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0화 (10/215)

#10. 은자원의 네 명의 은자들

“푸하하하!”

한바탕 파안대소가 이림관(梨林官)의 서쪽 별관을 뒤흔들었다.

만개한 배나무 숲 한가운데 세워진 별관에 세 사내와 한 여인이 자리했다.

은자원의 세 은자와 이레였다.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사내의 이름은 서강율.

은자원의 세 번째 은자였다.

먼 곳에서 이제 막 돌아온 강율은 맞은편에 앉은 형운과 기대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가 그리 웃긴가?”

기대가 불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참으로 절묘한 조합이란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절묘하다니?”

강율이 기대를 손짓했다.

“소문에 밝고, 잠시도 입을 쉬지 못하는 참견쟁이와…….”

기대에 이어 이번엔 형운을 바라보았다.

“과묵하고 신중하여, 반년이 지나도록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던 사람이 한 장소에, 그것도 기가 막힌 시기에 딱 만났는데 어찌 웃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별것이 다 웃기는군.”

“자네가 엉뚱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 몰랐네.”

강율이 은근한 목소리로 질문을 이었다.

“이번엔 무슨 일인가? 함께 있던 여인은 또 누구고?”

“오늘따라 질문이 많군.”

강율이 픽 하고 입가를 틀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 워낙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사람 아닌가.”

“그리 특별할 일 아니니. 그 호기심일랑은 그만 넣어두게. 사내가 어여쁜 여인과 함께 있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 호들갑인가.”

“그 사내가 자네라서 특별한 게지.”

“난 사내 아닌가?”

“자나 깨나 누이 걱정뿐이라, 다른 여인에게 관심 돌릴 여유가 조금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네.”

“험험, 별소릴 다 하는군.”

기대는 연신 헛기침을 터트리며 모른척했지만, 강율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자네가 벌인 일이니, 괜한 소동은 아닐 테고……. 의도가 뭔가?”

“의도는 무슨.”

“그만 속 시원하게 털어놓게나. 보아하니 자네 누이도 이미 눈치챈 듯하니.”

“이레가?”

누이라는 말에 기대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힐끗 이레를 곁눈질했다.

제법 치밀하게 세운 큰 그림이었건만.

그걸 모두 눈치챘단 말인가?

기대를 필두로 별관에 있는 세 사내의 시선이 이레를 향했다.

새치름하니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한 채 차를 홀짝이던 이레가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무지하여, 두 분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도통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레를 살피던 기대의 눈매가 경직되었다.

차분하게 내리깐 눈썹.

부드럽게 흘리는 말꼬리.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무언가가 있었다.

함께 삶을 살아온 혈육만이 알 수 있는 직감이었다.

그러나 굳은 것도 잠시, 기대는 곧 시침을 뚝 뗀 채 강율을 향해 소리쳤다.

“보았는가? 내 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질 않는가. 세상 사람 모두가 자네처럼 속이 시커멓지는 않단 말일세.”

“허허, 거참…….”

강율은 손끝으로 술잔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때로는 거울같이 맑고, 때로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백 마리는 들어앉아 있는 듯하니. 나름 사람 속을 잘 안다 자부하는 나로서도 도무지 그 깊은 속을 가늠할 수 없구나.”

“지금 날 여우라 했나?”

“기대 자네는 능청스럽고 음흉하니, 여우가 아니라 러울(爲獺: 너구리)이 어울릴걸세. 아니, 움직임이 재빠르고 번잡하니 어쩌면 꺼병이인지도 모르겠군.”

“뭣? 내가 꿩 새끼란 말인가?”

분위기가 좋지 않자 잠자코 있던 이레가 불쑥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서 선비님. 이번에 먼 길 다녀오셨다 들었습니다. 석 달 넘게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다행히 강율은 흥분한 기대 대신 이레에게 집중했다.

“남해에 일이 있어 다녀왔소.”

짧게 말한 그가, 뒤늦게 몇 마디 덧붙였다.

“그쪽 지방의 풍습이나 제사 절차에 독특함이 있다 하여 조사차 간 것이지요.”

“남해라면 진귀한 구경을 많이 하셨겠습니다.”

“말도 마시오. 가는 길은 멀고 험하여 중도에 그냥 돌아올까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오. 그런데 땅끝에 도달하여 너른 바다를 본 순간 그간의 노고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소.”

“풍경이 그리 대단하던가요?”

“솔직히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까 여러 번 고민하였을 정도였다오.”

“조선 팔도를 두루 다니신 분께서 그리 극찬하시니, 정말 멋진 곳이었나 봅니다.”

“그 가슴 벅찬 광경은 글로도 그림으로도 표현 못 할 것이라오.”

말을 마친 그가 은근슬쩍 물었다.

“어떻소? 낭자만 괜찮다면 내 다시 한 번 시간을 내어보겠소. 땅끝의 풍경. 궁금하지 않소?”

“안 돼!”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기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사이 술을 적잖이 마신 듯, 혀까지 풀려 있었다.

그는 강율을 손가락질하며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다른 녀석은 다 돼도 너만큼은 아니 된다. 이 천하의 바람둥이. 어디 감히 내 누이를 노리느냐?”

“기왕이면 풍류를 즐긴다 해주게나.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내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아는 여인은 수두룩하나 정작 마음 준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는 걸 잘 알지 않는가?”

“아는 여인이 많다는 점, 그것 하나만으로도 자넨 실격이야. 그러니 내 누이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게.”

“아쉽게 됐군.”

강율이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난 안 된다니 그렇다 치고……. 그럼, 남은 한 명의 은자는 괜찮은 겐가?”

강율은 형운을 슬쩍 눈짓했다.

기대가 반쯤 풀린 눈으로 그의 시선을 좇았다.

이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불편한 기색으로 앉은 사내, 형운의 모습이 들어왔다.

남들이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형운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저 친구도 안 돼.”

강율이 호기심을 보였다.

“난 풍류를 알아 아니 된다 하였고. 그럼 저 은자는 무슨 연유로 아니 된다 하는 것인가? 설마, 우리 모르게 여인을 잔뜩 알고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건…….”

손으로 형운을 위아래로 훑던 기대가 빈 술잔을 가리켰다.

“일단 술을 안 먹고 있잖은가. 자고로 술을 즐기지 않는 자는 사람 사는 도리도 모른다 하였다.”

“술은 우리 중 가장 많이 먹은 듯한데…….”

“뭐?”

기대가 안 열리는 눈을 억지로 부릅떴다.

과연, 형운의 앞자리에 빈 술병이 제일 많이 쌓여 있었다.

“뭔 놈의 술을 저리 소리 없이 많이 먹었어?”

강율이 피식 웃으며 참견했다.

“뭔가 말 못 할 답답함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보다 술은 잘 먹는 것 같으니, 이젠 어떤가?”

“안 돼. 술을 저리 먹고도 취한 기색도 없지 않은가? 인간미가 없어. 저리 감정이 메말라서야 어디 쓰겠나?”

“하하. 그것참 걸작이로군.”

껄껄 웃음을 터트리던 강율이 이레에게 물었다.

“실례가 될지 모르나 아무래도 낭자께서 성혼하시려면 이 까다로운 오라비부터 어찌하셔야겠소.”

이레가 부드러운 미소로 맞받았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오라비랍니다.”

“그렇소? 과연 그렇구려.”

강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 한 잔을 들었다.

“생각해 보니 은자원의 세 은자가 이리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군. 이런 날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이날을 기념하여 각자 한마디씩 합시다. 내가 첫 은자였으니 내가 먼저 하리다.”

술 채운 잔을 들며 강율은 좌중을 돌아보았다.

“이 좋은 날 모두가 모였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석 잔 술로 내 마음을 대신하겠네.”

말을 마친 그가 술 석 잔을 연거푸 깨끗이 비웠다.

뒤이어 기대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내 누이에게 함부로 손대는 녀석은 그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형운에게 차례가 돌아갔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표정이 역력한 그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일…… 결코, 잊지 않겠다.”

기념사라기보다는 무에 단단한 결의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단숨에 술잔을 털어놓은 형운은 씹어 삼키듯 중얼거렸다.

“삭탈관직, 삭탈관직, 삭탈관직, 삭탈관직…….”

은자들의 차례가 끝났다.

강율이 이레를 돌아보았다.

“낭자도 한마디 해야 하지 않겠소?”

“전 은자원의 사람이 아닌지라…….”

“은자원의 사람이 어디 누구라고 따로 정해져 있겠소? 애초에 은자원이라는 이름도 우리 마음대로 지어 부르는 것이니……. 우리가 인정하면 그 사람이 바로 은자원의 은자가 아니겠소?”

강율이 두 동료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레 낭자가 은자라는 데 이의 있는 사람 있소?”

그러나 물음에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형운은 강율의 말을 못 들은 듯 혼잣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기대는 ‘은자가 아니라 선녀라 불러라’며 소리쳤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구려.”

상황이 이쯤 되자 이레도 더는 사양할 수 없었다.

술잔을 받쳐 들고 일어나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하늘 향해 어지럽게 뻗친 고목의 가지 같다 들었습니다. 그 무수한 갈래 중 이렇게 모여 함께 가는 것은 분명 보통 인연이 아니겠지요. 훗날 각기 다른 길을 찾아 헤어진다 해도 부디 오늘의 기억만큼은 영원하길 감히 바라옵니다. 너와 내가 이편과 저편으로 나뉘어 터럭만큼의 관련도 없어 보인다 한들 그 근본은 본시 하나였음을.”

오라비 기대를 위한 말이었다.

배경이 없어 너른 궁 안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오라비.

비록, 한직일망정 믿을 수 있는 동료만이라도 있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말을 하였습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강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 지금까지 들은 말 중 단연…… 최고였소.”

말을 마친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음 날 깨면 잊어버릴까 얼마나 아쉬운지 모른다오. 다음엔 온전한 정신일 때 해주시오. 부탁하오, 하하하.”

***

단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전 거리.

꽃처럼 아름다운 남녀가 앞뒤로 선 채 어색하게 걷고 있었다.

형운과 이레였다.

이림관을 나온 은자원의 네 사람은 한동안 함께 거리를 걸었었다.

잡화전에서 엉뚱한 장신구도 사며 뜻깊은 시간을 보내던 중, 뒤늦게 혼자 두고 온 여인을 기억한 기대가 허둥지둥 사라졌다.

뒤이어 강율도 더 늦기 전에 궁에 들어가 보고하여야 한다며 훌쩍 사라져버리자,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남녀만 남게 되었다.

형운이 배웅해준다 하니, 이레는 사양하였다.

모르는 곳도 아니고, 돌아갈 길도 머니 그만 돌아가셔도 된다 만류했다.

하지만 형운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며 조용히 뒤를 따랐다.

이림관을 나와 큰길로 접어들 때까지 두어 보(步) 간격을 유지한 채 두 사람은 땅만 보고 걸었다.

의도적인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 어색함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걷기만 하니, 평소 잘 알던 길도 멀게만 느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집까지 바래다주는 곳이 고맙기도 하였고, 어떻게든 이 어색한 분위기를 줄여보고 싶어 이레가 조심스레 먼저 말을 내놓았다.

“오늘…… 제 오라비 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슨 말이오?”

“억지로 끌려 나오신 것이 아닙니까?”

등 뒤에서 형운의 한숨이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신경 쓸 필요 없소. 애초에 내가 원하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니.”

차분한 음성이 이레의 등 뒤로 달라붙었다.

“제 오라비가 성격이 급하고 장난치길 좋아하나, 알고 보면 속정이 무척 깊은 사람입니다. 나리께 짓궂은 일을 하여도 친해지고 싶어 그런 것이니, 널리 이해해 주십시오.”

형운에게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주 작은 소리로 ‘삭…… 직.’이라는 중얼거림이 들리긴 했으나, 너무 작은 소리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레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좀 전에 산 장신구에도 큰 뜻은 없을 것입니다. 술이 깨면 까맣게 잊고 말 테지요.”

이림관을 나온 네 사람은 잡화점에 들렀다.

기대가 은자만의 표식을 만들자며 억지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레를 포함한 형운과 강율은 기대에게 떠밀려 침통 네 개를 샀다.

침통은 손가락 하나 정도 되는 크기의 나무를 깎고 수실을 달아 장식하였는데, 내부에 공간이 있어 침을 넣을 수 있었다.

응급한 상황에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라, 창포 꽃잎을 말려 만든 향 주머니와 더불어 액귀를 물리친다는 창포비녀 다음으로 단옷날 주고받는 인기 품목 중이 하나였다.

“이제부터 이것이 우리 은자들의 표식이다. 이것을 가진 사람은 은자원 소속이라는 의미이니, 죽어서도 잊어선 안 된다.”

기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시중에서 아무나 살 수 있는 침통이 표식이라니.

아마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에 적어도 열은 은자원 소속이 될 수도 있었다.

다들 떨떠름한 표정이었으나, 기대가 워낙 막무가내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레가 침통에 대해 굳이 언급한 것은 오라비의 억지를 변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엔 형운의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소.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

아무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삭탈관직하고 말겠다 다짐하였는데, 그깟 억지쯤 무에 큰 대수일까.

그런 속마음도 모른 채, 마음의 짐을 덜어낸 이레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참, 지난번엔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

느닷없는 고마움에 형운이 눈빛으로 물었다.

이레는 앞서 걷고 있던 터라 그 시선의 의미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용케 눈치채고 대답했다.

“은자원에서 있었던 일 말입니다. 그때 나리가 아니었다면 오늘 전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땐, 경황이 없어 제대로 감사의 마음도 못 건넸습니다.”

“그 일이라면…… 나 역시 도움을 받았소.”

이레가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형운 역시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은자원과 연관된 일로 궁은 한차례 큰 홍역을 치렀으리라.

이레가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시지요?”

“괜찮소. 낭자는 괜찮소?”

“보시다시피 말짱합니다.”

“다행이오.”

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려나.

이레가 고민할 때였다.

형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땐 왜 그랬소?”

“무얼요?”

“그때, 갑자기 내 등 뒤로 다가와 손을 뻗지 않았소?”

“아! 그건…….”

이레는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 아끼던 머리꽂이를 잃어버렸습니다. 때마침 나리의 책상에 있던 물건이 제가 잃어버린 것과 비슷해 보이질 뭡니까. 하여 저도 모르게……. 송구했습니다.”

형운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머리꽂이를…… 잃어버렸소?”

설마, 아니겠지.

그런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레의 동그란 정수리를 보는 순간, 어가 행차에서 보았던 제비꽃 여인의 정수리가 떠올랐다.

은근한 두근거림에 입안이 조금씩 말랐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형운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서두를 이유 없다.

우선 확인부터 하자.

“혹여…… 글 쓰는 것을 좋아하오?”

“네?”

느닷없는 물음에 이레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글쓰길 좋아하느냐 물었소. 병법을 논하고 천문과 지리에 밝으며, 옛 성현 말씀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시오?”

서탁 속의 여인은 그러했다.

가끔 댕돌같은 모습으로 따져 묻기도 하고, 무람없이 그를 불손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남의 이야기 듣길 좋아하고, 난해한 설명과 이론에도 호기심을 보였다.

여인의 취향이 그러하기에 서탁의 백귀들도 저마다의 지식과 경험을 아끼지 않고 들려주는 것이리라.

혹시, 눈앞의 이 여인이 서탁 너머의 그 여인은 아닐까?

은근한 기대감이 형운을 긴장시켰다.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앞서 걷던 이레가 발을 멈추었다.

그녀의 등을 따라 걷던 형운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오랜 세월 그가 궁금히 여기던 일이 이 자리에서 밝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운을 돌아본 이레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어린 시절, 오라버니의 글 선생께 소학이나 겨우 뗀걸요. 병서나 성현의 말씀을 담기엔 제 그릇은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한데, 왜 그걸 물으시는지…….”

“낭자가 글을 잘 아는 듯하여…….”

형운의 눈가에 무언가 아쉬움이 번져나갔다.

이레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소녀는 오라버니께서 하시는 말도 알아듣기 어려워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리께서 말씀하신 이야기들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렇구려. 실례하였소.”

둘 사이에 침묵이 돌아왔다.

말없이 앞서고, 뒤따르며 걷다 보니 어느새 큰길이 끝나고 양 갈래로 갈라진 소로가 나왔다.

이레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대문 앞까지 바래다주겠소.”

“아닙니다.”

이레는 조심스레 사양했다.

더는 부담 주기 싫기도 하였거니와 행여 사내와 함께 있는 것을 집안 어르신이 보기라도 할까 저어되었다.

그 속내를 알아차린 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들어가시오.”

공손히 고개를 숙인 이레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 세 개를 꺼내 형운에게 내밀어 보였다.

“이것이 무엇이오?”

“창포 꽃잎을 말려 만든 향 주머니입니다. 이걸 차면 모기나 벌레가 가까이 범접하지 않는다 합니다. 예까지 고생하였는데, 제가 드릴 것은 고작 이것뿐입니다. 하나는 나리께서 쓰시고, 나머지 두 개는 뒤따르는 분들께 주십시오.”

단오라.

오라비를 비롯한 가족을 위해 산 것이었다.

달리 줄 것이 없어 꺼내 놓은 것인데, 정작 그녀의 말을 들은 형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 뭐라 하였소?”

“창포 향 주머니라고 했습니다. 오늘이 단오라…….”

“뒤따르는 사람이 있다 했소?”

“내내 나리 뒤를 따르는 두 분 말입니다.”

형운은 놀란 기색으로 이레를 바라보았다.

“그 사실을 어찌 알았소?”

그는 오늘 단 한 번도 이레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타고난 성정 탓인지, 아니면 후천적인 탓인지, 여인을 대하는 것이 무척 낯설고 어렵기만 하였다.

이레 역시 마찬가지라,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면 괜한 잔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이레의 두 눈을, 그 머루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내 뒤를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어찌 알았소?”

이레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처음엔 몰랐으나, 워낙 분위기가 독특하신 분들이라…….”

“그들이 날 해치려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건 또 어찌 안 것이오?”

“위해를 끼치려는 자들이었다면 말없이 뒤따를 것이 아니라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때를 기다렸겠지요.”

이레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맺혔다.

형운의 깊은 눈동자에 그녀의 샛말간 얼굴이 낙인처럼 각인되었다.

***

이레가 골목 저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운은 그 자리에 선 채, 그녀의 모습 지켜보고만 있었다.

특별한 까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저하.”

형운의 등 뒤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우익위 홍인모와 좌익위 최치성이었다.

형운은 이레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알고 있느냐?”

“무얼 말씀이십니까?”

“저 여인, 너희가 있음을 알고 있더구나.”

홍인모와 최치성이 서로를 돌아보며 놀란 눈빛을 교환했다.

형운이 다시 물었다.

“이런 일이 또 있었느냐?”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래, 흔치 않은 일이겠지.”

두 호위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보다도 형운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칼만 잘 쓰는 자들이 아니었다.

은신과 미행 역시 조선 팔도 누구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실력을 겸비했다.

그런데 무인도 아니고 사내도 아닌 여인이 그들을 눈치채고 선물까지 주었다.

“받아라.”

“이게 무엇입니까?”

“향낭이다. 너희에게 하나씩 주라 하더구나.”

홍인모와 최치성이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받았다.

향낭의 내용물을 살핀 홍인모가 조심스레 말했다.

“답례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답례?”

형운이 그를 돌아보며 반문했다.

“선물을 받았으니, 응당 다른 것으로 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인모의 조언에 형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래야 한단 말이냐? 나와 저 여인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또한, 선물도 내가 달라 해서 준 것이 아니지 않으냐?”

홍인모는 잠시 당황했다.

뒤늦게 그는 자신이 모시는 분의 위치를 떠올렸다.

세손께선 무언가를 받기만 하였지, 누군가를 챙겨줄 필요가 없는 그런 분이셨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그저 굽어살피는 것만으로 모두가 감복했던 것이다.

그런 분께 선물에 답례를 하라 하였으니.

이해가 아니 될 수도 있음이라.

홍인모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세간의 정리가 그런 것이옵니다. 무언가를 받으면 응당 무언가를 돌려주는 것이지요.”

“복잡하구나. 알았다. 돌아가면 최 내관에게 저 여인의 집안에 포상하라 명을 내리마.”

“그것이 아니오라…….”

홍인모는 궁궐에만 박혀 산 세손에게 평범한 범인들의 관계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였다.

그런 마음도 모른 채, 형운은 좌익위 최치성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느냐?”

“세손께서 잘못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 옳습니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형운이 여봐란듯이 홍인모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네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굳이 따지지 않겠노라.’라고 말하고 있었다.

홍인모는 속이 타들어 갔다.

‘우리 저하를 어찌한다.’

어린 시절부터 서책에만 파묻혀 있다 보니 세상 물정엔 다소 어두운 측면이 있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조금씩이라도 알려드려야 할 텐데, 주위에 죄다 최치성 같은 자들만 있어서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홍인모는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엔 먹구름만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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