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등하불명(燈下不明)
새벽과 아침의 찬란한 간극.
빛과 어둠의 치열한 경계.
희고 붉은 여름꽃들이 제 본연의 색을 감춘 채 태양을 기다리는 시간.
미명(未明).
은자원을 떠난 이레는 위태로운 걸음을 옮겼다.
끝없이 이어진 궁궐의 회랑이 미로처럼 느껴졌다.
때때로 만나는 갈림길은 삶과 죽음의 선택을 강요했다.
유난히 길었던 밤.
목적은 이뤘으나, 간절한 바람은 거두지 못했다.
마음 저린 실의에 어느 구석에 주저앉아 울음이라도 터트리고 싶건만.
멀리서 들려오는 파루의 북소리가 등을 밀어 이레를 달리게 하였다.
비감(悲感)과 할아버지들의 글귀와 형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돌았다.
정신을 차리니 행방(行房) 근처였다.
어디를 어떻게 달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오는 길에 경비가 심한 곳도 있었을 터인데.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도 아니면 아침이 밝아오며, 엄격한 감시의 눈길이 흩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레는 서른세 번, 마지막 파루의 북소리와 함께 행방의 이부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한뎃뒷간에라도 다녀오십니까? 어찌 이리 오래 자리를 비우십니까?”
깜짝 놀란 이레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직 어둡습니다. 좀 더 주무세요.”
“아닙니다. 일어나야지요.”
수모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레도 잠이 막 깬 척 마른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찬찬히 지켜본 수모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어디 이상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얼굴이 발갛게 붉으시니, 열병이라도 앓는 사람 같습니다.”
“제 얼굴이 붉어요?”
이레는 제 볼을 감싸 쥐었다.
화끈한 열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언제부터 이랬던 것일까.
설마, 형운과 함께 있을 때도 이런 낯빛은 아니었겠지.
“잠을 설쳐 그런 모양입니다.”
“낯선 곳이니 편히 쉬기 어려웠겠지요. 찬물에 소세라도 하면 나아질 겁니다. 얼른 소세물 올리겠습니다.”
수모가 자리를 털고 나갔다.
홀로 남은 이레는 그제야 내내 참은 숨을 내놓을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리니 잠시 잊은 감정들이 샘솟듯 솟구쳤다.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 했다.
몰강스러운 상처에서 삐져나온 핏물처럼 슬픔이 번졌다.
울음을 어금니로 짓씹고 가슴의 고통을 삼켰다.
서글픈 마음을 몰아내기 위해 오라버니의 웃음을 떠올리고, 그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오라버니를 떠올리니, 또 다른 목소리가 북소리처럼 가슴을 울린다.
‘내가 하리다.’
두근.
다정은커녕 온기 한 줌 없었던 그 무심한 한마디가 귓가를 연신 맴돈다.
처음 겪은 생경하고도 이질적인 느낌에 이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말 한 자락에 어찌 이리 가슴이 뛰는 걸까?
의지하고 싶은 연유가 무얼까?
어찌 그를 믿고 싶은 걸까?
옳지 않다.
그저 위로하려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에 맥없이 무너져선 안 된다.
“언제 다시 만나자는 약조도 하지 않았잖아.”
이레의 입술이 쓸쓸한 미소를 그렸다.
나와 그분의 관계는 약조 없인 스치는 인연으로도 만나기 어려우니.
다시 만날 기약조차 없는 현실이 먼 곳에 계신 그분과의 간격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레는 수모가 열어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동편으로 아침 해가 떠오른다.
궁궐의 동쪽.
해가 뜨는 저편 어딘가에 은자원이 있다.
“그분께선 잘 돌아가셨을까?”
경황이 없어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에겐 매번 미안하고, 매번 고마운 일투성이다.
다음엔 꼭 고맙다는 말 전해야지.
그런데 다음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방을 나선 수모는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돌아왔다.
그사이 감정을 추스른 이레가 물었다.
“늦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지은 죄가 있는 터라, 밖의 동정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에 있을 두 번째 선보이기가 취소되었답니다.”
이레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우연히 들었는데…….”
주위를 둘러본 수모는 누가 들을세라 소곤소곤 이레의 귓가에 속삭였다.
“궁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밤사이 큰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레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큰일요?”
“동궁전 안뜰에서 불이 난 것처럼 무럭무럭 연기가 피어올라 궁이 발칵 뒤집혔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수문장들이 불이 났다며 소란을 떤 일이 생각났다.
덕분에 마지막 관문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기에, 궁금증이 일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웬걸요. 알고 보니 세자 저하께서 사냥한 멧돼지를 손수 요리하겠다며 동궁전 앞뜰에 장작을 쌓고 불을 올린 것인데, 하필 젖은 나무라 그 사달이 났다지 뭡니까.”
“화재가 아니었군요.”
“세자 저하 엉뚱하시단 이야기는 간간이 있었지요. 그동안 뜬소문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마냥 없는 소리도 아닌 모양입니다.”
“사람의 입만큼 혼란한 게 없다 했습니다. 소문은 그런 사람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것이니. 온전히 믿어서도, 함부로 전해도 안 됩니다.”
“설마, 궁녀들이 없는 소릴 하겠습니까?”
이레가 손가락을 입술 위에 세웠다.
“궐은 사방에 숨은 귀가 있다 했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요.”
뒤늦게 입방정을 깨달은 수모가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이레는 소세물에 두 손을 담갔다.
찬물이 얼굴에 닿으니 졸음이 가셨다.
옷을 갈아입고 단장을 마쳤다.
곧 아침상이 들어왔다.
지켜보는 눈이 있어 억지로 몇 수저 들었다.
푸짐한 성찬이건만, 모래라도 씹은 듯 입안이 서걱댔다.
***
“지금 무어라 하였는가?”
사헌부 집의이자 어사대 수장인 김익현의 나직한 목소리에 사헌부가 얼어붙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이른 시각, 집의의 주도 아래 회의가 열렸다.
간밤의 일을 논의하고, 앞으로의 방도를 계획하는 자리.
세손빈의 간택으로 궐 안팎이 들떠 있으니.
경계를 강화하고 오가는 자들의 면면을 더 세심히 살피라는 일상적인 지시가 있었다.
문제는 회의가 끝나고 관원들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벌어졌다.
“그자는 어찌 되었는가?”
집의 김익현이었다.
상좌에 앉은 그가 무심하게 던진 질문 하나에 모두의 몸이 굳어버렸다.
“예조의 말단 관원. 이름이…… 그래, 김기대라 했지?”
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사헌지평 권문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일이라면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진행 중이다.”
딱, 딱, 딱,
김익현은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관원들이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
고저 없는 음성으로 김익현이 말했다.
“진행 중이라는 말을 들은 게 제법 오래전인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권문의 표정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워, 워낙에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작자인 데다, 특별히 수행한 직무도 없어…….”
“그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자가 동궁전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지? 권 지평, 자넨 그럴 수 있나?”
“하, 할 수 없습니다.”
“지평인 자네도 할 수 없고, 집의인 나도 하지 못하는 일을 그자는 밥 먹듯 하였군.”
김익현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나도 하지 못할 일을 신통방통하게 해내는 그 보잘것없는 자에 대해 무얼 알아냈는가?”
“전향사 아래, 이름도 없는 전각에 머물렀다는 정보가 있어 그곳을 뒤졌습니다. 그자의 손길이 닿았던 서책과 자료를 압수하여 샅샅이…….”
“이보게, 권 지평.”
무심하게 부르는 소리에 권문의 어깨가 좁아졌다.
김익현이 누군가를 저리 부르면 항상 사달이 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김익현의 주름진 눈이 섬뜩한 미소를 그렸다.
“내가 언제 자네의 변명을 듣고 싶다 했는가?”
“아, 아닙니다.”
“결과. 내가 듣고 싶은 건 지루한 과정이 아니라 명확한 결과일세.”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그자와 관련한 자료를 뒤져…….”
“그래서 뭘 알아냈는가?”
딱, 딱, 딱, 딱, 딱.
김익현이 다시 탁자를 두드렸다.
일정하게 이어지는 그 소리가 심장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수상한 것이 한둘이 아녔습니다. 우선 예조(禮曹)의 속사(屬司)인 전향사 아래인데, 그곳의 자료는 이조(吏曹)와 호조(戶曹)를 비롯한 여러 기관을 망라하여 온갖 잡스럽고 하찮은 것들을 모아두고 있었습니다.”
“과연 괴이쩍은 곳이군. 그래서?”
계속되는 추궁에 권문은 말문이 막혔다.
“그것이…….”
“그것이?”
“조사가 진행 중이라 아직 확실한 것은 없사오나…….”
“허허허. 이 사람.”
김익현은 돌연 헛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관원들은 김익현의 눈치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껄껄 웃던 김익현은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것 같으이. 그때 남은 한 발의 화살을 마저 쏠 것을.”
“집의 어르신.”
바닥에 엎드린 권문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소인이 감히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말석에 앉아 있던 감찰방 비방주 허상익이 끼어들었다.
“무어냐?”
김익현의 차가운 눈빛이 허상익을 향했다.
“김기대의 정체는 여전히 안갯속이나 실종된 그자의 마지막 행선지는 밝혀냈습니다.”
“그래?”
섬뜩하게 일그러진 김익현의 미소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렇다면 곧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바라는 게 아닐세. 명확한 결과. 난 그것만이 필요할 뿐.”
주춤하던 허상익이 김익현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허허. 이보게. 내 이번 일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긴 하나, 굳이 자네 목까지 필요한 건 아닐세.”
“기필코 집의 어르신께서 만족하실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기특하군. 꼭 그리 하겠다면 말리진 않겠네.”
“감사합니다.”
허상익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회의가 끝나고 모두 물러갔다.
창가에 선 김익현에게 권문이 다가갔다.
“초간택 일로 여러 곳에서 부름 있으신 줄 압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김익현이 흘끔 권문을 돌아보았다.
“그리 수모를 당하고도 넉살이 좋구나.”
권문이 비위 좋게 웃었다.
“집의 어르신의 호된 가르침은 언제나 어리석은 절 일깨워주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재주는 있군. 그러니 그 자리까지 오른 것일 테지.”
“모두 집의 어르신께서 돌봐주신 덕입니다.”
“아부나 떨 생각이라면 그만 돌아가라.”
“간밤에 동궁전에서 일어난 말썽은 어찌할까요?”
“불이 난 것이 아니라, 불을 피운 것이라지?”
“그러합니다.”
권문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궐이 세손궁의 초간택으로 잔뜩 들떠 있사온데, 본을 보이셔야 할 세자께서 경사스러운 날 사냥에 다녀오시다니요. 이야말로 법과 질서를 어지럽힌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멧돼지라 하더구나. 그것도 어지간한 수레엔 실을 수도 없는 큰 놈이었다지?”
“그런 이야기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 큰 놈을 단 한 발의 화살로 잡았다더군. 힘이 어찌나 강하였던지 두개골을 뚫고 들어간 화살이 깃대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뒷말이 성성하구나.”
“네?”
권문이 우둔하게 눈을 끔뻑이며 반문했다.
김익현은 혀를 끌끌 찼다.
“세자 저하의 기행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더냐? 부산 떨 것 없다. 그분다운 일이니, 조용히 뒤처리나 해두어라.”
“알겠습니다.”
힘찬 목소리로 대답한 권문이 허둥지둥 물러갔다.
텅 빈 집의청에 홀로 남은 김익현은 창밖 먼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쓰지도 못할 활인데, 완강한 손맛만큼은 잊히지 않으니. 가지고 싶은 것이 그 활인지, 그 활을 다루는 신력인지 모르겠구나.”
***
푸른 지붕을 머리에 얹은 가마엔 침묵이 가득했다.
초간택이 끝나고, 이레는 다른 간택인들과 함께 하룻밤 신세 진 행방을 떠났다.
외궁 밖, 행랑 할멈이 가마와 함께 그녀를 기다렸다.
한달음에 달려온 행랑 할멈은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걱정을 늘어놓았다.
얼굴이 까칠한 걸 보니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모양입니다.
좀 쉬었다 갈까요?
물이라도 드시겠어요?
“우리 아가씨, 이러다 병나시면 어쩌나?”
하는 양을 보아서는 이레가 병이 나는 것이 아니라, 행랑 할멈 쪽이 사달이 나도 먼저 날 듯싶었다.
이레는 애써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난 괜찮아, 할멈.”
“그런데 어찌 그리 기운이 없으셔요?”
“곤해서 그래, 고단해서…….”
“그렇지요. 고단하시겠지요. 그 어려운 자릴 꿋꿋이 버텨 내셨으니.”
속상한 듯 할멈은 질금질금 눈물을 훔쳤다.
보다 못한 수모가 혀를 찼다.
“당찬 아가씨였소. 그러니 못난 울음 그만 비치시구려.”
“그게 뭔 말이오?”
할멈이 물었다.
“행실이 워낙 침착하고 아리따워 종친 중 몇몇이 아가씨 하는 모양새를 유심히 지켜보더라는 뒷말이 들려오더이다.”
“그게 참말이오?”
“궁에서 내린 귀한 음식까지 먹은 나요. 없는 말을 지어 할까?”
수모는 가마 뒤를 따르는 작은 수레를 가리켰다.
“초간택에 참여한 간택인에게 저리 선물을 후하게 베푼 것만 보아도 왕실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겠소?”
“들으셨어요, 아가씨?”
할멈의 입귀가 길게 늘어졌다.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수모가 아량을 베풀듯 한마디 흘렸다.
“문중에서도 참으로 장하다 하실 겁니다.”
그 후로도 한동안 수모의 칭찬과 할멈의 웃음이 이어졌다.
그러나 마음이 번잡한 이레에겐 그 어떤 이야기도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과 함께 집에 도착하니,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
“선물은 우선 문중으로 가져가겠습니다. 나눔은 큰어른께서 알아 하실 겁니다.”
볼일을 마친 수모는 버리듯 이레를 내려놓고 가마와 함께 분주히 돌아갔다.
이레는 아릿한 눈으로 텅 빈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불과 몇 시진 전의 일이건만.
궁에서의 경험과 지난밤의 소동이 십수 년 전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한바탕 긴 꿈이라도 꾼 것만 같았다.
“뭘 하고 섰느냐?”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할머니의 엄한 표정이 들어왔다.
이레는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돌아왔으면 냉큼 들어올 것이지, 왜 우거지상을 하고 선 게냐?”
“어지럼증이 나서 그랬습니다.”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간택에 참여했다고 네가 무어라도 된 줄 착각이라도 했더냐? 네 오라비 잡아먹은 궁궐에 무슨 미련이 남아 문밖을 서성인단 말이냐?”
할머니의 모진 말에 울컥,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잘했다, 장하다.
그런 말은 아니더라도 그저 무던히 맞아주시면 아니 되시려나.
괜스레 코끝이 알싸해졌다.
목 안을 가득 채운 뜨거운 기운을 삼킨 채 이레는 별채로 향했다.
자박자박.
무거운 걸음이 별채 중문 턱을 넘어설 때였다.
이레의 등 뒤로 할머니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쉬어라.”
“……!”
이레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등을 돌린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팡이에 의지한 깡마른 뒷모습이 오늘따라 외로워 보였다.
***
제 둥지로 돌아온 이레는 무섭게 달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했다.
열병 걸린 사람처럼 쌔액쌔액 밭은 소리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캄캄한 밤이었다.
꿈자리가 사나웠다.
무엇이 두렵고, 어찌 요사한 꿈이었는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눈을 뜨니 베고 누운 베갯잇이 눅눅했다.
자리끼로 입술을 축인 이레는 자리에 앉았다.
허망한 시선이 작은 방 안을 훑었다.
변한 것도, 빈 곳도 없는데.
허전하고 헛헛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고, 마쳐야 할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한숨만 뱉어내던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답답하거나 풀리지 않는 일이 있으면 언제나 서탁에게 묻곤 하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서탁의 할아버지들도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
“어?”
멍하니 서탁을 내려다보던 이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무언가 변했다.
서탁은 변함없다.
그 위에 펼쳐둔 종이도 떠날 때의 모습 그대로다.
“종이가 깨끗해.”
궁으로 떠나기 전, 서탁에 글을 남겨놓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작별 인사가 사라지고 없었다.
글이 사라졌음은 누군가 읽었다는 뜻.
한데 정작 답글도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지워진 것이리라.
할아버지들께서 걱정하실까 싶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자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써 억누른 상념이 다시 떠올라 몸과 마음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정녕 이대로 오라버니와 연결된 것은 찾지 못하는 것일까.
아직 만나지 못한 은자원의 은자, 서강율이 떠올랐다.
그러나 형운조차 모르는 기대의 행방을, 노상 자리를 비우는 강율이 알 수 있을까?
이제 어디서 오라버닐 찾아야 한다?
서랍을 열어 오라버니가 선물한 머리꽂이를 꺼냈다.
단옷날 밤, 머리꽂이를 건넬 때 보인 기대의 인자한 눈빛과 선한 웃음이 자꾸만 눈앞을 흐리게 했다.
“못된 오라버니, 지키지도 못할 약조를 잘도 하셨습니다.”
제 배필은 오라버니가 찾아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저, 간택에 참여하였습니다.
오라버닐 찾겠다고 궁까지 갔건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마음껏 비웃고 싶으시겠지요.
너도 허술한 면이 있구나 하며 놀리고 싶으시겠지요.
오라버니.
이제 저는 어찌합니까?
어쩌면 좋습니까?
속절없이 떨어진 설움이 서탁을 적셨다.
-아이야.
자상한 부름이 물기 머금은 이레의 시야에 들어왔다.
-슬퍼 말아라.
눈물이 전해진 모양이다.
종이 위로 떨어진 울음을 분별없는 서탁이 고스란히 먼 곳에 계신 분들께 전하고 말았다.
화할아버지의 다정한 위로에 내내 참았던 울음이 왈칵 터지고 말았다.
어린 시절.
외롭고 슬퍼 마냥 울기만 하던 아이를, 지금처럼 위로해 주셨더랬지.
-할아버지.
-무슨 일이냐?
-찾을 수 없어 슬픕니다.
-네 오라비 얘기로구나.
-소중한 사람을 잃었는데 찾을 길 없어 가슴이 미어집니다. 희망을 품고 간 궁에서도 끝내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궁에 가다니? 네가 어떻게 궁에 가?
상의 날카로운 필체가 날아들었다.
-간택이 있었습니다.
-설마, 거길 참여했다는 게야? 네 오라비 찾으려고?
-네.
-아주 간을 배 밖으로 내놓았구나. 그런데…… 가만!
상이 잠시 뜸을 들였다.
-네가 있는 곳은 지금 무슨 계절이냐?
-여름입니다.
-무슨 해더냐?
상의 뜬금없는 물음에 이레는 붓을 놀렸다.
-신사년입니다.
답을 마치고 글이 전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시와 때를 적은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레는 동창을 열었다.
달빛은 밝고, 검은 하늘엔 구름 한 점 떠돌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탁 위의 글은 선명한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레가 다시 붓을 들었다.
-할아버지들.
붓을 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글이 사라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레는 다시 글을 썼다.
-신사년이라 하였습니다.
새로 쓴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서탁의 또 다른 비밀 하나를 깨달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서로 왕이라 주장하는 할아버지들의 설전이 극에 치달았던 과거의 어느 날.
화할아버지의 도발에 넘어간 상할아버지가 더는 못 참겠다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아니, 밝히려 했다.
그러나 서탁엔 아무 글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묘한 간극 후.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았느냐며 의기양양해하는 상할아버지의 글이 이어졌다.
당연히 다른 할아버지들은 상할아버지를 비웃고 꾸짖었다.
십 년 동안 그런 일이 종종 벌어졌다.
어느새 할아버지들은 서로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다.
서로를 상, 화, 예로 호칭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름뿐 아니라 시기도 안 되는 거였구나.”
인(人)과 귀(鬼).
두 세계의 영역이 극명하니,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고 서탁이 경고하는 듯했다.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백귀인데, 이름은 몰라도 시기는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사이, 상할아버지의 다그침이 이어졌다.
-너, 어찌 대답 못 하느냐? 당연히 거짓일 테지. 내가 허락한 적도 없는데 누가 감히 간택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지금 그게 중요하오?
예가 상을 질책했다.
-중요하지. 저 어린것이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니 그러지.
-그만해라. 서탁의 기괴함을 모르지 않을 터. 상처받은 아이를 탓해 무엇할까.
화의 지청구까지 잇따르니, 상이 기세를 꺾었다.
-어울리지 않게 자꾸 울기만 하니 답답해서 그러는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깬 것은 악필이었다.
-잃어버린 걸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고? 본시 중요한 것은 가까운 데 있는 법이다.
-넌 뭔데 또 끼어들어?
상이 악을 경계했다.
악은 느긋했다.
-답답해서 그런다. 아이는 답을 묻는데, 다들 딴소리만 해서.
-딴소리? 그거 나 보라는 말은 아니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지만, 제 발 저린 사람이 자주 하는 말이긴 하구나.
슬그머니 악이 던진 미끼를 상이 덥석 물었다.
-망할 놈의 잡귀가 어디서 감히! 너 누구냐? 어느 가문이냐?
-왜? 와서 무덤이나 뒤지고 다니려고? 아서라. 내 죽지도 않았지만, 죽었어도 내 무덤 파려면 네 늙은 뼈다귀론 어림도 없을 것이다.
-이놈이!
한동안 악과 상의 말다툼이 이어졌다.
싸움이 그치길 기다린 이레가 악에게 물었다.
-중요한 것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본래 사념에 사로잡히면 정말 중요한 것을 잊기 마련이니라. 복잡한 일일수록 작은 계기로 풀리는 법이지.
예가 한마디 거들었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하였지.
화도 한 자락 의견을 펼쳤다.
-처지를 바꿔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 네 오라비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면 어떻겠느냐? 세상에서 네 오라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네가 아니더냐.
상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싸우다 말고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래?
이레는 할아버지들의 말을 곱씹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라.”
허술하다 생각한 오라버니의 정체를 그가 소속된 예조는 물론이고 어사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오라버니의 행적이 묘연했다.
오라버닌 어떤 일을 하셨을까?
나라면 어떨까?
어떤 신분이어야 오라버니처럼 행동할까?
그간 보아온 오라버니의 행동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오라버니가 무슨 일을 하고, 누굴 만나고, 누구와 어떤 얘길 하셨지……?
전엔 대수롭지 않던 말들에 깊은 속내가 숨어 있음을 깨달았다.
세세하게 짚어보니 미심쩍은 행적이 곳곳에 편린처럼 흩어져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 중요한 것은 가까운 곳에 있는 법.”
짜릿한 전율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희미하기만 하던 것이 한순간에 명확해졌다.
“……그것이었어!”
이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
여름 습기가 작은 사랑채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기대가 사라지고 난 뒤, 이곳은 내내 텅 비어 있었다.
할머니는 작은 사랑채에 누구도 걸음 하지 말라 엄명을 내렸다.
덕분에 기대의 방은 그가 사라진 날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레는 심지 마른 등잔에 기름을 붓고 불을 밝혔다.
기름 타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밝아졌다.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 물건이.”
이레는 아늑하게 꾸민 기대의 방 안을 눈으로 훑었다.
방의 동쪽 벽은 책장이 가득 메웠다.
서쪽엔 낮은 문갑이 일렬로 자리 잡고 있었으며, 남쪽으로 둥근 들창이 나 있었다.
그 옆에 옷 걸린 횃대가 보였다.
북쪽의 네 폭 낡은 병풍 앞엔 양팔 너비의 서탁이 놓였고, 한쪽 구석엔 반듯하게 개킨 이부자리도 보였다.
이레는 제일 먼저 서탁의 서랍을 살폈다.
책장과 이부자리도 뒤졌다.
방 안 곳곳.
구석구석 먼지 한 톨마저 눈에 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문갑 안과 병풍 뒤도 살폈지만 역시나 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나라면…… 진정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물건이라면 어디에 숨길까?”
늘 보이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곳.
이레는 둥근 들창 옆에 자리한 횃대를 올려보았다.
그곳엔 기대가 사라지기 전 자주 입던 두루마기가 언제나처럼 걸려 있었다.
입술이 바삭바삭 말려들었다.
한 호흡 숨을 들이마신 후, 두루마기의 앞섶을 더듬이질했다.
없다.
이레는 두루마기의 소맷자락을 만졌다.
각진 물건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꺼내보았다.
향갑(香匣).
아찔한 백단향에 머릿속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대추나무를 정교하게 깎아 만든 향갑은 오라버니가 몇 달 전 잡화전의 노파에게서 산 물건이었다.
사대부의 사내라면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물건.
하지만 오라버니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
이레는 향을 넣는 작은 틈새를 살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향갑을 더듬던 손길이 네모난 상자의 귀퉁이를 퉁겼다.
딸각.
향갑을 여는 순간, 새끼손톱 길이의 작은 종이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입안에 단침이 고였다.
이레는 천천히 조심스레 종이를 펼쳤다.
그녀의 눈에 종이에 적힌 글씨들이 들어왔다.
열십(十).
종이의 한 면엔 열십자(十)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뒷면.
붉은 언덕 위로 아침 해 떠오르니 (赤阜旦出)
산과 물, 모두가 좋구나. (丘壑二樂)
뜻 모를 여덟 자의 시.
그러나 그 의미 불명의 글을 확인한 이레의 눈이 부드럽게 여며졌다.
기대가 사라진 이후, 처음으로 짓는 웃음이었다.
***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세손궁으로 낮은 발걸음이 다가왔다.
기운을 느낀 형운이 눈도 뜨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엇이냐?”
문밖에서 홍인모가 아뢰었다.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더냐?”
“김기대가 실종되기 전, 향한 지역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탁.
형운이 서책을 접었다.
정해진 일정을 좀처럼 어기지 않던 분이라.
보던 책을 덮는 모습만으로도 홍인모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이어진 명은 더 놀라운 것이었다.
“급히 궐 밖을 나가야 하니, 최 내관에게 준비하라 이르거라.”
“직접 행차하려 하십니까?”
형운은 대답 대신 문갑을 열고 구석에 처박아둔 둥근 패를 꺼내 들었다.
“가자.”
고저 없는 목소리가 세손궁에 깊은 파장을 그렸다.
네 번째 출궁(出宮).
처음은 할바마마를 배웅하러 간 것이고.
두 번째는 아바마마의 명으로 하는 수 없이 나간 것이었다.
세 번째는 어설픈 협박으로 인한 것이었으나…….
이번은 그 스스로 원하였다.
세손의 네 번째 출궁이자 그가 자처한 첫 잠행(潛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