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22화 (22/215)

#22. 은백, 은협, 은랑

이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팽례가 무엇입니까?”

간신히 찾은 오라버니의 흔적.

언젠가 궁 안에서 자랑하듯 슬쩍 보인 둥근 패.

그것을 형운은 ‘팽례의 패’라 했다.

“팽례란 누군가의 서신을 전하는 사람을 말하오.”

“문안비(問安婢)처럼 말입니까?”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반가의 여인들.

그들을 대신하여 정초에 새해 문안을 드리는 여자 하인을 문안비라 하였다.

형운은 팽례의 패를 이레에게 건네며 대답했다.

“그렇소. 문안비보다는 은밀하게 움직이긴 하지만, 소식이나 서신을 전한다는 면에서는 같소. 다만, 동패를 가진 팽례는 좀 더 특별하오.”

“무엇이 특별합니까?”

“팽례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패를 지니는데, 보통 나무를 깎아 만드오. 그곳에 팽례를 뜻하는 샛별과 초승달을 새기고, 그 아래 특정 가문을 뜻하는 글자를 새기는 게 일반적이오.”

오라버니가 어떤 일을 하는지 이레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남의 심부름을 한다는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급 관리라 어쩔 수 없이 높은 분의 잔심부름을 하는 줄 알았지, 그 일이 본업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레가 다시 물었다.

“동패를 가진 팽례는 왜 특별합니까?”

“동패는 궐과 지방의 관청을 출입할 때 쓰이오.”

오라버니는 말했다.

이 패만 지니면 조선 팔도 못 만날 사람이 없다고.

단순한 허풍이라 생각하였는데, 조금의 어긋남 없는 사실이었다.

이 패만 지니면 궐조차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으니.

“관청을 드나드는 팽례의 동패 또한 샛별과 초승달이 있고, 그 아래 소속을 뜻하는 글이 적혀 있는 게 일반적이오. 하나, 이 동패의 경우는…….”

손때로 반질반질한 동패엔 샛별과 초승달 아래 구름 위를 달리는 신수, 기린이 그려져 있었다.

형운이 말한 바대로라면 기린이 오라버니의 진정한 소속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형운조차도 기린이 어느 조직과 신분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레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라버니, 대체 누구의 팽례셨습니까?”

대관절 어떤 서신을 전하려 하였기에 이런 지경으로까지 내몰리셨습니까?

절벽 아래로 추락할 때 오라버니가 느꼈을 심정을 생각하니, 심장이 짓이겨지는 기분이었다.

이레는 아랫입술을 거칠게 물었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형운이 그녀를 붙잡았다.

“어딜 가려 그러오?”

“절벽 아래를 살펴봐야겠습니다. 동패를 여기서 찾았으니 이 아래로 가면 다른 흔적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잠도 못 자질 않았소? 다른 사람을 불러올 테니, 잠시라도 쉬시오.”

이레는 바삭 마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는 것보다 이리 움직이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애써 미소 짓는 그 눈빛이 너무도 처연했다.

“……함께 갑시다.”

단단한 결기가 느껴지는 형운의 목소리에 이레도 더는 사양하지 못했다.

길을 찾아 간신히 절벽 아래로 내려간 두 사람은 실종된 기대의 흔적을 찾아 여러 곳을 헤맸다.

절벽 아래는 전형적인 계곡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병풍처럼 두른 기암절벽 아래,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괴이한 형상의 바위와 뾰족한 자갈 사이를 굽이치듯 흘렀다.

여름의 한 중앙이라.

숲은 무성했고 딱히 길이라 부를 만한 곳도 없어 좀처럼 수색에 진척이 없었다.

“늦었습니다.”

두 시진 후, 산 아래로 내려간 홍인모가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

대부분이 건장한 체구의 장한들이었는데, 개중에 허리가 굽은 노인과 왜소한 체격의 중년인이 섞여 있었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자들입니다.”

토박이들과 함께 본격적인 수색이 시작되었다.

계곡을 굽이굽이 헤집고, 숲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작은 돌멩이의 그늘까지도 살폈다.

그러나 한나절이 꼬박 흐르도록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이레와 형운의 곁으로 홍인모가 다가왔다.

“토박이들의 말에 따르면 지난 몇 달간 비가 유난했다 합니다. 계곡 물이 많이 불어 절벽 아래 못엔 사람이 들어가지 못할 지경이었답니다. 만약 거기에 빠졌다면…….”

홍인모는 흉흉한 뒷말을 삼켰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오겠습니다.”

형운에게 허락을 구한 홍인모가 서둘러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홍인모의 손엔 괴나리봇짐이 들려 있었다.

“주군.”

“이게 무어냐?”

홍인모가 입을 열기 전,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이레가 신음을 흘렸다.

“그건…….”

봇짐을 본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홍인모가 형운을 보았다.

형운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표했다.

“보십시오.”

홍인모가 내민 봇짐을 이레가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떨리는 손으로 봇짐의 모서리를 더듬던 이레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접히는 안쪽에 엉성하게 수자 놓인 나비 한 마리.

팔랑거리며 날갯짓하는 노랑 봄나비는 다름 아닌 자신이 놓은 자수였다.

오라버니의 원행이 외롭지 않길 바라는 염(念)과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일랑 따뜻하길 바라는 원(願)을 담은 자수였다.

수자를 배우고 처음 놓은 것이라 엉성하고 허술했다.

볼 때마다 부끄러워 여러 번 다시 해주겠다 하였지만, 그때마다 오라버니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것이니, 절대 돌려줄 수 없다 하였다.

그 엉성한 봄나비가 외딴 계곡 아래에서 다시 이레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걸…… 이걸 어디서 찾아냈습니까?”

“개울 한가운데 있는 너럭바위 귀퉁이에 겨우 걸쳐 있었다 합니다.”

이레는 홍인모가 가리킨 곳으로 뛰어갔다.

봇짐이 발견된 바위 밑은 물살이 급해지는 곳이었다.

“위험하오.”

행여 급류에 휩쓸릴까 싶어 형운은 서둘러 이레의 허리를 낚아챘다.

“정신 차리시오.”

어깨너머로 들려온 목소리가 이레를 붙잡았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오라버니를…….”

“그는 저곳에 없소.”

냉정한 단정에 이레는 멈칫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한 검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형운이 달래듯 다시 말했다.

“김기대, 그 사람은 저기에 없소.”

들끓던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전신을 지탱하던 끈 하나가 툭 하고 끊어진 것 같았다.

아닐 것이다.

오라버니는 무사할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리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오라버니의 패를 발견하였어도, 절벽으로 떨어졌다는 호방의 말을 들었어도.

그래도 믿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그 간절한 바람이 오라버니의 봇짐을 발견한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맥이 풀린 이레는 휘청거렸다.

형운은 그녀를 물가로 데려 나왔다.

그 와중에도 이레는 품에 안은 봇짐을 놓지 않았다.

이마저도 놓아버리면 오라버니를 영영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감추려 봇짐에 얼굴을 파묻었다.

흙탕물에 더러워지고 색이 바래진 나비 자수처럼 기대의 생(生)이 흐릿해진 듯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흐윽…….”

이레의 입에서 기어이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그날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오라버니께 가지 말라 어린아이처럼 떼라도 써보는 것이었는데.

안갯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오라비의 뒷모습이, 돌아와 어머니께 함께 가자던 그 든든하고 아득한 등.

그 등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이레를 서럽게 했다.

***

수색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그러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대와 관련된 물품은 봇짐 외엔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더는 산속을 헤맬 수 없음이라.

형운은 남겠다 하는 이레를 끌다시피 하여 관아로 되돌아왔다.

사또가 버선발로 뛰어 나와 그들을 극진히 대했다.

“이, 이제 오십니까? 이리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제가 관졸들을 이끌고 산에 오를 것을 그랬습니다.”

사또의 과한 굴신에 형운은 홍인모를 돌아보았다.

“대체 뭐라 한 것이냐?”

어젯밤만 해도 당장 주리를 틀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날뛰던 사또가 이젠 꼬리라도 흔들 기세였다.

홍인모가 사또를 내려다보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패가 가짜가 아님을 증명하였을 뿐입니다.”

사또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한겨울 된서리처럼 차갑고 매서웠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달리 뒤끝이 강한 녀석이라.

일단 상대를 적으로 인식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지난밤 사또의 무엄한 행동을 보았으니, 틀림없이 갖은 방법으로 협박하고 괴롭혔겠지.

모르긴 몰라도 사또는 앞으로 적어도 한 달은 악몽을 꾸게 되리라.

대체 무슨 말로 사또를 저리 만들었을까?

세손이라는 정체는 밝히지 않았을 터인데.

그럼 뭐라 한 걸까?

“인모야.”

형운이 그를 불렀다.

홍인모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인, 이곳에 있습니다.”

“과하구나.”

“저자가 한 일을 생각하면 이쯤은…….”

“과하다 하였다.”

“송구합니다.”

홍인모를 물린 형운은 허리조차 바로 펴지 못하는 사또에게 말했다.

“청을 하나 해도 되겠느냐?”

“여부가 있겠나이까. 괜한 오해로 귀한 분께서 낭패를 겪으셨으니. 그 곤란을 어찌 만회해야 할지 궁리 중이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지요. 원하는 건 뭐든 대령하겠나이다.”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편히 쉴 곳이 있으면 될 뿐.”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사또가 이방을 손짓했다.

“이보게, 뭐 하고 있는가. 어서 안으로 뫼시질 않고.”

“네네.”

이방이 종종걸음으로 이레를 안내했다.

그 등 뒤에 대고 형운이 덧붙였다.

“큰일을 겪어 놀라고 기력이 없으니…….”

형운의 당부가 채 끝나기 전, 눈치 빠른 이방이 양손을 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외숙께서 근방 백 리 안에선 최고로 손꼽히는 의원입지요. 특히 놀라서 경기하고, 기력 없어 헛헛한 환자 전문인지라. 나리께서는 걱정 푹 내려놓으십시오.”

이방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레는 형운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조금만 쉬고 나오겠습니다.”

“푹 쉬어도 상관없으니, 천천히 나오시오.”

“죄송합니다.”

이레의 말에 형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게 옳을 것 같소.”

무심한 말 속에 담긴 서툰 배려.

하얗게 마른 이레의 입술이 아주 잠깐 길어졌다.

흐릿하게 웃은 이레는 곧 이방을 따라 안채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레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킨 형운은 사또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서늘한 음성으로 명을 내렸다.

“이곳에서 호방으로 일한 자. 그자에게 대한 모든 것을 내게 가져오라.”

***

새벽 별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사또와 이방이 가져온 모든 자료를 살핀 형운의 표정이 어둡게 침잠되었다.

“호방 박진봉. 이 마을 토박이로 열다섯 되던 해에 마을을 나갔다 두 해 전 돌아왔다. 마을 밖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 정확히 아는 자 없으나, 어수룩한 말과 달리 아는 게 많고 글을 읽을 줄 알아 아전으로 일하게 되었다.”

사또와 이방을 닦달하여 호방에 대한 모든 내력을 긁어모았다.

평범한 신상 가운데,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이요루를 맡아 관리하였고, 훈장과 평소 친분이 두터워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와 친분이 돈독했던 훈장은 어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평화로운 시골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살인사건.

아이들을 위해 사또에게 간청하여 관아에서 책씻이할 만큼 자상하고 마음 넉넉했던 훈장의 죽음.

그의 죽음과 박진봉 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는 듯한데,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호방 박진봉.”

고을 안에서 박진봉의 평은 후했다.

그가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체머리를 흔들었다.

그 순한 놈이 그럴 리 없다는 대답만이 되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박진봉은 철저한 이중생활을 해왔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순박한 그가 어떻게 그런 살인마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를 따르던 자들은 대체 누구일까?

“마을 밖에서 지낸 몇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다.”

형운의 생각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배후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정작 손에 쥔 정보가 없으니,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할 길이 없었다.

“놈을 놓친 것이 아쉽구나.”

곱씹는 형운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홍인모의 손아귀에서 도망친 자다.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의미.

“언젠가 꼭 찾아내고 말겠다.”

이로써 찾아야 할 사람이 하나에서 둘로 늘었다.

김기대와 박진봉.

“……조금 피곤하군.”

머릿속이 흐릿했다.

어제부터 잠시도 쉬지 못했다.

형운은 사또의 집무실을 나왔다.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모두 돌아가 쉬라 명했다.

늦은 새벽 시간이라.

문을 지키는 포졸 둘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들의 쪽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이방이 알려준 안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을 밝혀 두어 찾기 쉬울 거라 하더니.

과연, 안채로 들어서니 불 밝힌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형운은 무심히 발길이 이끄는 대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런!”

그의 입에서 낭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희미한 불빛 아래.

벽에 등을 기댄 채 깊이 잠든 이레의 모습이 보였다.

형운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이방이 무언가 오해한 모양이다.

어쩐지 쉴 방이 어디냐 물었을 때, 묘한 미소를 보이더라니.

“실례했소.”

돌아 나가려던 형운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옹송그린 채 잠든 여인이 그의 눈에 밟혔다.

차마 편히 눕지도 못한 채, 맨바닥에 봇짐을 한껏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어째서…….”

볼 때마다 이런 모습인지.

괜스레 성화가 치솟았다.

거칠게 몇 걸음 밖으로 옮겼다.

못 본 척, 상관하지 하지 않으려 너른 보폭으로 성큼성큼 마당으로 내려섰다.

이레의 안쓰러운 모습이 그의 발을 잡아끌었다.

“하아.”

깊은 한숨.

형운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는 이부자리를 꺼내 조심스레 이레에게 덮어주었다.

“많이…… 애썼소.”

혹여 이레의 잠이 깰까 조용히 물러나 방 밖으로 나왔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신을 신는다.

마지막으로 열린 문을 닫으려 문고리를 잡았다.

때마침 이레가 뒤척였다.

어깨에 드리운 이불의 포근함 때문일까.

지친 그녀의 얼굴에 짧지만, 평온한 기색이 어렸다.

형운은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지된 시간이 흘렀다.

열린 문이 다시 닫히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

안채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온 형운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직도 아니 주무셨는가? 어디 먼 곳에 다녀와 곤하다 들었는데.”

쥘부채를 팔랑거리며 다가오는 사내.

서강율이었다.

예의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다가오는 그를 형운은 찌푸린 미간으로 반겼다.

“그대가 어찌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군.”

형운의 냉정한 인사에 강율은 두 팔을 펼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한가? 그럼, 이 순진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형운은 짧지만, 단호히 대답했다.

“옥사.”

“옥사? 아! 사람들이 날 오해한 그 일 때문이군.”

“과연 오해일까?”

“하하. 제 입으로 ‘어사’의 ‘어’ 자도 말하지 않은 사람에게 사칭죄를 적용하였으니, 당연히 오해일 수밖에. 아니 그러한가?”

강율의 너스레에 형운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허상익이라 하였던가.

그 어사가 단단히 벼르는 눈치였는데, 대체 어떤 수작을 부린 걸까.

입심 대단하여 순진한 사람 미혹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 재간이 오만한 어사에게까지 통할 줄이야.

“어떻게 풀려났는지 모르나,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이 많으니 조용히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조용히 넘어가면 결코 안 되지.

삭탈관직.

적어도 그 정도는 해주어야지.

“어이쿠, 눈빛이 너무 뜨거워 마주 보기 가슴 떨릴 지경이네.”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 강율은 고개를 슬며시 들이밀며 물었다.

“그보다 어디 계시다 오는 길인가? 찾아봐도 안 보여서 내가 얼마나 간을 졸였는지 아는가?”

“김기대. 그 사람의 봇짐을 발견했다.”

서강율이 부채를 접었다.

“설마…… 죽었는가?”

물어보는 그의 음성이 잘게 떨렸다.

“시신은 찾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서강율은 부채를 다시 펼쳐 부쳤다.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에 미소가 되돌아왔다.

당연히 살아 있을 거로 믿는 눈치였다.

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럴 수밖에.

형운의 뇌리로 봇짐을 안고 지쳐 잠든 이레가 떠올랐다.

바람이 깃든 듯 가슴 언저리가 선득선득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한 겐가?”

어느 틈엔가, 바싹 다가온 강율이 그의 상념 사이로 불쑥 질문을 던져넣었다.

“무얼 묻는 것인가?”

“나야 단순한 오해였으니 금세 해결되었지만, 그쪽의 경우는 다르지 않은가? 듣자하니 마패를 보였다던데? 물론, 그 자리에서 가짜인 게 판명되어…….”

“가짜 아니다.”

“에이, 어사 허상익의 말을 들어보니, 가짜인 게 틀림없다고 하던데. 뭘 또 그리 억지를 부리시나.”

“억지도 아니다.”

서강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소문으로 듣자니 어사가 되면 마패 외에도 유척을 비롯한 몇 가지 필수적인 물품을 받는다 하던데. 어사는 마땅히 그 물품을 마패와 함께 챙겨야 한다지?”

“…….”

“진짜 어사라면 그런 물품은 어디 있는가?”

“……없다.”

없을 수밖에.

아바마마께선 마패 하나만 무심히 던져주셨을 뿐이니.

“어사 중에서도 암행대는 발탁하는 과정 또한 신비하고 어렵다 하던데. 그런 절차를 받았는지…….”

“받은 적 없다.”

팔랑팔랑.

부채를 흔드는 강율의 손동작이 크고 빨라졌다.

표정 변화는 없지만, 그 단순한 동작 하나만으로도 형운은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들었다.

“어찌 생각할지 모르나, 그 마패는 가짜가 아닌 진품이다. 궐로 돌아가면 내 증명해 보이지.”

“하하, 뭘 굳이 증명까지야. 괜찮으이. 알고 보면 우린 모두 은자원의 동료 아닌가. 그쯤은 얼마든지 웃고 넘길 수 있다네.”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증명해 보이마. 없는 증명서라도 발급받아 은협, 그대에게 진품임을 증명하겠다.”

형운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나 정작 강율은 다른 말에 더 관심을 보였다.

“은협? 나를 은협이라 부른 겐가? 대체 그게 무슨 뜻인가?”

눈빛을 반짝이며 기대하는 강율에게 형운은 찬물을 끼얹었다.

“은자원의 협잡꾼.”

서강율은 부채를 활짝 펼쳐 눈 아래를 가렸다.

“이 순진한 사람에게 그런 억울한 별명을 붙이다니. 너무하는군.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였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미소를 그렸다.

“그래도 이리 불러주는 것은 처음이니. 은협이라……. 은자원의 협객. 좋구나.”

형운이 이를 아득 갈았다.

“협객이 아니라 협잡꾼이다.”

“뭐, 어찌 되었든 은백께서 날 그리 다정하게 불러 주니. 기쁘기 한량없으이.”

“은백?”

“은자원의 백수(白手)님.”

형운은 매서운 눈매로 강율을 노려보았다.

“네가 진정…….”

분노의 마음을 삭이지 못하는 그의 손을 강율이 덥석 잡았다.

“이곳의 잔치는 파하였으니. 난 그만 다른 잔칫집을 찾아 떠나야 할 것 같네.”

형운은 강율에게 잡힌 손을 뿌리쳤다.

“함께 온 사람은 어쩌고?”

“기왕 하신 걸음이니. 이대로 은백께서 맡아 주게나.”

“주막에서도 이러더니. 제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것이 취미인가?”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부탁하는 걸세.”

부채를 곱게 접어 온전히 얼굴을 드러낸 강율은 형운을 마주 보며 말했다.

“이번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은백께 부탁하지만, 이런 일은 이번 한 번뿐일세. 우리 은랑의 곁자리, 그리 쉽게 내주지 않을 걸세.”

“은랑?”

“은자원의 여랑(女郞).”

그게 무슨 소리냐는 형운의 강렬한 눈빛에 강율이 슬며시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잊었는가? 그날, 우리가 처음 한자리에 모여 다짐한 일을.”

네 명의 은자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였던 단옷날.

그곳에서 서강율은 이레를 은자원의 은자로 받아들였고, 아무도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또 보세나.”

미소 섞인 마지막 눈인사를 끝으로 서강율은 어둠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던 형운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엔 허상익에게 빼앗겼던 마패가 들려있었다.

작별인사하듯 손을 마주 잡을 때, 강율이 슬쩍 넘긴 것이었다.

마패를 꽉 움켜쥔 형운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누구 맘대로.”

그것이 이레에 대한 것인지.

다음에 또 보자는 서강율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하는 형운조차도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머릿속이 번잡했다.

바람도 풀벌레 소리도, 그리고 흘러가는 구름의 모양도 다 탐탁지 않았다.

그중 가장 신경을 거스르는 건…….

“저들은 이 시각까지 어인 부산인가.”

형운은 관아와 이웃하고 있는 이요루로 시선을 던졌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이요루는 사방 환하게 밝힌 횃불로 낮처럼 밝았다.

어사 허상익이 수하들을 부려 이요루의 먼지 한 톨까지 살피고 있었다.

수하들이 미덥지 않은지, 먼지 구덩이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그 모습이 결연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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