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20화 (20/215)

#20. 겸손한 모습이 무척 보기 좋군

단양 관아 옥사에 모처럼 죄인이 들어섰다.

옥문 앞을 지키고 선 옥졸은 졸음이 가득한 눈을 비볐다.

“뭣하고 섰느냐? 어서 문 열지 않고서.”

이방의 매서운 서릿발에 옥졸들이 허둥지둥 문을 열었다.

“이보시게, 난 억울하네. 난 억울하단 말일세.”

잔칫상의 상석에서 한순간에 곰팡내 가득한 옥사로 떨어진 서강율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은 이방의 날카로운 눈총뿐이었다.

“시끄럽다. 억울한 걸로 치면 네놈의 농간에 놀아난 우리보다 더 억울할까. 네놈 때문에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난처해졌는지 아느냐? 당장 목이 잘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저놈의 세 치 혓바닥에 놀아나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준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농간이라니? 설마 내가 농간을 쳤다 말하는 건가?”

서강율의 물음에 이방은 제 가슴을 쳤다.

“그 뻔뻔한 얼굴로 어사라고 사기 칠 땐 언제고. 이제 와 발뺌할 생각이더냐?”

“어사? 난 한 번도 어사라 한 적 없네.”

강율의 대답에 이방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놈이 뭐라 했느냐?”

“나야말로 묻고 싶네. 대체 내가 뭐라 했는데 이 난리 법석인 겐가?”

“관복을 입고 궐을 드나든다 하였지?”

강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로 그러하지.”

“또한, 한양에 머무는 시간보다 지방을 떠돌며 궁의 어떤 분께 이런저런 소식을 전한다고도 했고?”

“그 역시 사실이네.”

이방이 턱을 내밀며 추궁했다.

“그게 어사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냐?”

서강율의 입에서 헛웃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 사람 참 순진하긴. 겨우 그딴 말에 날 어사로 생각했단 말인가?”

“뭐라?”

“어디 그런 일을 하는 관원이 어사 하나뿐인가? 궁에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필요한 물품은 또 얼마나 많고. 궁의 뒷문으론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드나든다네. 개중엔 각 지방으로 파견되는 봉명사신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남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나 각 부처에서 원하는 것을 구해다 주는 말단 관원들도 많다네.”

“그럼, 긴한 일로 단양에 왔다는 말은 무슨 소리냐?”

“한양서 예까지 배 타고 말 타고 사나흘을 왔을 때는 당연히 긴한 일이겠지. 그럼, 사소한 일로 이 먼 곳까지 왔겠나?”

“그 긴한 일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냐?”

“사사로운 개인사까지 밝힐 이유는 없으이. 어쨌든 난 내 입으로 어사라 한 적 없네. 오히려 그대들이 멋대로 남의 말을 오해해서 내가 이런 꼴이 된 거 아닌가. 그러니 억울한 사람, 그만 가둬두고 이만 풀어주게. 그럼 내 너그러운 마음으로 없던 일로 함세.”

입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한 서강율의 능변에 이방은 일시 말문이 막혔다.

“이, 이놈이. 옥에 갇혀서도 간사한 주둥이는 여전하구나. 어사란 말만 직접 안 했다뿐이지, 말이며 태도에서 어사라고 말한 것이나 진배없지 않으냐? 하여간 어사께서 직접 네놈을 심문한다 하였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서강율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는 억울하네. 난 누굴 현혹한 적도, 희롱한 적도, 농간을 부린 적도 없네. 그러니 풀어주게. 난 정말 긴한 일로 이곳에 왔단 말일세. 제날짜에 일을 해내지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질 걸세. 그러니 그만 날 풀어주게. 어서 빨리!”

그의 외침이 고요한 옥사를 뒤흔들었다.

***

흥겨운 잔치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동헌 뜰에 쳐진 장막이 걷히고 기름진 음식상도 치워졌다.

곳곳에 횃불을 밝힌 동헌 뜰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섬돌 아래.

사또를 필두로 각 방의 이속(吏屬)들이 좌우로 열립하여 섰다.

책씻이하던 마을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관아 마당에 잡혀 있었다.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아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엄명이 내려졌다.

평소 사또가 앉던 대청 의자에 허상익이 자리했다.

그의 앞에 놓인 탁자에 공물이나 세금을 거둬들인 장부와 문서들이 높이 쌓였다.

관아의 창고가 열리고 장부와 대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사또는 대역죄라도 지은 죄인인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청렴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지도 않았다.

그러나 꼬투리를 잡으려 들면 없던 먼지도 묻어 나오는 법이다.

안절부절못하는 사또를 느긋하게 곁눈질하던 허상익이 장부를 뒤적였다.

대충 휘리릭 넘기는 모양새가 건성이었다.

“어사 나리.”

역졸 하나가 소반을 받쳐 들고 다가왔다.

그 위에 잡다한 잡동사니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 작자에게서 나온 물건들입니다.”

서강율에게서 뺏은 소지품이었다.

부채와 향낭, 두툼한 전낭,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침통까지.

허상익은 손가락으로 잡동사니들을 휘휘 뒤적거렸다.

어사라면 응당 지녀야 할 마패와 유척(鍮尺) 같은 물건은 그 속에 없었다.

“어사라 착각하고 대접하였다?”

그의 무심한 물음에 사또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 작자가 제 입으로 오해할 말을 잔뜩 하여…….”

“하지만 정작 어사라 한 적은 없다 하던데?”

“아닙니다. 말만 안 했다뿐이지, 잔뜩 허세를 떨며 특별한 일을 한다 했습니다. 궐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특별한 분의 눈과 귀가 된다 하니, 깜빡 속아 넘어갈 수밖에요.”

“그가 그대 앞에서 직접 그리 말하던가?”

“호방이 전했습니다.”

“호방?”

사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휘휘 돌리며 호방을 찾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호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느려터진 녀석이 또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단 말인가?’

사또가 애가 탄 얼굴로 이방을 바라보았다.

이방 역시 호방의 행적을 알지 못해 연신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행태를 지켜보던 허상익이 쯧, 혀를 찼다.

“그래서 그 호방이라는 자는 어디 있단 말인가?”

“호, 호방은 이 고장 토박이로 작은 상단의 행수 일도 했었고, 글도 제법 알아…….”

“내가 지금 그 호방이라는 작자의 내력을 물었는가?”

답답하다는 듯 허상익은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탁자 위의 문서가 우르르 쏟아졌다.

“그, 금세 찾겠습니다.”

“됐다. 달아난 게 아니라면 언젠가 나타나겠지.”

눈치 빠른 이방이 서둘러 어수선한 대청마루를 치웠다.

곧 탁자 위에 술상이 차려졌다.

“먼 길 오시느라 갈증이 나실 터이니.”

허상익은 마다치 않고 술잔을 비웠다.

사또가 재빨리 빈 잔에 술을 쳤다.

술잔을 받는 허상익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그자에게도 이리하였겠군. 융숭하게 대접하고 적당히 노잣돈 쥐여주려 하였겠어.”

“어디 어사 나리와 그 작자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궐에서 나왔다 하니 적당히 편의를 봐주려 하였을 뿐입니다.”

“편의라……. 좋은 말이로군.”

허상익의 모호한 말에 사또의 낯빛이 하얘졌다.

거만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허상익이 섬돌 아래에 선 형운과 이레를 턱짓했다.

“그런데 저자들은 이 마을 사람들은 아닌 듯한데.”

두 사람을 바라보는 허상익의 표정이 그리 편치 않았다.

사또를 비롯한 모든 이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숙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형운만은 뒷짐을 진 채 꼿꼿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 올곧은 태가 허상익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저, 저자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뒤늦게 형운의 행태를 본 사또가 두 눈에 불을 켰다.

“당장 저 무엄한 자를 무릎 꿇려라.”

포졸들이 달려들어 형운을 제압하려 하자 허상익이 손을 들어 막았다.

“잠깐.”

“왜, 왜 그러십니까?”

사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허상익은 미간을 찌푸린 채, 형운을 빤히 바라봤다.

왠지 눈에 익은 자인데.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허상익이 물었다.

“제법 기세가 등등하구나. 어디에서 온 자냐?”

만약 고관대작의 자제이거나 혹은 권문세가와 연이 닿은 자라면 훗날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

거드름 섞인 어사의 위엄에도 형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무형의 벽이 사내를 휩싸고 있는 듯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했던 굴신의 처세가 몸에 밴 까닭일까.

이쯤 되자 오히려 허상익이 당황하고 말았다.

어사를 앞에 두고도 저리 당당하다니.

이럴 수 있는 자가 세상천지 몇이나 될까.

이제나저제나, 잘 보일 기회만 노리던 사또가 끼어들었다.

“서강율, 그 협잡꾼과 함께 온 자들입니다.”

“그래?”

결국, 협잡꾼과 한패란 소리가 아닌가.

혹, 비범한 신세 내력을 가진 게 아닐까 걱정하였던 허상익이 여유를 되찾았다.

제아무리 귀한 태를 자아내도 사기꾼과 동행하는 자의 태생은 뻔할 노릇.

허상익은 굵은 눈썹을 휘었다.

“이놈…….”

소리 지르려는 허상익을 향해 형운이 두 눈을 똑바로 치켜떴다.

일순, 허상익은 다시 움찔했다.

저 눈빛이 과연 협잡꾼 따위가 부릴 시선이란 말인가?

‘저놈. 대체 정체가 뭐지?’

단순한 허세라면 죽음을 각오한 비장함일 테고, 그게 아니라면 분명 뭔가가 있다.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그러다 이내 저를 향한 주위의 시선을 인식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러나선 안 된다.

허상익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기세가 제법이구나. 그래, 뭐 하는 놈이냐?”

형운이 지지 않고 물었다.

“알려주면? 감당할 자신은 있느냐?”

“뭐라? 대관절, 네가 어떤 무엇이건대, 어사인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냐?”

허상익이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며 소리를 높였다.

그 소심한 반응에 형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소맷자락 안으로 집어넣은 손끝에 둥근 패가 잡혔다.

여간해서는 쓰지 않으려 했지만, 상황이 고약하니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난 바로 이런 사람이다.”

형운이 소매에서 마패를 꺼냈다.

말이 그려진 둥근 패.

어사를 상징하는 바로 그 패였다.

“어, 어사!”

놀란 사또가 벌러덩 뒤로 나자빠졌다.

또 어사라니.

어사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출두할 줄이야.

동헌 마당이 술렁거렸다.

관아의 아전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마저도 돌연한 어사의 출현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바로 그때였다.

“푸하하하하하.”

허상익의 입에서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영문 모를 그의 웃음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어사? 네가 어사라고?”

목젖이 보이게 껄껄 웃던 허상익이 형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사대엔 내가 모르는 자가 없다. 내가 모르는 자 중에 그런 어사패를 가진 자라면 오직 한 명. 유일하게 남은 암행대의 어사뿐이지. 아무래도 그대가 바로 그 암행어사인 모양이군.”

“…….”

허상익의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를 어쩔꼬. 누구도 얼굴을 보지 못한 그 암행어사 말인데, 이미 십 년 전에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가 되었다지?”

허상익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십 년 전, 그대의 나이 몇이었을까?”

비로소 사또를 비롯한 사람들은 허상익이 말하는 의미를 눈치챘다.

십 년 전부터 암행어사로 활동했다기엔 형운이 너무 젊었다.

허상익은 의자의 팔걸이를 사납게 내리쳤다.

“국법이 지엄하거늘. 감히 가짜어사 행세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가 속출하는구나. 여봐라, 당장 저들을 잡아라.”

“네.”

한목소리로 대답한 포졸들이 형운과 이레에게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여전히 뒷짐을 지고 선 형운이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괜찮겠느냐?”

허상익이 손을 들어 역졸들을 멈춰 세웠다.

그가 형운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냐?”

형운이 의자에 앉은 허상익을 올려다보았다.

“이리 날 함부로 대하는 것 말이다. 뒷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묻는 것이다.”

“……뭐라?”

허상익의 굵은 눈썹이 휘어졌다.

형운과 허상익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허상익이 인상을 잔뜩 쥐어짜며 노려보아도 형운의 무심한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랜 눈싸움 끝.

담장에 인 균열처럼 허상익의 입매가 비틀렸다.

“제법 기개가 있구나. 좋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널 문초하마. 하나,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차라리 제발 죽여달라 빌게 만들어줄 터이니.”

형운의 얼굴 위로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 그 말. 내 분명하게 기억하마.”

그는 포승줄을 내미는 역졸들을 물리고 이레와 함께 제 발로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잠깐.”

당당한 형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허상익이 이방을 불렀다.

“저자를 옥사가 아닌 관아의 객방(客房)에 가둬라.”

“네?”

이방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허상익이 혀를 찼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내가 따로 엄히 심문할 것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따르도록 하라.”

혹시나 모를 뒷배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이방이 앞장서자 형운의 뒤를 쫓아 객방으로 향했다.

“대체 어느 뒷배를 믿기에 저리 당당한지 모르겠구나.”

허상익은 형운의 마패를 들어 올렸다.

같은 마패임에도 영롱한 빛이 어려 있어 특별해 보였다.

“경기도에 의문의 어사우가 내렸다 하였지. 이 마패가 그와 관련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김기대, 그 작자를 쫓아 이곳까지 왔으나, 예기치 못하게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함께 해결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보다…….”

형운의 마패를 살피던 허상익은 눈살을 찌푸렸다.

“참으로 감쪽같이 만든 마패가 아닌가?”

***

‘귀찮게 되었군.’

이레와 함께 객방에 갇힌 형운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마패는 가짜가 아니었다.

아바마마께서 손수 내어주셨으니, 가짜일 리 없다.

다만, 절차상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워낙 즉흥적인 분이시라.

또 뒷일은 생각지도 않은 채 마패를 던져준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았으면, 마패를 주실 수도 없었겠지.’

본디 암행어사란 가합인(可合人)을 뽑아 심사하고, 그 심사 과정을 통과한 피초인(被招人) 가운데 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 관례다.

절차대로라면 세손인 그는 마패를 가질 수 없다.

‘이 일을 어찌한다?’

신분만 밝히면 풀려나는 것은 간단한 일.

문제는 그 이후였다.

그의 잠행은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어사 노릇은 더더욱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니 행여 이 일이 밝혀지면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포졸들에게 끌려올 때, 마을 주민으로 위장한 우익위 홍인모에게 눈짓을 보내 나서지 말라 한 것도 그 이유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허상익이라는 자가 새가슴이라.

만약, 국법 운운하며 포승줄로 그를 묶으려 하거나 옥사에 가두려 하였다면, 결국 홍인모가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사정이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

복잡하게 꼬인 일을 해결하려면 신분을 밝힐 수밖에 없으리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죄송합니다.”

그의 한숨에 이레가 고개를 숙였다.

“저 때문에 이런 고초를 당하게 되어, 이 죄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형운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그러니 내게 사과할 것 없소.”

“하지만…….”

이레의 말을 자르며 형운이 물었다.

“그보다 서강율과는 어찌 아는 사이요? 아니, 그자는 대체 누구요?”

이 모든 사달의 원흉.

서강율.

그자를 만나고 난 후부터 일이 꼬여 버렸다.

형운의 물음에 이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은 곳에서 일하는 분이시니, 저보다 더 잘 알지 않으십니까?”

형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은자원이라는 공간에 함께 있었다뿐이지, 정작 다른 은자들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서강율도, 김기대도.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눈을 빛내는 그에게 이레가 말했다.

“같은 곳에서 일하시기에, 하는 일도 같은 줄 알았습니다.”

“내가 그 사람처럼 가짜 노릇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오?”

무심코 말을 하고 나서야 뒤늦게 아차 싶었다.

조금 전 일이 떠올랐다.

그 역시 방금 협잡꾼으로 몰리지 않았던가.

정식 마패를 보이고도 가짜란 소리를 들었다.

속사정이 어떻든 이레의 눈엔 서강율이나 자신이나 같은 족속으로 보였겠지.

이걸 어찌 설명한다?

형운의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이레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분, 서 선비님에 대해 알게 된 건 제 오라비를 통해서입니다.”

김기대, 실종된 이레의 오라버니.

그를 통해 서강율을 알았다는 이야기였다.

“본래 제 오라비는 과묵하고 무표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김기대, 그 사람이 말이오?”

그리운 기억을 떠올린 듯 이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네. 입이 너무 무거워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웃는 얼굴을 보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습니다.”

이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형운이 본 기대는 과묵하긴커녕 잠시도 제 입을 가만 놔두지 못하는 작자였다.

무표정과는 더욱 거리가 멀었다.

“그런 오라버니께서 관직에 오른 이후로 점차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확하게는 은자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부터였지요. 안 먹던 술을 마시고, 집에 오는 시간이 점차 늦어졌지요.”

역시.

서강율, 그자가 멀쩡한 사람을 망쳐 놓았구나.

이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루 이틀 지나며 무표정하던 오라비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맺히고, 조금씩 대화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오라버니께선 주로 한 분에 관해 이야기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서 선비님이었습니다.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오라버니께서 서 선비님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요.”

“하필 그 협잡꾼을 동경하였단 말이오?”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이번 일은 착오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그의 농간이 착오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아무튼 더는 그를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이번 일이 알려지면 더 이상 관직에 있지도 못할 것이니, 가까이하고 싶어도 가까이할 수 없을 것이다.

직접 삭탈관직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문득 이레가 그를 보며 웃었다.

“그런데 나리께서 암행어사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형운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내가 왜 어사라 생각하오?”

“암행어사라 하셨으니까요.”

“어사의 말 못 들었소? 날더러 가짜라 하지 않았소?”

“하지만 나리는 암행어사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형운은 이레를 보았다.

그 맑은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 걸린 듯 그녀의 시선을 외면 수 없었다.

“어찌 그리 확신하오?”

“나리께선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니까요.”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녀의 눈을 본 순간.

형운은 알 수 있었다.

알게 되었다.

날 믿고 있다.

터럭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저 온전히 믿어주고 있음을.

그 수렁 같은 눈망울에서 간신히 도망친 형운은 부러 퉁명스레 말했다.

“난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정말 아닙니까?”

이레가 반문했다.

“…….”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난 암행어사가 아니다.

세손이다.

그리 말하고 싶었다.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 욕망이 불끈 튀어 올라왔다.

영문 모를 욕심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은자원.

그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있던 사람이 실은 세손이라 하면 과연 믿어줄까?

믿어주리라.

그녀라면.

놀랄지는 몰라도 분명 믿어주겠지.

이제 더는 날 의심하지 않으니.

이제 더는 나쁜 버릇으로 날 재단하려 들지 않으니.

내가 어떤 말을 하여도 믿어주겠지.

하지만…… 해선 안 된다.

내가 누군지 알면, 그녀와의 관계 또한 무너지리니.

저 믿음을 배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해선 안 된다.

날 마주 보는 저 선선한 눈빛을 영영 잃어버리기 싫다면.

절대 말하여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나는…….”

굳게 닫혀 있어야 할 그의 입이 열렸다.

이성은 분명 안 된다 외치고 있음에도, 가슴 깊은 곳에 숨은 것이, 그조차 알지 못한,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이, 그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하였다.

“나는 사실…….”

그때였다.

“안에 있어유?”

친근한 사투리.

사또가 간절히 찾는 호방의 목소리였다.

***

“이거 참 기이하구나.”

관아의 옥사로 향하는 허상익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손엔 형운에게서 빼앗은 마패가 들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진품 같구나. 대체 어디서 이렇게 감쪽같이 만들었을까?”

끝까지 굽히지 않던 형운의 당당한 기세도 마음에 걸렸다.

“이 일이 끝나는 즉시 그 내막을 자세히 캐봐야겠다.”

그가 이곳, 단양까지 내려온 것은 김기대 때문이다.

전향사 소속 하급 관원, 김기대.

세자궁에 출입하다 실종된 그자의 행방을 쫓기 위함이었다.

감찰하는 척하며 사또를 비롯한 관아의 아전들은 물론 마을 주민들에게까지 물었으나, 그에 대해 아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초조해졌다.

반드시 김기대에 대해 알아내고 말겠다 호언장담하였는데,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집의의 형형한 눈빛을 떠올리니, 오금이 저렸다.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없으면 거짓으로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증좌를 가져가고 말리라.

마침 적당한 제물도 찾은 참이라.

서강율을 떠올린 허상익은 입매를 비틀었다.

“감히 가짜어사 행세를 하다니. 팔다리를 부러뜨려 놓으마.”

인두로 지지고, 매질하면 없던 죄도 술술 불게 되어 있다.

잘만 구슬리면 김기대, 그자의 일도 사기꾼의 소행으로 정리될 수 있으리라.

역졸 둘을 이끌고 걷는 허상익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컴컴한 옥사로 들어섰다.

허상익의 얼굴에 드리워진 웃음이 사라졌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눈앞에 벌어진 탓이다.

옥사에 갇혀 앓는 소리를 뱉고 있어야 할 사기꾼.

서강율이 태연하게 밖을 활보하고 있었다.

“거 옥사 좀 깨끗하게 관리할 것이지, 아무리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 하나, 이리 지저분해서야 원.”

툭툭,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혀까지 차는 양이 죄인이 아니라 마치 구경 나온 사람 같았다.

옥사를 지켜야 할 옥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대신 옆구리에 비단 보자기를 낀 덩치 큰 장한이 서강율 곁에 서 있었다.

“네놈이 감히 옥사를 나와? 여봐라, 당장 저 협잡꾼을 잡아라!”

허상익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역졸이 서강율에게 달려들었다.

“뭘 또 이렇게 반겨주시나.”

서강율은 당황하기는커녕 악수하듯 두 손을 내밀었다.

역졸들의 손이 어느새 서강율에게 잡혔다.

“으악!”

“헉! 내 손.”

악수하듯 내민 서강율의 손이 이리저리 흔들리나 싶더니, 두 역졸은 바닥에 누워 비명을 터트렸다.

허상익은 놀란 숨을 채 뱉지도 못했다.

“저, 저것은 포박의 술(術)이 아닌가!”

포승줄로 범인의 팔을 묶고 제압하는 재주.

그것을 서강율은 맨손으로 펼쳐 보였다.

저것을 맨손으로 구사하는 자도 처음 보았지만, 서강율처럼 물 흐르듯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도 처음 보았다.

그러나 허상익이 놀란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좀 전에 서강율이 보인 포박술.

그것은 궐내, 그중에서도 특정 집단에서만 전해지는 특별한 기술이었다.

허상익의 턱이 덜덜 떨렸다.

“너…… 아니,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나?”

서강율은 평소처럼 넉넉한 웃음을 보였다.

거한이 옆구리에 낀 보자기를 풀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쳤다.

유척과 봉서(封書)가 한데 뒤섞인 중에서 서강율은 둥근 패를 들어 보였다.

“이런 사람일세.”

말이 그려진 동그란 마패.

허상익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 암행어사!”

서강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행히 눈은 제대로 박혀 있군.”

“정녕 암행어사란 말이요? 그, 그렇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던 거요?”

“암행어사라고 말한 적도 없지만, 암행어사가 아니라고 말한 적도 없네.”

서강율의 눈에 언제나 걸려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그보다 그댄, 고개가 너무 뻣뻣한 거 같으이.”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던 허상익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어사 허상익. 암행어사를 뵙습니다.”

그의 굽은 등을 내려다보며 서강율은 쥘부채를 펼쳤다.

“겸손한 모습이 무척 보기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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