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9화 (9/215)

#9. 단오도(端午圖)

경복궁 앞길.

너른 길을 한가운데 두고 동편과 서편으로 육조 관서들의 행각과 정문이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관청의 모습은 서로 엇비슷하게 보였다.

그러나 각 관청의 위세에 따라 솟을대문과 담벼락의 높이가 달랐다.

그중에서도 탄핵이나 간쟁 등의 언론 활동은 물론이고 백관의 규찰을 맡은 사헌부의 위세는 남달랐다.

남다른 위세만큼이나 사헌부의 기강은 육조의 그 어떤 관청보다 엄격했다.

대사헌을 필두로 한 명의 집의와 네 명의 장령과 지평, 그리고 스물네 명의 감찰들로 구성된 사헌부는 크게 본청과 별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곳의 상하구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율법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사헌부엔 명을 내리는 자와 명을 받드는 자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주로 명을 내리는 곳은 대장청에 근무하는 장령과 지평들이었고, 별청에 머무르는 감찰들은 그들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각자 맡은 임무와 역할이 확실한 만큼 발을 들일 수 있는 곳과 발을 들일 수 없는 영역의 경계 또한 명확했다.

다시 말해 별청의 감찰들은 부름을 받지 않고선 함부로 본청에 걸음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사헌부의 불문율을 깨는 일이 벌어졌다.

어스름, 어둠이 깔리는 시각.

별청의 외방에서 감찰들을 관리하는 비방주(批房主) 허상익이 본청의 중문을 허락 없이 넘어섰다.

그가 걸음 한 곳은 본청의 대장청이었다.

“무슨 일이냐?”

대장청의 중문을 지키고 선 군졸이 허상익의 앞을 막았다.

허상익은 대답 대신 명(命)이라는 글자가 음각된 나무패를 보였다.

군졸의 눈매가 눅진해졌다.

한순간, 눈앞의 허상익이 보이지 않는 듯 군졸은 뒤로 물러섰다.

먼 허공을 응시하는 군졸을 뒤로하고 허상익은 안으로 향했다.

어둠이 가득한 대장청은 텅 비어 있었다.

허상익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긴장한 그의 등 뒤로 드르륵 문이 열렸다.

사헌지평(司憲持平) 권문이었다.

허상익이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소인, 부름을 받고 달려왔나이다.”

권문이 허상익을 향해 두루마리 하나를 툭 던졌다.

“이것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두루마리를 펼쳐 본 허상익이 서둘러 대답했다.

“경기도에서 올라온 장계이옵니다. 경기도 화성지역에 어사우(御史雨)가 내렸다고 합니다.”

권문의 미간에 굵게 주름이 그려졌다.

“지금 어사우라 하였느냐?”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어사의 출두를 어사우가 내렸다 칭하였다.

예전에 어사가 각 지방을 돌며 억울한 옥사를 판결하자, 하늘에서 곧 비가 내렸다는 말에서 기원한 어사우(御史雨).

백성들의 척박한 삶에 내리는 단비.

그러나 정작 보고를 받은 권문의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엄연히 정해진 법과 절차가 있거늘.

하늘의 뜻이라 하여도 어찌 그 체계를 따르지 않을 것인가.

아무리 하늘이 허락하였다 해도 인간의 법도를 따르는 어사우는 오직 내리라 명한 곳에만 내려야 한다.

“어사대에서는 어사우를 내리라 명한 적이 없거늘. 감히 누군가 단독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냐?”

허상익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사대에서 그리 간 큰 행동을 할 자가 어디에 있겠나이까.”

“허면?”

“역관의 역졸 중 제법 눈썰미가 좋은 자가 있습니다. 그자의 보고에 의하면 이번에 사용된 마패가 우리 어사대에서 쓰는 것과 조금 다른 형태라 하였나이다.”

권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가짜더냐?”

어사에 대한 지방 관찰사의 대우가 극진하다 보니, 종종 가짜 마패가 등장하는 일도 있었다.

발각되는 날엔 참혹한 꼴을 면치 못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가짜 어사 행세를 하는 간 큰 자들이 더러 있었다.

“가짜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무엇이냐? 가짜는 아닌데, 어사대의 마패도 아니다. 그럼 그것이 대체 무슨 물건이란 말이냐?”

잠시 눈치를 살피던 허상익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암행대의 귀물이 아닐는지요.”

“뭐라?”

권문의 눈동자에 성난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 암행대라 했느냐?”

쾅!

거칠게 탁자를 내리친 권문이 허상익을 노려보았다.

“암행대가 유야무야 사라진 것이 옛적이거늘. 그 사실을 알기나 하고 떠드는 것이냐?”

“소인은 다만 보고 중에 그런 의견이 있었기에…….”

“밑에서 올라온 보고를 단순히 읊기만 한다면 굳이 자넬 쓸 이유가 무엇일까. 중요한 안건을 추려낼 능력이 없으면, 적어도 쓸데없는 걸 쳐내는 눈이라도 가져야 하질 않겠느냐?”

허상익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때였다.

“암행대가 모두 사라졌다라…….”

두 사람 사이로 고저 없는 음성이 끼어들었다.

“누구냐, 감히!”

권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러나 정작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그의 표정은 다시없이 유순해졌다.

“집의 나리.”

권문과 허상익이 황급히 허리를 접었다.

장궁을 손에 든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두 사람 곁을 유유히 지나쳤다.

집의(執義) 김익현.

긴 탁자의 상석에 자리한 그가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권 지평. 암행대가 아직 한 명 남은 것으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가?”

권문이 급히 허리를 접으며 대답했다.

“한 명 남아있긴 합니다만, 그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어사우를 내린 적이 없나이다. 실적 또한 미미하여 사실상…….”

“사정이 무엇이라 해도 암행대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로군. 의미가 없다 하나 명맥이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니고.”

김익현은 의자를 돌려 앉고, 가져온 활을 들고 시위를 가볍게 퉁겨보았다. 두꺼운 시위가 몸을 떨며 웅웅 힘찬 울음을 흘렸다.

김익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활을 잡고 제대로 시위를 당겼다.

활이 둥글게 휘어졌다.

하지만 십팔기(十八技)에 능한 김익현으로서도 시위를 충분히 당길 수 없었다.

김익현이 고개를 외로 기울였다.

“참으로 억세구나. 이 활을 자유자재로 쓴다니, 과연 그 힘이 어떠할까?”

권문이 물었다.

“집의 나리, 외람되오나 그것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세자께서 사냥에 쓰시는 활이다. 지난번 사냥에서 망가져 수리하라 맡기신 것을 내 호기심이 동하여 잠시 빌려왔구나.”

김익현의 태연한 대답엔 권문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제아무리 빌린 것이라 하나, 세자께서 사용하시는 무기였다.

행여 이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단순히 불호령 정도로 그치지 않으리라.

그러나 정작 김익현은 대수롭지 않은 듯 심드렁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살 한 대를 시위에 메겼다.

“일전에도 세자께서 암행대에 미련을 보인 적이 있으셨지.”

권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일이라면 염려 놓으십시오. 암행대가 무엇입니까? 주상전하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께서 딴에는 조정을 장악하기 위해 꾸린 조직이 아니옵니까. 그러나 꾸려진 지 딱 석 삼 년 만에 간신히 이름만 건사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어사대의 협조가 없으면 암행대는 그야말로 어둠 속에서나 움직일 수 있는 밀약조직에 불과합니다.”

“나도 그리 알았다, 바로 좀 전까지는. 헌데, 그대도 듣지 않았는가? 암행대의 마패를 쓰는 자가 다시 나타났다고.”

“송구합니다.”

“요즘 들어 세자궁의 소식이 뜸하구나.”

김익현이 화살 메긴 시위를 당겼다.

“딱히 별다른 일이 없어 보고 올리지 않았습니다. 세자께서 하시는 일이란 것이 그저 풍광 좋은 곳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 전부인지라…….”

퍽!

김익현이 쏜 화살이 권문의 관모를 뚫었다.

대경실색한 권문을 김익현이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루면 되겠는가?”

“무, 무슨 말씀이시온지…….”

“세자궁의 소식. 최근 세자궁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녀석이 있다더군. 그자에 대한 정보도.”

“하, 하오나…….”

“이런,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을 보니 화살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관모 대신 머리통을 뚫으면 꽉 막힌 생각이 돌아가려나?”

권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조사하겠나이다. 하루면 충분합니다.”

그제야 흡족한 듯 김익현은 활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찮게 여긴 작은 구멍이 종국엔 둑을 무너뜨리는 법이다. 이 나라 조선의 근본을 뒤흔드는 것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싹이 트기 전에 잘라내야 한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대장청의 어둠을 향했다.

“수상한 조짐의 근원이 있을 것이다. 그곳이 어딘지 알아내라.”

* * *

뒤엉킨 책장을 바로 세우고, 사방으로 흩어진 서책을 차곡차곡 정리한 은자원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다른 정적이었다.

묵직한 침묵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은자원을 감싸고 있었다.

평소라면 책더미 위에 대충 쓰러져 졸고 있을 기대가 불구대천의 원수인 양 형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시하던 형운은 한 시진 넘게 이어진 노골적인 눈빛에 결국 고개를 돌렸다.

“어쩌라는 것이냐?”

기다렸다는 듯 기대가 이를 갈았다.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느냐?”

“보았다시피 그 일은 사고였다.”

“사심이었겠지.”

기대의 억지에 형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이 통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자의 기분을 아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제 누이가 사내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어느 오라비인들 흥분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니 이번만 눈 감아 주지.

저 시건방진 태도와 말도…….

형운은 적당히 무시하며 다시 제 일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느닷없는 기대의 물음이 그를 뒤흔들었다.

“언제부터냐?”

“언제부터냐니?”

“꽤 깊은 관계 같던데. 그리 깊어지려면 시간이 제법 걸렸을 테고. 그래, 처음 이레가 여기에 왔을 때부터였겠군. 그때부터 눈독을 들였던 게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네 누이와…….”

흥분한 기대는 아예 형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찌 한 것이냐?”

“무얼?”

“도통 사내에겐 관심이 없는 아이였는데. 어떻게 구슬린 거지? 혹, 그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건…….”

“내가 그런 짓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느냐.”

“그래. 그래야 할 것이야. 아니 그랬다간 네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니까.”

“무슨 소리냐?”

“이런 말 어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이 대대로 이름난 무인 집안이라는 거. 알고 있느냐?”

무시무시한 겁박이었지만, 형운은 무심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무사라면 내 집안에도 차고 넘친다.”

“호오라. 역시 믿는 뒷배가 있단 말이렷다? 그럼 이건 어떠냐? 내 비록 전향사의 허름한 전각에서 일하는 별 볼 일 없는 관원처럼 보이나, 내 배경엔 권세 으리으리한 분이 여럿 계시다. 알겠느냐? 내가 입만 열면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번에도 형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권세라면 내 집안도 빠지지 않아.”

“하하하.”

별안간 웃음을 터트린 기대가 뚝 멈추고 형운을 노려보았다.

“어둡고 음침한 곳에 고개만 파묻고 있어 그 성정이 나약한가 하였더니. 제법 기개가 대단하구나. 좋다. 옹졸하게 겁박하는 건 이쯤에서 그만두지.”

뜻밖의 말에 형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리 쉽게 끝날 일이었나?

어쨌거나, 다행이다.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상황이 끝날 모양이다.

안심하는 형운에게 기대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 대신 내 요구를 들어다오.”

형운의 반듯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야기가 어찌 그리 흐르느냐? 무엇보다 내가 왜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지?”

“내 입이 두렵지 않으냐?”

“방금 옹졸하게 겁박하는 건 그만두겠다 하지 않았더냐?”

“그래. 힘과 권세를 빌리는 건 사내가 할 짓이 아니지. 그까짓 것들 동원하지 않아도 너 하나쯤은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으니까.”

형운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 치고 말았다.

“어떻게 말이냐?”

“발 없는 말이 천 리 가는 법.”

“……소문을 내겠단 소리로군.”

“넌 사고라 주장하겠지만, 과연 듣는 사람들은 그리 순순히 믿어줄까?”

“그리하면 다치는 건 내가 아니라 네 누이일 텐데.”

기대의 얼굴에 히죽 웃음이 걸렸다.

“내가 바보로 보이느냐? 설마 그 여인이 내 누이라고 소문낼 성싶으냐?”

형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김기대가 내세우는 실력도, 뒷배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저 녀석의 빠른 발과 입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자원에 간혹 둘이 함께 있을 때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곤 했는데,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귀가 솔깃할 정도로 입담이 좋았다.

아는 이야기는 또 어찌나 많던가.

저 녀석이 작심하고 입을 놀리면, 틀림없이 없던 일도 있던 것이 되고, 단순한 사고가 의도적인 사건으로, 그리고 녀석의 누이는 한양 최고의 기생으로 둔갑할 것이다.

낭패였다.

소문이야 귀를 닫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쏟아질 주위의 관심과 호기심은 가장 피해야 할 일이었다.

행여 정체라도 드러난다면.

단순히 호사가들의 입에 오를 내릴 추문 정도로 마무리되진 않으리라.

궁 전체가 들썩일 것이 뻔했다.

거기다 할바마마께서 아시는 날엔…….

결국, 형운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서슬 퍼런 눈빛으로 쏘아보았지만, 기대는 기가 죽긴커녕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반색했다.

“내 요구가 무엇이냐면…….”

기대가 귓속말을 속닥였다.

그 황당한 요구에 형운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결의를 다졌다.

김기대.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녀석을 삭탈관직하고 말리라.

아득하게 높은 권력이 어떤 앙심을 품었는지 모른 채, 기대는 신이 난 표정으로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제 며칠 후면 단오 아닌가? 그때…….”

***

녹색의 짙푸름이 성큼 깊어졌다.

뽕잎이 무성해지고 가지마다 열매가 알알이 맺혔다.

음력 초닷새.

단오의 아침이 밝았다.

창포 우리는 향내가 한양 땅을 가득 뒤덮었다.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느라 도성 안팎이 분주했다.

그러나 그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레의 입에선 답답한 한숨만 새어 나왔다.

“하아.”

거리는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울리는 사람들의 표정에 웃음꽃이 한가득하였다.

그러나 이레에겐 먼 곳의 일인 듯 아득했다.

거리를 걷는 그녀의 얼굴엔 씁쓸함뿐이었다.

“역시…… 괜히 나왔구나.”

단오라.

한양 땅이 떠들썩하였지만, 그녀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아닌 천덕꾸러기 신세인지라, 명절이 되어도, 손님이 찾아와도 이레에겐 별다를 것이 없었다.

오라비라도 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지 모르나.

하필이면 오늘 아침 일찍 볼 일이 있다며 훌쩍 나가버렸다.

이레는 외부의 소란을 잊기 위해 서탁을 닦았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바빠 살피지 못했더니, 구석진 곳에 드문드문 먼지가 보였다.

이곳에 여러 할아버지가 계시다 생각하니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손님이 찾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김서우.

백부의 금지옥엽이자 이레의 동갑내기 사촌.

한 집안이라 하지만 서로 왕래가 빈번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도타운 정을 쌓을 만큼 아련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오늘따라 서우는 지나칠 만큼 살갑게 굴었다.

“그네?”

서우가 이레를 찾은 것은 함께 그네 뛰러 가자는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안국동의 홍 대감? 그네 뛰러 거기까지 가야 한단 말이야?”

“그냥 그네뛰기가 아니야. 홍 대감 댁 그네뛰기라고. 종 3품 이상 벼슬아치 인척만 참가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라고.”

“그런 것이 있었어?”

“집안에만 콕 박혀 있어 세상 돌아가는 걸 도통 모르는구나. 한양 사대문 안 여인네치고 그 댁 그네뛰기를 모르는 여인은 너 하나밖엔 없을 거야.”

“그런데 거길 우리가 어찌 가?”

“몰라? 지난달 내 아버님이 종3품으로 품계가 오르셨어. 그러니 그 댁 행사에 출입할 자격이 생긴 셈이지.”

서우가 가드락가드락 턱을 치켜들며 우쭐댔다.

조금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다.

종3품 벼슬아치의 인척들에겐 큰 관심 없었다.

그네뛰기도 안중에 없었다.

다만, 또래 여인들과 만나고 싶었다.

그들이라면 요즘 이레가 겪는 갑갑증에 대해 알고 있는 이도 있으리라.

이레는 서우와 함께 집을 나섰다.

서우와 안국동 홍 대감 댁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설렘은 홍 대감댁 솟을대문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서우와 함께 이레가 지나가려 하자, 청지기가 그 앞을 막아섰다.

“외람되지만, 아가씨께서도 부친의 품계 패를 보여주실 수 있으신지요?”

서우가 말했다.

“그 아이는 저와 일행입니다만.”

“올해부터는 초대된 본인 외에는 아무도 들일 수 없다는 분부가 내려졌습지요.”

“그랬소?”

“사람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자꾸만 집안 물건이 손을 타,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라 합니다요. 그러니 부디 이해를 해주십시오. 부러 사람을 시켜 알렸는데, 듣지 못하셨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들어본 것도 같고.”

서우가 머쓱한 표정으로 이레를 돌아보았다.

“어찌하지?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안 들어갈 수도 없고.”

“…….”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어쩔 수 없네. 집에 돌아가 잠시만 기다리련? 내 금방 돌아갈 테니.”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으니, 천천히 놀다 오려무나.”

결국, 이레는 홍 대감 댁 문턱을 넘지 못했다.

문전박대를 당한 이레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때문에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서우가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레는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마음이 상하진 않았다.

애초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또한, 오늘 같은 일이 익숙한 까닭이기도 하였다.

외면당하고, 버림받는 일.

이레에겐 전혀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떠들썩한 길을 홀로 외롭게 걸으면서도 이레는 서럽지 않았다.

오늘 밤 할아버지들과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노라니,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가볍기까지 하였다.

아참, 그런데 오늘은 단옷날이지.

어쩌면 다들 바쁘셔서 아무도 응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명절이나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에 대개 그러했다.

하지만 운이 좋다면 예할아버지는 뵐 수 있겠지?

상념에 빠져 걸음을 옮기던 이레가 문득 멈춰 섰다.

멍하니 먼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뜻밖의 장면이 들어왔다.

“저 사람은……?”

푸른 두루마기에 검은 갓을 쓴 사내.

오라버니가 분명했다.

과장되게 껄껄 웃고, 떠드는 모습은 김기대가 틀림없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오라비를 본 것은 의외이긴 해도 마냥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곁에 젊은 여인이 있다면 사정이 전혀 달랐다.

오라버니에게 여인이?

집안 어른들의 성화에도 언제나 일이 바빠 여인은 생각할 틈도 없다 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른 아침 일이 있어 나간 사람이 곁에 여인을 두고 있다.

단오가 이룬 화려한 거리의 모습에 녹아들 듯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모습은 지금까지 이레가 알던 기대의 모습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에서 그쳤더라면 조금 놀라긴 했어도 엉뚱한 마음까지는 품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속으로 오라버니를 응원하며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라비 곁을 꿰찬 여인의 행색과 미태가 범상치 않았다.

여염집 여인 같이 꾸몄으나, 말하는 본새와 손짓, 표정에 오묘한 기질이 숨어 있었다.

본능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사내의 관심을 끌고 시선을 잡아 붙드는 법에 능숙해 보였다.

갈등하던 이레는 결국 둘의 뒤를 몰래 따랐다.

적어도 어떤 여인인지는 알아보고 싶었다.

오라버니는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사내가 생기면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보여야 한다고.

사내는 사내가 봐야 정확히 아는 법.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여인도 여인이 봐야 정확히 아는 법이다.

들키지 않기 위해 온갖 수를 써야 했다.

때때로 엉뚱한 점포에 들어가기도 하고, 외길에선 부러 멀리 돌아갔다.

복잡한 곳에선 과감하게 바로 곁에 붙기도 하였다.

모두가 할아버지들에게 배운 것이었다.

상할아버지는 이따금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였는데, 그때마다 화와 예할아버지도 경쟁하듯 저마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할아버지들과 알고 지낸 기간이 무려 십 년.

그간 이레가 보고 기억한 내용은 절대 적지 않았다.

기대는 잡화전에 들러 장신구를 둘러보았다.

세책방에도 들르고, 떡전에도 잠시 들렀다.

오라비는 단오를 제대로 즐기는 사람 같았다.

적어도 겉보기엔 그랬다.

하지만 정작 그 뒤를 따르는 이레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찌 이리 정처 없이 걷기만 하는 걸까?

게다가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느낌이다.

어느 순간, 함께 한 여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떠올랐다.

웃고 있으나 그것은 그저 습관처럼 얼굴에 배여 있는 미소일 뿐.

할 수만 있다면 오라비에게 그만 좀 돌아다니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우연인 듯 스쳐 지나가며 한마디 해야겠다.’

여인과의 만남에 서툰 오라비가 허둥대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이리 정처 없이 걷는 것이 뻔했다.

결심을 굳힌 이레가 기대를 향해 다가갔다.

바로 그때였다.

부산하게 움직이던 기대가 갑자기 여인의 손을 강하게 잡아끌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제 눈치채신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레는 안심했다.

늦긴 하였지만, 이제라도 눈치챈 모양이다.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편히 쉬며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겠지.

그러나 정작 기대가 여인을 끌고 간 곳은 으슥한 골목이었다.

이쯤 되자 이레는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졸도할 지경이었다.

오라비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곳으로 간단 말인가.

안 되겠다, 말해 줘야지.

성급한 사내를 좋아할 여인은 없으니, 우선 정부터 차근차근 다져야 한다고.

하지만…….

이레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누이동생이라 해도 오라비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지 않은가.

이레의 망설임이 깊어질 때였다.

“무얼 고민하시오. 유인하듯 갔으니, 모르는 척 따라가야지.”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이레가 고개를 돌렸다.

죽사립을 쓴 선비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를 본 이레의 표정이 밝아졌다.

“선비님!”

장신의 선비.

그는 바로 은자원의 세 번째 은자인 서강율이었다.

“먼 곳으로 가셔서 당분간 오지 못한다 들었습니다. 언제 오신 겁니까?”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낭자의 모습을 보았다오. 반가워 인사하려 하였는데, 하는 양이 무척 흥미로워, 그만 무심코 뒤를 따르고 말았다오.”

이레의 두 뺨이 붉어졌다.

오라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한 온갖 행동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건…….”

“쉿!”

강율이 검지를 제 입술 위에 세웠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요. 늦기 전에 어서 들어갑시다.”

“네?”

강율은 어리둥절한 이레를 재촉하여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뜻밖의 광경이 두 사람을 기다렸다.

왈짜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기대와 여인을 포위하듯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기대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으나, 낯빛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바닥을 디딘 두 다리는 연신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무어냐고? 하하. 정녕 몰라서 묻는 거냐?”

“모르니까 묻는 것이 아니냐?”

“네가 가진 모든 것.”

“돈이라면 얼마든지 내어주마.”

“그건 당연하고.”

왈짜들이 음흉한 시선으로 기대의 곁에 있는 여인을 눈짓했다.

“그대가 가진 것이 돈뿐인 건 아닌 것 같은데?”

협박하고 위협하는 왈짜들의 기세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다급해진 이레가 오라비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강율이 급히 그녀를 말렸다.

“잠깐만.”

이레가 의문 어린 시선을 던지자, 그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내 짐작대로라면 곧 흥미로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오.”

“흥미로운 광경이라 하셨습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냥 떨기만 하던 기대의 얼굴에 돌연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들킨 건가?

이레는 오라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기대가 바라본 곳은 그녀가 있는 곳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때마침, 먼 곳에서 술시(戌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

북소리와 함께 좁은 골목 끝에서 한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이레의 눈동자에 낯익은 얼굴이 맺혔다.

며칠간, 그녀를 끝없는 자책과 고민에 빠지게 한 사내.

형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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