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4화 (14/215)

#14. 드디어……

궁은 찬연하였다.

미로처럼 끝없이 이어진 기와의 행렬은 삼엄하고도 아름다웠다.

그 모습이 장대한 여름 숲 같기도 하고, 검푸른 심해 같기도 하며, 새하얀 구름 위 세상 같기도 하였다.

궐은 근엄하였다.

묵직한 검회색 기와와 붉은 기둥은 황천 건넌 객을 심판하는 염라국의 대왕전을 떠올리게 했다.

궁궐은 신비하였다.

장중하고 권위 넘치는 무채색의 지붕, 정작 그 아래는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화려한 색채로 수 놓여 있었다.

날아오를 듯 휘어진 처마 선의 부드러운 미소와 청, 적, 황, 흑, 백. 오행을 색으로 풀어낸 단청의 화사함은 대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은밀한 속살은 저리 곱고 어여쁘거늘, 왜 굳이 불퉁한 모습의 기와로 감추었을까.

비바람에 깎이고 쓸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리라.

무뚝뚝한 기질로 인내하여 속 깊은 곳에 감춘 다채로운 고아함을 지키기 위함이리라.

형형색색으로 삼엄한 궁궐에 바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궁녀들은 중희당 인근 행방으로 구름처럼 사뿐사뿐 잰걸음을 옮겼다.

초간택에 참여한 어린 규수들은 느닷없는 부산함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느꼈다.

정오가 되었다.

행방의 사잇문이 일시에 걷혔다.

길게 나열된 행방에서 치장에 몰두하던 간택인들은 갑작스러운 대면에 머쓱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곧 궁녀들이 푸짐하게 차린 점심상을 들였다.

간택인들은 반색했다.

큰일을 앞둔 터라, 태반이 피로하고 시장하던 참이다.

하지만 그들의 웃음은 이내 흔적없이 사라졌다.

음식과 함께 상궁과 궁녀들이 들이닥쳤던 까닭이다.

종6품 이상의 상궁과 궁녀들이 각각의 간택인을 병풍처럼 둘러쌌다.

그들은 저마다 맡은 간택인의 모습을 무심한 표정으로 기록했다.

간택인의 얼굴 모양과 눈, 코, 입의 조화로움, 눈썹의 생김새와 낯빛을 살폈다.

밥상 앞에 앉은 모습, 수저 드는 자세, 음식을 집고 삼키는 모양과 먹은 음식의 양과 남긴 양을 세세히 관찰했다.

심지어 숭늉 마시는 모습까지 하나 놓치지 않았다.

상 위엔 기름진 산해진미 가득한데, 정작 이를 즐겨야 할 간택인들의 얼굴엔 긴장이 가득했다.

심약한 자는 사레가 들리고, 딸꾹질하는 여인도 적지 않았다.

행여 음식 삼키는 소리라도 들릴세라 입에 문 것을 몰래 뱉는 간택인도 있었다.

그 조용한 소란 와중에도 몇몇 간택인들은 차분함을 잊지 않았다.

수저를 쓰고, 음식을 드는 모습에서도 고아함을 잃지 않았다.

그런 여인 중엔 이레도 있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진지상을 비워냈다.

마치 지켜보는 사람을 보지 못한 것처럼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태평해서 외려 시중들던 수모가 당황할 지경이었다.

대범한 것일까?

그것이 아니면 자포자기한 것이려나?

상을 물린 이레는 창가에 섰다.

“백아흔여섯, 백아흔일곱, 백아흔여덟…….”

수를 헤아리는 소리에 수모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 오면서부터 헤아린 수가 이젠 이백 가까이 되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수모가 물었다.

“대체 아까부터 무얼 그리 세시는 겁니까?”

이레가 말간 시선으로 수모를 바라보았다.

“버릇입니다.”

“버릇이라고요?”

“네. 긴장하면 지금처럼 수를 헤아리곤 합니다. 그리하면 마음이 진정되곤 하지요.”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까 기대한 수모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그럼 그렇지.

겉으론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긴장하고 있었던 게다.

“장하십니다. 그렇게라도 마음을 차분히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수모는 이레를 추켜세웠다.

괜스레 던지는 빈말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창칼 같은 시선을 이겨보려 나름 용쓰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굼뜨던 햇살이 담벼락 아래로 물러갔다.

진짓상을 물리자 이번엔 차 화덕을 든 궁녀와 찻상이 열을 이었다.

쪼르르.

찻물 따르는 소리가 고요한 행방에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차를 우리고, 맛을 음미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다시 기록되었다.

마지막으로 작은 서탁과 함께 하얀 백지가 들어왔다.

“이건 뭡니까?”

이레의 물음에 그녀를 담당한 대전 소속 장 상궁이 예의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종친부에서 간택인들의 필체를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

“무엇을 써야 합니까?”

“아무것이나 아가씨가 쓰시고 싶은 것을 쓰시면 됩니다.”

마치 일상인 듯 무심히 말했지만, 간택인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식사와 차에 이어 글을 쓰라 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시험의 일환이었다.

궐에 들어선 이후, 간택인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찰되고 기록되고 있었다.

필체를 살피겠다는 이번 시험이 그중 방점이리라.

간택인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붓을 들었다.

하나, 정작 텅 빈 종이를 보니 막막했다.

필사(筆寫)라면 모를까, 이 종이에 무얼 적어야 한단 말인가?

그럴듯한 문장과 글귀를 써야 한다는 중압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고, 입안에선 소리 없는 한숨이 되새김질 되었다.

그러나 이레는 달랐다.

처음부터 간택에 참여한 이유가 다른 간택인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

부담은 물론이고 중압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되려 서탁을 마주하니 할아버지들과의 필담이 떠올라 기쁘고 즐거웠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단 한 번의 막힘없이 글을 써내려갔다.

마음을 맑게 할 수가 있고   (可以淸心也)

맑은 마음으로 마셔도 좋고  (以淸心也可)

맑은 마음으로도 상관없고   (淸心也可以)

마음도 맑아질 수 있고      (心也可以淸)

또한, 마음을 맑게 해주네.   (也可以淸心)

다섯 글자 가운에 어떤 글자부터 읽어도 뜻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자자회문시(字字回文詩).

어린 시절, 서탁의 할아버지들과 즐기던 놀이 중 하나였다.

한 줄에 다섯 자.

모두 스무 글자를 한 호흡에 써 내린 이레는 미련 없이 붓을 내려놓았다.

붓을 들고 글을 완성하기까지 불과 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곁눈질로 지켜보던 장 상궁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했다.

상궁의 눈치를 살핀 수모가 이레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머릿수만 채우는 간택이라 해도 조금의 성의는 보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직 문장은커녕 한 글자도 쓰지 못한 간택인이 태반이었다.

더러 글을 쓰는 여인도 논어(論語)와 시경(詩經)의 글과 말씀을 한 글자, 한 글자 심혈을 기울여 썼다.

그에 반해 이레는 아이 장난하듯 가벼이 써내려가 순식간에 문장을 완성하였다.

그렇다고 필체가 명필인 것도 아니었다.

흘려 쓰듯 무심히 치고 내려간 글은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 해도 성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매사에 건성인 듯한 모습이라, 수모는 장 상궁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쓰는 게 어떨는지요?”

수모가 조심스레 권했다.

“전 이것이 좋습니다.”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이레는 종이를 장 상궁에게 내밀었다.

종이와 이레를 번갈아 본 장 상궁이 물었다.

“진정 이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이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특별한 양식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그것으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장 상궁은 종이를 받아 곁에 선 궁녀에게 넘겼다.

이레가 다시 물었다.

“이제 또 무엇이 남았습니까?”

“아직 간택인들이 모두 입궐하지 않으셨습니다. 당도하는 대로 왕실과 종친의 내명부 어른들께 선보이기를 시작할 겁니다.”

대답을 마친 장 상궁이 궁녀에게 서탁을 물리게 했다.

이레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서탁을 이대로 두면 안 되겠습니까?”

장 상궁이 눈으로 이유를 묻자, 이레가 미소로 답했다.

“제가 불안하고 초조할 때마다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래는 버릇이 있습니다. 서탁이 있으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일 듯하여 그럽니다.”

“원하신다면 그리하셔도 됩니다.”

장 상궁과 궁녀들이 물러갔다.

수십 개의 행방 사잇문이 다시 내려졌다.

수모와 단둘이 남게 된 이레는 닫힌 방문을 비스듬히 열었다.

그리고 서탁 앞에 앉아 눈으로는 밖을 보며, 붓을 든 손으로는 숫자를 써내려갔다.

-삼백서른넷, 삼백서른다섯, 삼백서른여섯…….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미시말(未時末: 오후 3시)이 되어서야 서른 명의 간택인이 모두 모였다.

“선보이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간택인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방 중문을 떼어낸 중희당의 넓은 마루 한가운데로 긴 발이 처졌다.

발 안쪽, 궐의 최고 어른인 대비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이 자리했다.

마루 양쪽, 정해진 자리에 상궁과 궁녀들이 머리를 조아린 채 섰다.

“전각에 들어서면 바로 곡배(曲拜: 임금을 뵈올 때 하는 절) 하시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중희당의 솟을대문을 넘기 직전, 장 상궁이 일렬로 길게 선 간택인들에게 당부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허무할 정도로 몇몇 간택인은 중희당에 들어서기 무섭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곡배는커녕 전각의 초입에서 허둥대는 간택인도 있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분들을 뵙는 자리라.

그저 안내한 자리로 이동하여 절만 하면 된다 하였지만, 긴장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크고 작은 실수들이 이어졌다.

곧 이레의 차례가 되었다.

잔잔히 앞으로 나아가 정해진 자리에 선 채, 조용히 곡배 올리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자연스럽다 못해 익숙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장 상궁은 다시 이마에 주름을 새겨넣었다.

왕실의 어르신들이 지켜보는 어려운 자리.

그 앞으로 나서고, 절하고, 물러나 제 자리를 찾아서는 모습이 지나칠 정도로 정갈했다.

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고개 숙여 절하고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시기 또한 마치 경험 많은 상궁이 옆에서 거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확했다.

고작 짧은 절차에 불과했지만, 장 상궁의 눈엔 경기관찰사 여식의 행동 하나하나가 각인되듯 새겨졌다.

그 예사롭지 못한 움직임을 감지한 건 비단 장 상궁만이 아닌 듯했다.

중궁전 소속의 박 상궁이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방금 절한 간택인, 장 상궁께서 맡은 분이지요?”

“그렇습니다.”

“걸음 하며, 곡배 하는 모습에 기품이 넘치더이다. 어느 집안 여식입니까?”

“경기관찰사댁 규수입니다.”

“아!”

질문을 던진 박 상궁의 입에서 놀람과 안타까움이 각각 반씩 섞인 탄식이 새어 나왔다.

“워낙 침착하여 이번에 내정된 삼간택인 중 한 분인가 하였더니…….”

삼간택에 오를 간택인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재간택도 어지간하면 미리 합을 맞춘 간택인이 되리라.

내정된 집안엔 초간택의 시험에 대해 대강이나마 그 과정을 알려주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도 당황하지 않은 몇몇 간택인들의 여유가 바로 그 덕분이었다.

그러기에 당연히 장 상궁이 맡은 여인도 그런 집안 중 하나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경기관찰사라…….

“아쉽군요.”

박 상궁의 말에 장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택인이 작성한 회문시를 본 뒤라, 그런 아쉬움이 더욱 컸다.

“묘한 규수로구나.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아쉬운 혼잣말을 중얼거린 장 상궁은 마지막 간택인의 뒤를 쫓았다.

중희당의 나무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

자시초(子時初: 밤 11시) 구름이 물러가고 보름달이 얼굴을 비쳤다.

한낮에는 흐릿하던 하늘이 다시 한껏 맑아졌다.

까만 어둠에 가려진 궁궐이 달빛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자정을 향해 치달리는 시간.

궁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오직 한 곳.

오늘 빈궁 간택에 참여한 어린 규수들이 묵는 전각은 은은한 흥분으로 여전히 술렁거렸다.

낯설고 긴장하여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간택인이 많았다.

그중 한 곳의 문이 열렸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여인이 밖으로 나와 번(番)을 서는 궁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래도 다식한 듯합니다.”

궁녀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불편함을 호소하는 간택인이 적지 않았다.

“급체에 쓸 약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한이 일고, 아랫배가 냉합니다. 단순히 체기만 있는 게 아닌 듯합니다.”

궁녀가 간택인의 얼굴을 살폈다.

낯빛이 백지처럼 창백하고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무래도 탈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함께 온 분은…….”

“깊은 잠이 든 모양인지, 불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깨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여인이 난처한 듯 설명했다.

“실은 문중에서 보낸 분이라. 함부로 대하기가 어렵답니다.”

궁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살뜰하게 모셔야 할 아가씨의 일신에 탈이 생겼거늘.

태평하게 잠이나 자다니.

‘보아하니 가문의 체면을 위해 원치 않게 초간택에 참여한 규수인 모양이구나.’

지엄하신 어명에 마지못해 간택에 참여한 가문도 적지 않았다.

가문의 체면치레를 위한 일이니, 뉘라서 선뜻 나설 것인가.

만약의 불상사에도 뒷말 없고, 목소리 내질 못할 집안의 여식이 제물이 되곤 하였다.

이런 경우 간택인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 또한 엉망이기 마련이다.

궁녀의 눈에 안쓰러움이 깃들었다.

“제가 약방(藥房)으로 모셔다드리지요.”

“고맙습니다.”

궁녀는 간택인을 내의원 근처의 약방으로 안내했다.

“체기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우선 약을 드시고, 잠시 이곳에 계십시오. 경과를 살피겠습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내의녀는 간택인의 얼굴만 쓱 한번 보고는 일상적인 처방을 내렸다.

오늘 궁에 든 간택인 중 태반이 약을 받아갔다.

좋게 웃으며 시작한 진료가 겹겹이 쌓이니 곤함이 밀려들었다.

행여 세손빈이 될지 모를 내정인이라면 내의원에 기별을 넣어 맥이라도 짚었으리라.

내의녀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약을 권했다.

약을 삼킨 간택인이 침상에 몸을 뉘었다.

그 곁에 궁녀가 섰다.

간택인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는 괜찮으니 돌아가 쉬십시오.”

“아닙니다. 완치할 때까지 곁을 돌보는 게 제 일입니다.”

“증상으로 보아 한두 시진 지난다고 나을 것 같지 않습니다. 날이 밝으면 의녀님께 길 안내를 부탁하겠습니다.”

궁녀가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곳에도 의녀들이 있으니, 굳이 곁을 지키지 않아도 될 듯했다.

“몸이 나으면 꼭 기별하셔야 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궁녀가 주춤주춤 돌아갔다.

대신 젊은 의녀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신 하품을 하는 모양이 금시라도 곯아떨어질 듯했다.

그때, 갑자기 약방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간택인 중 한 명이 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찾아왔는데, 먼저 온 여인과 달리 당장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나원, 수라간 인간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융숭한 대접도 좋지만, 잔뜩 긴장한 사람에게 기름진 음식이라니. 이러니 탈이 안 나고 배겨?”

약방의 의녀들은 신음하는 여인을 돌보느라 분주했다.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고 젊은 내의녀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응? 이분은 또 어딜 가신 거야?”

유난히 낯빛이 창백한 간택인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투덜거리던 내의녀의 눈에 침상 위의 놓인 종이가 들어왔다.

- 급한 부름이 있어 행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의녀는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급한 부름은 무슨.”

근처를 지나던 동료 의녀가 물었다.

“그쪽 분은 어디 가셨어요?”

“해우소에 간답니다.”

“약방 해우소 말입니까?”

“귀하게 자란 아가씨께서 낯선 곳에서 어디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그나마 잠시라도 묵었던 곳이 더 안심되겠지요.”

“설마 혼자 간 건 아니겠죠?”

“좀 전에 다른 간택인을 모시고 온 상궁이 있었잖습니까? 돌보는 사람이 있어 다급히 돌아가던데, 아마 따라갔겠지요.”

“가면 간다고 인사라도 할 것이지.”

“볼일이 급했나 보죠.”

“하긴, 그런 말을 직접 하기도 민망했겠군요. 여튼 별일 없으면 됐지요.”

그렇잖아도 할 일이 태산처럼 쌓인 터라.

내의녀들은 사라진 간택인에 대한 관심을 서둘러 털어냈다.

***

약방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이레는 웅크린 궐의 그림자 아래를 조심조심 걸었다.

글을 남겨두고 오긴 했지만, 과연 고분고분 믿어줄까?

지금이라도 사라진 그녀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올 것만 같았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침착하자.

마음을 가라앉혀야 해.

이레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운 좋게 감시의 눈을 벗어났지만, 정말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목적지까지 들키지 않으려면 그야말로 오감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내의원의 북쪽 중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약 스무 보.

꽃나무를 왼쪽으로 끼고 서른다섯 보.

그곳에서 이레는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렸다.

뎅, 뎅, 뎅.

삼경(三更)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레는 첫 번째 종이 울리자마자 수를 헤아렸다.

-삼경 삼점초(12시12분), 동소의 위장과 서소의 부장이 다른 방향으로 출발하여 약 일경(一更) 동안 순찰을 할 것이다.

상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그 말이 옳다면 일경 이내에 이곳으로 순찰이 당도한다.

그전에 중요한 관문을 적어도 두 곳 이상 통과해야 한다.

처음 간택을 이용해 궐 안으로 숨어 들어간다는 생각을 한 백귀는 악할아버지였다.

악할아버지는 이레를 구천을 맴도는 가엾은 귀라 여겼다.

그 가엾은 귀가 궁으로 들어가길 갈망했다.

단순히 달래보자는 심산으로 시작한 일이 궐로 숨어들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 간택이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할아버지들은 악을 비웃고 놀렸다.

악은 발끈하여 더 좋은 계책이 있으면 내놓으라 하였고, 자존심 강한 할아버지들은 앞다퉈 저마다의 의견을 써내려갔다.

각기 독특하고 훌륭했다.

다만, 여인이 시도하기에 가장 현실성 있는 계획은 악의 것이었다.

당연히 반발이 뒤따랐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며 상이 성화를 토해냈다.

이레가 아직 어려 새 사람에게만 마음을 쓴다며 화가 섭섭해 했다.

이레는 토라진 할아버지들을 달래느라 한동안 애를 먹었다.

그 와중에 예가 던진 한마디로 인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초간택에 참가하여 궐에 들어가는 건 그렇다 치고, 그 이후엔 어떻게 은자원으로 간단 말이오?

할아버지들은 악의 계획 또한 현실성 없기는 오십 보 백 보라며 웃었다.

악이 다시 발끈하여 반드시 통할 완벽한 계획을 세우겠노라 선언했고, 다른 백귀들은 그 계획의 허망함을 밝혀주겠다 자신했다.

그렇게 한동안 백귀들 사이에 간택과 관련한 논쟁이 벌어졌다.

백귀들은 놀라울 정도로 궐의 구조와 순찰 흐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레는 논쟁으로 변한 할아버지들의 대화를 따로 적었다.

상응하는 것은 남겨두고, 상충하는 것은 다양한 경우의 수로 세분화하였다.

그렇게 그녀는 궁궐 내부의 구조와 순찰 흐름을 모조리 암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간택을 이용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에 이른 것이다.

-궁궐 문에는 수문장이 배치되어 있고, 각 문(門)마다 많게는 스무 명에서 적게는 다섯까지, 병조에서 파견한 군졸이 지키고 있다. 순찰하는 군졸은 서로 군호로 호응하고 호응에 응하지 않으면 즉각 달려드니, 설사 실수로 죽게 되더라도 할 말이 없단다.

화의 설명에 상이 반박했다.

-모든 문에 수문장이 배치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나 사람의 출입이 잦은 곳엔 시와 때를 가려 배치되지 않기도 한다. 물론, 궐 외곽에 한정된 이야기니라.

-각 전각을 지키는 문지기와 군졸들은 약 일각의 시간 동안 교대하는데, 운이 좋다면 짧은 틈을 보아 이동할 수도 있겠지.

악의 말이었다.

-아무리 틈이 있다곤 하지만 사람이 지키고 선 곳을 무사히 통과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오. 차라리 담을 타 넘고 이동하는 게 현실적일 것이나, 여인의 몸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일 터.

예의 설명이었다.

이 밖에도 할아버지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레는 수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계획을 짜고,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물론, 실제 궁궐의 순찰이 할아버지들의 이야기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점도 배제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레가 물었다.

-할아버지들 말씀을 종합하면, 궁의 순찰 시간과 교대 시각이 매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 변화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요?

악할아버지가 묘수를 짜냈다.

-숫자를 세면 되지 않을까? 순찰의 이동과 교대 시각은 시시때때로 변하지만, 일정한 흐름만은 한결같으니. 순찰이 시작되고 수문장이 교대하는 간격만 정확히 잴 수 있다면, 대강의 흐름은 파악할 수 있겠지.

이레가 수를 헤아린 이유, 바로 그 때문이다.

창과 문밖을 예의 주시하며 스치듯 지나가는 순찰과 교대 시간을 재고 헤아렸다.

적당히 느낌만으로 수를 센 것이니, 정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강의 흐름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순찰과 교대 시각은 상할아버지의 말씀이 정확하다.’

사전에 세운 여러 가능성 중 가장 적합한 경우를 파악한 이레는 할아버지들의 조언에 따라 움직였다.

서탁의 백귀들은 남들은 모르는 비밀통로도 여럿 알고 있어, 이레는 꽤 먼 거리를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한계에 맞부딪혔다.

궁궐 내부에서 외곽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이 있었는데, 이곳의 경비가 보통 삼엄한 게 아니었다.

수문장도 두 명이나 되었고, 순찰하는 자들이 수시로 지나갔다.

악은 교대하는 짧은 틈을 이용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였지만, 한두 명이 지키는 것이 아닌지라, 사실상 불가능했다.

어쩌면 작은 틈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좀처럼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레는 분하고 억울하여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갈 수 없다니.

어느덧 교대 시간도 지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이레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 때였다.

“저, 저것이 무엇이냐?”

수문장이 놀란 비명을 터트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다른 문군사는 헛바람을 삼켰다.

“무슨 일인데…… 헉!”

내궁 깊숙한 곳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곧 궁 이곳저곳에서 소란스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불이야!”

“연기가 솟고 있다!”

수문장을 비롯한 군졸들이 문 안으로 들어와 연기가 치솟는 곳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이레에겐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였다.

살금살금 이동한 이레는 마침내 마지막 관문을 넘을 수 있었다.

부리나케 달리는 이레의 등 뒤로 군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저곳이 어딘가?”

“글쎄, 얼핏 보기엔 동궁전 근처인 듯한데…….”

***

“마침내…….”

이레는 허술한 나무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향사 소속, 편액도 걸리지 않은 낡은 전각.

은자원.

마침내 염원한 곳에 당도한 이레는 눈물을 억누르지 못했다.

고작 이 낡은 전각을 보는 게 이리 힘들 줄이야.

이리도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될 줄 예전엔 상상이나 하였을까.

“바보 같으니.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울 틈이 어딨다고 눈물이야.”

이레는 스스로를 질책하며 눈물을 닦았다.

참아야 한다.

주문(呪文)처럼 되뇌었건만, 자꾸만 쏟아지는 눈물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레는 낡은 문에 손을 가져갔다.

습관처럼 한쪽 눈을 감고 스물을 세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은자원의 문을 열었다.

삐걱.

예전과 같은 낡은 소리가 이레를 반겼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두운 실내.

흐트러진 책더미와 두루마리들.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서책들.

반가운 먼지 내와 해묵은 서책의 향기.

저쪽 구석, 희미한 등잔불 아래 엎드려 붓을 휘갈기는 시내가 보일 것만 같았다.

인사를 하면 그저 가볍게 고개만을 끄덕이겠지.

감은 눈을 뜨고, 방해되지 않게 사뿐히 들어가 오라버니 자리에 앉아야지.

그리고 게으른 오라버니가 올 때까지 은자원의 내부를 관찰해야지.

그조차 무료해지면 일하는 사내를 뒷모습을 무심코 지켜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레는 조심스럽게 은자원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

그녀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라졌다.

모든 게 사라지고 없었다.

벽을 빼곡히 메운 서책도,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던 두루마리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각각의 영역을 상징하듯 존재감을 자랑하던 은자들의 책상도 엎어지고 쓰러져 이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심지어 셋 있던 책상도 둘만 남았다.

오라버니의 책상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듯 아수라장으로 변한 은자원을 보며 이레는 절망했다.

“아아!”

그녀가 바란 것은 이런 살풍경한 광경이 아니었다.

목 밑까지 뜨거운 물이 차오른 듯했다.

보이지 않는 손길에 숨통이 막힌 것처럼 갑갑했다.

대담하게 문중 회의에 뛰어든 것도, 간택에 나서겠다 했던 것도…….

죽을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과감한 계획을 시행하였던 것도…….

모두 이곳에 오기 위함이었다.

이곳에서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의 희망 때문이었다.

이곳 은자원에서 오라버니에 관한 작은 단서 하나라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실낱같은 가능성 하나만을 보고 이 험한 길을 달려왔는데.

이레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어이한단 말인가.

사라진 우리 오라버니,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이 허망함을 무슨 수로 채워야 한단 말인가.

입을 막은 두 손 사이로 끅끅 울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무정한 하늘은 그녀에게 마음 놓고 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저벅저벅.

문밖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발소리.

사람이다!

이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들키면 안 돼.

달아나야 해.

숨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출입문은 하나뿐이고, 휑뎅그렁한 은자원 어디에도 몸을 숨길 곳은 보이지 않았다.

저벅저벅저벅.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와 동시에 이레의 심장 또한 요란하게 날뛰었다.

제발, 모든 게 꿈이길.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길.

이대로 발소리가 다시 멀어지길.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은자원의 문은 삐그덕, 무정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야 말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너무도 놀라고 두려워 숨 쉬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거침없는 발소리가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그리고…….

발소리의 주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대는…….”

낯익은 목소리.

이레의 두 눈에 눈물이 샘솟듯 솟구쳤다.

생사를 건 긴긴 모험과 텅 빈 절망의 나락.

지독한 상실의 끝.

그 마지막 끝자락에서 드디어…….

“……만났다.”

내내 참은 숨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이 뚝 하고 끊어졌다.

서러운 눈물이 이레의 뺨을 타고 흘렀다.

소리 없이 우는 그녀의 맞은편.

놀란 표정의 형운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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