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봄날의 꿈(春夢)
형운과 헤어진 이레는 곧장 집을 향해 걸었다.
“그나저나 오라버닌 대체 어딜 가신 걸까?”
깜빡 잊은 일이 있다며 사라진 오라버니는 한참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날 찾느냐?”
“오라버니.”
대답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등 굽은 소나무 아래 쪼그려 앉은 기대의 모습이 보였다.
“예서 뭐 하십니까?”
“이 녀석이 하도 외로워 보여, 말동무라도 되어 주려고.”
기대는 베넷 털 탐스러운 어린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많이 취하셨습니다.”
“취하긴. 하나도 안 취했다.”
기대는 보란 듯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비틀거리는 걸음은 큰 갈지(之)자를 그렸다.
“그러다 넘어지시겠습니다.”
이레가 휘청거리는 기대의 팔을 꿰찼다.
“녀석.”
부축하는 이레가 싫지 않은 듯 기대는 누이의 어깨에 의지했다.
“이레야.”
“네.”
“너 기억하느냐?”
“무얼 말입니까?”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 말이다.”
“제가 몇 살 때인지 아시고 하시는 말입니까?”
“내 나이 다섯이었으니, 넌 두 살이었겠구나.”
“고작 두 살 때 일을 어찌 기억하겠습니까?”
“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단다.”
곧 넋두리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은 날이었단다. 난 저 소나무 아래에 서 있었지. 사박사박 발소리를 내며 널 품에 안은 어머니가 날 향해 걸어왔단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난 그때 그분이 몹시 미웠단다. 내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 온기 채 식기도 전에 빈자리 메우러 오신 분이었지. 철없는 나이에도 그게 몹시도 슬프고 아팠더랬다.”
“그러신 분이 지금은 어머니께 어찌 그리 잘하십니까?”
이레의 물음에 기대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널 보았거든.”
“…….”
“눈처럼 뽀얗고 하얀 얼굴이었다. 추웠던지 볼이 빨갛게 얼어 있더구나. 어머니 손 꼭 잡고 입김 흘리며 아장아장 걸어오는 모습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단다. 어미 잃은 상실감도, 아비에 대한 분노도, 그리고 계모를 향한 미움마저도 거짓말처럼 지워지더구나.”
“그랬습니까?”
이레는 말간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전 아무 기억 없습니다. 그저 툭하면 자주 넘어지곤 하였던 것밖엔.”
생각났다는 듯 기대가 맞장구쳤다.
“그래, 그랬지. 두어 발짝 걷다 풀썩풀썩 넘어지곤 하였지. 울기는 어찌나 그리 잘 울던지. 그날도 그랬단다. 위태롭게 걷던 네가 그만 제풀에 넘어지고 말았단다. 그때 나도 모르게 뛰어가 너를 부축해 주었는데.”
“이젠 제가 부축하고 있습니다.”
“신세 갚으려면 아직 멀었다. 너, 일곱 살 때의 일은 기억하느냐?”
“산에서 길 잃고 헤맸던 일 말이지요?”
“그때 너 어찌 되는 줄 알고 이 오라비, 맨발로 온 산을 헤집고 다녔더랬지.”
“바위 아래 엎드려 울던 절 발견하여 등에 업고 내려오셨지요. 그날 할머니께 정말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났습니다. 오라버니 맨발인 줄도 모르고 업혔었다고.”
“하하. 나도 그땐 워낙 경황이 없어 신이 벗겨진 줄도 몰랐단다.”
훌훌 웃어내는 그를 보자니 이레의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오라버니 아니었으면 저는 참 못난 아이로 자랐을 겁니다. 오라버니가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한 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이레에게 있어 아버지의 집은 언제나 낯설고 삭막한 장소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오라비 기대가 없었다면 노랗게 말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
“소녀가 어리석어 이제 간신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구나. 잊지 말거라. 내 널 위해 얼마나 동분서주하며 애간장을 태웠는지 꼭 기억해 두어라. 하여, 나중에 이 오라비 늙고 병들어 수저 들 기력 없을 때, 잊지 말고 되갚아야 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기대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한번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네가 아니더냐. 너라면 그 약속 꼭 지키겠지.”
기대의 웃음이 그치길 기다린 이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
“왜?”
“오늘 일도 그래서였습니까?”
“오늘 일?”
“평소 데면데면하던 서우가 그네뛰기 하자며 조를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하였습니다. 홍 대감댁 문 앞에서 거절당하고 돌아오는데,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오라버니께서 나타나셨지요. 옷차림도 요란한 낯선 여인과 함께 말입니다. 말만 안 했지, 따라오라 대놓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눈치채고 있었구나.”
이레는 대답 대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머쓱해진 기대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뚱거렸다.
“그리 알았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느냐? 중간에 네가 사라져 그냥 간 줄 알고 내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느냐?”
“같은 곳을 계속 오간 게 그래서였습니까?”
“너라면 어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였지. 다행히 내 짐작이 옳더구나. 나중에 다시 나타났으니 말이다.”
“왜 그러셨습니까?”
“왜 그랬을 것 같으냐? 너라면 이미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이레가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날 일은 사고라 하지 않았습니까?”
은자원에서 형운과 책장 아래 깔린 일이 있었다.
오라버니가 벌인 엉뚱한 소동은 분명 그 일과 관련 있으리라.
“어허, 그 꼴을 보았는데,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느냐? 넌 몰라도 그 녀석은 믿을 수 없다. 내 여러 번 말하지만 사내는 죄 짐승이니라.”
“그분은 다른 것 같았습니다.”
“어허! 그런 자일수록 속이 더 음흉한 법이다.”
“그래서 저와 그분의 사이를 좀 더 파헤쳐야겠다 생각하신 거로군요.”
“너나 그 친구나 좀처럼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으니. 내, 별수 없이 큰 그림 한번 그려보았다.”
“보니 어떻던가요?”
“네가 몰래 지켜보는 걸 알고도 왈짜에게 함부로 덤비지 않는 걸 보니 정말 아무 사이 아닌 것 같더구나.”
이레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것으로 어찌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네가 사내를 몰라 하는 소리다. 무릇 사내란 곧 죽어도 여인의 앞에선 허세를 부리는 족속이란다. 특히 마음에 둔 여인 앞에서라면 당장 죽는다 해도 허튼 발길질일 망정 요란 법석을 떠는 법이지.”
기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녀석은 사내도 아니다. 어찌 그런 상황에서 뒷짐 지고 지켜보기만 하는지. 어두컴컴한 곳에 웅크리고 있을 때부터 어딘가 문제가 있는 듯싶더니. 겉만 음침한 게 아니라 속은 더 차고 이기적인 모양이다.”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차가운 분은 아닙니다.”
차갑고 이기적이라면 책장이 넘어질 때, 온몸을 던져 구하려 하지 않았겠지요. 제 몸 아래에 깔린 여인을 먼저 보내겠다고 그리 안간힘 쓰지도 않았을 겁니다.
“차갑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냐.”
“그냥 그리 보이더란 말이었습니다.”
“갈수록 알 수 없는 소리로구나. 아무튼, 형운 그 친구는 안 된다. 아무리 봐도 집안에서 글만 읽어대는 골샌님이 틀림없어. 무정하고 무심하니 우리 이레, 평생 고생만 시킬 거다.”
“알겠습니다.”
기대가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넌 그저 이 오라비만 믿으면 된다. 돌다리 두드리듯 이놈 저놈 찾아보고, 알아보마. 아무렴, 내 누이 평생 배필 찾는 일인데, 어찌 소홀할까. 조금만 기다려라. 내 널 일평생 귀한 대접 받으며 살게 해 줄 것이야.”
“그럼, 오라버니만 믿으면 되겠군요.”
“나쁜 놈들은 네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할 것이다. 오늘도 보아라. 이 오라비의 큰 그림 덕에 이형운, 그자의 또 다른 진면모를 보지 않았더냐. 그 골샌님 때문에 이림관의 소화까지 데려 나오느라 무려 은자 두 냥이나 썼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구나.”
“부족한 녹봉으로 어찌 그리 무리하셨습니까?”
“널 노리는 음흉한 녀석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데 그깟 은자가 문제겠느냐?”
호탕하게 외친 기대가 뒤늦게 생각난 듯 품에서 비단으로 감싼 작은 물건을 꺼냈다.
“받아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잔말 말고 열어봐.”
기대의 재촉에 이레가 조심조심 열어보니 단아한 모양의 머리꽂이가 들어 있었다.
“어머니께서 네게 준 머리꽂이가 보이지 않더구나. 어디서 잊어버린 게지? 마침 비슷한 것이 보여서 하나 샀단다.”
기대의 말처럼 비단보에 싼 머리꽂이는 이레가 잃어버린 제비꽃 머리꽂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대가 머리꽂이를 들어 이레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돈도 없으신 분께서 어찌 이리…….”
“또 그놈의 녹봉 이야기. 네 잔소리가 지겨워서라도 녹봉 좀 올려달라 청을 올려야겠구나.”
“오라버니.”
“걱정 마라. 아무리 궁핍하여도 네게 손 벌리지 않으마. 그보다…….”
문득 기대가 한층 낮아진 눈빛으로 물었다.
“양화사에서 변고가 있었던 모양이지?”
이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걸…….”
“네가 평소보다 하루 더 그곳에 머물렀다는 말을 듣고 이상하다 생각했지. 행랑할멈 뒤를 집요하게 따르며 캐물었더니, 결국 말해주더구나.”
단단히 입단속을 하였는데, 마지못해 입을 연 모양이다.
하긴 오라비의 집요함은 세상 누구도 못 말릴 일이니, 막지 못하였겠지.
다행인 것은 양화사에 함께 가긴 했어도 머문 곳은 달라 행랑할멈도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착오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별일 아니었습니다.”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수장당할 뻔하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순순히 오라비에게 고했다간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착오건, 큰일이건 이야길 했어야지. 왜? 아버지나 할머니께서 다신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아 그리하였느냐?”
그것도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심하였던 것은…….
“그래도 내겐 말해야지.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 얼마나 가슴 졸이겠느냐?”
오라비가 이처럼 걱정하실까 저어되었기 때문입니다.
바깥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저의 일까지 신경 쓸까 걱정되었기에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어디 보자, 오라비가 잘 골랐는지.”
머리꽂이를 꽂아준 기대가 취한 눈가를 지그시 여몄다.
“곱구나, 어여쁘다.”
흡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그는 누이의 손을 잡았다.
“이레야.”
“네.”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꼭 이 오라비에게 말해야 한다. 숨기지 말고. 알았느냐?”
내 편.
내 든든한 바람막이.
이레는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하하. 대답 한 번 시원해서 좋구나. 이 오라비 내일 원행 갔다 돌아오면…….”
“또 원행 가십니까?”
“이번엔 길지 않아. 사흘이면 족할 것이야.”
“어딜 가시는 데 사흘이나 걸립니까? 먼 길 가시는 일이 이리 잦으니, 행여 병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내 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니 미룰 수도 없구나. 하여간 이번 일이 끝나면 시간 좀 낼 수 있을 것 같구나. 다녀와서 어머니 뵈러 가자.”
이레가 반색했다.
“정말요?”
좀처럼 제 감정을 속 시원하게 드러내지 않는 그녀인지라.
지켜보는 기대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내걸렸다.
“얼굴 못 뵌 지 벌써 반년이 지나지 않았더냐. 당연히 가야지. 어머니도 네 얼굴 보고 싶으실 거야. 그러니 가자. 오라버니가 꼭 데려다주마.”
어머니.
부르기만 해도 그리운 그 이름.
요양 떠나신 이후로 이레가 걸음 하지 않으면 영영 얼굴을 뵐 수 없는 분이셨다.
이레는 신이 난 얼굴로 기대와 함께 집안 대문을 넘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왜?”
“좀 전에 그 소화라는 여인을 바래다주러 간다 하지 않았습니까? 별일은 없었습니까?”
“이 오라비가 누구냐? 조금 말썽이 있긴 하였다만, 평탄하게 잘 해결했단다.”
자신만만한 기대를 보며 이레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술에 취해 실수나 하지 않으셨을까 걱정입니다.”
***
밤의 그늘이 짙어졌다.
흥청망청 마시고 취했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지고, 떠들썩하던 단오도 그렇게 저물어가는 듯했다.
“이, 이게 뭐야?”
어린 기생의 날카로운 외침이 시전의 뒷골목을 뒤흔들었다.
때마침 거리를 순찰하던 순라꾼들이 비명을 듣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오?”
“사, 사내. 저기 사내들이…….”
무얼 보고 놀랐는지, 동기(童伎)는 어둠을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순라꾼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오늘 하루 골목 최악의 왈짜들이 여인들을 희롱하고 어리바리한 양반들의 돈주머니를 노린다는 신고가 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들어왔다.
그러나 워낙에 드세고 사나운 놈들이라, 순라꾼들도 멀리서 보고 피해갈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골목 안에서 끙끙 앓는 신음들이 들려왔다.
“거머리 같은 놈들. 잠도 없나.”
“어지간하면 대충하고 돌아들 갈 것이지.”
“아무래도 우리 힘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은데?”
순라꾼들이 두려운 듯 머뭇거리자 어린 기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저곳에 왈짜들이 쓰러져 있어요.”
“뭣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순라꾼들은 조심조심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뜻밖의 광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종일 오가는 사람들을 괴롭히며 말썽을 피우던 왈짜들이 골목 여기저기에 피떡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저희끼리 떼싸움이라도 한 건가?”
순라꾼들이 쓰러진 자 중 비교적 정신이 온전한 자를 추궁했다.
“어디 패와 붙은 것이냐?”
순라꾼의 물음에 왈짜 하나가 끙끙 신음을 흘리며 웅얼거렸다.
“차라리 떼싸움이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아니야?”
“한 놈이었소.”
“뭐?”
“한 놈이 우릴 이 꼴로 만들었단 말이오.”
“고작 한 놈에게 이렇게 당했다고? 무슨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놈이 무슨 홍길동이라도 되더란 말이냐?”
“정말이란 말이오.”
“한 놈의 소행이라면, 필시 끔찍한 흉기를 썼겠구나.”
“흉기가 있긴 했는데……. 정작 그걸로 당했다 말하기도 그렇고.”
“뭔데?”
“고작 손바닥만 한 단도 두 자루였소.”
“옳거니. 칼을 귀신같이 다루는 자로구나.”
“그런데 정작 칼은 자루에서 뽑지도 않고 칼집 끝과 칼자루 웃등으로만 찌르고 찍는데……. 손이 얼마나 빠른지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소.”
순라꾼들은 왈짜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예끼, 아무리 떼싸움의 처벌이 중하다 해도 말이 되는 변명을 해야지. 혼자서 이 많은 사람을 쓰러트렸다는 소리가 말이 돼? 더구나 칼은 뽑지도 않고 방망이처럼 휘둘러서?”
“방망이처럼 휘두른 게 아니라 짧은 창이나 작대기처럼 쿡쿡 찌르기만…….”
“헛소리는 그쯤 해둬라.”
“아마도 술에 취해 헛것을 본 모양이군.”
“저희끼리 싸움 난 걸 무마하려 그런지도 모르지.”
“아무튼 잘되었네. 안 그래도 오늘 말썽 피운 게 여럿이라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이대로 압송하세나.”
순라꾼들은 굴비 엮듯 왈짜들을 오랏줄로 엮었다.
좌포청으로 끌려가는 왈짜들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젠장, 기생 하나 어찌해보려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그날 좌포청으로 압송된 왈짜의 수는 족히 열은 넘었다.
***
“어이쿠, 무슨 술을 이리 많이 드셨습니까요.”
문밖에서 조심스레 부르자 밤 귀 밝은 행랑아범이 나와 취한 기대를 부축했다.
“오늘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 기분이 좋으셨던 듯하네, 부탁하이.”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행랑아범이 기대를 사랑채로 부축해갔다.
이레는 오라버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 그림자까지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별채로 걸음 했다.
그곳엔 이레를 기다리는 낯선 그림자가 있었다.
“이제 들어오는 것이냐?”
목을 조르는 서늘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계신 걸까?
별채 툇마루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 곁에 서책들이 어수선하게 쌓여 있었다. 이레가 방에 숨겨놓은 책들이었다.
“이 서책들은 다 무엇이냐?”
서슬 퍼런 물음에 이레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료하여 읽던 것입니다.”
“누가 네게 책을 읽으라 하였더냐?”
할머니는 서책을 마당으로 내동댕이쳤다.
“네 할아버지가 버릇을 잘못 들여도 한참을 잘못 들여놨구나. 오냐오냐 귀여워만 하여 여인의 도리는 안중에도 없고 사내처럼 책이나 들여다보게 하였어.”
“할머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책은…….”
“닥쳐라!”
할머니가 고리눈을 뜨고 이레를 쏘아보았다.
“일찍이 신동이라 불리었던 양천허씨 여인(陽川許氏: 허난설헌)의 일을 아느냐? 그 여인의 일생이 끝내 비극으로 마감하였다는 것도 아느냐?”
“…….”
“사람에겐 저마다 하늘이 내린 그릇이 있다. 사내는 사내의 할 일이 있고, 여인은 여인의 할 일이 따로 있는 법. 여인으로 태어나 사내 흉내 내며 글 읽고 시구 읊는 것은 남의 옷을 훔쳐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할머니…….”
“지금 네가 하는 짓은 그야말로 천리를 거스르는 것. 읽어도 못 읽는 척, 궁금하여도 아닌 척. 그것이 바로 네가 지켜야 할 여인의 도리라고 내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느냐.”
싸늘한 호통의 끝자락.
할머니는 곁을 지키는 하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주춤주춤 이레의 눈치를 살피던 하인이 손에 든 횃불을 쌓아 놓은 서책에 가져갔다.
“할머니. 이러지 마십시오. 다시는 읽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불태우지 마십시오. 다시는 가까이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태우지 마십시오.”
이레가 엎드려 애걸하였으나 할머니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내 눈에 저 몹쓸 것이 보였다간, 이 집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리 알아라.”
가시 돋친 지청구를 쏟아낸 할머니는 안채로 돌아갔다.
이레는 재로 변한 서책 앞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하였다.
슴벅슴벅한 두 눈에 기어이 눈물이 고였다.
저 서책들을 구하려 얼마나 고생하였는데.
얼마나 어렵게 모은 것인데.
요 며칠 봄날의 꿈처럼 행복하였더랬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추억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달콤하고 포근한 춘몽(春夢)이었다.
눈 뜨면 사라질 신기루.
팔랑팔랑 나비처럼 날아가 버릴 아득한 꿈결처럼 아끼고 소중한 것들이 자꾸만 사라져 간다.
어머니의 선물을 잃어버리니, 이젠 서책마저 재가 되었다.
“아니야. 호사다마라 하지 않았던가.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 하였어. 어머니의 머리꽂이를 잃어버렸지만, 오라비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았던가. 필시 이번 일도 좋은 일이 생길 길조일 거야.”
이레는 가슴을 잠식하는 불안을 애써 떨쳐냈다.
그래도…….
그래도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소중한 것을 잃을까 더럭 겁이 났다.
혹시…….
다급한 생각에 이레는 헐레벌떡 별채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허전한 방안 풍경이 그녀를 맞았다.
방 한편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서탁을 본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가장 귀한 것은 남아 있었구나.
이레는 무너지듯 서탁 위에 엎드렸다.
이것마저 사라졌다면 어찌 되었을지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힌 이레는 붓을 들었다.
-다들 오늘 어찌 보내셨는지요? 저는…….
종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저는 무탈하였습니다.
먼저 쓴 글이 눈물에 묽게 번져갔다.
-오늘은 단오였습니다. 할아버지들께서도 즐거운 일 많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레의 글이 이어졌다.
-전 뜻밖에 많은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알고 보니 제 오라버니의 엉뚱한 장난 때문이었답니다.
평소 같으면 이쯤에서 할아버지들의 글이 나타났을 터였다.
화할아버지는 안부부터 물었을 것이고, 상할아버지는 무슨 장난이냐며 짧은 물음을 던지셨을 테지.
예할아버지는 차분히 글에 번진 눈물의 흔적에 대해 궁금해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답하지 않으셨다.
“글이 사라지지 않는구나.”
이레가 쓴 글이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종이 위에 남아 있었다.
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서탁의 글귀를 그 누구도 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명절이나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엔 할아버지들의 답을 듣기 어려웠으니.
그래도 오늘처럼 울적한 날엔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고 싶었다.
한때는 얄밉기만 했던 불손이라도 답하면 좋을 텐데.
자로 잰 듯 반듯하면서도 불퉁한 글이라도 보이면 반가울 텐데.
야속하게도 불손 역시 답이 없었다.
이레는 붓을 거두지 않았다.
마치 매일의 일을 기록하듯,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 평소처럼 붓을 놀려 이야기를 그려나갔다.
-할아버지들. 오늘 오라버니께서 제게 예쁜 머리꽂이를 선물하였습니다. 오늘 하루 제가 이리 즐거웠던 것도 모두 오라버니께서 애쓰신 덕이었습니다. 때로는 엉뚱하고 별나게 행동해도 제겐 참으로…… 참으로 과분한 오라버니입니다. 아마 세상에서 제 오라비만큼 누이를 걱정하는 오라비도 또 없을 겁니다.
시리고 외로운 밤.
이레의 붓은 묵묵히 마음속에 담아둔 사연을 풀어나갔다.
-사흘 후, 오라비가 원행에서 돌아오면 함께 어머니를 뵈러 가기로 했습니다. 벌써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어머니를 뵙는 것만큼이나 오라버니와 여행 가는 것이 고대됩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
공허한 이야기임에도 이레는 마지막 인사까지 넣고 나서야 붓을 내려놓았다.
다음 날 새벽.
기대는 푸른 안개를 뚫고 먼 길을 떠났다.
이레는 먼발치에서 오라비를 배웅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오라비의 모습이 이레를 미소 짓게 하였다.
그렇게 기대는 푸른 안개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갔다.
기대는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