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파루의 북소리
미몽에 사로잡혔다.
가슴이 답답하고, 끝없는 잡념에 시달렸다.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산책하고 활을 쏘아도, 말 타고 검을 들어도.
머릿속은 온통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하였다.
수렁에 빠진 것만 같았다.
나가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했다.
은자원.
모든 일의 발단은 그곳에 있었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전향사 소속의 이름조차 없는 전각.
아바마마의 명으로 그 낡은 전각으로 걸음 할 때만 하여도 그저 귀찮고 번잡하기만 하였다.
그 보잘것없는 곳에 걸음 하길 여러 달.
세우(細雨)에 옷 젖는 줄 모른다 했던가.
어느새 그곳에 정 붙인 모양이다.
갑자기 그곳으로 걸음 하지 말란 명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연유를 물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엉뚱한 소식이 전해졌다.
예조의 하급관원 김기대의 실종.
그와 관련한 불민한 소문.
급기야 어사대가 그를 조사한다는 소식마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였다.
갑갑증의 시작은.
이상하게 속이 허전하고 헛헛하였다.
음식을 앞에 두고도 시장하지 않고, 여러 스승의 말씀을 들어도 공허함이 가시지 않았다.
어디 마음결 붙일 만한 곳이 없었다.
혹여 서탁에라도 기대볼까 하였으나, 그조차도 잠잠하였다.
참으로 괴이하고 사특한 요물이 아닌가.
원하지 않을 때는 스스럼없이 나타나 눈과 마음을 빼앗더니, 정작 필요하여 부르면 잠든 듯 숨어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이야말로 희롱이요, 농락이 아닌가.
그렇게 화도 내보고 무시도 하였으나, 밤이 되면 무심코 서탁 위에 펼쳐둔 종이를 보게 되었다.
그리 성불하라, 서로 노래하더니.
정말로 성불이라도 한 것일까.
글이 보이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비로소 하찮게 여긴 서탁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인정하긴 싫지만, 은자원 역시 그의 일상이요,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서탁은 숨통이요, 은자원은 그의 유일한 안식이었다.
목덜미를 짓누르는 현실 속에 유일하게 숨구멍을 열어 주던 곳이었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사라졌다.
그래, 그 연유로구나.
가슴이 답답하고 공허하였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뜻 모를 두려움으로 깊게 잠들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 허름한 전각이 이토록 중한 줄 알았더라면, 그곳에서의 시간을 조금 더 느긋하게 보낼 것을.
그깟 일, 조금 미뤄두고 넉넉하게 즐길 것을.
백귀들의 잡담이 이리 그리울 줄 알았다면, 따로 적어두기라도 할 것을.
발칙한 제비꽃 여인에게 차가운 외면 대신 따뜻한 말 한 자락 던질 것을.
아니다.
모두 부질없다.
괜한 정 주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이처럼 헛헛하지도, 아프지도 않았겠지.
눈 녹고, 꽃 지듯 담담하게 흘려보낼 수 있었을 테지.
잊자.
망각의 강 너머로 잔잔히 흘려버리자.
버리자.
지금껏 묻은 수많은 추억처럼, 이번 일도 심연처럼 깊은 곳에 묻어버리자.
그렇게 애써 잊으려 하였다.
묻어만 두었다.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세상일에 관심 끄고, 사람 일에 무관심했다.
그러기에 최 내관이 초간택에 참여한 여인들에 대해 말할 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세손빈의 자리야 내정되어 있거늘.
간택이라는 복잡한 절차는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궐의 권력과 다양한 이해득실이 똬리 튼 뱀처럼 한데 뒤엉켜 잉태시킨 욕망의 결과.
정작 세손인 자신의 의지와 생각은 조금도 투영되지 않는 허깨비 놀음.
관심도 없었고,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처럼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따르면 될 일이다.
반항도 저항도 의미 없으니, 남이 닦아 놓은 길을 묵묵히 걸으면 될 일이다.
덧없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있으나, 정작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뜻밖의 이름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경기관찰사 김 아모개.
김기대의 아비가 아니던가.
감히 세손인 그에게 농을 건네고, 함부로 친구라 칭하고, 귀찮게 들러붙었으며, 협박하고, 쓸데없는 침통을 징표라며 나눠준 이상한 녀석.
난생처음 권력을 이용하여 골탕 먹이리라 작심하게 한 그 엉뚱한 녀석.
그리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수상한 녀석.
그의 실종과 이후의 이야기가 하도 괴이쩍어 형운은 사람을 부려 뒷조사를 명했다.
그 과정에서 김기대의 아비가 최근 경기관찰사가 되었다는 소식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바, 경기관찰사의 자식 중 간택에 참여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사람.
김 기대의 누이, 이레뿐이었다.
형운은 근원 모를 불안을 느꼈다.
그토록 살갑던 오라비가 실종되었는데, 돌연 초간택에 참여한다?
부자연스럽다.
다른 연유가 있으리라.
오라비로 인해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 위한 집안의 강요이거나, 그도 아니면…….
형운은 그녀가 유난히 현명하고 똑똑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불현듯 은자원이 떠올랐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애써 부정하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무지근했다.
천 번, 만 번 생각해도 허황한 이야기이나, 오라비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한 그녀라면…….
불안하고 초조하여 방안을 서성이던 형운은 예조의 관복으로 환복하였다.
오랜만에 입게 된 관복.
어찌 된 이유에선지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렇게 뜻 모를 향수와 기대를 품고 은자원을 찾았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처음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두운 실내.
사라진 추억의 빈 구석.
그곳에 오도카니 선 여인의 모습.
그녀였다.
동그랗게 뜬 눈.
눈물로 얼룩진 얼굴.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 아래.
밤이 그린 신기루인 듯.
망상에 사로잡힌 소망의 현신인 듯.
그곳에.
그 장소에.
이레가 있었다!
***
이레를 마주한 순간, 뒤엉킨 감정이 형운에게 밀려들었다.
기쁘고, 반가웠고, 슬프고, 화가 났다.
오랜만에 만난 이레가 은자원에서의 추억을 생각나게 하여 기뻤고,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여 반가웠다.
그녀의 눈물 맺힌 눈동자를 보니 슬펐고, 그녀가 이곳까지 온 과정을 미루어 짐작하니 화가 났다.
“대체…….”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린 형운이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것이오?”
“드디어 만났습니다.”
이레의 목소리에 애써 가라앉힌 물결이 다시 일렁거렸다.
그 음성에 담긴 절실함에 형운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박동했다.
“날…….”
형운이 물었다.
“만나려 하였소?”
“네.”
이레가 대답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호수 같은 눈동자가 형운의 얼굴을 담아냈다.
“나리를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레의 그 말 한마디가 형운의 심장에 화살처럼 쿡 박혔다.
차라리 울었더라면…….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이 으레 보이는 그 서러움을 맥없이 터트렸다면 이리 선명하게 가슴 아리진 않았으리라.
참고 인내한 고통.
깊이 삭이고 삭인 슬픔이 담담한 표정과 어조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시린 줄 알기에 마냥 외면할 수 없었다.
“간택에 참여했다 하던데. 사실이오?”
이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미소에 괜스레 불뚝성이 치솟았다.
어찌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순찰하는 군사의 눈에 띄기라도 했으면 어찌하려고.
그걸 모를 만큼 미련한 사람은 아닐진대.
그리 간절하였소?
제 목숨 따위 덧없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이레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제…… 오라버니가 사라졌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이레의 물음이 텅 빈 은자원에 깊은 파문을 그렸다.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이레가 한 걸음 다가왔다.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아십니까?”
형운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동자가, 간절한 음성이, 작은 희망이라도 잡아보려는 그 처연한 표정이,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깊은 곳에 잠긴 무언가가 목구멍 위로 불끈 치솟으려 하였다.
억지로 그 뜨겁고도 낯선 기운을 삼켰다.
형운은 이레에게 등을 보였다.
죄지은 것도 아니건만,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기대와 희망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모르오.”
이레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제 오라버니가 어디로 가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번에도 형운은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알지 못하오.”
“아!”
등 뒤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슬픔으로 얼룩진 급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창으로 새어 들어온 유백색 달빛에 그녀의 그림자가 금시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휘청였다.
형운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무너진 이레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저 얼굴에 다시 말간 미소가 피어나게 할 수 있을지.
지금껏 배우고 접한 성현의 말씀과 글귀가 이 전각을 가득 메우고도 남거늘.
정작 실망하여 쓰러진 여인 하나를 위로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둥!
멀리서 파루를 알리는 첫 번째 북소리가 들려왔다.
형운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곧 궁의 아침이 시작된다.
저 북이 서른세 번 울리면 비밀의 시간이 끝나고, 비정한 민낯의 시간이 열리리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소. 그만 돌아가시오. 더 늦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오.”
그의 말에도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레는 초점 잃은 눈으로 혼잣말하듯 말했다.
“혹시 나리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틈나는 대로 궁문 앞을 서성거렸습니다. 하지만 나리도…… 서 선비님도, 그 누구도 뵐 수 없었습니다.”
둥!
두 번째 북소리가 울렸다.
형운이 물었다.
“그래서…… 간택에 참여한 것이오?”
“…….”
이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거운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진 자명하였다.
둥!
세 번째 북소리가 울렸다.
형운의 낯빛이 전에 없이 무거워졌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묻지 않겠소.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는 날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소?”
둥!
네 번째 북소리가 울렸다.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곳에 오는 것만이 오라버니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대는 정녕…….”
자신을 살피지 않는 이레의 무모한 모험을 질책하려던 형운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저 눈빛.
저 결기.
무엇도 저 여인을 막을 수 없으리라.
그럼 이제 어찌한다?
대체 이 여인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둥!
다섯 번째 북소리.
“우선은 돌아가시오.”
“못 갑니다. 오라버니가 사용하던 물건을 살피게 해주세요.”
“이곳은 이미 어사대가 한바탕 훑고 지나간 곳이오. 김기대가 쓰던 것이라면 작은 종이 쪼가리 하나조차도 그들이 거둬 갔으니. 낭자가 찾는 건 여기에 없소.”
둥!
여섯 번째 북소리.
“그래도 이리 허무하게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지금 오라비를 걱정할 때가 아니오. 간택에 참여한 낭자에게 다른 뜻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낭자는 물론이고, 낭자의 집안마저도 온전치 못할 것이오.”
둥!
운명의 일곱 번째 북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요지부동인 이레를 보며 형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북소리가 전하는 초조한 압박과 모든 것을 내던진 여인의 고집이 끝내 그의 철벽같은 마음을 녹이고야 말았다.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은 말.
“내가 하리다.”
“네?”
“내가 찾아보겠소.”
언제나 시키는 대로만 하였다.
남과의 약조도 결과가 확실해야 비로소 입 밖으로 뱉었다.
그에게 있어 약조의 의미는 이처럼 크고 중요했다.
그런데 오늘.
불확실한 일을 남에게 다짐하고 말았다.
뒤를 쫓는 북소리와 여인의 단호함에 그의 완벽한 세상이 흔들렸다.
지금껏 걸은 탄탄한 길을 벗어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길을 선택했다.
어쩌면 영영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를 부담을 스스로 떠안겠다 약조한 것이다.
오래도록 쇠사슬에 매여 녹슬고 허물어진 운명의 수레바퀴가 우렁찬 굉음을 토하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둥둥둥!
어느새 북소리가 열 번 넘게 울렸다.
“약조하오. 내가 김기대,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겠소. 그러니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시오.”
형운은 이레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대로 문을 나서 왼쪽 길로 가시오. 처음 나오는 갈림길에선 오른쪽, 그다음은 다시 왼쪽이오. 잊지 마시오. 왼쪽 다음은 오른쪽, 그리고 다시 왼쪽. 행여 길을 잘못 들었다간 그 길로 북망객이 될 터이니. 정신 바싹 차려야 하오.”
“나리.”
“가시오.”
형운은 이레를 은자원 밖으로 등 떠밀었다.
둥둥둥.
파루의 북소리가 멀어지는 이레의 뒤를 바싹 뒤쫓았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형운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좌익위, 거기 있느냐?”
“여기 있사옵니다.”
은자원 입구 근처에 몸을 숨긴 최치성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넌 지금부터 저 여인을 지켜라.”
“…….”
“앞서 가서 여인의 길을 밝혀두거라. 행여 무모한 짓을 하진 않는지. 험한 일에 휩쓸리진 않는지. 은밀하게 뒤를 지켜야 한다. 알겠느냐?”
“명 받잡습니다.”
우직한 목소리로 대답한 최치성이 자취를 감추었다.
둥둥둥둥!
아침을 깨우는 북소리가 울렸다.
은자원 입구에 기대고 선 형운은 아스라이 멀어지는 이레의 뒷모습을 제 망막에 가뒀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그는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세손궁이 평소와 달리 묘하게 술렁이었다.
이른 아침.
세손의 침소를 찾은 최 내관은 안절부절못했다.
당연히 침소에 계셔야 할 분이 아니 보인 까닭이다.
“어찌 내가 자리를 비우면 이 사달이오, 사달이.”
늙은 내관은 세손궁의 우익위를 달달 볶았다.
“그쯤 해 두어라.”
애타게 찾던 형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하.”
세손의 차림을 본 최 내관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손복이 아닌 하급관원의 차림.
예조의 관복이라면 자다가도 이를 갈던 분이 아니시던가.
그런 분이 자진하여 환복하셨다니.
“이 이른 시간에 어딜 걸음 하셨나이까. 가뜩이나 세자궁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궁이 발칵 뒤집혔사온데, 세손저하 아니 보이시니. 이 늙은이 너무 놀라 심장이 쪼그라들었사옵니다.”
동동대는 최 내관을 형운이 물렸다.
“번잡하다.”
“하오나…….”
“쉬고 싶구나.”
더는 어쩌지 못한 최 내관이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홀로 남은 형운은 지친 기색으로 보료 깊숙이 기대고 앉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형운은 서탁 앞에 정좌하고 앉았다.
“인모야.”
주군의 부름에 우익위 홍인모가 부복했다.
“저하.”
“김기대에 관해 알아보라 한 일은 어찌 되었느냐?”
“송구하옵니다.”
“어사대에서도 무어 알아낸 것이 없는 눈치더냐?”
“하늘로 솟은 듯, 땅으로 꺼진 듯. 종적이 끊겨 어사대마저도 당황하고 있나이다.”
“그래?”
“그 일로 집의 김익현이 진노하였습니다. 김기대를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장소로 어사를 파견한다 합니다.”
형운의 눈썹이 휘어졌다.
“김기대, 대체 그자의 정체가 무엇이냐?”
그간 은자원에서 함께 하면서도 딱히 관심 두지 않았다.
어쩌다 은자원까지 오게 되었는지, 은자원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지도,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의 정체를 어사대조차 파악하지 못하다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김기대를 찾아라. 그자의 행적을 어떻게든 알아내야 할 것이다. 죽었으면 그 시신이라도 거둬야 할 것이고, 살았다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내라.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홍인모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형운을 올려다보았다.
“감히 하나만 여쭈겠나이다.”
“무엇이냐?”
“저하, 어찌하여 그자에 대해 이리 관심 가지시나이까?”
형운의 반듯한 얼굴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형운은 서탁 한쪽에 얌전히 놓인 향낭에 시선을 던졌다.
단옷날 이레가 선물한 창포 향낭이었다.
“선물을 받으면 답례하는 것이 도리라고.”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것은 그 선물의 답례니라.”
오직 그뿐.
그래, 그 외엔 아무 뜻도 없다.
진실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