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귀인(貴人)
운명이 손을 내밀었다.
잡느냐, 잡지 않느냐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고민은 없었다.
향갑.
기대의 방에서 그것을 발견한 순간, 이레가 선택할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무엇인들 못 할까.
궁에 들어가기 위해 세손빈 간택에까지 참여한 그녀가 아니던가.
잠시 잠깐 이번에도 헛걸음은 아닐까 하는 염려도 들었다.
이레는 곧 머리를 저었다.
후회하고 망설이기엔 손에 쥔 것이 컸다.
마지막 망설임마저 떨쳐낸 이레는 오라버니의 두루마기가 걸린 횃대 앞에 섰다.
교교한 달빛 아래.
파르르 떨리는 둥근 어깨가 맨살을 드러냈다.
잠자리 날개인 듯 얇은 속적삼 사이로 희고 봉긋한 언덕이 들썩거렸다.
거추장스러운 적삼을 벗은 이레는 왼 가슴 위의 나비매듭을 풀었다.
휘리릭.
비단 치맛자락이 바닥으로 허물처럼 떨어졌다.
단단히 가두고 옥죄는 데 들인 공에 비해 풀고, 놓아버리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사뿐한 여인의 옷차림을 모두 벗어던진 이레는 질박한 무명천을 집어 들었다.
잠시 자유로이 허공에 흔들리던 여인의 상징은 전보다 단단한 결박 속에 사로잡힌다.
붙들고 동여매는 손길이 더욱 꼼꼼하고, 단단했다.
완만한 구릉이 그 야무진 손끝에 깎아지른 절벽이 되었다.
제 타고난 본성을 철저히 갈무리한 이레는 오라비의 옷을 몸에 걸쳤다.
그러잖아도 가냘픈 몸피가 헐렁한 사내 옷 속에서 더 작아진 듯 느껴졌다.
길게 땋은 머리를 풀었다.
곱게 빗은 머리카락을 정수리로 감아올려 옥 동곳으로 고정했다.
망건을 고쳐 둘렀다.
오라버니의 옷을 몸에 걸치고 그 위에 삿갓까지 썼다.
면경을 비춰봤다.
유약한 인상의 낯선 사내가 보였다.
“제법이다.”
오라버니가 있었더라면 분명 이리 말했을 텐데.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움에 입안이 뜨거웠다.
서둘러 감정을 지운 이레는 오라비의 호패를 허리춤에 차고 괴나리봇짐을 멨다.
별채로 돌아와 서탁 앞에 앉았다.
걱정하실 할머니와 아버지껜 요양 떠난 어미를 뵈러 간다는 짧은 내용의 글을 썼다.
갑작스레 사라진 저를 찾아 엉뚱한 곳을 뒤지고 다닐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들께도 작별 인사를 남길까 하다 절로 대신했다.
괜한 걱정만 안겨드릴 것 같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서탁에 절을 올린 이레는 서신을 안채 대청마루 한가운데 놓았다.
그러곤 불 꺼진 할머니 방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할머니. 저는 아무래도 영영 할머니 마음에 들지 못할 듯싶습니다.”
할머니께선 늘 여인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말씀하셨다.
사람에겐 저마다 제 타고난 자리가 있으니.
그 자리를 운명이라 부르고, 그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는 것을 분수라 하셨다.
분수를 지키지 않음은 곧 운명을 거스름이라.
용의 역린을 건든 것과 같이 큰 재앙을 맞게 된다 하셨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옛사람들이 어리석어 여인과 사내를 나누고, 각자의 일과 몫을 구분한 것이 아니니.
타고난 분수대로 살아라.
그래야 평범하게라도 살 수 있다.
할머니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씀하셨다.
“어쩌다 보니 할머니께서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이레의 눈가에 쓸쓸한 바람이 맴돌았다.
서책을 읽고, 학문에 심취하고, 궁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이젠 사내 노릇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도 할머니,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실 만한 일 한 가지는 하겠습니다. 어떻게든 오라버닐 찾아올게요.”
이레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흐린 새벽 별이 그녀의 길동무가 되었다.
***
충청도로 가는 가장 빠른 길.
뱃길이었다.
이레는 광나루로 발길을 재촉했다.
대로(大路)를 피해 가능한 한 사람의 발길이 드문 길을 골랐다.
행여 누군가 곁을 지날 땐 괜스레 걸음이 위축되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한 것만 같았다.
어깨를 움츠리고 갓 끝을 끌어내렸다.
서두른 탓에 정오가 되기 전에 나루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숨 돌린 이레는 내내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대체 정체가 뭡니까요?”
갑자기 들려온 호통에 움찔 놀란 이레는 어깨를 다시 좁혔다.
들킨 것이려나?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를 향한 다그침이 아니었다.
도선장 끄트머리에 있는 뱃전에서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낡은 갓과 해진 도포 차림의 사내는 사공의 사나운 고함을 웃음으로 응수했다.
“허허. 내 정체가 뭐냐니. 보면 모르겠는가?”
선비는 팔을 좌우로 활짝 펼쳤다.
“이마에 이름 석 자를 써놓은 것도 아닌데, 선비가 뉘신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요. 말장난 그만하고 돈 없으면 그만 물러서십시오. 뒤에 기다리는 사람 안 보이십니까?”
“허허, 이거 참. 그게 대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잃어버린 물건 찾듯, 제 품을 뒤진 선비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전낭(錢囊)을 잃어버린 것 같으니. 이보게, 사공. 내 돌아오는 길에 틀림없이 갚으이. 이번 한 번만 봐주구려.”
“그런 말은 하지도 마십시오. 외상은 받지도 말고 지지도 말라는 것이 이 천한 집안의 신조입지요. 돈 없으면 발품을 파십시오. 애먼 이놈의 노질에 매달리지 마시고요.”
외면하는 뱃사공의 손을 선비가 꼭 그러잡았다.
“내 이 배를 꼭 타고 가야 할 급한 사정이 있어 그런다네. 어떻게 좀 태워주면 안 되겠는가?”
“왜 남의 손을…….”
“부탁하이.”
선비의 부담스런 눈빛에 주춤주춤 물러난 뱃사공은 간신히 손을 털어냈다.
“안 되는 건 안 됩니다요.”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말고.”
“소인이 뭘 믿고 삯도 받지 않고 선비님을 태웁니까요?”
“이래 봬도 내가 신용 하나로 여태껏 먹고산 사람일세.”
“그럼, 그 좋은 신용으로 삯을 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면 구태여 자네에게 매달릴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지 말고 사정 좀 봐주게. 누가 알겠는가? 나중에 자네 곤란할 때 내가 도움될지. 그러니까…….”
매정한 외면에도 사내는 질기게 들러붙었다.
뱃사공과 사내의 실랑이에 선객들의 무료한 시선이 모였다.
이레 역시 관심 어린 시선으로 두 사내를 응시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실랑이가 벌어지는 뱃전이 그녀가 타야 할 배였던 까닭이다.
이레는 낡은 복색의 선비를 눈에 담은 채 배 탈 순서를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눈매를 여몄다.
선비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다.
“서 선비님?”
서강율.
은자원의 세 번째 은자.
간절히 찾을 땐, 보이지도 않던 사람.
궁 앞을 매일 서성여도 끝끝내 만나지 못한 사람.
그 사람을 엉뚱하게도 먼 길 떠나는 길목에서 만나게 되었다.
“누구요?”
제 부르는 소리를 들은 서강율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차 싶은 마음에 이레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자신의 행색이 평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반가의 여식이 사내의 복색을 하고 나타났으니.
행여 그가 알아보고 낯 뜨거운 반응을 보일까 두려웠다.
자칫하면 배 타기도 전에 머리채를 잡혀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환청쯤으로 생각하고 넘어가주길.
그러나 강율은 복잡한 틈바구니에서 제 부른 사람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아니, 이게 누군가?”
한달음에 달려온 강율은 이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이레는 당황했다.
그녀의 모습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강율은 이레를 끌고 뱃사공에게로 갔다.
“이제 해결되었네.”
“무슨 말씀입니까요?”
뱃사공이 퉁명스레 물었다.
“보고도 모르겠나?”
서강율은 이레와 맞잡은 손을 들어 보였다.
“내 신용을 보증할 친우일세.”
“……!”
***
물길은 잔잔하고 넉넉했다.
바람을 가르는 뱃전 위에서 느긋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내 그대 덕분에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구려. 이 고마움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서강율의 말에도 이레는 여전히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배에 탄 이후 그녀는 줄곧 강율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간 간절히 만나길 바란 사람이었건만, 이곳에서의 만남은 반갑지 않았다.
물어볼 말이 산처럼 쌓였음에도 이레는 입을 다물었다.
질문은커녕 그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챌까 두려웠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일까?
이레를 대하는 그의 모습 어디에도 여인을 대하는 낯빛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었다.
뱃길로 사흘은 꼬박 더 가야 하는 길.
그동안 어찌 들키지 않으려나.
이렇게 마냥 외면하면 제풀에 지쳐 멀찍이 떨어지지 않으려나.
이런저런 심사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데 말이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서강율이 이레의 귓가에 속삭였다.
“보기보다 배짱도 참 좋으시구려. 어찌 사내 행세까지 하는 것이오?”
깜짝 놀란 이레가 고개를 들었다.
촤락!
서강율이 쥘부채를 펼쳐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조심해야지요. 낭자의 놀란 표정은 특별히 어여쁘고 고우니. 가뜩이나 의심하는 자들이 엉큼한 맘 품을까 저어되오.”
“……알고 계셨습니까?”
서강율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묻는 게 낭자의 어설픈 남장을 말하는 거요? 아니면 예상보다 두둑한 전낭을 말하는 거요?”
이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완벽하다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들통 난 모양이다.
어설픈 사내 행색에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을까.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려.”
“네?”
“남장이라면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낭자 곁에 듬직한 이 몸이 붙어 있으니 말이오.”
서강율이 어깨를 펴며 사내다움을 과시했다.
“……그렇군요.”
이레는 강율과 마주하던 시선을 먼 허공으로 던졌다.
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서강율은 흥미롭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런 취미가 있었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평소 속 깊고, 생각이 남다른 여인인 것은 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남장이 취미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취미 아닙니다.”
“그럼?”
“먼 길 떠나는 덴 여인보다 사내의 모습이 더 안전하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하, 그렇소? 난 또 별난 취향인 줄 알았구려.”
서강율의 태평한 말에 이레는 정색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이 모습도 나쁘지 않은데. 마지막이라 하니 아쉽소.”
“무슨 말씀입니까?”
“별 뜻 없이 한 말이니 신경 쓸 것 없소이다.”
팔랑팔랑 한가로이 부채질하는 서강율을 이레는 빤히 응시했다.
“이런 곳에서 서 선비님을 만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하하, 본디 만남이란 뜻하지 않게 이뤄지는 법이지요.”
서강율의 능청스런 대꾸에 이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낭자는 어디까지 가시오?”
물음을 물음으로 되받아치는 말 속에 속내가 들어 있었다.
살피는 투명한 시선과 설렁설렁 눙치는 눈빛이 허공중에 만났다.
소리 없는 전쟁의 첫 패배는 서강율의 몫이었다.
그는 슬쩍 이레의 시선을 피했다.
“거 날씨 한번 덥구나.”
이레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짐작하셨소?”
“우연이 지나치면 필연이라 하였지만, 그조차도 지나치면 누군가의 계획이겠지요.”
오늘의 만남,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누군가 잘 짜놓은 판 위를 걷는 기분이랄까.
“절묘한 계획이라 생각하였는데……. 아무래도 낭자에겐 못 당하겠소. 하하.”
서강율은 시원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탁!
쥘부채가 접혔다.
“낭자의 예상대로요.”
“절 감시하고 계셨습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초저녁잠이 많소. 남의 집 지키고 감시하는 데는 영 소질이 없다오.”
“그럼, 제가 집을 떠나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운 좋게 아는 사람을 통해 들었소.”
“우연히 말입니까?”
“그렇소. 우연히.”
이것으로 선명해졌다.
광나루에서 서강율을 만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레는 앞으로 숙인 상체를 곧게 폈다.
“아무래도 서 선비님께서도 오라버니 계신 곳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소.”
담백한 대답.
이레는 맥이 탁 풀렸다.
팽팽하던 긴장이 무너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데…….”
서강율이 이레에게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느슨해진 공기가 다시 단단하게 조여졌다.
서강율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노자는 얼마나 준비하셨소?”
“……?”
“오해하지 마시오. 먼 길 가다 보면 종종 뜻하지 않은 일들이 생기는 법이니. 동행인이 외진 곳에서 강도로 돌변하거나, 산적이 출몰할 수도 있고…….”
딱딱하게 굳은 이레의 얼굴에 헛헛한 미소가 맺혔다.
“오라비의 지인께서 제 노자를 공공의 재물로 하자 할 수도 있겠고요.”
서강율 역시 입가를 길게 늘였다.
“신세 좀 지겠소.”
감추는 게 많지만, 왠지 밉지 않은 사람이었다.
마침 혼자 먼 길 가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차라.
이레는 그의 몰염치를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것이 남아 있었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 궁금하시오?”
“서 선비님은 오라버니와 함께 걷는 분입니까? 아니면 마주 걸음 하시는 분입니까?”
“친우냐, 적이냐. 그게 궁금하시다?”
촤락!
서강율은 대답 대신 부채를 펼쳐 눈 아래를 가렸다.
“낭자의 눈에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오?”
되묻는 그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
“허어, 이를 어쩐다.”
늦은 밤.
서강율의 얼굴에 보기 드문 난색이 떠올랐다.
“정말 방이 없단 말이오?”
거듭된 그의 물음에도 주막의 여주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요 며칠 물길이 좋은 탓에 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렸습지요. 덕분에 방은 정오가 지나기 전에 꽉 찼답니다.”
이레와 서강율이 충주의 목계나루에 도착한 것은 저녁놀이 질 무렵이었다.
원하는 목적지는 또다시 작은 물길을 건너고도 반나절은 더 가야 할 먼 거리였다.
밤에 배도 구할 수 없을뿐더러, 유별한 남녀가 밤길을 재촉하기도 마땅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먹장구름처럼 무거운 눈꺼풀이었다.
사흘 동안 흔들리는 배에 시달린 탓에 연신 멀미가 일었다.
발을 디디고 선 땅이 요동쳤다.
게다가 흔들리는 뱃전에서 잠을 설친 터라.
아무 데고 몸 뉠 만한 곳을 찾는 중이었다.
“이곳이 마지막인데…… 이걸 어쩌나.”
서강율은 이레를 곁눈질했다.
“미안하외다. 내가 나루터에서 지체하지만 않았어도.”
배가 나루터에 도착하자 서강율은 볼일이 있다며 이레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레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잰걸음으로 거간꾼과 운반인 그리고 나루터의 들병이를 만나고 다녔다.
제법 낯이 익은 듯,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맞잡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유독 덩치가 큰 운반인에겐 빌린 물건을 갚는다며 작은 보퉁이를 건네기도 하였다.
그처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입인사를 전한 그가 이레에게 돌아왔을 땐 이미 한 시진이나 흐른 뒤였다.
그사이 먼저 온 사람들이 근처의 주막을 모두 차지해버렸다.
“이 일을 어쩐다. 나야 아무 곳에서나 찬 이슬만 피하면 그만이지만. 유약한 그대를 한데 묵게 할 수도 없고.”
거듭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는 서강율을 향해 이레는 애써 미소를 보였다.
“괜찮습니다. 부러 그런 것도 아니질 않습니까. 집을 나설 때, 노숙도 생각했습니다.”
말은 괜찮다 하여도 난처하고 난감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실은…… 자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이레를 유심히 살핀 주모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서강율이 그런 주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리가 있는가?”
주모가 그의 손에서 제 손을 슬그머니 빼며 말했다.
“큰 방을 혼자 쓰는 분이 계시긴 계시는데…….”
서강율은 다시 주모의 손을 잡았다.
“잘됐구려. 그 사람에게 함께 묵자 권하면 될 터.”
또다시 손이 잡힌 주모가 당황하며 서강율의 손을 뿌리쳤다.
“기대는 마십시오. 이미 몇 번 권하였지만, 워낙에 외통인 분인지라…….”
“그래도 한 번 더 권해 보시게.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해보겠네.”
서강율이 항아리를 받치듯 두 손을 내밀며 주모에게 다가섰다.
주모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행색 비록 허름하나, 보기 드물게 훤칠한 선비였다.
깎은 밤처럼 뽀얗고 여름 숲처럼 형형한 낯빛은 하늘 선인인 듯 아득했다.
짙은 눈썹을 초승달처럼 여미며 웃을 때면 하늘하늘 갈대처럼 여심이 흔들렸다.
한데 잠시만 긴장을 풀면 자꾸만 손을 잡고 오래 사귄 지인처럼 친한 척 파고들었다.
그 과한 친근함이 부담스러웠다.
“부탁하외다.”
서강율의 변함없는 미소를 보니, 묻지 않았다간 단순히 손을 맞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기세였다.
주모는 급히 몸을 돌렸다.
“묻겠습니다. 물어볼 테니, 손은 그만 좀 잡으십시오.”
“주모가 워낙 친근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말게. 그럼, 내 주모만 믿겠네.”
서강율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받은 주모가 큰방 앞으로 향했다.
내심 큰 결심을 하고 나섰지만, 방 앞에 이르자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서강율이 엿가락처럼 달라붙는 사람이면, 이곳에 묵는 분은 시린 서릿발 같은 분이시다.
두 사내 모두 일평생 한번 볼까 말까 한 미남자들이건만.
서로 다른 이유로 대하기 어려웠다.
“저…… 나리. 사정이 딱해 보이는 선비님들이 함께 묵으면 안 되느냐 청하십니다.”
예상대로 단호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내 이미 안 된다 말하지 않았느냐.”
“네네, 그랬습지요. 쇤네도 알고 있습지요. 하지만 워낙 간곡히 청하시는지라…….”
“하늘이 두 쪽 나도 내 대답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방 안의 서늘한 기세에 주모가 주춤 물러섰다.
지켜보던 서강율이 나섰다.
“해는 지고 날은 찬데, 머물 곳이 없어 벌벌 떨고 있소이다. 내 배 부르면 종 배고픈 줄 모른다고, 크고 넓은 방에 누워 넉넉하게 보낼 생각만 하지 말고, 남의 딱한 사정도 돌아봐 주시오.”
“그대를 위해 내가 양보하면, 이미 내가 물린 사람들은 불쾌하고 부당하다 여길 터. 남의 야박함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의 게으름을 돌아봄이 어떤가.”
“옛말에 덕을 베풀면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하였고, 선을 베풀면 반드시 집안에 좋은 일이 많을 것이라 하였소. 이웃사촌이란 말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의미 아니겠소? 춘부장께선 가족을 이리 방치하라 가르치셨소?”
“감히 누구에게 가족 운운하는 것이냐?”
닫힌 문이 벌컥 열렸다.
날카로운 눈씨로 무례한 여행객을 쏘아보던 사내가 서강율을 발견했다.
사내의 반듯한 미간에 고랑이 생겼다.
귀찮고 번거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사내의 시선이 서강율 옆에 선 이레에게로 향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여몄다.
이상하군.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데…….
뒤늦게 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대는…….”
그때, 서강율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니, 이게 누군가. 은자원의 벗이 아닌가. 반갑네. 낯선 곳, 난처한 때에 기다린 듯 나타나는 걸 보니, 그대야말로 은인이고 귀인일세.”
기습적으로 형운의 말을 가로챈 서강율이 이레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뭐하시오? 어서 들어오지 않고.”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형운은 멍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방에 두 불청객이 자리를 잡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