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초간택
“자네,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는 겐가?”
안채에서 무서운 호통이 터져 나왔다.
단전에서 치솟은 성화가 몸을 불덩이처럼 데웠다.
마음의 화기를 다스리지 못한 노마님은 닫힌 창문을 벌컥 열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게. 지금 무얼 어찌했다 하였는가?”
도저히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듯 노마님은 마른 입술을 연신 축였다.
내내 병석에 누워 있던 노인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아들을 보는 눈빛이 형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창칼처럼 날카롭게 찔러오는 어머니의 시선을 회피하며 김시묵이 대답했다.
“문중에서 결정한 일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아뢰어도 노마님의 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쾅!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걸까?
기대의 실종 이후, 숟가락 하나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나약해졌던 노마님이 거칠게 바닥을 내리쳤다.
“문중의 결정이 제아무리 무겁다 하여도, 어찌 그런 결정을 넙죽 받아들였단 말인가?”
“어머니…….”
“자네, 뭐하는 인사인가? 멀쩡하던 장남이 실종되어 생사조차 불분명하거늘. 이런 차에 간택이라니! 처녀 단자를 올리겠다니! 그게 어디 있을 법한 일인가 말일세.”
여름폭우처럼 아들에게 분노를 퍼붓던 노마님이 손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얌전스레 앉은 이레를 노마님은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내 일찍이 네게 무어라고 하였느냐.”
이레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애초에 대답을 원한 물음이 아닌지라.
파르르 경련하는 노마님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조용히 살라 하였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그리 살라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이르고 또 일렀다.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무얼 배워도 나서서는 아니 된다,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아는 녀석이! 아는 녀석이 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노마님의 목소리가 문밖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레는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았다.
괜한 변명은 할머니의 화만 돋울 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노마님의 성난 지청구가 이어졌다.
“허락 없이 별채 밖으로 걸음 하지 말라 했거늘. 네가 감히 내 말을 어기고 나가? 그리고 무얼 해? 감히 문중의 어른들이 중한 일을 논하는 자리에 함부로 끼어들었단 말이냐? 게가 어디라고! 감히 게가 어느 자리라고 네가 나섰단 말이냐?”
“…….”
“자리를 어지럽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간택에 넣어달라 요구를 하였어? 네가 미쳤구나.”
노마님은 연신 방바닥을 두드렸다.
“어찌 이리 어리석어? 어찌 이리 오만한 것이냐? 내가 그리 가르쳤느냐? 아니면 네 아비가 그리 시키더냐? 어찌하여 너만이 그리 별나게 구는 것이냐? 네게는 위아래도 없느냐? 집안의 법도 따윈 그리 쉬이 어겨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느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네가 이리 별난 짓을 벌인 연유가?”
“…….”
“이게 다 서책 때문이다.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고, 읽지 말아야 할 것을 읽어댔으니. 네가 이리 오만을 떠는 것이지. 네가 무어라도 되는 양 함부로 나서는 것이지.”
할머니의 어깃장에 이레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서책 때문이 아닙니다.
오만해서도, 법도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가슴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였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을 거듭하였는지, 할머니는 모를 것이다.
남 앞에 나서 본 적 없던 그녀가 문중의 서슬 퍼런 어른들 앞에서 제 뜻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가슴 떨리고 두려웠는지 할머니는 정녕 모른다.
인생을 건 모험이었다.
자칫하면 일평생 홀로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을 하는데 어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길 외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기에 선택한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먼저 상의하지 않은 것도 물러날 여지 자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에게 상의했으면, 문중 회의에 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으리라.
그러나 이런 속내를 입 밖으로 뱉을 순 없었다.
믿지도 않을 것이요, 믿는다 해도 구체적인 이유를 들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레의 아픈 속내는 까맣게 모른 채, 노마님의 일그러진 얼굴은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네 오라비가 사라져 집안이 이리 뒤숭숭하거늘. 이 와중에 간택에 나서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 영달을 위해서겠지. 저를 위해 그리 노력한 오라비는 안중에도 없고, 제 욕심만 채우려 드는 게 아니고 무엇일까?”
“어머니!”
내내 잠자코 있던 김시묵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노마님은 놀란 표정으로 아들을 돌아보았다.
“자, 자네 지금…….”
고개를 든 김시묵은 노마님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이레가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누구보다 생각이 깊은 아입니다. 저만 생각하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그러니…… 오라비도 잊은 파렴치한 아이로 몰아세우진 마십시오.”
강한 어조로 말을 마친 김시묵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용서를 구했다.
“자제심을 잃고 어머니께 언성을 높이고 말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
노마님의 눈두덩에 경련이 일었다.
당장에라도 뭔가 쏟아낼 기세던 그녀는 끝내 한마디도 뱉지 못하고 돌아앉았다.
“꼴도 보기 싫다. 모두 나가라.”
차가운 축객령.
김시묵의 눈짓을 받은 이레는 공손히 절하고 안채 밖으로 나갔다.
손녀가 사라진 후에도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을 향해 노마님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는 왜 아니 나가는가?”
성난 물음에 김시묵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데, 제가 어찌 이곳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제야 노마님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아들을 향해 돌아앉았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일을 벌인 겐가? 자네, 저 아이 태어날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새 잊은 겐가?”
어미의 물음에 김시묵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처럼 별난 일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시리도록 추운 겨울 끝자락이었지. 연일 내린 눈으로 옴짝달싹 못 하던 어느 날, 느닷없이 정원의 복숭아나무에 꽃이 피었다네. 한 송이도 아니고, 그곳만 다른 계절이 깃든 것처럼 꽃이 만발하였지.”
“집안에 큰 경사가 깃들 징조라며 다들 기뻐하였지요.”
“복숭아는 하늘 세계의 과일이라 하지 않았던가. 때마침 아이가 태어날 즈음 그런 조화가 있었으니, 그와 같은 길조를 누군들 반기지 않을까.”
“그날 이레가 세상으로 나왔지요.”
“그래. 이레가 태어났지. 사내가 아닌 계집아이가…….”
“그것이 그리 못마땅하셨습니까?”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 여인에게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닐세.”
“사내에게도 편편하기만 한 세상은 아니지요. 사내는 그 어깨에 집안을 얹고 평생 책임감에 짓눌려 살아야 합니다. 고달프고 평생 남과 비교당하는 삶이지요.”
“그래도 가진 재주라도 있으면 제 이름 석 자 앞세워 살아갈 만한 세상이기도 하지. 허나, 여인은 어떠한가? 사내의 등을 밀고 아이를 챙겨야 하고, 집 안팎의 모든 일을 돌보고 지켜야 하는 것이 여인의 삶이 아니던가.”
“…….”
“하는 일은 넘치도록 많건만. 아무리 해도 드러나지 않고, 드러나서도 아니 되네. 뛰어난 재능이 있으면 비난과 질시를 받기 일쑤일세. 게다가 세상 그 어떤 사내가 저보다 잘난 여인을 반기겠는가?”
“다 하늘이 내린 운명 아니겠습니까?”
“망할 놈의 운명. 태어나는 것도 운명이요, 죽는 것도 운명 탓이라면, 먼저 간 내 서방 잡아간 것도 그놈의 운명 탓이겠구먼.”
“어머니, 그러다 하늘이 진짜 노하겠습니다.”
“노하라 하게.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내 사람을 잡아갔으니 욕을 먹어도 싸지. 안 그런가?”
“허허허. 다 깊은 뜻이 있겠지요.”
아들의 너털웃음에 노마님은 고개를 저었다.
“내 나이 되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있어. 운명이란 녀석만큼 고약한 게 또 없단 말일세.”
“그리 고약합니까?”
“암, 고약하지. 하나, 큰 흐름은 벗어날 수 없어도, 작은 물결 정도는 빗겨갈 수 있으니……. 그렇게 하나둘 피해가고, 둘러가다 보면, 어쩌면 언젠가 앞을 가로막은 악연도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레가 간택에 참여하는 게 그리 마음에 걸리십니까?”
“책도 불사르고, 별채에 가둬도 한겨울에 피어난 복숭아 꽃 같은 그 아이의 운명은 도통 피할 수 없나 보이.”
“똑똑하고 현명한 아이입니다. 문중 어르신들 앞에서 간 크게도 간택에 필요한 준비를 해주십사 당당히 요구한 아이입니다.”
노마님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리 당차게 구니 더 걱정되는 게 아닌가. 대체 얼마나 억센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에 저 여린 아이를 매몰차게 내몰고 있는가 말일세.”
짙은 한숨을 뱉은 노마님은 다시 역정을 쏟아냈다.
“망할 놈. 기대 그놈은 대체 어딜 가서 안 오는 게야. 썩을 녀석아, 이 할미 속 그만 썩이고 돌아와라. 금이야, 옥이야 아낀 네 누이가 간택인지 뭔지로 궁으로 끌려가게 생겼다. 그 아이 배필은 네가 고르겠다 하지 않았느냐? 늦기 전에 와서 네 동생 어디 못 가게 발목에 족쇄라도 달아놓으란 말이다.”
노마님의 주름진 눈가에 끝내 진득한 물기가 서렸다.
***
달이 차오르고 이지러졌다.
아침과 저녁이 반복되었다.
어느덧 한 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쏘아 올린 화살처럼 눈 깜짝할 사이 초간택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레 아가씨.”
행랑 할멈의 부름에 이레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그저…… 아닐세.”
오늘 해야 할 일을 되새기고 있었다.
남들에겐 초간택일지 모르나, 이레에겐 그저 오라버니를 찾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끝났습니다요. 한번 보시지요.”
할멈이 이레의 앞에 면경을 바싹 들이댔다.
두 시진 전에 시작한 치장이 이제 막 끝이 난 참이다.
이레는 면경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고운 진주 가루 분을 바르고 동백기름으로 윤기를 낸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내렸다.
송화색 저고리에 초록 견마기, 그리고 다홍치마를 입고 한껏 치장한 제 모습이 낯설기만 하였다.
“곱습니다, 아가씨. 참말로 고와요.”
할멈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잔뜩 들뜬 노파는 이레의 자태를 살피고 또 살폈다.
“이리 어여쁜 모습을 기대 도련님도 보셔야 하는데…….”
무심코 기대 이야기를 입에 올린 행랑 할멈은 제풀에 놀라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 몹쓸 입을 보았나. 오늘 같은 날,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연신 눈치를 살피는 행랑 할멈을 향해 이레는 희미하게 미소를 건넸다.
그녀는 앞섶을 바르게 편 뒤 면경을 갈무리했다.
“왜요? 꽃단장하신 것도 처음인데. 더 보시지 그러셔요?”
“되었어. 그보다 내가 준비하라 한 건 어찌 되었어, 할멈.”
이레의 물음에 할멈이 주름진 눈을 슴벅거렸다.
“말씀하신 물품이랑은 이 늙은이가 진즉 챙겨두었지요. 그런데 정말 그런 옷까지 챙기실 겁니까요? 구태여…….”
“혹시 몰라 그런 것이야.”
물끄러미 이레를 응시하던 행랑 할멈이 그녀의 바로 곁으로 바싹 다가와 앉았다.
“아가씨.”
“왜?”
“궁에 꼭 가셔야겠어요?”
“갑자기 왜 그래?”
“아가씨께서 고집하시니, 애써 맞장구는 쳤지만. 이 늙은인 암만 생각해도 이게 아니다 싶어요.”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싫다 하시며 이 늙은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볼게요.”
“이미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형국이라,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있는 상황이야. 그리고 알다시피 이번 일은 내가 원해서 하게 된 일이고.”
“제가 미련했어요.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어떻게든 처녀 단자 올리는 걸 막았어야 했는데.”
할멈의 코끝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훔치는 노파의 손을 이레는 살포시 맞잡았다.
“걱정 마, 할멈. 나 잘할 수 있어.”
“어찌 걱정이 안 되겠어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제 품에 있던 아가씨가 아닙니까. 금이야, 옥이야 곱게 키운 우리 아가씨를 두 눈 멀쩡히 뜨고 사지로 내모는데.”
“누가 들으면 내가 죽으러 가는 줄 알겠다.”
“궁궐의 법도가 좀 엄해야지요.”
“어른들 이야기 들었잖아. 이미 세손빈 자리는 정해진 것이나 진배없다고. 난 그저 얼굴 한 번 비추고 오면 되는 일이야. 괜히 걱정하지 마.”
이레의 말에도 할멈의 입에서는 연신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좋은 날 어찌 한숨이야?”
“에고고, 이 주책을 봐.”
서둘러 눈가를 훔친 할멈은 방문 밖을 살폈다.
아직 밤이 깊게 내려앉은 마당엔 아무도 없었다.
“을시초(乙時初:오전 6시 30분)엔 외문(外門)인 통화문(通化門)을 통과해야 하니. 늦어도 반 시진 전에는 궁궐 앞에 도착해야 한다 하시더라고요.”
“응.”
간택인의 입궐은 저마다의 사주에 의해 결정되었다.
태어난 해와 시에 따라 각기 다른 시각에 사방 성문 중 한 곳을 통하여 입궐한다.
이레가 궐의 외문(外宮門)을 통과할 시간은 을시초(乙時初).
그런 이유로 그녀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치장을 하고 간택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야 했다.
그편이 더 나았다.
시간이 많다고 해서 제대로 잘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차라리 이렇게 일찍 움직이는 것이 더 마음 편했다.
목을 길게 빼내고 문밖을 살피던 행랑 할멈이 안달했다.
“가마꾼들이 어째 이리 늦을까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어째 나보다 할멈이 더 긴장하는 것 같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쇤네가 대문 밖 좀 살피고 오겠습니다요.”
할멈은 종종걸음으로 별채 밖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홀로 남은 이레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평 남짓한 방 안 풍경이 들어왔다.
다른 이들에겐 허름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레에겐 한없이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 어디보다 아늑한 곳.
더럭 겁이 났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깟 초간택이 무어라고 이리 긴장할까.
고작 궁에 들어가 몇 가지 묻는 말에 대답하고, 하룻밤 자고 오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이레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칫 큰 사달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 피해가 오롯이 저 하나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이레는 모든 과정을 각인하듯 수없이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럼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하는 생각에 집안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따로 서찰도 준비해 두었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집안에 몰아닥칠 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니 실패해선 안 된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바늘로 찌르는 듯, 가슴에 쿡쿡 격통이 느껴졌다.
쿵쿵 울리는 심장의 고동이 머릿속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좀처럼 불안이 사라지지 않자,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문방사우(文房四友).
붓, 벼루, 먹, 종이, 그리고 할아버지가 즐겨 쓰시던 연적.
서탁과 뗄 수 없는 다섯 가지 물품이 이레를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옷소매를 접은 이레는 연적의 물을 벼루에 부었다.
먹을 수직으로 들고 조심스럽게 벼루에 갈았다.
사각, 사각, 사각.
벼루에 담긴 투명한 물이 먹이 일으킨 탁류와 어지럽게 뒤엉켰다.
한 바퀴 두 바퀴…….
돌을 깎아내듯, 차분하게 먹을 풀어내자 어느새 투명한 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얼굴마저 비칠 윤기 나는 검은 연못으로 탈바꿈하였다.
지루한 인내의 과정을 마친 이레는 붓을 들었다.
붓에 먹을 먹인다.
하얗게 말라있던 붓이 허겁지겁 먹을 삼켰다.
이레는 배부른 붓을 들어 종이 위에 글을 풀어냈다.
그 과정이 쉽지 않기에, 붓으로 펼쳐내는 글 또한 허투루 쓸 수 없다.
일 점, 일 획.
찍고, 훑고, 때로는 할퀴고 떨쳐내는 문장은 글이되, 그림이었으며 쓴이의 마음이 담긴 인생이었다.
-오늘 궁으로 향합니다. 어쩌면 다시 뵈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들께서 주신 은혜일랑은 제 가슴에 고이 담겨있습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다시 뵈올 때까지 몸 건강히 계세요.
짧은 작별 인사를 마치고, 붓을 내려놓았다.
고작 몇 줄에 불과한 글인데, 불안한 마음이 저만치 달아났다.
동시에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할멈한테 뭐라 할 게 아니었어.”
주책 맞긴 저도 매한가지였다.
이 어인 눈물일까.
때마침 문밖에서 가마가 도착했다는 호들갑스런 행랑 할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가네.”
소매로 눈물을 지운 이레는 걸음을 서둘렀다.
***
이른 새벽.
이레는 궁으로 향하는 가마에 올랐다.
하늘 먼 끝에서 푸르게 날이 밝아왔다.
해가 뜨지 않았으니 아침도 아니고, 어둡긴 하나 밤도 아닌 시각.
달도 없었고 달무리는 더더욱 보이지 않았으며 해일처럼 밀려들던 밤안개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르르.
서탁 위에 쓰여 있던 이레의 글이 사라졌다.
하지만 별채를 떠난 이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저하.”
문밖에서 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세 번째.
하지만 형운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글을 읽고 책장을 넘기는 단조로운 동작만 반복할 뿐.
그가 고개를 든 것은 서책의 마지막 장까지 넘긴 후였다.
“무슨 일인가?”
모시는 분의 성정이야 뉘보다 잘 아는 최 내관이 아니던가.
그나마 빨리 끝났다 안도하며 그는 말을 꺼냈다.
“일 식경 전, 다섯 번째 가마가 외궐문(外闕文)을 통과하였다 하옵니다.”
간택에 참여하는 여인들이 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평생의 배필을 정하는 첫 번째 날.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형운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 그날이었군.”
무덤덤하게 예사로이 넘기는 세손의 반응에 최 내관은 애먼 제 가슴만 쳐댔다.
“지금 궁 안팎이 간택인 맞을 준비로 들떠 있사옵니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세손의 물음이 돌아왔다.
“몇 명이나 단자를 올렸다더냐?”
“한성부에서 스무 장, 그 외 감영에서 열 장의 단자가 올라왔나이다.”
“용케 서른 장이나 올라왔구나.”
“뉘라서 빈궁전의 주인 되기를 주저할까요.”
이제 관심을 보이실까 기대하였지만, 그 후로 다시 무거운 침묵만이 이어질 뿐이다.
성마름에 최 내관은 다시 목을 가다듬고 열심히 초간택 상황을 전했다.
“새벽닭이 울기 전부터 지금까지 이미 다섯 분이나 입궐하였사옵니다. 그분들의 미모가 가히 날던 기러기가 넋을 잃고, 달과 꽃이 부끄러워할 지경이라 하옵니다.”
말을 마친 최 내관은 방안의 동정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혹시, 관심을 보이실까?
그러나 역시 돌아오는 건 침묵이요, 들리는 건 책장 넘기는 소리뿐.
최 내관은 방문을 향해 가늘고 길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리하면 관심 둘까, 저리 하면 귀 기울이실까.
있는 말, 없는 표현 죄 가져다 붙이며 최 내관은 세손의 관심을 끌어보려 노력했다.
“처음 입궐한 분은 영의정 댁 아가씨라 합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워 활짝 핀 붉은 꽃 같다 하옵니다. 두 번째로 입궐하신 분은 대사헌의 귀한 외동이신데, 부드럽고 선한 인상이 청초한 난초와 같다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입궐하신 분은 경기관찰사댁 아가씨인데, 연못에 핀 수련 같고 아스라한 봄 연못의 연(蓮) 같기도 하여 신비한…….”
그때였다.
드르륵.
굳게 닫힌 방문이 활짝 열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목에 보인 반응인지라.
최 내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내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형운이 최 내관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지금 누구라 하였느냐?”
“네?”
“어느 가문의 누가 입궐하였다고?”
***
이레가 탄 가마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을시초 통화문에 도착했다.
가마꾼들이 가마를 내려놓자, 상궁이 가마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경기관찰사, 김 아모개의 여식이 맞습니까?”
이레의 간택 참여가 결정된 이후, 아버지 김시묵은 돌연 경기관찰사 자리로 임명되었다.
간택에 참여한 여식의 집안이 허술해선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문중의 판단으로 내려진 조치였다.
어떤 과정으로 어떤 입김이 작용하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내 변방을 맴돌던 김시묵이 한 걸음 성큼 중앙 정계로 발을 내디딘 것만은 사실이었다.
관리의 미덕은 모름지기 청렴과 결백이며, 백성을 아끼고 성실하여야 한다 배웠건만. 현실은 지금껏 서책으로 배우고 익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가마 밖에서 상궁의 물음이 다시 들려왔다.
“김 아모개의 여식이 맞습니까?”
이레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가마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이레가 허락하자, 상궁이 가마 문을 열었다.
“여기서부터는 가마를 타고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이레는 행랑 할멈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근엄한 표정의 상궁과 그녀가 부리는 열 명의 궁녀들이 기러기 날개처럼 좌우로 서 있었다.
상궁은 이레 곁에 선 두 여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함께 온 일행입니까?”
상궁의 물음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유모고 이쪽은 수모로 따라왔습니다.”
수모는 문중에서 가마와 함께 보낸 중년 여인이었다.
눈이 가늘고 입술이 얇고 끝이 쳐져 신경질적인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내궁까지 동행할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입니다.”
그 말에 수모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행랑 할멈이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요. 가려면 내가 따라가야지. 그쪽이 우리 아가씨에 대해 뭘 안다고.”
“할멈.”
이레가 서둘러 할멈을 말렸다.
수모는 문중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문중의 돈으로 옷을 짓고, 가마를 빌리고, 사람까지 얻었으니 이 정도 비위는 맞춰주는 게 예의였다.
“여기서 기다려, 할멈.”
“하지만…….”
행랑 할멈은 떨어질 수 없다며 체머리를 흔들었지만, 이레의 처연한 미소에 하는 수 없이 잡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유모는 따로 마련한 숙소가 있으니 그곳에서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짧게 말을 마친 상궁은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이레가 앞으로 걸음을 떼자 상궁이 곁에 서고 궁녀들이 꼬막 연의 꼬리처럼 줄을 이었다.
그렇게 이레는 하늘의 율법과 땅의 이치에 따라, 정해진 시각에 허락된 문을 차례로 통과하였다.
그렇게 얼마 후.
상궁은 이레를 숭덕문(崇德門) 안쪽, 중희당(重熙堂) 인근에 위치한 행방으로 안내했다.
“선보이기는 점심 진지를 물린 후에 시작될 예정입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요기하실 간단한 다담상을 준비하겠습니다.”
간택에 참여한 여인들을 궁은 그야말로 극진히 대접했다.
희고 곱게 치장한 방(粉壁紗窓)엔 붉은 자개장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위에 면경을 비롯한 간택인의 꾸밈에 필요한 화장 도구들이 간잔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그 외에도 여인들이라면 신기해할 것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레는 자개장이나 그 밖의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갑갑하군요.”
이레는 창을 열고 닫힌 문도 비스듬히 열었다.
그리고 어느 때엔 창가를 서성거렸고, 다른 때엔 문 앞에 선 채 밖을 내다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어수선한 모습을 보다 못한 듯 수모가 나섰다.
“그리 불안해할 것 없습니다. 몇 가지 시험이 있을 것이나 의례적인 절차일 뿐. 아가씨는 그저 머릿수만 채우고 돌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이레는 창밖에 시선을 던진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 그렇겠지요.”
그 순순한 대답에 수모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아가씨가 간택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니, 무에 큰 기대라도 하는 모양이구나.
그녀는 이레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번 간택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문중 회의에 뛰어들어 스스로 간택에 참여하겠다 말하다니.
여인치곤 대단한 배짱이라 생각했다.
또한, 어리석다 느꼈다.
세손의 옆자리를 구하는 자리.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능력이 있다 하여 함부로 탐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세손빈이 어떤 자리인가.
수많은 이해(利害)와 득실(得失), 그리고 명분과 미래가 더해지고 빼져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던가.
가문의 위상은 물론, 사주와 관상, 역술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짚고 헤아릴 뿐 아니라 왕실과의 정치적 관계까지 철저하게 계산된다.
그러기에 제아무리 인물 좋고, 사주와 관상이 훌륭해도, 정작 비씨(妃氏)는 권력자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런 것을 귀동냥이나마 들어 아는 수모로써는 스스로 간택에 나서겠다 한 이레가 그저 미련한 숙맥으로만 보였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레를 힐끗거리던 수모는 끝내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입에 올리고 말았다.
“비씨는 진즉 영상대감 댁 큰 아가씨로 낙점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말을 내뱉는 순간, 수모는 후회했다.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절망하고 슬퍼하겠구나.
염원이 컸을 터인데.
행여 울기라도 하면 어쩌나?
가벼운 입놀림에 귀찮은 일 하나 더 늘었구나, 생각하는 찰나.
그녀의 생각과 달리 이레의 반응은 뜻밖에 무덤덤했다.
“그렇군요.”
울기는커녕 실망한 기색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수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섭섭할 것이 무업니까.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닌 것을요.”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라도 보고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그럼 왜……?”
세손빈이 될 욕심이 아니라면, 무슨 생각으로 굳이 이런 자리까지 자청하고 나선 걸까?
수모의 의문을 알 리 없는 이레는 입을 굳게 닫은 채 행방 밖에만 관심을 두었다.
딱히 시선을 끌 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이레는 요지부동의 자세로 앉아 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것이라곤 그저…….
“쉰하나, 쉰둘, 쉰셋, 쉰넷, 쉰다섯…….”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수를 헤아리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