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2화 (12/215)

#12. 제가 가겠습니다.

여름을 알리는 장마가 시작되었다.

바람이 짐승처럼 사납게 울었다.

세차게 뿌려진 빗방울이 연신 사창(紗窓)을 두드렸다.

불 꺼진 방.

구석에 동그마니 쪼그려 앉은 이레는 초점 잃은 눈으로 닫힌 창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 후에 돌아오마 약조한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

장남의 실종으로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오라비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문중의 어른들을 찾아뵙고, 갖은 연줄을 이용해 높은 관직의 관원들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달포가 지나도록 기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할머니는 몸져누우셨다.

연일 탕약 달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 사이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

전향사 소속의 종 9품 관원, 김기대.

그 누구도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은자원에 관해 물어도 아는 이 없고, 그에게 일을 시킨 사람도, 함께 일하였다는 동료도 없었다.

수군대는 소문이 돌고 돌아 어느덧 기대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일도 하지 않고 온종일 숨어지내더란 말부터, 처음부터 명부에 이름만 오른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소속은 분명한데, 정작 그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불편하고 불쾌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이 일을 수상히 여긴 예조에서 어사대에 의뢰하여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까지 새어나왔다.

뒤늦게 소문을 접한 이레는 황망하여 탄식조차 뱉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도 바쁘게 뛰어다닌 오라비가 아닌가.

사흘이 멀다 하고 먼 길 떠난 사람이 아닌가.

은자원에 간 이후로 집에 온 날을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시전에 나가서도 남의 심부름으로 물건을 몰래 주고받았을 정도였다.

그리 힘들게 살면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던 오라비가 아니던가.

소문처럼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부패한 사람은 더더욱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이레를 실망하게 한 일은 따로 있었다.

어사대가 전면에 나서 김기대를 파헤치자, 문중에서 슬그머니 발을 빼기 시작했다.

도와주겠다 한 관원들과도 연락이 끊어지고, 되레 위험한 일에 연루하게 하였다고 원망하고 질책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아버지마저도 속병을 앓을 지경이었다.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졌으니, 더는 실종된 김기대를 추적하는 일도 불가능하게 된 셈이다.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못한 사람은 오직 이레뿐이었다.

하지만 이레는 무기력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안달하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모두가 포기한다 해도 자신만은 오라비를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어느새 어둡던 창이 푸르게 밝아왔다.

먹구름 가득하고 비바람 몰아쳐도 어김없이 아침은 돌아온다.

생기 잃은 꽃처럼 허물어졌던 이레는 몸을 일으켰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설사, 그것이 부질없는 짓이라 해도.

* * *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감정 없는 군졸의 목소리가 이레의 앞을 막아섰다.

파루가 치기 무섭게 이레는 궁궐 앞으로 달려갔다.

은자원에 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오라비가 사라진 직후 궁문을 지키던 수문장은 물론이고 군졸마저 죄 바뀌었다.

기대가 있었을 땐 내 집 대문 드나들듯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궁궐이 지금은 철옹성이라도 된 듯 엄격히 통제되었다.

이레는 바뀐 수문장과 군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애원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은자원에 대해 아는 이도 없었다.

간혹 마음 약한 군졸이 마지못해 궁 안으로 들어가 수소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건 단호한 고갯짓이 전부였다.

“하루이틀 이러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작심으로 이러는 겁니까? 우릴 괴롭히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러십니까? 이 새벽부터 있지도 않은 사람을 찾고 존재하지도 않는 관청에 가야 한다고 난리 치는 연유가 대체 뭡니까?”

이레를 대하는 군졸의 얼굴에 짜증이 역력했다.

여러 날 이어진 장맛비에 몸도 마음도 눅눅하던 참이다.

아침부터 찾아와 생떼 아닌 생떼를 쓰는 이레가 영 귀찮고 성가셨다.

“괴롭히려 그러는 게 아닙니다. 실종된 사람을 찾고 싶을 뿐입니다. 잠시면 됩니다. 정 방법이 없다면 저와 함께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포승줄로 팔을 묶어도 좋습니다. 들어가게만 해주세요. 그럼 보여드리겠습니다. 은자원이 어떤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거참, 말이 되는 소릴 하십시오. 일평생 궁에서 산 상궁들도 모르는 전각을 아가씨가 어찌 안다고 그런 말씀입니까?”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라 들었습니다. 그러니 다들 모르는 겁니다.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곳입니다. 제가 갔었으니까요. 달포 전까지 제가 그곳에서 제 오라비를 기다리고 만났습니다.”

“이 아가씨, 참말 사람 잡을 소리만 골라 하십니다. 뉘라서 감히 허락받지 않은 이를 궁으로 들인단 말입니까? 행여 잠꼬대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만 돌아가세요. 고고한 양반댁 아가씨가 어쩌다 이리되셨는지 알 길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엄한 사람 괴롭히는 일은 이 정도만 하십시오.”

질린 표정을 한 군졸은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이레의 눈앞에서 나무문이 굳게 닫혔다.

그러나 그녀는 한참이나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 * *

-제가 신기루를 본 것이었을까요?

열흘째 이어지던 빗줄기가 잦아들고 드디어 반쯤 부풀어 오른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서탁을 마주한 이레의 턱 끝으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지금껏 제가 만나고, 제가 겪은 일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끅,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르며 이레는 붓을 움직였다.

-오라버니께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곧 화, 상, 예.

세 할아버지의 글이 나타났다.

-오랜만이구나. 반갑다 인사하려 하였는데,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게냐?

-오라비?

-심히 슬퍼 보이는구나. 우선 진정하여라. 찬찬히 그간의 일을 말해 주려무나.

할아버지들의 글을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하지만 오라비를 잃은 슬픔이 더 컸다.

-제 오라비가 사라졌습니다.

이레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사흘이면 돌아오겠다던 오라비가 오지 않은 것과 궁 안팎의 소문.

무엇보다 은자원에 들어갈 수 없어 애타는 마음을 구구절절하게 전했다.

화가 물었다.

-은자원. 처음 듣는 곳이로다. 분명 전향사의 하부조직이라 하였느냐?

-네. 다만, 은자원이라는 이름은 제 오라비가 제멋대로 지은 것일 뿐. 실제로는 이름도 없는 곳입니다.

-한데, 그곳에 왜 가려느냐?

-오라비의 동료분들이 그곳에 계십니다. 그분들이라면 오라버니께서 어딜 가셨는지 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번엔 상이 물었다.

-만약, 그들조차 모른다면?

-오라버니께선 자신의 일과를 항상 어딘가에 적어놓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을 생각입니다.

-무모하구나. 들어갈 방법도 없거니와 설사 들어간다 한들, 원하는 걸 얻는다는 장담도 없지 않으냐?

이레의 턱 아래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알고 있다.

궁으로 들어갈 방도는 없다.

설사, 들어간다 한들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등을 돌려도 이레는 그럴 수 없었다.

허망할지언정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그때였다.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나타났다.

스스로를 왕이라 칭한 네 번째 할아버지.

이레가 악(樂)이라 이름 지은 할아버지였다.

-지금 네 상황을 보면 딱 하나…… 말도 안 되는 방법이 있긴 한데.

* * *

본가의 거대한 솟을대문을 앞에 두고 김시묵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문중회의가 열렸다는 기별을 받았을 때 김시묵의 뇌리로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들, 기대의 실종 이후 문중에서 보인 반응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안타깝게 여기며 기꺼이 도와주겠다 약조한 말과 달리, 정작 하는 일은 미적지근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한 가문.

한 핏줄.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정작 필요한 일엔 슬그머니 발을 빼고 모른척하였다.

혹여 잔 불똥이라도 튈까 두려워했다.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그래도 그는 작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청지기의 안내로 한성판윤 김덕진이 있는 사랑채로 걸음 하는 동안 김시묵은 쪼그라들었던 희망을 다시 부풀렸다.

아들의 일 때문인지, 그의 등 뒤로 호기심 섞인 눈빛과 함께 쑥덕거림이 달라붙었다.

문중의 일에서 언제나 변방을 떠도는 입장인지라,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 더더욱 기대가 부풀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섯 칸, 한성판윤의 긴 장방형의 큰 사랑방은 사잇문을 모두 걷어 올린 모습이었다.

열두 폭 백납병풍을 등 뒤로 두른 채 보료에 앉은 김 판윤과 서(序)와 열(列)에 맞춰 양쪽으로 마주 앉아있는 문중 사내들이 방으로 들어서는 김시묵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김시묵은 김 판윤에게 예를 갖췄다.

말없이 수염을 쓸어내리던 김 판윤은 시묵이 자리에 앉자 입을 열었다.

“오늘 이리 부른 것은…….”

김시묵은 문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김덕진의 입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한성판윤의 목소리가 좌중에 울려 퍼졌다.

“오늘 대전에서 참으로 망극한 일이 일어났지 뭔가.”

김 판윤은 기대의 이야기가 아닌 궁궐의 이야기를 꺼냈다.

숨죽인 채 기다린 시묵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의문이 들었다.

기대의 일이 아니라면 굳이 날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같은 노론이되 노론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

워낙에 융통성 없이 청렴결백한 김시묵을 문중 사람들은 고깝게 여겼다. 그러기에 문중의 대소사에 언제나 제외되었던 그가 아니던가.

의문이 채 꺼지기 전, 판윤 대감의 침통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손빈 간택령이 내려진 지 석 달이 지났건만. 한성부에서 올린 단자는 고작 열 장에 그쳤고 그 외 감영에서 올린 단자의 수까지 합치면 고작 열세 장에 불과하다 하네.”

“어허, 이 어이 망극한 일이…….”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왔다.

“전하께서 매우 노하셨다네. 성심을 흡족하게 하지 못한 불충, 어이 씻을까 고민하던 차에 우리 문중에서도 단자를 올리는 것이 신하 된 도리가 아닐까 판단하였다네.”

김덕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장 가까운데 앉은 병조좌랑 김수오가 맞장구를 쳤다.

“판윤 대감의 말씀이 백번 천번 옳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사헌부 장령 원경무가 안타까운 얼굴로 바닥을 내리쳤다.

“마음 같아서는 저라도 단자를 올려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해 정성을 보태고 싶습니다. 하오나, 여식의 나이 이제 겨우 여섯. 아직 제 앞가림조차 변변찮으니. 이 어찌 원통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외까.”

김수오 역시 안타까운 기색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저 역시 마찬가지이옵니다. 혼인하지 않은 딸자식이 있다면 지체 않고 간택에 참여하게 하였을 것을요.”

“누가 아니랍니까.”

“내리 아들놈만 셋이니…….”

김덕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럼 어찌한다? 어떻게든 우리 문중에서도 처녀 단자를 올려야 하거늘.”

모두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간택이라는 것이 문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시 없을 광영이며, 정권의 중심으로 다가갈 절호의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정작 간택에 참여하는 당사자와 그 집안의 입장에서는 외줄 하나 믿고 천 길 낭떠러지를 오르는 일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험이었다.

우선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에 이르기까지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나마 초간택에 떨어지면 큰일은 없으나, 재간택과 삼간택에서 떨어지면 영락없이 평생 홀로 사는 길을 택해야 했다.

어디 그뿐일까?

행여 삼간택에 낙점되어 비씨(妃氏)가 되어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으니.

궁의 질서와 법도는 지극히 엄격하니, 살얼음판을 걷듯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야망을 품지 않고서야 선뜻 여식을 내놓겠다 자청하는 이가 없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역시 눈치를 살피며 서로 미루고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흠흠.”

판윤 김덕진의 입에서 기어이 못마땅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야살스럽게 눈치를 살피던 김수오가 문득 맨 끝자리에 앉은 김시묵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 댁은 어떠시오?”

의중을 은근히 떠보는 김수오를 향해 김시묵은 무감한 시선을 보냈다.

“그게 무슨 말이시오?”

“혼기 꽉 찬 아이가 하나 있다 들었소만.”

“…….”

“듣자하니 그 아이, 어릴 적부터 마음 씀씀이가 넉넉하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리지 않고 매사 가엾고 인자하게 바라보니. 그야말로 간택에 참여할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소?”

눈앞이 캄캄하였다.

이러려고 부른 것이었구나.

저들은 애초에 내 아들의 실종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김시묵의 눈동자에 분노가 깃들었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나, 내 여식은 그만한 그릇이 못 되오.”

“무슨 말인가?”

김덕진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자네에게 마땅한 여식이 있다는 말인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능청을 떠는 김덕진을 보며 김시묵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약하게 걸려들었다.

그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등을 꼿꼿이 세웠다.

“마침 혼기 찬 여식이 있긴 합니다. 하오나 대감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자식놈의 행적이 묘연하여 집안이 뒤숭숭하니, 여식의 단자를 올릴만한 여력이 되질 않습니다.”

꺼두르는 대로 함부로 휘둘리는 건 나 하나로 족하리라.

자식들에게마저 그 비참한 노릇을 대물림할 수 없었다.

김시묵은 전에 없이 단호했다.

예상외의 거절에 김수오가 당황하며 김덕진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한성판윤은 노한 기색으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바로 그때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방 문밖에서 낭창낭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게 누구냐?”

김덕진의 물음에 청지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구합니다. 들어갈 수없다 하였는데도 막무가내인지라…….”

“누구라더냐?”

“전(前) 전라감영댁 아가씨라 하였습니다.”

“이 목소리는…… 이레냐?”

김시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아버님. 소녀 이레입니다. 긴히 청할 일 있어 감히, 무례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문중의 중요한 일을 논하고 있거늘. 어느 자리라고 네가 끼어든단 말이냐. 썩 물러가거라.”

“잠깐.”

김덕진이 손을 들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무언가 급한 사정이 있는 것 같군. 나는 개의치 않으니 한 번 들어나 보는 게 어떻겠소.”

“하오나…….”

김덕진은 시묵의 말을 무시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가씨를 안으로 뫼셔라.”

곧, 문이 열리고 미태 고운 여인이 들어왔다.

이레였다.

이레는 고운 자태로 한성판윤에게 인사 올리고 차분한 신색으로 그의 앞에 앉았다.

김덕진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참하구나. 이름이 무어라 하였느냐?”

“이레라 합니다.”

“그래, 내 이곳에서 듣자하니 네가 뭔가를 하겠다고 자청한 듯싶은데. 내가 옳게 들었느냐?”

이레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처녀 단자 일로 문중이 어지럽다 들었습니다. 제가 하면 아니 될는지요.”

“아니 된다!”

김시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격노한 얼굴로 이레를 가리켰다.

“처녀 단자를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네가 제대로 알기나 하느냐. 간택령이 가당키나 한 소리냔 말이다.”

사납게 호통친 김시묵은 서둘러 이레의 팔을 끌었다.

“돌아가라. 문중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어른들의 귀를 소란케 한 죄, 엄히 벌하겠다.”

“이보시게.”

이번에도 김덕진이었다.

그는 축 늘어진 눈꼬리를 가늘게 여미며 달래듯, 부탁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내 자네 집안에 생긴 불상사를 알고 있어, 뜻이 있어도 참고 있었네.”

“대감.”

“허나, 저 아이의 마음이 오죽 확고하였으면 이 어려운 자리에 나올 결심까지 하였겠는가.”

“이 아이가 미처 몰라 저지른 실수입니다. 간택이라뇨. 이 아이는 그 큰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허허. 내 반백 넘게 살며 숱한 자들을 보았지. 사기꾼에 도적 같은 자들. 겉으로는 성인군자인 척 행세하나 속으로는 음험한 안셈을 하는 자들을 수도 없이 봤다네.”

“…….”

“그러나 그 아이는 다르군. 눈빛이 굳세고, 거침없이 뱉는 말에 잔꾀도 허영도 어리석음도 보이지 않으니, 어찌 간택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 하겠는가?”

“그러나…….”

“어허.”

김덕진은 목소리를 나직하게 낮췄다.

“설마, 지금 내 눈이 틀렸다 말하는 겐가?”

슬며시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하는 양이 더는 설득으로 비치지 않았다.

그 눈에 비친 싯누런 욕심을 느낀 김시묵은 이를 악물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레를 간택에 앞장세울 작정이었다.

처음엔 권하고 부탁하여도 결국엔 온갖 협박과 협작으로 굴복하게 할 생각이었겠지.

참담했다.

평생 청렴하고 남 앞에 부끄럼 없이 살면 충분하다 여겼거늘.

권력을 등에 업고 잘난척하는 사람 앞에서도 그저 허허 웃고 말면 된다 생각하였거늘.

힘이 없음이…….

권세가 없음이…….

이토록 비통한 것인 줄 미처 몰랐다.

김시묵은 복잡한 심경으로 여식을 바라보았다.

“정녕…… 그리 해야겠느냐? 네 처녀 단자를 올려야만 하겠느냐?”

윽박지르는 목소리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조용한 물음은 그 어떤 위협보다도 더 강하게 이레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레는 이를 악물었다.

이 방법뿐이다.

오라버니를 찾으려면 오직 이 길뿐이라는 것을.

허물어지려는 결심을 간신히 다잡은 이레가 아버지를 응시했다.

“네, 아버님. 정녕 그리하고 싶습니다.”

이레의 핏발 선 눈을 확인한 김시묵은 말없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더는 말리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김덕진이 물었다.

“누구 저 아이의 처녀 단자 올리는 것을 반대할 사람 있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되지 못할 버리는 패.

억지를 부려서라도 맡길 생각이었으니, 반대할 리 만무했다.

“허허허. 그럼, 저 아이로 결정된 것이오.”

김덕진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의지 굳건한 아이가 나타나 쉽게 해결되었소. 이 또한 주상전하의 복이요, 조상께서 우리 문중을 돌보심이 아니겠소.”

공치사를 늘어놓은 김덕진은 굳은 표정의 김시묵을 보며 말했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네.”

그때, 잠자코 앉은 이레가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김덕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이냐?”

“간택에 참여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아무렴, 그러하지.”

“제 오라비의 행방 묘연하여 집안이 심히 어수선합니다. 그 준비를 대신 부탁하고 싶습니다.”

“허.”

김덕진의 입에서 헛바람소리가 새어나왔다.

스스로 단자를 올리겠다 하여 가상타 여겼거늘.

이젠 조건까지 붙여?

감히 나와 거래를 하겠단 심산 아닌가.

“당돌하구나.”

김덕진은 상체를 숙여 이레를 노려보았다.

이레는 그저 묵묵히 앉아있었다.

공경은 표하나, 반듯한 자세 어디에도 흔들림은 보이지 않았다.

물끄러미 이레를 바라보던 김덕진은 자세를 풀고 장침(長枕)에 팔을 기대었다.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이 고목처럼 늘어졌다.

“좋다. 문중을 생각하는 네 고운 마음을 갸륵히 여겨 내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이레가 고개를 숙였다.

오라비 기대가 사라진 지 한 달하고도 아흐레.

이레는 자진하여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