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23화 (23/215)

#23.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팽례

한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물길은 거칠고 더뎠다.

흔들리는 뱃전에는 고요만이 가득했다.

물살을 가르는 노(櫓) 소리와 황포 돛에 달라붙는 바람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긴 침묵 끝.

상념에 잠겨 있던 이레가 문득 형운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형운이 그녀를 보았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눈빛.

“이번 일 말입니다.”

고난을 함께하고, 목숨까지 걸어주지 않았습니까.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담은 인사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갓을 아래로 눌러쓴 채 고개만 끄덕일 뿐.

그 소리 없는 고갯짓이 한때는 갑갑하여 견디기 어려웠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느 사이, 그의 침묵에 적응한 모양이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리며 이레는 강물을 응시했다.

한양으로 되돌아가는 마음의 무게는 여전히 무거웠다.

품에 안은 오라버니의 봇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오.”

형운은 내내 제대로 눈도 못 붙인 이레를 걱정했다.

“곧 도착하는 걸요.”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광나루로 시선을 고정했다.

더는 권해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는지 형운이 이내 화제를 돌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형운의 물음에 이레는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까.

생각해본 적 없다.

그간 오라버니의 행적을 좇아 정신없이 달렸다.

궁으로, 단양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품에 낡고 해진 봇짐 하나만이 안겨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공연한 참견일지 모르나…….”

형운이 먼 곳을 보며 말을 이었다.

“딴생각 말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시오.”

“……네.”

“대답만이 아니라 이번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오.”

거듭된 형운의 강요 아닌 강요에 이레는 미소를 지었다.

“네.”

“그리고 다시는 위험한 행동도 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약조할 수 있겠소?”

귓가에 와 닿는 단정한 음성.

이레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형운과 시선이 맞닿았다.

“네. 약조하겠습니다.”

이레의 확답을 들은 형운은 다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예전엔 낯설고 어색한 침묵이었건만.

지금은 편안했다.

그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은자원의 말 없는 선비와 이리 편한 사이가 될 줄이야.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되새김하면 할수록 신기했다.

문득, 언젠가 화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오라버니 일로 은자원을 드나들기 시작했을 무렵.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르고, 가는 것에도 관심 없이 그저 묵묵히 일만 하는 형운을 대하기 어려워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여간 까다롭지 않습니다.

-어찌 까다로운 것이냐?

-말이 없습니다.

-말을 안 해?

-인사를 건네도 끄덕, 작은 고갯짓이 전부입니다. 늘 침묵하고 있으니, 답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럼 너도 침묵하려무나.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으레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어찌 말로 하는 이야기만이 대화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럼,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대화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눈짓, 몸짓으로도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지. 침묵 또한 그렇단다.

-침묵도 대화라면 어찌 어색한 것일까요?

-두 사람 사이가 그만큼 낯설고 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멀기 때문이라고요?

-네 오라비와 있을 때는 어떠하냐? 말하지 않으면 불편하고 어색하더냐?

-아닙니다. 늘 좋고 행복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뜻을 아니,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서로를 잘 아니 괜한 체면치레, 입치레도 필요 없겠지. 그러니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아! 침묵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알 수 있겠군요.

-침묵이 어색하지 않으면 그만큼 가깝단 의미지. 말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다는 의미니 말이다.

화할아버지의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구태여 소리 내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위로가 되는 존재.

두 사람이 탄 나룻배가 잔물결에 잘게 흔들렸다.

***

배가 나루터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이레가 형운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여행 내내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으니, 더는 배려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운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대신 곧장 집으로 가야 하오.”

“염려 마십시오. 그럼, 언제가 될지 모르나 신세 꼭 갚겠습니다.”

“신세 진 것 없소. 그저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니.”

형운의 말에도 이레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신세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다시 허리를 접은 이레가 뒤돌아섰다.

손을 흔들어주는 것도 아니건만, 가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꾸벅꾸벅 고갯짓한다.

“인모야.”

이레의 모습이 작아지자 형운은 우익위를 불렀다.

“소인. 이곳에 있습니다.”

손님과 흥정하던 뱃사공이 냉큼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저 낭자…….”

이레를 낭자로 칭하던 형운은 돌연 말을 바꿨다.

“은랑. 네가 은랑을 따라가거라. 집까지 무사히 도착하는지, 딴 곳으로 가는 건 아닌지. 혹여 무뢰배가 해코지하지는 않는지. 네가 살피거라.”

“감히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약조하였으니까.”

“서강율. 그자가 감히 저하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한 일입니다.”

형운이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약조는 약조다.”

홍인모는 불만 가득한 표정을 얼굴에 떠올렸다.

그런 홍인모에게 형운이 물었다.

“너는 내가 무책임한 사람이길 원하느냐?”

“…….”

“내가 서강율, 그자처럼 낯선 곳에 여인을 홀로 버려두는 그런 대책 없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이냐?”

“그 소인배를 어찌 감히 저하께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됐다. 다녀오너라.”

“송구하오나. 따를 수 없습니다.”

“인모야.”

“그리 부르셔도 안 됩니다. 제 소임은 세손저하를 곁에서 지키는 것입니다.”

“잠시면 된다.”

“잠시도 그럴 수 없습니다.”

홍인모의 목소리는 결연하였다.

지금도 단양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홍인모가 다시 쐐기를 박았다.

“은랑의 일이라면 제가 따로 손을 써놓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날 지킬 사람이라면 이미 충분하다.”

형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단양에서 홍인모가 이끌고 온 무관이 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호된 경험을 한 홍인모가 형운의 안전을 위해 과할 정도로 많은 호위를 불러들인 탓이다.

“인모야.”

“송구하옵니다.”

거듭된 부름에도 홍인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

홍인모가 무슨 뜻이냐는 듯 눈으로 묻자 형운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게 칼이 두 자루 있는데, 그중 한 자루가 길이 잘못 들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면 버리고 새로 장만해야겠구나.”

“……농이 과하십니다.”

“내가 언제 이런 일로 농하는 걸 본 적 있느냐?”

형운의 담담한 목소리에 홍인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인, 어린 시절부터 불철주야 학업에 매진하고 수련을 한 이유는 오직 하나, 저하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세월이 어언 십 년입니다.”

“그래. 무척 오래되었구나. 그만하면 녹이 슬 때도 되었지.”

“자고로 책과 친구는 옛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쇠는 다르지. 녹슬면 버리고 이가 빠지면 다시 갈아야 하는 법.”

비통한 청에도 형운은 흔들리지 않았다.

홍인모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이런, 녹이 슬려는 게 아니라, 이미 녹이 잔뜩 슨 모양이구나. 행동이 이리 굼뜬 걸 보면 말이다.”

“벌써 출발했습니다.”

“인모야.”

달려나가는 홍인모를 형운이 불렀다.

“은랑과 함께일 때는 어설픈 변장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홍인모가 다음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들켰다.”

홍인모의 인상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저와 은랑은 전생에 큰 악연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매번 애써 숨은 널 기어코 찾아내는 걸 보면 견원지간도 이런 견원지간이 없겠구나.”

형운은 오랜만에 얼굴에 웃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벌써 저만치 멀어진 이레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작게 당부의 말을 중얼거렸다.

“더는 무리한 일 하지 마시오. 더는 위험한 일도 하지 마시오. 더는 궁에도, 은자원에도, 단양에도, 위험한 산속도 헤매지 마시오. 더는…… 걱정도, 근심도, 눈물도 흘리지 마시오.”

***

늦은 저녁이었건만.

북촌 김시묵의 집은 불빛으로 환했다.

원래는 이른 저녁 잠자리에 드는 노마님으로 인해 북촌의 어느 집보다 일찍 하루를 마감하던 집안이었다.

벌써 일주일째 이어지는 뜻밖의 풍경.

“아이고, 아이고.”

앓는 소리를 하는 노파가 대문 밖을 서성거렸다.

누굴 기다리는지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행랑 할멈은 밤하늘을 올려 보았다.

밤이 꽤 기울었다.

오늘도 아니 오시려나 보네.

푹, 마른 한숨을 쉬며 안으로 들어서는 노파의 등 뒤로 자분자분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할멈.”

“아이고, 아가씨!”

행랑 할멈의 고함에 온 집안사람이 다 뛰쳐나왔다.

무려 일주일이나 행방불명되었던 이레가 돌아온 것이다.

장남인 김기대에 이어 그 누이마저 사라진 터라, 집안은 말 그대로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이레를 찾아 어미가 요양 떠난 산천으로 사람들을 보내고, 한양을 이 잡듯 뒤졌다.

그럼에도 그 어디에서도 이레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날벼락 같은 일에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사라진 이레가 돌아온 것이다.

“아이고. 아가씨. 이 꼴이 다 뭐랍니까. 행색은 또 왜 이렇고요.”

할멈은 이레의 얼굴을 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간 연락조차 없었어요? 쇤네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이 늙은이를 말려 죽일 작정이셨어요?”

이레는 정신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할멈을 간신히 달래 집안으로 들어섰다.

“할머니는 잘 지내시지? 아버님은 어찌…….”

이레의 물음에 답인 듯.

“네 이 녀석!”

대청마루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김시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곁엔 할머니가 예의 서릿발 같은 시선으로 이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성난 표정과 엄한 목소리에 이레는 되려 코끝이 알큰해졌다.

예전 같으면 서운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저분들의 엄한 모습조차 반가웠다.

또 그리웠다.

저를 향한 분노 이면에 숨은 걱정을 읽은 까닭이었다.

“대체 어딜 갔다, 이제 나타난 것이냐. 네가 사라져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과년한 여인이, 그것도 간택까지 참여한 여인이 어찌 겁도 없이…….”

“잘못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어건 허락도 없이 사라져 어른들을 근심케 하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레는 무릎을 꿇은 채 아버지의 호된 질책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대체 어딜 갔었던 것이냐?”

다그치는 아비의 물음에 이레는 품에 꼭 안은 봇짐을 앞으로 내어놓았다.

“그게 무엇이냐?”

눈치만 보던 행랑 할멈이 냉큼 달려와 봇짐을 살폈다.

그러다 무에 놀란 듯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이고. 도련님. 기대 도련님.”

할멈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김시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 기대라 하였느냐? 그 봇짐. 기대 것이냐?”

“보셔요. 이 안에 든 옷이며 물건이며. 기대 도련님의 것이 틀림없습니다.”

헤지고 더러워진 봇짐이…….

“아아.”

긴 세월 모진 풍파 속에서도 고목처럼 버티고 견뎌낸 할머니를 주저앉게 하였다.

그 어떤 일에도 굳은 표정을 풀 것 같지 않던 김시묵을 휘청이게 하였다.

복잡한 눈으로 이레를 내려다보던 김시묵이 몸을 돌렸다.

그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돌아가 쉬어라.”

등을 보인 김시묵의 뒷모습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

별채로 돌아온 이레는 꼬박 하루 동안 죽은 듯 잠들었다.

잠에서 깬 후엔 아버지가 계신 큰 사랑채로 향했다.

그다음엔 앓아누운 할머니의 부름이 있었다.

두 분께 봇짐을 찾은 사연을 들려주었다.

오라비가 절벽에서 떨어졌단 사실은 빼고 이야기했다.

동패를 찾았단 것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그저 우연히 오라비의 방에서 행선지의 단서를 찾았고, 무작정 단양으로 향했노라고.

그곳에서 봇짐을 찾게 되었노라고만 말씀 아뢰었다.

이야기를 끝냈을 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두 분 모두 아픈 표정으로 눈을 감으셨다.

봇짐으로 돌아온 장남의 흔적.

그간의 사연을 모두 털어낸 이레가 별채로 돌아온 건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각이었다.

텅 빈 방에 홀로 놓인 서탁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레는 창을 열고, 서탁 앞에 앉았다.

사각, 사각.

먹 가는 소리를 듣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일 년은 더 된 일인 것처럼 새삼스럽고 또 반가웠다.

붓끝에 먹을 찍어 종이 위에 세웠다.

무슨 말을 할까.

그래, 인사부터 하여야지.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붓을 들고 잠시 제가 그린 글을 바라보았다.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칼로 자른 듯 선명한 달이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의문과 함께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집을 비운 사이 서탁이 귀기를 잃은 것이려나?

돌이켜보면 처음 화할아버지를 만난 이후, 이번처럼 오랫동안 서탁과 대화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화가 나신 걸까?

인사도 없이 가버린 것에 실망하여 훌쩍 떠나신 건 아닐까?

이대로 영영 할아버지들을 뵙지 못하면 어찌해야 하나.

두렵고 무서웠다.

사람을 잃는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괴로운진 넘치도록 배우고 경험했다.

그리 절절히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별은 여전히 생소하고 시린 고통이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만큼.

서탁의 침묵이 더없이 무서웠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그때였다.

스스스슷.

이레의 글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글이 사라지기 무섭게 새로운 글들이 나타났다.

-아이야.

-오래 연락이 없어 걱정하였느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화와 예, 악의 글이 차례로 이어졌다.

짧고 긴 글 속에 이레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마지막으로 상의 글이 이어졌다.

-이번에야말로 성불하였구나 했더니, 또 돌아온 게냐? 참으로 질기구나.

반가움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제가 가긴 어딜 갑니까? 여기에 할아버지들께서 계시는데. 죽을 때도 멀었고, 성불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그러지 말고 날 좋을 때 떠나지 그러느냐? 나야 네가 있어 적적함을 덜 수 있어 좋다만, 자칫 네 업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쌓일까 걱정이구나.

-할아버지의 적적함을 덜 수 있다면, 그깟 업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어디냐?

-어딘지 알면요?

-내가 잘 정리해주마. 네가 성불하지 못하는 연유도 해결해주마.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말 못 하겠습니다.

-어허, 그러지 말고 어서.

-자꾸 그러시면 평생 상할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내 곁을? 하하. 그러려면 우리 집 귀신이 되어야 할 텐데. 그건 그리 쉽지 않을 게다.

상할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아무렴요. 할아버지들께선 모두 왕이라 하셨지요.

그런 집안의 귀신이 되려면 정말 쉽지 않겠네요.

아! 예할아버지께선 왕이라 하시지 않았구나.

언제나 자상하시고, 기품을 잃지 않으시는 예할아버지.

어떤 분이실까?

마침, 예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왔느냐?

이레가 답했다.

-네. 일이 있어 잠시 먼 곳에 다녀왔습니다. 인사드리지 못하고 떠나 죄송합니다.

-보아하니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 같구나. 말해줄 수 있겠느냐?

이레는 침착하게 이번에 겪은 일을 서탁에 전했다.

할아버지들은 때때로 무모하다 혼내고, 때때로 웃고, 화내며 이레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내 이레의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였다.

-그 패에 무엇이 그려져 있었다고?

악이 팽례의 패에 관심을 보였다.

-샛별과 초승달이…….

-팽례의 표식 말고. 그 아래!

-기린이라 했습니다.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화의 글이 떠올랐다.

-동패. 분명 동패로 만들어진 팽례의 표식 아래 기린이 있다 하였지?

-네. 비늘 같은 털을 가진 긴 뿔의 용과 사슴을 합한 듯한 형상입니다.

할아버지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행간에 숨은 침묵의 의미.

돌연 이레의 가슴이 떨려왔다.

혹, 무언가 알고 있지는 않을까?

이레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 동패에 대해 아십니까?

악이 대답했다.

-모른다.

짧은 대답에 잔뜩 부풀었던 기대감이 푹 꺼져버렸다.

그러나 곧 이어진 악의 말에 이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기린이 뜻하는 바는 알 수 없다. 하나, 팽례의 패에 길한 짐승이 그려진 경우는 알고 있다.

상이 곧바로 글을 달았다.

-알고 있다고? 네가 진정 그 의미를 안단 말이냐?

-당연히 알고말고.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걸?

상과 화 그리고 예가 거의 동시에 답했다.

-웃기고 있네. 그 의미를 아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이 몸이니라.

-난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으니, 유일하다는 말은 틀렸구려.

이레가 물었다.

-그 패가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악과 화가 답했다.

-그건 곤란하구나.

-왕가의 비밀이니. 나를 비롯하여 아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만큼밖에 되지 않는다. 아이야, 안타깝지만 나도 알려줄 수 없구나.

이때, 상이 끼어들었다.

-푸하하. 비겁한 녀석들. 개 코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기는. 솔직히 말해봐. 모르지?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거지?

상의 도발에 화와 악이 발끈했다.

-아는 척이라니. 내가 누구인지 진정 모른단 말이냐?

-모를 리가 있겠느냐?

상은 여전히 그들을 놀렸다.

-알아? 그럼, 말해봐. 아이가 들으면 안 된다고? 어차피 서탁에 깃든 백귀 아니냐. 알아도 문제 될 건 없잖아?

서탁에 침묵이 감돌았다.

상의 글이 다시 질주했다.

-못하겠지. 아무렴. 푸하하하하.

그 웃음에 화와 악이 휘갈겨 쓴 글로 대응했다.

-백귀라. 듣고 보니 그렇군. 원한다면 해주마.

-남이 쓰는 걸 보고 따라 할 수 있으니. 아이야, 네가 수를 헤아리거라. 삼이 되면 동시에 쓰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상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네 아들이다.

상의 도발로 이루어진 승부.

이레는 악할아버지의 제안대로 서탁에 수를 썼다.

일(一), 이(二)…….

그리고 마침내 삼(三).

이레가 마지막 획을 긋기 무섭게 화, 악, 상 그리고 예의 글이 동시에 나타났다.

-왕이다.

-왕의 팽례.

-왕.

-신수는 오직 왕의 팽례만이 가질 수 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타난 글.

심지어 잠자코 있던 예마저도 같은 답을 냈다.

서탁에 기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잠시 후, 사뭇 진지해진 상의 글이 나타났다.

-이 망할 놈의 잡귀들. 대체 어떻게 왕의 팽례를 아는 거냐?

화가 답했다.

-왕이니 당연히 알지. 그러는 너는 어찌 아느냐?

-왕이니까.

-허튼 소리하지 말거라. 네가 왕이면 난 허깨비란 말이냐?

-그럼 내가 허깨비겠냐?

둘의 다툼이 길어지자 악이 끼어들었다.

-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 요사스런 서탁엔 어떤 비밀이 있는 것 같다.

상이 호기심을 보였다.

-어떤 비밀?

악이 말했다.

-각자 지금이 언제인지 적어 봐라. 어느 대, 어느 해, 어느 날인지. 참고로 난…….

악의 제안에 화, 상, 예가 차례로 글을 적었다.

-지금은…….

-…….

-오늘이 아마…….

잠시 후, 악의 글이 다시 나타났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연도는 보이지 않았을 터. 왜냐면 내 서탁에서 그 내용만 사라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상이 역정을 냈다.

-그렇긴 하다만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악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모르겠느냐? 이 서탁은 시간, 날짜 그리고 특별한 몇몇 내용을 전하지 않는다. 다른 건 다 되고. 덕분에 우린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서탁에 붙은 잡귀라 생각하지. 그런데 만약…….

예가 말을 받았다.

-모두가 그리 생각하는 것이라면. 여기 있는 모두가 살아 있다면.

상이 웃었다.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사실이라면 저 아이도 백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고, 간택에도 참여했단 말이냐? 아서라. 허튼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악이 말했다.

-서로 사는 시대가 다르다면 반드시 말이 안 되리라는 보장도 없지.

상이 답했다.

-그렇다면 가능은 하겠지. 하지만 그건 더욱더 말이 되지 않아. 잡귀의 소행이 아니라면 이 서탁은 대체 무슨 요물이란 말이냐?

화가 글을 적었다.

-애초에 이 서탁 자체가 범상하지 않으니…….

화의 말을 끝으로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상이 침묵을 깼다.

-대단하군. 대단해. 정말 그럴듯하구나. 귀신에게 홀린다는 말이 마음 약한 자에게나 해당되는 소리라 생각하였더니. 내가 직접 당해보니 과연 현혹당할 만하구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어찌나 그럴듯하게 하는지…….

화와 예도 오랜만에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하긴, 그럴 리 없지.

-사는 것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까. 현실조차 깨치지 못한 인생들이 어찌 시공을 논할까.

어떻게든 자기 뜻을 관철할 것 같던 악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님 말고.

지켜보던 이레는 애가 탔다.

엉뚱한 논쟁으로 정작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할아버지들.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좀 전에 기린이 그려진 동패를 왕의 팽례라 하셨는데. 사실입니까?

화가 대답했다.

-그렇단다. 종류는 다르나 신수가 그려진 팽례의 패를 가진 자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팽례. 즉…….

악이 그의 말을 받았다.

-너의 오라비는 왕의 팽례였을 터.

툭!

이레의 손에서 붓이 떨어졌다.

“왕의 팽례.”

마침내 오라버니의 정체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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