 가리켰다.
“꺼림칙해서 도로 가져가라 했는데도 듣지도 않고 도망치듯 나가질 뭐여요. 급히 뒤쫓아 나갔는데 그새 사라졌더라고요.”
이레는 서탁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냥 버릴까요? 이 늙은이가 살짝 엿봤는데, 별거 아닌 바늘이었어요.”
“바늘?”
“바늘은 바늘인데, 귀가 없는지라. 이게 참말 요사한 물건이지 뭡니까.”
“귀가 없는 바늘?”
“실도 꿰지 못하는 바늘을 어디다 쓰라고 주고 간 건지, 원.”
할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레는 서탁으로 달려들었다.
귀가 없는 바늘.
이레는 떨리는 손으로 작은 비단 보자기를 풀었다.
이윽고 오색 바늘꽂이를 가로질러 꽂힌 오푼 길이의 짧은 호침(毫鍼)이 눈에 들어왔다.
호침의 끝.
노란 실이 엉성한 나비 모양으로 매듭지어 있었다.
이레의 눈에 왈칵 뜨거운 눈물이 들어찼다.
“오라버니…….”
단옷날.
은자들이 나눠 가진 징표.
싫다는 은자들에게 오라버니가 강제로 주었던 바로 그 침통.
노란 나비매듭이 달린 침은 틀림없이 그 침통에 든 침 중 하나이니라.
침을 징표로 사용할 사람은 하늘 아래, 오직 오라버니 한 분뿐이었다.
내내 막혔던 숨통이 이제야 뻥하고 뚫렸다.
이레의 눈가로 눈물이 떨어졌다.
지금껏 흘렸던 실의의 눈물이 아닌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었다.
“살아 있다.”
오라버니는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