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기린(麒麟)의 동패
여름 산길은 습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잎이 수렁처럼 발목을 휘감았다.
이레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연신 뱉으며 호방의 뒤를 쫓았다.
그러는 와중에 뒤따르는 형운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운은 예의 무표정하게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호방의 뒤를 따르는 것을 썩 내켜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큰 불만도 내비치지 않았다.
한 시진 전.
객방에 갇힌 이레와 형운을 호방이 찾아왔다.
김기대의 행적을 아는 사람을 찾았다 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이레가 물었다.
“그러니께, 조금만 더 가믄 돼유.”
“반 시진 전에도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가 그랬나유?”
“그리고 그 전에도 조금만 더 가면 된다 하였지요.”
“그 사람이 사냥꾼이라서 조금 외진 곳에 살아유. 그래두 을매 안 남았슈.”
이레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오라비를 찾는다는데 어딘들 못 갈까?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분께서 제 오라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까?”
“말도 마셔유. 나가 그걸 알아보려고유. 마을을 아주 다 뒤집고 다녔슈. 점박이네도 갔고, 철구네도 갔고. 근디 철구 아범이 보이지 않잖유. 그래서 또 어딜 갔나 해서 이짝에도 가보고 저짝에도 가보고. 그 뭐시기냐. 냇가에도 가구 그랬슈. 근디 알고 보니 뒷간에 있잖유. 그래서 나가 그곳까지 가서 막 뭐라고 했슈.”
“그래서 찾았다는 거죠?”
“아직 설명 다 안 끝났슈. 근디 어디까정 설명했는지 잊어버렸네유.”
“철구네 이야기였습니다.”
“맞어. 그랬지유. 아무튼 여차저차해서 이러저러한 사람들을 나가 만난 거지유.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된 거쥬.”
“그렇게 찾은 사람이 이곳에 사는 사냥꾼이라는 말이군요.”
“역시 한양서 오신 분이라 눈치가 보통 아니네유. 그랬시유. 여기서 저짝까지 이어진 절벽이 있는디. 거게 사는 사냥꾼이 안다 하더라구유.”
구불구불 이어지던 오솔길이 어느새 끊겼다.
멀리서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절벽이 있다는 소리가 사실인 모양이다.
“그 사냥꾼은 어떤 분입니까? 제 오라비와는 어떤 사이랍니까? 혹시…….”
제 오라버니가 그곳에 계신가요?
이레가 물으려 할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형운이었다.
팔에 와 닿는 따뜻한 온기에 이레는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눈으로 물었다.
‘무언가 이상하오.’
형운 역시 눈으로 대답했다.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귓전으로 호방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 양반이 사냥꾼과 뭔 사인 줄 나가 어떻게 알겠슈. 그건 나도 모르쥬. 직접 가서 물어보셔야 할 것 같네유.”
형운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무척 차갑게 식은 음성이었다.
“그가 사냥꾼이라면, 어쩌면 제집에 없을지도 모르겠군. 그대가 먼저 가서 사정을 살피고 오는 것이 어떠한가?”
“그건 아니쥬. 내 일도 아닌디.”
“발품값이라면 넉넉히 쳐주지.”
“돈이라면 됐슈. 나가 한 몇 년을 여길 나가 전국을 싸돌아다니는 일을 했는데유. 다 소용없었시유. 돈은 중요한 게 아니더라구유.”
“그럼, 무엇이 중한가?”
“글씨유. 지금도 그게 무언지 찾고는 있는디. 알 듯하다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가도 알 듯하니. 가물가물한 것이 아무튼 잘 모르겠시유.”
“길이 험해 더 올라가는 건 무리일 것 같군.”
“다 왔시유. 조금만 더 가면 되는디.”
“난 지쳐서 한 걸음도 갈 수 없다.”
형운은 아예 근처 바위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본 호방이 물었다.
“지금 뭐한데유?”
“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더는 올라갈 수 없다고.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군.”
“하이고, 한양서 오신 양반이라 그런지 뭐가 이래 궁금한 게 많대유?”
“우리가 갇힌 곳은 본래 역졸들이 지키고 있었지. 그들은 어찌 되었나?”
“푹 삶은 수육에 막걸리 한 잔씩 쭉 돌렸쥬. 그랬더니 허겁지겁 먹드라구유. 배부르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 맴 아녀유. 졸리는지 배부른 머구리마냥 눈을 끔뻑이더니, 그대로 잠들었시유. 아마, 몹시 피곤들 했나 봐유.”
“우릴 어사가 직접 심문한다 하였는데.”
“아유,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유. 나가 다 잘 설명했네유.”
“그래?”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형운이 이레의 팔을 잡고 산 아래를 향해 걸었다.
호방이 물었다.
“뭐하는 거유?”
“밤이 너무 깊었다. 우린 이쯤에서 돌아가야겠다.”
“그래도 예까지 왔는디, 헤어진 오라버닌 봐야지 않겠슈?”
“마치 김기대,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나가 그렇게 말했슈?”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께, 암만 해도 나가 실수를 했네유.”
호방의 얼굴에서 순박한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형운이 딱딱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김기대,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느냐?”
호방, 박진봉이 대답했다.
“그러니께, 애먼 사람 붙들고 묻지 말고, 직접 물어보셔유.”
수풀 여기저기에서 사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한 명 두 명 모습을 드러낸 자가 아홉 명.
박진봉이 씩 웃으며 말했다.
“곧 만날 수 있을 거여유.”
***
“어허. 밤이 되니 제법 쌀쌀하구나.”
옥사를 나선 서강율은 휘적휘적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는 허상익은 벌레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하필 이곳에서 단 한 명뿐인 암행대의 어사를 만나게 될 줄이야.
일진이 사나워도 이렇게 사나울 수 있나.
그래도 하는 수 없다.
아무리 유명무실해졌다 하나 일반 어사인 자신보단 암행어사의 권한이 더 크니.
그야말로 어사 위의 어사였다.
어사마저 감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차하였다간 이 자리에서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요, 파직까지도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자가 바로 암행대의 어사였다.
그러니 불편하고, 불쾌해도 참을 수밖에.
허상익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어딜 가는 겁니까?”
서강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우리? 언제부터 그대와 내가 함께 다니는 사이가 되었는가?”
허상익은 어색한 미소를 떠올렸다.
“암행대의 어사가 납시었는데, 제가 보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런 뜻이었군.”
“그래서 지금 어딜 가는 겁니까? 제게 귀띔해 주시면 아랫것들을 먼저 보내 놓겠습니다.”
“누구긴 누구겠는가? 김기대, 그 사람을 찾으러 가는 길이지.”
허상익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김기대라면…….”
“허허, 이거 왜 이러시나. 자네도 김기대 그 사람을 찾으러 온 걸 다 알고 있네.”
서강율의 말에 허상익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것을 어찌 알았을까?
어사대 내에서도 극비로 취급된 이야기거늘.
“그리 경계할 건 없네. 비록 소속은 달라도 우린 같은 어사 아닌가?”
“……그렇지요.”
같은 어사.
분명 어사대의 어사와 암행대의 어사는 같은 어사로 불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두 조직을 하나로 오해한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이름은 어사대라 하나 어사대의 어사와 암행대의 어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어사대의 어사는 엄연히 이조(吏曹) 소속.
즉, 궐 내부와 지방조직을 감시하고 감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에 반해 암행대는 삼정승이 복잡한 절차를 거쳐 추천인을 올리면, 최종적으로 왕이 친히 임명하는 특명어사(特命御史).
그들의 상관은 하늘 아래, 오직 한 사람.
왕뿐이다.
추천한 삼정승은 물론이고, 이조를 비롯한 육조의 다른 조직과도 무관했다.
오로지 왕만을 위한, 왕만을 섬기기 위한 친위대.
암행대의 성격이 어찌나 은밀하였던지, 심지어 암행대의 어사로 지명된 자조차도 봉서를 뜯어보고 확인하기 전까진, 자신이 암행어사가 된 줄 모를 지경이었다.
이처럼 어사대와 암행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터라.
서로 경쟁하는 것은 물론이요, 경우에 따라선 적대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기에 같은 어사 운운하는 서강율의 말에 허상익은 속으로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배알이 뒤틀렸지만, 겉으로는 야살 떠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허상익의 입가에 비굴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지금 그 김기대란 자를 만나러 가는 겁니까?”
허상익의 물음에 서강율은 쥘부채를 폈다.
“아쉽게도 그건 아닐세.”
“그럼, 어딜 가는 겁니까?”
“김기대,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여기라는 건 알고 있을 테지?”
이번에도 허를 찌르는 질문.
허상익은 대답하는 대신 과장되게 헛기침을 했다.
“어험.”
쓱, 곁눈질하던 서강율이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가 어디로 갔느냐인데. 그건 도통 알 길이 없고, 자네 또한 그렇겠지.”
“괜히 떠보려는 수작이라면 그만두시지요.”
“떠봐?”
서강율은 걸음을 멈추고 허상익을 멀뚱히 내려다봤다.
“뭘 알고 있어야 떠보기라도 하지.”
얕잡아보는 듯한 눈빛.
서강율의 얄미운 표정을 마주하자니, 허상익은 목구멍으로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울컥 치솟는 듯했다.
절로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입맛이 썼다.
“그러는 서 어사께선 무언가 쓸 만한 걸 찾아내시었습니까?”
서강율은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찾아내지 못했네.”
“그럼, 결국 다를 게 없는 처지 아닙니까?”
“쓸 만한 걸 찾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어울리지 않는 것을 발견하긴 했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뇨?”
“자네 이상하다 생각한 적 없는가? 김기대, 그 사람이 이 먼 곳까지 와서 하필 단양 관아를 찾은 이유 말일세.”
허상익도 궁금하게 여긴 차였다.
그도 처음 김기대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을 때, 큰 의문을 느꼈다.
전향사의 하급 관리가 단양까지 대관절 무슨 볼일이란 말인가.
그가 집의에게 확실한 증좌를 캐오겠다 장담한 이유도, 실은 그의 흔적이 이곳 단양의 관아로 이어졌던 까닭이다.
사또나 휘하 육방을 족치면 사소한 단서 하나라도 나오겠지.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마을 사람조차도 그에 대해 아는 자가 없었다.
그가 이곳에 들어와 활보했다면, 외지인에 민감한 지역 사정상 모를 리 없을 텐데.
“김기대, 그 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발 하나는 정말 빠른 사람이지. 밤새 조용히 다녀갔다면 아는 자가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세.”
“그래서요. 대체 그 이상한 게 뭡니까?”
서강율이 멈춘 걸음을 다시 옮기며 말했다.
“이곳에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그런데 하필 관아다. 만약 자네라면 어떤 장소를 택할 텐가?”
인물이 아니라 장소.
허상익은 이 점에 집중했다.
“관아에 속해 있지만,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 또한, 누가 드나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서강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상익의 뇌리로 세 글자가 떠올랐다.
“이요루.”
허상익은 눈을 빛냈다.
“이요루. 이요루였어.”
답을 찾은 허상익의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 이요루를 살펴봐야 한다.
“잠시 볼일이 생겨 이만…….”
그는 미처 인사도 마치지 못한 채 허둥지둥 사라졌다.
“사람 참 인사성 없기는. 귀한 정보를 주었으면, 고맙다 말 한마디 정도는 제대로 하는 게 도리이거늘.”
멀어지는 허상익의 뒷모습에 대고 서강율은 혀를 찼다.
문득 제 뒤를 조용히 뒤따르는 장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귀찮은 떨거지를 치워 버렸으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 안 그러냐, 몽돌아.”
몽돌이 물었다.
“이요루에 아니 가십니까?”
“그 장소엔 굳이 갈 필요 없다.”
“그자에겐 거짓 농간한 것입니까?”
“하하. 내가 거짓 농간을 부려야 할 만큼 그자가 대단해 보이더냐?”
“그럼 이요루에 관한 이야기는 대체 뭡니까?”
“그건 사실이다. 다만 그곳에 가봐야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게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김이레, 그 영특한 낭자가 벌써 찾았겠지.”
“이요루는 역시 눈속임을 위한 거짓입니까?”
“아니다. 다만, 이요루에서 찾아야 할 것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곳에서 무엇을 찾아야 한단 말입니까?”
서강율은 탁 쥘부채를 접었다.
“사람.”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을 찾으면 되겠군요.”
몽돌의 말에 서강율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사또는 몰라도 이방을 비롯한 육방 중 누군가는 쓸 만한 이야기를 쥐고 있었겠지.”
“그렇다면…….”
“잔치에서 말이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이것저것 알게 되는 것이 많더구나.”
“무얼 알게 되셨습니까?”
“관아의 아전이 아니건만, 관아를 수시로 드나드는 사람. 아니, 정확히 관아와 이웃한 이요루에 수시로 머무는 사람이라 해야 할까.”
“그게 누굽니까?”
“그 사람은 바로…….”
서강율이 발을 멈췄다.
이 마을 훈장의 집 앞이었다.
“훈장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노인이 소일거리 삼아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다.
다른 곳도 아닌 이요루에서.
덕분에 이요루에 가면 언제든 훈장을 만날 수 있었다.
끼익.
서강율은 사립문을 열었다.
“계시오. 아무도 안 계시오?”
깨끗하게 정돈된 마당.
쓸데없는 겉치레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소박한 초가.
외골수인 주인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긴 집이었다.
선비가 머무는 곳답게 바람결에 묵향이 느껴졌다.
동시에 어울리지 않는 냄새가 서강율의 코끝을 스쳤다.
비릿한 쇳내.
“이런.”
서강율의 눈빛이 탁해졌다.
그는 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작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두 칸 초가집의 방문을 차례로 열었다.
이윽고 서탁에 엎드린 채 죽은 훈장의 시신이 그의 망막에 들어왔다.
“한발 늦었구나.”
짧은 탄식이 서강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툭, 맥 풀린 얼굴로 문지방에 걸터앉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훈장의 시신 뒤편.
네 폭 병풍에 피로 쓰인 글귀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
하늘의 그물이 크고 넓어 성긴 듯하나, 기실 무엇 하나 빠트리지 않는다.
병풍에 쓰인 여덟 자 글귀를 본 서강율은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심지어 옥사에 갇혔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십학사(十學士).”
서강율은 결코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이름을 뱉어내듯 읊조렸다.
그의 두 눈이 사납게 이글거렸다.
***
“헉헉.”
턱밑으로 숨이 딱 달라붙었다.
가파른 산길을 뛰는 이레의 전신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어리석었다.
호방, 박진봉의 순박한 얼굴에 경계를 풀었던 것이 이리 크게 되돌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
아니, 오라버니라는 말에 정신이 팔려 주의력을 잃어버렸다.
스스로 범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간 격이다.
그나마 중도에 형운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미 망자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었으리라.
되새겨보면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절대 풀지 않았을 경계를 풀고, 하지 않았을 일을 분간 없이 하고 말았다.
그저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주위를 살피지 못했다.
박진봉이라는 저 사내의 덫에 걸린 건 그 탓이다.
욕심이 눈과 귀를 닫아버렸다.
이레는 자책했다.
서탁의 할아버지들께서 하신 조언과 무용담을 엮으면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음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레는 앞서 달리는 형운을 바라보았다.
단지 약조를 지키기 위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온 올곧은 사람.
그 사람마저 저로 인해 이런 처지가 되었으니.
이 빚을 어찌 갚는단 말인가.
번민과 자책을 곱씹으며 얼마나 달렸을까?
앞을 가로막은 수풀이 갑자기 사라졌다.
시야가 확 넓어지고, 멀리서 은은하게 들리던 폭포 소리가 수십 배는 더 커졌다.
“아!”
이레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절벽이다.
적을 피해 달리다 보니, 그만 도망칠 수 없는 구석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걸 워쩐대유. 더는 도망도 못 가게 생겼네유.”
박진봉이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나타났다.
그의 뒤로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누이라서 그런가.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네유. 죽을 자리로 같은 곳을 선택한 걸 보면 말이쥬.”
박진봉의 말에 이레는 그만 왈칵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이곳이었구나.
내 오라비 죽은 곳.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을 자리를 찾아왔다? 가소롭구나. 우릴 이곳으로 몬 것은 바로 너희가 아니더냐?”
형운이었다.
이레를 지키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그가 박진봉을 내려다보았다.
물에 풀린 먹이 가라앉듯, 어둠이 가라앉았다.
먼 곳에서부터 짙푸른 새벽이 차오르고 있었다.
박진봉을 보는 형운의 두 눈에도 시린 냉소가 담겼다.
그 차디찬 시선을 박진봉은 가면 같은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대단하네유. 쫓기는 와중에도 그런 것까지 파악하고 말이쥬.”
“이곳인가? 김기대, 그 사람이 구석까지 몰린 곳.”
“그렇지유. 바로 이곳이었쥬.”
“그는 어떻게 되었지?”
“나는 몰러유. 뒤쪽의 절벽이라면 혹 알란가 모르겠네유.”
이레는 고개를 돌려 절벽 아래를 확인했다.
천 길 낭떠러지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암담하쥬? 아무리 아래쪽에 숲과 개울이 있어도 이 정도믄 살 수 없겠쥬? 개울이 있어서 오히려 더 위험해유. 물은 얕고 돌은 뾰족해서. 전에 멧돼지가 떨어지는 걸 봤는데. 아유, 끔찍하더라구유.”
박진봉의 말에 이레는 현기증이 일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형운이 부축했다.
“저자의 말을 듣지 마시오.”
박진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한 가지는 좋은 점이 있슈. 곧 죽은 오라비를 볼 수 있으니께유. 혹시, 알아유? 아직 승천하지 않고 이편에서 누이를 기다리고 있을지유.”
느긋한 목소리와 달리 섬뜩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박진봉이 칼을 들었다. 포위하듯 슬금슬금 위치를 옮긴 다른 사내들도 일제히 무기를 손에 쥐었다.
박진봉은 선심 쓰듯 말했다.
“그러니께, 그걸 뭐라더라. 맞어. 마지막 소원. 그거 하나 들어드릴게유. 나가 좀 인정이 많아서유.”
“어떤 소원을 들어줄 텐가?”
형운이 묻자 박진봉이 칼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대답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면 돼유. 칼침 한 번 크게 맞고 오라비를 볼 참인지, 아니면 잘게 찔리고 절벽으로 떨어진 오라비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유.”
이레는 박진봉을 노려봤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원망해본 적 없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선 입으로 뱉은 독설은 언젠가 칼이 되어 돌아온다 하셨다.
서탁의 할아버지들께서도 처한 환경보다 깨달음이 중요하다 하셨다.
그 말씀들을 가슴속에 고이 새겨두었다.
그러기에 줄곧 그녀를 냉정하게 대한 할머니에게조차 속말일지언정 험담 한번 한 적 없었다.
그러나 오늘 처음,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원망하게 되었다.
미워하게 되고, 분노를 품게 되었다.
그 대상인 박진봉이 히죽 웃음을 보였다.
“좋네유. 나가 그런 표정을 좀 좋아해유. 그렇잖유. 죽기 전에 펑펑 울어싸는 거보단 그렇게 독기 파래서 노려보는 게 조용하고 좋지 않겄슈? 그래도 걱정은 마셔유. 가보시면 나가 보내드린 분들 많으시니께.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 거유.”
이레가 씹어뱉듯 물었다.
“어째서냐?”
“뭐가유?”
“어째서 내 오라비를 해하였느냐?”
“아, 그거유?”
박진봉이 빙글빙글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순박하거나 조금 바보처럼 느껴질 그런 웃음이었다.
“그러니께, 그 오라버니란 양반이유. 만나선 안 될 사람을 만나려 했슈.”
“…….”
“만나기로 약조한 양반보다 나를 먼저 만난 것이 오라비란 양반의 불운이었지유. 뭐, 우리도 이상하다 했슈. 오라비란 양반이 만나려 한 사람이 설마 열 번째 학사님일 줄은 생각 못 했으니께유.”
“열 번째 학사?”
“아, 그런 게 있네유. 이젠 상관없지만유. 아마 지금쯤 다른 높은 분께서 일을 잘 마무리하셨을 거여유.”
혼잣말하듯 중얼중얼 설명을 이어가던 박진봉이 또 실없이 웃었다.
“말이 좀 많았네유. 그런데 어떻게 죽을지 결정들은 하셨슈?”
형운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넌 결정하였느냐?”
“무슨 말이어유?”
“칼을 맞고 내 앞에 무릎 꿇겠느냐? 아니면 뼈가 부러지도록 맞고 무릎 꿇겠느냐?”
“허, 그건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리래유?”
박진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으악!”
박진봉을 따르던 아홉 사내 중 하나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뭐여? 무신 일이여?”
놀란 박진봉이 뒤를 돌아봤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검은 철릭을 입은 젊은 사내가 굶주린 늑대 같은 눈빛을 한 채 서 있었다.
산을 전력 질주하여 오른 듯 숨이 거칠었고,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두 눈만큼은 날 선 칼처럼 살아 있었다.
그의 칼은 서릿발 대신 핏물을 마시고 있었다.
형운의 우익위.
홍인모였다.
“그만 늦고 말았습니다. 이 죄 달게…….”
형운이 그의 뒷말을 막았다.
“왜 늦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내 곁을 비운 죄는 나중에 따로 물으마. 다만, 지금은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제 주인이 말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형운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느라 잠시 곁을 놓치고 말았다.
홍인모는 찬 서리를 뒤집어쓴 듯한 얼굴로 박진봉을 돌아보았다.
“감히……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이 무엄한 자들에게 저승길을 열어 주겠나이다.”
말 몇 마디 주고받는 짧은 사이에 홍인모의 거친 숨결이 잦아들었다.
쏘아드는 그의 살기에 사내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박진봉이 소리쳤다.
“답답한 사람들이네유. 이짝은 아홉이고, 저짝은 혼잔디, 뭐가 겁난대유.”
그의 재촉에 주춤거리던 사내들이 한 번에 달려나갔다.
쇠와 쇠가 부딪쳤다.
어두운 숲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
형운과 그의 호위무사.
그리고 박진봉이 이끄는 무리 간의 싸움은 치열했다.
홍인모는 같은 편마저도 두려운 마음이 일 정도로 살기가 짙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검술은 간결하고 깔끔했다.
심지어 먼저 공격하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선 채, 적의 공격을 흘리고 반격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흘리고 반격하는 이 두 가지 행동만을 반복했다.
다만, 한 호흡에 이어지는 두 동작이 너무도 빠르고 치명적이라 아무도 그의 검을 당해내지 못했다.
다음에 무엇이 올지 뻔히 알면서도 막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무려 넷이 쓰러졌다.
홍인모의 기세에 눌린 사내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저 선비를 잡아라.”
“저놈을 잡으면 저 칼잡이도 굴복하겠지.”
사내 셋이 형운에게 달려들었다.
형운의 미간에 꿈틀, 귀찮은 기색이 번졌다.
“검을 한 자루만 가져왔더니, 과연 번거롭게 비가 새는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린 형운은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곧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내를 순식간에 제압해 버렸다.
그것도 무기도 들지 않은 맨손으로.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그의 손 속은 거칠었다.
찔러오는 공격을 슬쩍 피하더니, 발을 채고 손날로 뒤통수를 후려쳐서 쓰러트렸다.
벌레를 밟듯, 꿈틀거리며 일어나려는 사내의 뒷덜미를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둥거리는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며칠 만에 쥐어 보는구나.”
칼을 쥔 형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날붙이를 잡자 그의 내면에 웅크린 사나운 맹수가 깨어났다.
남은 두 사내의 무위도 만만치 않았으나 발톱을 꺼낸 범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 혼란한 와중.
이레는 절벽가에서 생각지도 못한 물품을 발견했다.
무언가 돌팔매질할 것이라도 찾으려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물체를 본 것이다.
홀린 듯 다가가보니, 당장 떨어질 것처럼 절벽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둥근 패가 보였다.
이레는 몸을 낮춰 패를 들어 올렸다.
누런빛의 동패.
‘이 패만 있으면 조선 팔도 못 가는 곳이 없고, 못 만날 사람이 없다.’
오라버니가 장난처럼 말하며 보여주었던 그 패가 확실했다.
이레의 눈가에 뜨뜻한 물기가 차올랐다.
소맷자락으로 눈을 문지른 그녀는 서둘러 동패를 잡쥐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형운의 물음이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이레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곳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정작 형운은 그녀의 말을 달리 해석했다.
“안타깝게도 그 약삭빠른 자를 놓치고 말았소.”
박진봉.
느긋한 말투와 순박한 미소로 사람을 속이고 희롱한 간악한 사내.
그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달리 다친 곳은 없으신지요?”
“괜찮소. 그보다 그 물건은 무엇이오?”
“제 오라비의 것입니다.”
“잠시 살펴봐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고작 여인의 눈물을 달래 보겠다고 생사를 함께 한 고마운 사람이다.
오라비의 유품일망정 숨길 게 무엇일까.
이레에게서 동패를 받아 든 형운은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뒷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홍인모에게도 보여주었다.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샛별과 초승달이 한데 어우러진 것을 보면, 제가 아는 그것인 것 같사온데, 이 동패엔 특이한 짐승이 있사옵니다.”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말처럼 생겼으나, 뿔이 있고, 몸에 용처럼 비늘이 있사온데…….”
“기린(麒麟)이다. 몸통에 있는 것은 비늘처럼 생겼으나, 실은 오색의 털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샛별과 초승달 아래를 질주하는 기린. 이와 같은 동패는 본 적이 없사옵니다.”
“나도 그렇구나. 정말 특이한 패로다.”
형운과 홍인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패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패는…….”
이레는 긴장한 채로 형운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팽례. 팽례의 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