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유달리 긴 밤
밤이 깊었다.
낮이 몰락하자 숲의 그늘에서 숨죽인 온갖 것들이 기어 나왔다.
풀벌레 소리, 밤새 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 개 짖는 소리.
한양이나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나.
시끌벅적한 밤의 향연은 다르지 않았다.
온갖 사람들이 거쳐 가는 주막도 낮보다 밤이 더 생기 넘쳤다.
밝은 낮엔 풍경에 묻혀 여느 집들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어두운 밤이 되면 불을 밝히고 떠들썩한 곳으로 돌변한다.
하지만 주막의 가장 큰 방.
그곳엔 때아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하. 이 무슨 기막힌 우연인지 모르겠군.”
서강율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꼼짝없이 밤이슬 맞고 자야 하나 했는데.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야말로 하늘의 돌보심이 아니겠나.”
시끌벅적하게 감회를 쏟아낸 서강율이 형운을 슬쩍 보았다.
감동적인 일장 연설에도 형운은 팔짱을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눈까지 감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닌 모양이오. 안 그렇소?”
머쓱해진 강율이 흘끔 이레에게 눈짓을 보였다.
눈치 빠르고 영민한 여인이었다.
이쯤 하였으니 적당히 받아주며 분위기를 풀어주리라.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이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정적.
강율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몸을 들썩였다.
“허허, 참 덥다.”
부채질로 식은땀을 날려보아도 어색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강율은 애꿎은 주모를 찾으며 방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도 들지 않았군. 허! 시장하다. 주모, 여기 국밥 좀 주시오!”
허둥지둥 나간 강율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굳게 닫힌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질문 하나 해도 되겠소?”
고심 끝에 꺼낸 질문인데, 하필 동시에 나올 줄이야.
“낭자가 먼저 하시오.”
형운이 양보했다.
이레는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곳엔 무슨 일로 오시었습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게요?”
“모릅니다.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나루터에서 강율을 만난 일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상황은 해석하기 어려웠다.
강율의 계획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허술했고, 우연이라 하기엔 또 지나치게 절묘했다.
“짐작이라……. 아무래도 낭자에겐 나쁜 버릇이 있는 것 같구려.”
긴 한숨을 흘린 형운이 이레를 직시했다.
“내게 왜 이곳에 있느냐 물었소?”
형운은 한 자 한 자 느리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그날, 약조하였으니까.”
“……!”
뜻밖의 대답에 이레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곳에 있다.
짧은 대답에 이레가 원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날.
깊은 밤, 은자원이라 불리는 낡은 전각에서.
이 사내는 그녀에게 약속했다.
내가 대신 나서겠다.
반드시 그를 찾겠다.
덧없는 언약이라 여겼건만.
그에겐 그 한마디가 천금보다 더 큰 무게를 지닌 모양이다.
그런 깊은 마음도 모른 채, 그를 의심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백 리 길을 마다치 않은 사내의 의도를 얕게 짐작하려 했다.
제 못난 마음에 이레는 얼굴이 붉어졌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불퉁한 말소리가 그녀의 입을 뚫고 튀어나왔다.
“고작 그 약조를 지키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오신 겁니까? 왜 그렇게 잘해주려 하십니까.”
어찌 이런 말이 나오는 걸까.
후회하는 찰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딱히 그대에게 잘해주려 하는 게 아니오. 그저 내가 본래 그런 사람일 뿐이오.”
형운의 칼 같은 대답.
모래 위 누각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던 이레의 마음이 도로 굳어졌다.
이레가 물었다.
“약조한다고 모두 지킵니까?”
“사내가 어찌 지키지도 못할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오.”
“그게 누구라도 말입니까? 설사, 목숨이 걸린 일이라도 말입니까?”
“감당하지 못할 일이면 애초에 약조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렇군요.”
고마운 마음이었다.
먼 길 마다치 않고 달려온 사람이니.
머리 숙여 감사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언가 서운했다.
‘누구’보다 ‘약조’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형운의 담백한 대답을 듣는 순간, 괜스레 가슴 한쪽이 시큰했다.
심란하고 성가신 마음이 불뚝하니 솟구쳤다.
“그럼, 이번엔 내가 묻겠소.”
형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굳이 묻지 않겠소. 왜 왔는지, 왜 그런 차림을 하였는지도 묻지 않겠소. 다만, 이쯤에서 그만두시오. 날이 밝으면 곧장 돌아가시오.”
딱딱한 표정만큼 단호한 말이었다.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실종된 오라비의 일이라면 약속대로 내게 맡기시오.”
“제 오라비의 일입니다. 사라진 오라비가 어디서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지 알 수 없는데, 제가 어찌 두 발 뻗고 쉴 수 있겠습니까.”
형운의 표정이 서늘했다.
“날 못 믿는 것이오?”
“믿습니다.”
“한데?”
“나리께선 혈육 중 누군가 실종되어도 마음 편히 기다리고만 있으실 겁니까?”
“난…….”
무심코 대답하려던 형운이 입을 닫았다.
과연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 된다면 그리하지 않으리라 단언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육친과 떨어진 슬픔과 고통을 모르는 바 아니니.
형운은 대답 대신 탄식을 흘렸다.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사라지고, 다시 무거운 침묵이 돌아왔다.
그 침묵이 버거워질 무렵, 닫힌 문이 삐죽 열렸다.
“괜찮다면…….”
서강율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소? 밤이 깊으니 잠이 몰려와 견디기 어렵구려. 허허허.”
언제부터 문밖에서 기다린 것일까.
의중을 물어보는 강율의 음성에 느릿한 졸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
“푸푸푸푸.”
요란한 소음이 형운의 귓가를 천둥벼락처럼 짓눌렀다.
가을 여치처럼 그의 옆구리에 달라붙은 서강율이 내는 입소리였다.
이레와 형운의 중간.
정확히는 형운을 죽부인처럼 끌어안고 작정이나 한 것처럼 요란하게 입소리를 냈다.
낯선 곳이라 잠을 설칠 법도 하건만, 서강율은 고삐 풀린 입담만큼이나 적응력도 뛰어났다.
그 바람에 형운의 단잠은 저 멀리 달아났다.
아니, 어쩌면 그의 잠을 방해한 것은 강율의 사나운 잠버릇이 아닐지도 모른다.
잠자리가 바뀌어 그런 것이리라.
홀로 잠드는 것이 당연하건만.
느닷없는 불청객으로도 모자라 곁을 꽉 채운 숨결이 있으니.
쉬이 잠 못 드는 것이지.
아니, 아니.
그보다 더 형운을 자극하는 것은 강율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존재였다.
얕게 내쉬는 숨소리.
작은 바스락거림에 온 신경이 쏠렸다.
벽에 서린 습기와 고르지 못한 바닥이 마음 쓰였다.
신경 쓰지 말자.
마음 쓰지 말자.
주문처럼 되뇌며 잠을 청하지만, 머릿속은 더욱 선명해질 뿐이다.
형운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강율을 노려보았다.
귀찮구나.
떨쳐내는 몸짓을 느꼈을까?
강율이 휘릭 몸을 돌렸다.
순간, 형운은 반사적으로 강율을 제 쪽으로 잡아당겨 이레에게서 떨어트렸다.
“내 이게 무슨 짓인지.”
낯설고 생경한 상황에 갈등하던 형운은 결국 방 밖으로 나섰다.
훤한 달이 그를 반겼다.
손으로 빚은 듯, 부족함 없이 꽉 찬 보름이었다.
우두커니 달구경하고 있자니, 그의 곁으로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우익위 홍인모였다.
좌익위 최치성은 궁 안에서 세손의 그림자 노릇을 하는 터라.
최치성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홍인모는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저하, 괜찮으시옵니까?”
“괜찮다. 그보다…….”
형운은 홍인모를 돌아보았다.
“알아보았느냐?”
“마지막으로 도착한 장소까지 특정해 내었습니다. 그곳은…….”
홍인모가 급보로 전해진 소식을 알렸다.
형운의 표정이 일변했다.
김기대.
그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전혀 뜻밖의 장소였던 까닭이다.
“확실한 것이냐?”
“그곳 이후에 다른 곳을 거친 행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확실한 듯합니다.”
형운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참으로 괴이하구나.”
김기대와 그가 사라진 장소를 번갈아가며 떠올려 보았지만, 별다른 관련성을 찾을 수 없었다.
“날이 밝는 대로 직접 가봐야겠다.”
어차피 내친걸음이라.
주저할 건 없었다.
“저하.”
“또 보고할 것이 있느냐?”
홍인모는 이레와 서강율이 잠든 방을 곁눈질했다.
“저자들, 몹시 수상합니다.”
“누구 말이냐?”
“둘, 모두 그렇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
“경기관찰사의 여식은 실종된 오라비인 김기대를 찾기 위함이라 하나, 지나치게 열성입니다.”
“지나치게 열성이라…….”
“오라비에 대한 단서를 찾겠다고 간택령에 참여하고, 은자원을 찾았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야밤 삼엄한 경비를 뚫고 말입니다.”
“범상한 일은 아니지.”
“감히 한 말씀 올리자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되옵니다. 내궁의 경비는 시시때때로 변하고 바뀌어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운이 좋다는 이유만으로는 저 여인의 야행(夜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
홍인모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 일은 더더욱 의심스럽습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오라비와 관련한 작은 단서라도 찾으려 혈안이던 여인이 돌연 남장을 하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저하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지요. 마치 이곳에 세자 저하께서 계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구나.”
“서강율이라는 자의 행적도 괴이하고 수상한 구석이 많습니다. 실종한 김기대와 마찬가지로 관원이긴 하나 소속이 불확실하고 하는 일 또한 흐릿하옵니다. 수상한 두 남녀가 함께 있으니 그 관계 또한 의심…….”
“인모야.”
형운이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나직한 부름에 홍인모는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네, 저하.”
“아무래도 너 또한 나쁜 버릇이 있는 것 같구나.”
홍인모가 어리둥절하여 눈동자만 연신 굴렸다.
제 우익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형운은 달래듯 잔잔히 말했다.
“둘의 관계가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면,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이번 여정에 굳이 남장할 필요는 없었을 터.”
“……?”
“생각해 보아라. 어색한 남장 대신 부부나 오누이로 꾸미면 훨씬 자연스럽지 않겠느냐?”
홍인모의 눈동자에 깨달음이 들어찼다.
“그렇습니다.”
형운의 말이 옳았다.
애초에 남장은 의심스러운 증거가 아니라 그녀의 무결함을 증명하는 근거였다.
“꼼꼼한 너라면 그들의 행적에 대해 이미 조사하였겠지. 어떻더냐? 그들이 날 곧바로 찾아왔느냐? 아니면 의심스러운 정황이라도 있더냐?”
“잠잘 곳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다 온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럼, 내가 있는 곳을 알고 찾았다는 네 생각에도 무리가 있구나.”
“…….”
“남을 의심할 때는 먼저 자신부터 의심해야 한다. 결과를 미리 만들어두고 모든 정황을 그 결과에 맞춰 해석하면 안 된다. 매 순간 남을 의심하는 만큼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돌이켜봐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형운의 말이 이어졌다.
“서강율, 음흉하고 깊은 속내를 지닌 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다. 서강율에게 이용당하는 것일지 몰라도 흉계를 꾸밀 사람은 아니란 뜻이다.”
“…….”
홍인모의 굳은 얼굴은 여전했다.
형운은 굳이 그 마음을 돌리려 애쓰지 않았다.
그의 우익위는 보지 못하였다.
은자원에서 이레가 보인 그 절박한 눈빛을.
그러니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홍인모가 제 주인에게 조심스레 권했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떠한지요.”
“자리를 옮겨?”
“불청객으로 밤잠을 못 이루시는 것이 아니 옵니까? 옮기겠나이다. 옮길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
생각해보면 그편이 좋을 듯도 하였다.
늦은 시각이지만, 홍인모라면 하룻밤 머물 아늑한 장소 정도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으리라.
낯설긴 매한가지라 하여도 곁에서 비치적거리는 밉살스런 사내는 없겠지.
형운은 방을 돌아보았다.
문풍지에 비친 서강율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뒤척이다 이레 쪽으로 또르르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형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하오나…….”
“밤이 깊었다. 너도 그만 쉬어라.”
서둘러 홍인모를 물린 그는 잰 몸짓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강율과 이레의 중간을 파고들었다.
쿡, 잠결에 직진하던 강율이 형운의 품에 안기듯 굴러 들어왔다.
형운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동시에 그의 등 뒤로 미미한 들썩임이 느껴졌다.
묘한 저릿함에 형운의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 이러할까.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형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유달리 긴 밤이었다.
***
“드디어 보입니다.”
이튿날.
이레는 소나무 숲 너머로 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며 밝게 웃었다.
주막을 떠난 두 사람은 물길을 건너고, 산길을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 목적지가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그렇구려.”
관자놀이를 주무르던 형운이 힘없이 대답했다.
이레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피곤해 보입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았다.
주막에서 예까지 꽤 먼 거리였던 데다 길도 제법 험했다.
무엇보다 피로했다.
목계나루에서 다시 배를 타야 했다.
물길을 타고 구불구불 끝없는 절경이 이어졌다.
그러나 피로한 형운의 눈엔 그조차도 들어오지 않았다.
“괜찮소. 그저 잠시 현기증이 일었을 뿐이니.”
“안색이 창백합니다. 잠시 쉬다 가는 게 어떨까요?”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짐을 풀어놓고 잠시 쉬면 금세 좋아질 것이오.”
“알겠습니다.”
이레는 걸음을 재촉했다.
고삐를 틀어쥐고 말을 능숙하게 이끄는 그녀를 보며 형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녀가 말을 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린 시절,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할아버지에게 배운 기마(騎馬)라 하였다.
익숙하게 말에 오르는 이레의 모습에 형운은 혀를 내둘렀다.
또한, 그녀의 조부에게 감사했다.
만약, 그녀가 말도 타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곱절은 더 고단했으리라.
아니다.
몸의 곤함일랑 떨쳐내면 그만이다.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게 다 그자 때문이다.’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형운은 이를 갈았다.
*
아침, 무거운 자리를 간신히 떨치고 일어난 형운은 허망함부터 느껴야 했다.
“늦잠이라니…….”
해 뜬 이후에 깬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기억이 남은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일과는 푸른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특별히 몸이 불편한 날이 아니면 궁의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고, 그 누구보다 늦게 잠들었다.
설사 몸이 편치 않아도 새벽닭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눈을 떠보니 훤한 아침이었다.
십수 년간 한 번도 없었던 괴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던 그에겐 천지개벽 같은 사태였다.
문풍지로 노랗게 번진 해의 그림자를 보니, 무에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무거운 심정을 부여잡고 밖으로 나갔다.
“일어나셨습니까?”
툇마루에 앉은 이레가 그를 반겼다.
그녀는 여전히 어설픈 남장을 하고 있었다.
부연 아침 햇살을 받은 그녀의 미태가 어제와 또 달라 보였다.
그 보드라운 미소에 형운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간밤엔 어떻게 저 눈을 마주 보았는지 모르겠다.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무시하였다 생각하여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깊이 잠드신 걸 보니, 많이 곤하셨나 봅니다.”
“…….”
이레의 말에 형운은 비로소 늦잠 잔 이유를 깨달았다.
서강율.
바로 그자 때문이다.
밤새도록 그자에게 시달렸다.
하는 짓도 밉상이고, 말은 더욱 밉상인 그자는 심지어 자면서 하는 짓도 밉상이었다.
서강율의 잠버릇은 뭐든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와 집착이 끈질기고 집요했다.
아무리 구석으로 밀어놓아도 끈끈한 인기척에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찰거머리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들러붙는 건 그렇다 치자.
곤히 자는 남의 귓가에 대고 발정 난 말처럼 투레질하는 건 대체 무슨 연유란 말인가.
그 시달림이 얼마나 심하였던지.
밤새 장정 열 명과 씨름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삐걱대고 불편했다.
그렇게 당하였으니 늦잠을 자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잠에서 깨어보니 정작 그 말썽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눈치 빠른 이레가 형운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서 선비님은 아침 일찍 볼일이 있다며 나가셨습니다.”
“……언제 온다 하였소?”
“특별한 말씀은 없었습니다. 언제 또 만날지 모르니 나리와 함께 가라 하시었는데. 혹시 서 선비님께 아무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
이 작자, 설마…….
“말 들었소. 잠이 덜 깨 깜빡 잊고 있었소.”
“그렇군요.”
형운은 차라리 잘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그 불편한 인사를 어찌 치울까 고심하던 차였다.
스스로 떨어져 나갔으니 귀찮음을 덜게 되었다.
절로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댓돌 위에 가지런하게 놓인 신을 신자니 이레가 말했다.
“세숫물이 필요하신 거라면 그 옆에 있는 걸 사용하시면 될 듯합니다.”
이레가 손짓하는 곳을 보니 과연 큰 대야에 물이 담겨 있었다.
그 옆엔 비단으로 만든 수건도 놓여 있었다.
형운이 다시 이레를 보았다.
설명이 이어졌다.
“옆방 손님께서 양보하신 겁니다.”
이쯤 되니 신기했다.
이 여인은 어찌 사람 눈빛만 보고 필요한 답을 골라 하는지.
참으로 신통한 재주가 아닌가.
“양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한 손을 펼쳐 입가에 세운 이레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건넛방 손님께서 쓰시려 주모에게 부탁한 것인데, 급한 일로 나가느라 미처 사용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버리긴 아까우니 혹여 쓸 분이 계시면 사용하라 하시었지요.”
형운은 넉넉한 인심의 건넛방 손님이 우익위 홍인모임을 알았다.
그리고 나름 들키지 않으려 신경 쓴 내력을 이레가 모두 눈치챘음도 깨달았다.
굳이 속삭이듯 말하는 모양새를 보면 분명했다.
이번이 두 번째인가?
단옷날에도 쉬이 형운을 지키는 두 무사의 존재를 알아차리더니.
이번에도 그녀는 홍인모의 노력이 무색하리만큼 빠르게 알아차린 것이다.
유달리 자부심 강한 녀석이라.
들켰다는 걸 알면 꽤 자존심이 상할 터인데.
태연하게 세안하고 수건을 드니, 그곳에 작은 쪽지가 숨겨져 있었다.
홍인모가 남긴 전언이었다.
-서강율. 인시초(寅時初:새벽 3시) 주막을 떠났음.
설마 했건만.
서강율은 이레를 형운에게 떠넘기고 달아난 것이 틀림없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함께할 길이라면, 서강율보다는 그녀가 낫겠지.
형운은 이레를 바라보았다.
귀찮은 짐짝 취급받은 것도 모른 채 이레는 방긋 미소 지었다.
연유를 알 수 없었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간신히 좋아진 그의 기분은 뒷장에 이어진 내용을 본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서강율. 저녁 식사, 야참, 조식, 모두 꼼꼼히 챙기고 계산하지 않고 떠남.
*
서강율.
그자가 나타난 이후로 모든 게 뒤엉켰다.
방을 빼앗기고, 잠을 빼앗긴 데 이어 돈마저 빼앗겼다.
날붙이만 들지 않았을 뿐, 도적이 따로 없다.
탄탄대로가 진창길로 변한 느낌이었다.
분노가 솟구쳐 이제는 무연해질 지경이다.
그저 어느새 주문이 되어버린 네 글자, ‘삭탈관직’을 되뇔 뿐.
“가만.”
형운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닮았다.
서강율.
하는 짓이 꼭 누군가를 고스란히 빼닮았다.
지금은 사라진 사내.
형운이 앞서 걷는 이레의 뒷모습에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오라비, 김기대.
서강율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얄미운 사내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니, 닮았다 하는 것은 서강율에 대한 모욕이었다.
기대가 서강율에게 닿으려면 한참 멀었다.
김기대가 어설프고 미숙한 애송이라면, 서강율은 세 치 혀로 온 나라를 희롱할 천하제일의 협잡꾼이었다.
“김기대, 그자는 기필코 찾아내어 삭탈관직할 터이고…….”
형운은 기대를 떠올렸다.
“서강율, 그자는 돌아가는 즉시 삭탈관직하고 말겠다.”
강율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며 형운은 결의를 다졌다.
“이곳입니다.”
이레의 밝은 목소리에 형운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가 멈춘 곳은 시골 관아의 뒷문이었다.
형운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이곳은 어찌 알았소?”
간밤에 우익위 홍인모가 알려준 장소.
다름 아닌 단양의 관아였다.
놀랍게도 이레가 찾아온 곳 역시 홍인모가 언급한 장소와 같은 곳이었다.
“이곳을 어찌 찾은 것이오?”
“오라버니 방에서 이곳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였습니다.”
“우연히 말이오?”
“네. 우연히.”
형운의 눈매가 휘어졌다.
목숨까지 걸고도 찾지 못한 단서를 우연히 오라비의 방에서 찾았다?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지만…….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눈동자.
그 눈빛이 사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형운은 작게 돋아난 의심의 싹을 가차 없이 도려냈다.
잡념을 털어낸 그가 이레에게 물었다.
“그런데 굳이 뒷문으로 온 연유가 무엇이오?”
이레는 머쓱하게 웃었다.
“제가 이런 행색인지라.”
“그렇구려.”
단숨에 상황을 이해한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장한 모습으로 관아의 정문을 들어서기가 쉽지 않으리라.
관아 앞은 지키는 군졸과 오가는 사람들로 번잡했다.
그중에 누군가 그녀를 수상히 여긴다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그러질 수도 있음이라.
기왕이면 사람이 적은 곳만 골라 다닐 심산인 듯했다.
하지만 남장이 저리 어설퍼서야 만나는 사람이 하나건 열이건 결과가 다르지 않을 터.
“여기서부터 내가…….”
형운이 앞장서려 했다.
그보다 한발 앞서 이레가 움직였다.
“계십니까?”
낭창한 여인의 목소리가 관아 뒷마당에 나직이 내려앉았다.
형운의 얼굴이 절로 굳었다.
“낭자.”
“네?”
부르는 소리에 이레는 말간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목적지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걸까.
아니면 남장을 하였다는 것을 잠시 잊은 걸까.
남들보다 영특하였지만, 연륜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뒤늦게라도 실태를 깨달았다는 점이다.
“아!”
이레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순간,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뉘시오?”
아직 문도 열리지 않았건만.
이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묻고 싶은 일이 있어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이번엔 목소리를 굵게 내었다.
“저런. 먼 길을 달려왔다니 피곤하고 시장하시겠구려. 마침 이곳에서 소소한 잔치가 열렸으니, 어서 들어와 배부터 채우시오.”
걱정한 것과 달리 목소리의 주인은 인심이 넉넉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이레가 다시 경직된 목소리를 냈다.
잔뜩 긴장한 그녀를 형운이 안타까운 눈길로 지켜봤다.
역시 내가 나섰어야 했는데…….
“뭘, 이 정도로 신세까지야.”
삐걱.
문이 열렸다.
곧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형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알고 보면 조선 팔도 모두가 사촌이고 이웃이니, 어려울 때 당연히 서로 돕고 살아야지. 안 그렇소?”
형운과 이레를 보며 선 굵은 미소를 짓는 사내.
새벽녘에 제 먹은 음식값도 치르지 않고 사라진 서강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