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9화 (19/215)

#19. 내가?

“뭐하시오? 어서 들어오질 않고.”

서강율은 형운과 이레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관아 뒷마당은 왁자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마을 사람으로 보이는 수십 명이 소소하게 차려진 잔칫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어른과 아이가 골고루 섞여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잔칫상의 주역은 올망졸망하게 앉은 아이들이었다.

“오늘 이 마을 아이들 책씻이하는 날이라오.”

서강율의 설명에 이레는 주위를 훑었다.

잔칫상 바로 옆에는 부침개를 굽는 아낙들과 익는 족족 뜨거움도 모른 채 입에 넣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옆에 따로 상을 받은 사내들은 제 소싯적 모습을 영웅담처럼 늘어놓았다.

잔칫상의 중앙에는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 앉아 있었고, 그 주위엔 학동들이 모여 있었다.

훈장님, 훈장님 하며 따르는 모양새가 마치 어미를 따르는 어린 물새 같아, 지켜보는 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양반인데, 소일 삼아 양인 아이들 몇을 데려다 가르치기 시작했다오. 헌데, 아이들이 제법인가 보오. 배운 지 얼마 안 되었건만, 천자문은 물론이고 소학까지 뗐다 하니. 그 어미들이 신이 나 떡도 하고 부침개도 하고, 닭도 잡았다오.”

서강율은 두 사람을 잔칫상 한편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부부로 보이는 사내와 여인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강율은 그들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이보시게, 상구 아범.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지금 자네 아들이 훈장 어르신께 한 말씀 듣고 있는데. 어서 가서 무슨 말씀 하시나 듣고 거들어야지. 상구 어멈은 따라가지 말고 얼른 한 상 차려오게. 먼 데서 손님이 왔는데, 대접이 이리 엉성해야 쓰겠는가?”

“내 정신 좀 보소.”

두 내외가 서강율의 지시대로 각자 흩어졌다.

냉큼 자리를 차지한 강율은 빈자리를 두드렸다.

“그리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어서 앉게.”

마뜩잖은 표정을 짓던 형운이 당연하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잠시 고민하던 이레도 엉거주춤 그 옆에 자리 잡았다.

곧 중년의 아낙이 소박하지만, 맛깔스러워 보이는 음식상을 내왔다.

“고마우이.”

“필요한 거 있음 말만 하슈.”

“어디 임금님 수라상이 상구 어멈 손맛만 하겠는가?”

“워떡혀. 무신 말을 그렇게 달짝지근하게 한대유?”

강율의 말에 볼이 발그레 붉어진 상구 어멈은 몇 차례 더 분주히 오고 갔다.

푹 곤 닭고기가 놓이고, 고기 산적과 어전이 놓였다.

시골 마을에선 좀체 보기 힘든 푸짐한 상이었다.

이곳 인심이 원래 이리 넉넉한가 싶어 이레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기는 구색이었고, 풀잎만 무성했다.

그들이 앉은 자리만 특별한 것이었다.

이레는 서강율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서 선비님, 이 마을이 고향입니까?”

“나 말이오? 나야 당연히 한양 출신이오.”

“그럼 이곳에 한동안 계셨었나 보군요.”

서강율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충주나 제천엔 몇 번 들른 적 있어도 이곳은 오늘이 처음이라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이레가 다시 물었다.

“고향도 아니고, 머문 적도 없으신 분이 이곳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누가 보면 원래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 착각할 듯 강율은 마을 사정에 훤했다.

강율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 알아내는데 굳이 살아봐야 할 필요까지 있겠소? 그저 척 하고 보면 착 하고 나오는 게지. 자, 자! 먼 길 오느라 시장할 테니, 어서 먹읍시다.”

서강율은 닭 다리를 뜯어 형운과 이레에게 하나씩 주고, 자신은 몸통을 통째로 들고 뜯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먹성인지라.

이레는 잠시 멍한 얼굴로 강율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귀한 손님이 더 오셨네유.”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구부정하게 등을 굽힌 채 엇갈린 양손을 소맷자락 안에 넣은 중년인이 다가왔다.

“어서 오게, 호방.”

강율은 이번에도 또 알은체를 했다.

그는 호방의 손을 잡고 제 맞은편에 앉혔다.

“음식은 드실 만한지 모르겠네유.”

“어디 먹을 만하다 뿐인가?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인심마저 후하니.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 이곳 사람들은 호방을 닮아 모두 지혜롭고 어진가 보이.”

단양 관아의 호방(戶房), 박진봉은 강율의 입담에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한양서 오신 분이라 그런가. 아주 말이 청산유수네유.”

서강율은 손을 흔들었다.

“허허, 그리 칭찬하니 내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만약 내 알량한 말이 좋게 들렸다면, 아마도 이곳의 좋은 풍광과 내 앞에 앉은 자네의 호탕한 기개가 이뤄낸 기적이겠지.”

“지가 무신 호탕이 어쩌구 하겠슈.”

“과장이 아닐세. 내 호방처럼 대단한 기개를 가진 사람은 한양 땅에서도 몇 보지 못했다네. 수다한 명사(名士)들이 이곳의 절경을 입이 닳도록 읊고 그렸지만, 정작 자네의 호연지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레는 기가 막히다 못해 당혹스러웠다.

기개니 호연지기니.

사실, 호방의 생김과 성정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과례(過禮)는 비례(非禮)라.

과한 것은 부족함만 못한 것인데, 정작 과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칭찬에도 불구하고 헤벌쭉해진 호방은 당장 간이라도 꺼내 바칠 기색이었다.

“나가 무신 그렇게 뭐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서도, 사실 말을 안 해 그렇지. 인물이며 공부며 엔간히 됐다고 해야쥬. 근디…….”

강율의 말치레에 휩쓸려 제 자랑을 늘어놓던 호방이 이레를 눈짓했다.

“그짝 분은 얼굴도 요래 말꼬롬하게 생기셔서는, 어째 남장을 하셨대유?”

뜨끔한 이레는 서둘러 고개를 음식상으로 내렸다.

내 남장이 그리 허술한가?

이리 쉽게 들킬 줄이야.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두려웠다.

어찌 대처해야 하나.

고민하자니, 서강율이 불쑥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쉿.”

강율은 검지를 입술 위에 세웠다.

그의 표정과 행동이 사뭇 심각했다.

얼결에 강율을 따라 입술 위에 제 손가락을 얹은 호방이 물었다.

“뭐래유? 왜 그런대유?”

“이건 비밀인데…….”

“비밀유?”

“어디 가서 절대 말하면 안 되네.”

“나가 입 무거운 걸로 치자면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슈.”

“그럼, 내 호방만 믿고 말하겠네. 내 사실…….”

강율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궐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네.”

“궈, 궐이라문 그 한양에 이, 임금님이…….”

“쉿!”

“쉿!”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내가 어찌 비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그러니께 방금은 깜짝 놀라부러서 실수한 것이쥬.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녀유.”

“그럼 내 자네를 믿어도 되겠는가?”

“암만요. 당연하쥬. 근디 궐에서 무신 일을…….”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닐세. 사실, 궐에서 일한다고 말하기도 뭣하구먼. 나고 자란 것은 한양이었으나, 관복을 입고 난 이후론 늘 떠돌아다녔으니.”

“음마야, 관복을 입으셨대유?”

호방의 목소리가 불에 들어간 콩처럼 톡 튀어 올랐다.

일순, 시끄럽던 좌중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서강율과 호방에게로 향했다.

“관복을 입었다는 게 뭐시여?”

어느 사내의 물음에 호방이 타박하듯 대꾸했다.

“것도 몰러. 급제해서 나랏일을 봤다는 말이지.”

“뭐여? 그런겨?”

“아이구야, 그럼 우리 사또 나리 같은 분인겨?”

놀라는 아낙의 말에 서강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겸연쩍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나랏일은 무슨.”

어느새 비밀 이야기는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겸양을 떨던 서강율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저 궁궐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어떤 분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전하는…… 뭐, 그런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거늘. 그리 대단하게들 보지 마시게나.”

호방의 눈이 화들짝 벌어졌다.

“궁을 자유로이 드나드셔유?”

“그렇지.”

“나리가 궁을 드나드는 귀한 분이라면 저짝 분은…….”

서강율은 호방의 귓전에 작게 속살거렸다.

“날 도와주는 사람들일세. 이 사람이 남장을 한 것도 바로 그 긴한 일 때문이라네.”

“아, 그렇구먼유.”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호방이 자라처럼 목을 앞으로 빼내며 다시 물었다.

“귀한 나리께서 요래 아랫사람들과 단양까진 뭔 일이시래유?”

강율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일 거 같은가?”

뻑뻑한 머리를 애써 굴리던 호방이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설마…….”

“쉿!”

다시 손가락을 세운 서강율은 만면 가득 미소 지었다.

그러곤 조용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네만 알고 있어야 하네.”

“암만유. 걱정 딱 붙들어 매셔유.”

“허허, 그나저나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마른데, 술잔이 비었으니 이를 어찌한다.”

서강율이 빈 잔을 들자 너도나도 앞다퉈 술을 쳤다.

“이 술 한번 드셔보셔유. 지난해에 담근 국화준데. 맛이 아주 일품이쥬.”

“음마야, 찬이 어찌 이리 부실하대? 안 되겠슈. 내 부침개라도 하나 더 후딱 해와야겠슈.”

아낙 하나가 재게 사라졌다.

들썩이는 사람들을 보며 서강율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소란 중에 강율과 마주 앉아 있던 호방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뗐다.

***

호방이 다시 모습을 보인 곳은 관아의 안채였다.

잔치로 떠들썩한 관아 마당과는 달리 안채는 조용했다.

“사또, 호방이어유.”

밀린 송사의 처결을 위해 이방과 한창 논의에 빠졌던 사또가 문밖의 목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무어냐?”

문이 열리고 호방이 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유, 큰일이네유.”

“큰일? 무슨 큰일?”

“그러니께, 책씻이하는 곳에 한번 가보셔야 할 것 같은디유.”

호방의 말에 사또는 ‘난 또 뭐라고’ 하는 표정으로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잔칫상 차려주고 술도 내려줬으면 됐지. 내가 참석까지 해야 하느냐?”

사실 이 모든 것이 낙향하여 아이들을 가르친 훈장의 체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으면, 양인 아이들의 책씻이를 관아 마당에서 한다는 건 언감생심, 생각도 못 할 일이리라.

“그게 아니어유. 뭔가 이상하단 말여유.”

호방이 두 손을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뭐가 이상해?”

“오늘 아침에 한양서 온 객사 손님 기억나시쥬?”

“날 밝기 무섭게 찾아와 밥상부터 청하던 그 뻔뻔한 양반 말이냐?”

이방이 끼어들었다.

“네. 그 손님 말여유.”

“그 손님이 왜?”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쥬. 그러다 손님이 잠깐 나갔는데, 또 손님을 데리고 온 거유.”

귀 기울이던 이방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손님? 객사 손님이 또 는 것이냐?”

“중요한 건 그게 아녀유. 먼저 온 손님이 술을 들고 뭐라드라…… 산 맑고, 물 좋고, 선비가 뭘 어쩌고 하며 읊고…… 막 그러잖유. 그래서 나가 물었쥬. 한양에선 뭘 하고 살았냐. 그랬더니 관복을 입었다지 뭐여유.”

“뭐라?”

시큰둥하던 사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호방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자세히 말여유?”

“그래. 자세히.”

“그게, 그러니께…….”

“아, 숨넘어간다. 빨리빨리 말해.”

“그러니께 을순네서 가져온 국화주가 있슈. 을순 어미 솜씨가 대단하쥬. 생긴 건 우락부락 뭉치다 만 메줏덩이가 따로 없는데, 술 만드는 솜씨는 어찌나 얌전하고 차분한지. 그 집에서 나온 술은 뭐랄까유, 새침한 애기씨처럼 곱고 귀한 느낌이 난단 말이쥬.”

“아니, 내 지금 그따위 술맛을 듣자는 게 아니질 않으냐. 잡소리는 그만하고 그 전에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뭐가유?”

송아지처럼 둔한 눈을 끔뻑이는 호방의 모습에 사또는 복장이 터졌다.

“그 한양에서 온 손님, 또 뭐라 했느냔 말이다.”

“그러니께 나가 인자 그 얘길 하려고 하잖유. 자꾸 끼어드시니께 무신 말을 했는지 나가 헷갈리잖유.”

“알았다. 그래서,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나가 그 손님한테 국화주를 권했쥬. 그랬더니 손님이 괜찮다 하지만서두 아주 맛나게 드셨슈.”

“끄응.”

사또는 손바닥에 참을 인(忍)을 새기며 어금니를 물었다.

이곳에 부임한 뒤 생긴 버릇이었다.

사람들의 성품이 워낙에 느긋한 탓에 매번 사또만 동동 안달이 났다.

이 와중에 물까지 한 사발 들이켠 호방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근디 나가 탁 물었슈. 한양에서 얼마나 살았냐?”

“그건 아까 했고.”

“그러니까유.”

“그래서? 관복 입은 후로 늘 떠돌아다녔고. 그다음에, 그다음에 무슨 얘길 했느냐?”

“그때 누가 물었쥬. 관복 입는 게 뭐냐? 급제해서 나랏일 보는 걸 말하는 거다, 나가 대답했쥬. 그랬더니 글씨…….”

“그랬더니? 뭐라더냐?”

“아유, 말도 말아유. 궁을 드나든다지 뭐여유.”

긴장한 표정으로 호방의 입만 쳐다보던 사또는 허리를 바로 세웠다.

“겨우 궁을 드나든다는 말에 이 호들갑인 게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위로는 삼정승부터 아래로는 물 긷는 무수리까지 숱하게 많다.”

호방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 정도면 나가 입도 안 열쥬.”

“뭐가 더 있더냐?”

“그러니께, 이 나리가 궁의 어떤 분께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전해주는 그런 별 볼 일 없는 일을 한다지 뭐여유.”

사또의 눈이 커졌다.

그가 곁에 앉은 이방에게 물었다.

“이방,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느냐?”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전해준다는 말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렇지?”

염두를 굴리던 사또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한양에서 오신 손님. 어사가 확실하다.”

“어, 어사 말입니까?”

태평하던 이방의 안색이 노래졌다.

그에 반해 호방은 보란 듯 씩 웃었다.

“정말 그 양반이 어사라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닙니까?”

이방의 말에 사또가 수긍했다.

“큰일이다마다. 이 일을 어찌한다? 이방, 회계장부나 징세장부 잘 챙겨놨느냐?”

“꼼꼼히 기록은 했사오나…….”

“그리 미덥지 않은 대답이 어디 있느냐. 가만가만, 우선 이럴 것이 아니라.”

우왕좌왕하던 사또가 호방에게 물었다.

“그 손님, 어떤 사람으로 보이더냐?”

호방이 턱을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께, 공밥 좋아하고, 공술 좋아하고…….”

이방이 호방과 어깨를 마주치며 질문했다.

“공돈도 좋아하게 생겼느냐?”

“아유, 안 줘서 못 받지, 주면 개똥도 받을걸유.”

“그래?”

사또와 이방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방이 빠른 목소리로 아뢰었다.

“사또, 월향이에게 기별 넣겠나이다.”

관아의 행수기생 월향이라면 공밥 좋아하고, 공술 좋아하는 어사 정도는 노골노골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사또가 이방의 제안을 넙죽 받았다.

“제일 미태 고운 아이들과 함께 냉큼 들라 하라.”

“네.”

“그리고 반빗간에 일러 술상 다시 보게 하라.”

“여부가 있겠나이까.”

“그리고…….”

허둥대는 사또의 등을 호방이 밀었다.

“아이구 사또, 요래 앉아서 말만 하지 말고유. 좌우지간 어여 어사께 인사부터 올리셔야쥬.”

“아차차, 내 정신을 좀 보게나.”

사또는 입성을 바로 하고 서둘러 관아 마당으로 향했다.

중문을 벗어나기 무섭게 강율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

“정말 대단한 분 아닙니까?”

이레는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옮겨 앉은 서강율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형운은 관심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눈마저 감고 있었다.

그의 시큰둥한 반응에 어색하게 웃던 이레는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형운이 감은 눈을 뜨며 물었다.

“어딜 가시오?”

“잠시.”

이레는 뒷간을 눈짓했다.

형운은 낮게 헛기침하며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서둘러 잔칫상에서 멀어진 이레는 중간에 방향을 틀었다.

소란스런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제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오라버니의 향갑에 남겨진 여덟 글자.

그 글이 뜻하는 장소는 달리 있었다.

관아 객사 서편.

그곳에 자리 잡은 여덟 칸 이층 누각.

바로 이요루(二樂樓)였다.

이요루의 나무 난간에 기대선 이레는 향갑을 열었다.

붉은 언덕 위로 아침 해 떠오르니 (赤阜旦出)

산과 물, 모두가 좋구나. (丘壑二樂)

단순히 풍광을 칭송하는 글로 보이는 이 여덟 글자는 사실 어느 한 장소를 가리키는 암어(暗語)였다.

붉은 언덕 위의 아침 해에서 적(赤)은 단(丹)을 의미했고, 언덕 위에 떠오른 아침 해(阜旦出)는 양(陽)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단양(丹陽).

산과 물을 가리키는 구학(丘壑)과 두 가지 모두를 좋아하는 이락(二樂).

좀 전에 서강율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던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

이요루라는 명칭의 근원이 바로 저 공자의 말씀 속에 있었다.

결국, 오라버니가 남긴 암어는 이곳 ‘단양, 이요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덟 자 암어의 뜻은 일찌감치 풀었으나…….”

이레가 종이를 뒤집었다.

그곳엔 오직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열 십(十).

“이 숫자가 뜻하는 바는 도무지 모르겠구나.”

열두 가지 동물을 의미하는 십이지(十二支)나 절기와도 상관없었고, 단양을 뜻하는 고사나 그림과도 관련이 없어 보였다.

“혹시 이곳에 십과 관련된 징표가 있으려나?”

이레는 이요루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각의 천장에 혹여 숨겨놓은 것은 없는지, 난간 사이사이, 마루 틈새까지 샅샅이 살폈다.

누각의 이 층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곳이 아닌 아래쪽에 무언가 있는 모양이다.”

이레는 서둘러 누각의 계단을 내려갔다.

급한 마음 탓일까?

내려서는 발걸음이 그만 뒤엉키고 말았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난간을 잡을 수도 없었다.

“아!”

낮은 비명과 함께 이레는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계단의 단단한 모서리가 그녀의 눈동자에 크게 들어왔다.

곧 전해질 아픔의 크기를 가늠하며 이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느껴질 아득한 고통을 예상했다.

그러나 이어진 것은.

“괜찮소?”

허리를 낚아채는 날렵한 손길이었다.

떠받치듯 든든하고 포근한 품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형운이었다.

계단 아래에서 나타난 그가 추락하는 그녀를 받아낸 것이다.

어쩌다 보니 형운에게 안겨버린 이레는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형운은 발밑에 뿌리라도 뻗은 듯 굳건하였다.

“천천히. 그러다 뒤로 넘어질 게요. 안 잡아먹으니 서두르지 말고 균형부터 잡으시오.”

형운의 배려로 이레는 안전하게 계단을 디딜 수 있었다.

“다친 곳 없소?”

묻는 형운의 눈동자에 이레의 얼굴이 온전히 담겼다.

놀라고, 당황하고, 그리고…… 수줍어하는 모습이.

“괘, 괜찮습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난 이레는 두 발짝 물러섰다.

“누각을 둘러보기엔 밤이 깊었소.”

등 뒤에 남아 있는, 그리고 어깨에 내려앉았던 형운의 온기가 이레를 동요케 했다.

서로의 간격이 멀어졌음에도, 마음 귀퉁이에 붙은 작은 불티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귓불이 붉어졌다.

들키지 않으려 이레는 서둘러 걸음을 계단 아래로 옮겼다.

그 뒤를 형운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무얼 찾고 있소?”

“……!”

그의 물음이 족쇄라도 되는 양, 이레는 우뚝 멈춰 섰다.

“낭자.”

부르는 목소리에 이레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두운 밤.

계단 위에 선 그의 모습은 그린 듯 아득했다.

붉고 선명한 그의 입술이 물었다.

“아직 나를 못 믿소?”

“…….”

파도치듯 밀려오는 그의 진심에 이레는 숨이 턱 막혔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렵고 난처한 상황이라 그의 시선을 피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이유에선지 형형한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선과 시선이 맞닿았다.

그의 진심이 심장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의 눈이 말하고, 그의 목소리가 전하며, 자신의 심장이 대답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다만, 오라버니의 생사가 걸린 일이라 조심 또 조심했을 뿐.

이레는 대답 대신 향갑을 꺼냈다.

형운이 눈을 빛냈다.

“그것이 무엇이오?”

“오라버니께서 집을 떠나기 전, 산 것입니다.”

“평범한 향갑으로 보이오만.”

“네. 시전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평범한 물건입니다. 하지만 평소 오라버니의 성정을 비춰볼 때 다분히 수상한 물건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이 물건을 입수한 방법이 범상치 않다면 더더욱 의심해야 할 일입니다.”

딸깍.

이레는 향갑을 열어 안에 든 쪽지를 형운에게 건넸다.

“이것은…….”

심상치 않은 글귀.

형운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이레의 설명이 공기를 타고 흘렀다.

“뒤편의 글귀는 이곳, 단양의 이요루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운의 눈에 놀람이 들어찼다.

“암어로군. 이걸 어찌 해독했소?”

“어린 시절, 자주 하던 놀이였습니다.”

“암어 풀이를 놀이 삼아 했단 말이오?”

“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이레를 형운은 짙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덟 자가 뜻하는 바는 쉽게 풀었습니다. 하나, 뒷면의 열십(十)자가 가리키는 의미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는 중이었구려.”

“네.”

형운이 물었다.

“이 쪽지. 분명 김기대, 그 사람의 물건이오?”

“물건을 구할 때 마침 제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잔잔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낭자에겐 심각한 결점이 있는 것 같소.”

“제 결점이라니요? 제가 무얼 보지 못한 겁니까?”

형운은 어둠에 잠긴 숲을 가리켰다.

“무엇이 보이시오?”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형운의 눈가가 보기 드물게 휘어졌다.

“바로 그게 문제요. 숲을 가리키면 숲을 보면 그만. 그 숲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또 무엇이 있는지 일일이 헤아리려 하면 정작 큰 것을 놓치게 되는 법이라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숫자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낭자의 통찰력이 되레 낭자의 눈을 가리고 말았다는 말이오.”

형운은 쪽지를 이레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낭자의 오라비가 이것을 찾기 위해 여기로 왔다 생각하시오?”

“그랬으리라 짐작합니다.”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 생각엔 그 역시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터. 하지만 이곳에 오면 자연스레 알게 되었을 것이오.”

“알지 못하지만, 오게 되면 알 수 있다.”

형운의 말을 곱씹듯 입속으로 되뇌던 이레가 이내 탄성을 뱉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군요.”

“그렇소. 그대의 오라비, 김기대는 여기서 열(十)을 기다리고 있었소.”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곳에 있는 누가 그대의 오라빌 만났는지 찾는 것이오.”

***

마을 아이들의 책씻이로 시작된 잔치는 어느새 어사를 위한 연회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어이구, 으딜 그리 가셨던 거래유? 나가 한참을 찾았네유.”

호방이 자리로 돌아온 형운과 이레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여 오시어유. 시장하시쥬? 이거 돼지염통인디 한번 드셔보셔유.”

귀한 것이라며 접시를 내려놓는 그에게 이레가 질문했다.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나가 뭘 알갔슈?”

“두어 달 전, 이곳을 찾은 손님 중에 혹시 한양에서 온 손님이 있었습니까?”

“한양서 오신 손님이믄…….”

잠시 기억을 되짚던 호방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나가 요새 정신이 없어유. 어제 일도 까묵는디, 두 달 전 일이 생각나겠어유?”

“꽤 시끄러운 자였을 거요. 저자처럼.”

형운이 상석에 앉은 서강율을 턱짓하며 말하자, 이레가 한마디 거들었다.

“키도 저분만큼 크고 생김도 반듯하여 쉽게 잊힐 얼굴은 아닙니다.”

형운의 무심한 목소리가 다시 따라붙었다.

“허세 심하고 말을 아주 얄밉게 했을 것이오. 저자처럼.”

자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호방은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도통 모르겠네유. 눈썰미 좋은 반빗아치가 있으니께 한번 물어나 볼게유.”

“부탁합니다.”

이레가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호방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말하는 투나 표정이 영 미적지근했다. 그래도 지금 믿을 것은 그가 가지고 돌아올 대답뿐이었다.

그때 ‘우와’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느닷없는 소리에 이레와 형운은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노릇하게 잘 구운 통돼지 한 마리가 서강율과 사또의 앞으로 운반되는 중이었다.

“허허, 이게 다 무엇이오?”

술잔을 들이켜던 서강율이 놀란 듯 물었다.

“불철주야(不撤晝夜), 아래로는 민심을 살피고 위로는 성심을 섬기시느라,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이곳에서 푹 쉬고 기력 가득 채우시어, 더 넓은 시야로 백성들의 삶을 살펴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습니다.”

“허허, 뭐 이런 걸 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서강율은 군침을 삼켰다.

“이곳 단양엔 여덟 가지 절경이 있다 하여 단양팔경이라 하더니. 이제 보니 단양팔경이 아니라 단양십일경이라 불러야 할 것 같소이다.”

“단양십일경요?”

술잔을 높게 든 서강율이 노래하듯 소리쳤다.

“술잔에 뜬 아름다운 달빛이 단양의 아홉 번째 절경이요, 고운 노랫가락에 사뿐한 춤사위 보여주는 저 미인이 단양의 열 번째 풍취가 아니겠소. 마지막으로 이리 넉넉한 인심을 어찌 빼놓을 수 있으리. 이것이야말로 열한 번째 자랑이니. 단양십일경이라 부르는데 뉘 감히 반대할 것이오.”

사또가 무릎을 딱 쳤다.

“하하하, 맞습니다. 옳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술을 치고, 마시고, 뜯고, 씹고, 삼키고, 노래하고, 춤추는 잔치의 여흥에 단양 관아가 녹지근하게 녹아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밖의 기별에 잠시 자리를 비운 이방이 사또에게 돌아왔다.

“사또.”

갸웃갸웃 고갯짓하는 양이 무언가 불편한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괜스레 가슴이 철렁한 사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상한 일?”

“관아 밖에 몇 사람이 찾아와 사또 만나길 청합니다.”

사또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은 늦었으니. 날 밝은 뒤에 찾아오라 일러라.”

“소인도 진즉 그리 말했습죠. 한데…….”

“한데?”

“위세가 등등하여 당장 나오라, 쩌렁쩌렁 호통을 칩니다.”

“뭐라? 감히 어떤 놈들이냐?”

“그게…….”

서강율의 눈치를 살피던 이방이 사또에게 귓속말을 했다.

“어사랍니다.”

“어사?”

사또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사라면 여기 계시지 않느냐?”

사또가 서강율을 힐끔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어사라니! 누가 어사란 말이냐?”

카랑카랑한 음성과 함께 한 무리의 사내들이 잔치가 벌어진 동헌 뜰로 들어섰다.

매서운 인상의 사내, 허상익이 사또를 노려보았다.

“감히 이 자리가 어디라고!”

사또 역시 지지 않고 호통쳤다.

허상익이 코웃음 치며 품에서 마패를 꺼냈다.

그의 양옆에 선 역졸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어사출두요!”

사또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지만…… 여기 계신 이분도 어사라 했는데.”

사또가 이 와중에도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서강율에게 시선을 돌렸다.

꼴깍.

입안의 술을 삼킨 서강율이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뭐? 어사?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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