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8화 (8/215)

#8. 내 이놈의 서탁질을 끊든가 해야지, 원

그곳은 지극히 어두웠다.

높은 곳에 난 창문 틈으로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었지만, 동굴의 석주처럼 크고 단단해진 실내의 어둠을 부수기엔 역부족이었다.

거대하게 똬리 튼 어둠이 희미한 빛을 집어삼켰다.

그 사내가 있을 때면 언제나 이랬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창엔 덧문까지 내려져 있었다.

고작 희미한 등잔 하나만을 밝힌 채, 작은 동산처럼 쌓인 책더미 속에 숨은 듯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기만의 세상에 넘어오지 말라 확연히 경계를 긋는 듯했다.

이형운이라 하였던가.

은자원을 드나들며 귀동냥으로 알게 된 사내의 이름.

이 낡은 전각에 배속된 세 명의 은자 가운데 하나.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찌 생겼을까?

무엇 때문에 저리 도망치듯 어둠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걸까?

어찌하여 자위처럼 가시를 잔뜩 세운 채 세상을 경계하는 것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워낙 아는 것이 없었고, 알 방도도 생각나지 않았다.

갖가지 이유로 이곳을 찾은 것이 여러 번이건만, 여태 사내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마치 숨기로 작심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었다.

비록 입 밖으로 제 뜻을 밝히진 않으나,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고 기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내가 이곳에서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평온이리라.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온종일 불안하고 갑갑하여도 서탁 앞에 앉아 붓을 들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았던가.

어쩌면 사내 또한 이곳에서 그런 것을 느끼고 있으리라.

이 은자원이 사내에겐 유일한 안식처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은자들의 낙원, 은자원.

문득, 저 사람이야말로 이곳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레는 사내의 평온이 부디 깨지지 않길 바랐다.

더불어 기대가 어서 은자원으로 돌아오길 염원했다.

사실, 말 없는 사내와 한 장소에 있는 것만큼 거북하고 어색한 일도 없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들릴 만큼 고요한 은자원에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도 내뱉는 것도 자유롭지 않았다.

오라비는 언제 올지 기약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라비도 보지 않고 돌아간다면, 할머니의 매운 눈씨와 마주할 터인데.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밖에서 기다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별세계.

율법과 체계에 의해 안과 밖이 엄격하게 구별되는 세상 속의 또 다른 세상이었다.

곳곳에 보이지 않는 눈이 지키고 있었고, 사방에 창칼이 도사리고 있었다.

내딛는 한걸음에 생(生)과 사(死)가 오고 갔다.

그러니 아무리 불편하다 하여도, 비록 어색함에 연신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인다 해도 이곳에 얌전히 있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방이 어둡고, 사내는 내내 등만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 좋았다.

여기선 무얼 해도 나무라거나 예의에 어긋났다 탓하지 않았다.

이레는 자리에 앉아 턱을 괬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언제나처럼 책장 가득한 서책들을 겉눈으로 훑으며 시간을 보냈다.

기대는 이곳의 출입은 허락하였어도 그 외의 행동은 허락하지 않았다.

가령 서책의 제목을 읽는 건 가능해도 내용을 보는 건 금했다.

탁자 위에 쌓인 두루마리는 거들떠보지도 말라 하였다. 행여 작은 것이라도 은자원의 물건이라면 절대 만져선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

지금까지 그 당부를 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그리 대단한 물건도 아니었다.

번쩍이는 금붙이도 아니고, 화려하거나 귀해 보이는 보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작은 머리꽂이.

낡은 태가 고스란히 담긴, 제비꽃 모양의 장식이 달린 머리꽂이었다.

남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물건일지 모르나, 이레에겐 달랐다.

낯선 자들에게 납치되어 큰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손발의 결박을 풀게 한 구명의 도구.

그리고 어머니께서 주신 유일한 선물이기도 한 보물.

도망치는 와중에 잃어버려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른다.

그때 잃어버린 제비꽃 머리꽂이와 똑같이 생긴 머리꽂이가 놀랍게도 그 사내의 책상 위에 있었다.

언제 몸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 그곳에까지 걸어갔는지도 기억이 희미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형운의 어깨너머로 손을 뻗어 머리꽂이를 쥐려는 제 모습이 보였다.

그때 멈췄어야 했다.

오라비의 당부를 떠올렸어야 했다.

은자원의 출입은 허락하였으나, 그 어떤 물건도 만져서는 안 된다는 말을 기억해내야 했다.

관심을 가져서는 더더욱 안 되거늘.

오라비의 당부를 처음으로 어겼다.

그 대가를 아프게 깨달았다.

“아니 되오!”

명백한 거부와 함께 날카로운 손끝이 이레의 손을 쳐냈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아!”

목덜미를 따라 낮은 신음이 역류했다.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보니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급작스런 사태에 몸이 굳어버렸다.

서책이 머리 위로, 얼굴 위로, 몸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벽이 무너지듯, 단단한 나무로 만든 책장이 떨어졌다.

그 순간 어이없게도 이레는 이 책장은 무슨 나무로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을 떠올렸다.

저리 튼튼하고 무거워 보이는 걸 보면 틀림없이 평범한 나무는 아니리라.

생각의 그물은 떨어져 내리는 서책을 향해서도 펼쳐졌다.

저리 사정없이 떨어지면 분명 상하고 찢어질 터인데.

저 많은 서책은 누가 다 정리하려나.

마지막으로 별채, 자신의 처소에 있는 서탁을 떠올렸다.

할아버지들께 작별인사도 못 했는데.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저승에 가지 못하고 백귀로 남게 된다면 서탁에 머물러야지.

할아버지들과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

그래, 불손.

그 오만한 백귀도 있었지.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불손을 보지 못했다.

행여 다음에 만나면 다투지 말고 잘 지내보자 해야겠다.

넝쿨처럼 뻗어 나가는 생각을 정리하며 이레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거친 숨결이 그녀에게 바싹 다가왔다.

그 사내였다.

그저 고개를 조금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부드럽게 묻는 말엔 매서운 냉기로 되받아치던 바로 그 사내, 이형운이었다.

그가 돌연 눈앞으로 달려와 파도를 막듯 두 팔을 벌렸다.

책과 책장이 형운의 등으로 곧장 쏟아졌다.

요란한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세상이 흔들렸다.

뜻하지 않게 그와 한 덩어리가 되어 격류에 휩쓸리듯 사정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어지럼증이 일었다.

낯선 이명이 귀를 아프게 두드렸다.

잠시 고통 속에 시간이 멈춰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와글거리던 머릿속이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귓속의 이명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혼란은 느리지만, 썰물처럼 확실하게 밀려나겠다.

그 빈자리를 아픔과 통증이 대신 채웠다.

그러나 그런 감각조차 다음에 들려온 한마디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괜찮소?”

이마 위로 떨어진 목소리.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니…….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곳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

숨이 턱 막혔다.

그의 눈을 본 순간,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작은 개미들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 간질거렸다.

저도 모르게 손과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입안에 마른침이 가득 고였건만, 행여 그에게 들릴까 두려워 차마 삼킬 수 없었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두 팔로 몸을 감싸야 하나?

그것이 아니면 사내와의 간격을 조금이라도 넓히려 애써야 할까?

뭐라 말해야 하나?

이럴 때 다른 여인들은 어찌하려나?

비명을 지르는 게 정상일까?

아니, 이제 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무색하니, 그럼 안부라도 물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고개부터 돌려야 할까?

고민이 끝없이 이어졌다.

생각은 하염없이 깊어졌다.

이리 경황없는 와중에도 이레의 시선은 한 곳에 박혀 있었다.

사내의 서늘한 눈동자.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맑고 투명한 눈 속에 깊은 바다가 담겨 있었다.

태양이 잠자고 있었고, 하늘 밖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아득하고 신비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눈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의 눈에 삼라만상이, 작은 우주가 담겨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그의 눈은 한없이 정제되어 있었다.

그것은 얼음처럼 마냥 차가운 냉기가 아니었다.

타오르는 불꽃으로 수없이 달구고 담금질하여 마침내 형태를 갖춘, 그리하여 불의 뜨거움을 품은 지극히 서늘한 결정체.

봄 연못 위에 그려진 푸른 달빛 같았다.

눈으로 뒤덮인 새하얀 벌판 위를 도도히 넘어서는 한겨울의 붉은 태양 같았다.

이질적이면서도 강렬한 힘을 품은 눈빛에 매료되었다.

사내의 눈이란 원래 이런 것일까?

아니면 이 사내의 눈이 특별한 것일까?

그의 눈동자엔 들끓는 생기와 서늘한 서글픔이 공존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처럼 함께할 수 없는 양면의 성질을 모두 품을 수 있는 걸까?

특이한 것은 눈만이 아니었다.

사내의 눈썹 또한 명필의 온갖 기교를 담은 듯 시선을 사로잡았다.

부드럽게 뻗어 강하게 마무리된, 무심한 듯 그어 내린 일 획.

더운 여름날, 툇마루에 누워 하늘을 보았을 때 그늘을 드리워주는 처마를 떠올랐다.

시원하게 뻗은 콧날은 반듯하여 거칠 것이 없어 보였고, 살짝 고개만 틀어도 닿을 듯한 그의 입술은 하얀 눈밭에 피어난 매화꽃처럼 아련했다.

그 입술이 벌어지며 물었다.

“……괜찮소?”

그의 목소리에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도원향에 취했다 돌아온 듯 묘한 아쉬움에 미처 답을 하지 못했다.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소?”

형운이 다시 물었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보다…….”

정신 차리자.

책더미에 깔렸는데, 엉뚱한 생각이나 하다니.

스스로를 질책하며 이레는 형운을 살폈다.

“나는 괜찮소.”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한 짓을 했다.

최소한 손을 뻗기 전에 허락부터 구해야 했다.

“……신경 쓰지 마시오. 나도 잘못한 것이 있으니.”

형운은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러다 뒤늦게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그때 머리꽂이를 잡으려 한 것이오?”

“그건…….”

이레가 입을 열었다.

바로 그때였다.

“음…….”

형운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등을 짓누른 책장이 기우뚱 불안하게 흔들렸다.

툭툭.

서책 떨어지는 소리가 위태롭게 들렸다.

이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넘어진 책장은 크기와 무게가 상당하여 사내 혼자서 감당할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바닥으로 쏟아진 책더미가 굄돌 역할을 하여 두 사람이 무사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우연히 벌어진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작은 움직임에도 균형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한가하게 머리꽂이 이야기나 할 때가 아니다.

그녀의 속내를 읽은 듯 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견디고 있으나, 언제 위험해질지 알 수 없소. 몸을 움직여 나갈 수 있겠소?”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레는 바로 누운 채, 어깨와 발로 몸을 밀며 움직였다.

형운의 두 팔 사이의 무척 비좁은 공간뿐이라, 움직이기가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슬쩍슬쩍 팔과 무릎이 형운에게 스치듯 닿았다.

그때마다 깜짝깜짝 자라목이 되는 통에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당황한 것은 이레만이 아닌 듯했다.

형운도 고개를 돌린 채, 애써 지금의 상황을 참아내는 모습이었다.

“……되었습니다.”

간신히 틈바구니를 빠져나온 이레는 책장이 무너진 형태를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당장에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잠시만 견디십시오.”

이레는 의자를 끌고 와 비스듬히 누운 책장 아래에 괴듯이 받쳤다.

“이제 나오십시오.”

이레가 형운에게 팔을 뻗었다.

“내가 움직이면 틀림없이 책장이 무너질 것이오. 차라리 사람을 불러오는 것이…….”

“그러면 늦습니다. 절 믿으십시오.”

확신 어린 이레의 말에 형운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중에 마주쳤다.

“…….”

형운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둘의 손이 맞닿았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생경하면서도 짜릿한 감촉이 손바닥을 거쳐 손목으로 이어졌다.

이레는 형운의 손을 두 손으로 꽉 맞잡았다.

절대 놓지 않으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이 순간, 맞잡은 손을 내어주지 않으리라.

그리고 온 힘을 다해 팔을 당겼다.

처음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던 형운도 끌어당기는 이레에게 호응하며 전력을 다해 몸을 던졌다.

와르르.

불안한 균형이 기어이 무너지고 책더미가 쏟아졌다.

굄돌 역할을 하던 서책이 허물어지자 그 위에 걸쳐진 책장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바닥으로 무너질 것만 같았던 책장 끝이 이레가 괴어둔 의자 좌판에 부딪히며 사납게 요동쳤다.

그 잠깐의 틈에 형운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괜…… 찮으십니까?”

다시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구른 이레가 형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괘, 괜찮소.”

형운이 고개를 돌린 채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조건 괜찮다 하지 마시고,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찬찬히 살피십시오. 그 무거운 것을 등으로 받치고 계셨으니, 아프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큰 일입니다.”

“나는 정말 괜찮소. 그보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게 아니면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우리의 모습이…….”

“네.”

“많이…….”

“네?”

말 대신 형운은 제 가슴께로 시선을 내렸다.

이레의 고개가 그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이동했다.

곧 형운이 말한 모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레가 누워있는 형운의 가슴을 짚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묘하고 괴이한 모양새에 이레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놀란 신음이 채 사라지기 전.

설상가상(雪上加霜).

은자원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어두컴컴한 것을 보니, 음침한 친구가 있는 모양이군. 대체 언제쯤 도깨비 같은 짓을…….”

평소처럼 왁자하게 은자원을 들어서던 기대가 돌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무슨 일인가?”

바닥은 쓰러진 책장과 나동그라진 서책들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사내와 여인의 모습.

기대는 입을 다문 채 졸린 황소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다 이내 입가를 길게 늘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런이런, 미안하네. 내가 눈치가 없었으이.”

까치발을 한 기대가 뒷걸음질로 살금살금 밖으로 몸을 뺐다.

“허허, 이런 일이 있으면 밖에 패라도 걸어둘 것이지. 그나저나 보기와 다르게 꽤 격하게…… 아닐세. 나는 아무것도 못 봤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마저 하시게.”

휘휘, 허공에 손까지 흔들어 보인 기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마저 슬그머니 닫고 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닫힌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의 기대가 다시 은자원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너. 이레 아니냐?”

***

북악산 자락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눈앞을 날리는 꽃잎은 시리도록 곱건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봄 나비의 팔랑거리는 나부낌도, 벽오동 나뭇가지에 앉은 새의 지저귐도 들리지 않았다.

별채로 돌아온 이레는 한동안 넋 나간 사람이 되어야 했다.

머릿속이 혼탁했다.

“하아…….”

입을 열면 나오는 건 한숨이요, 초점 잃은 눈에 떠오르는 건 온통 은자원에서의 사건이었다.

“내가 정신이 나갔구나. 음란한 마귀에라도 쓰인 모양이구나.”

잡생각을 잊으려 서책을 들여다보아도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귀가 쓰인 거다.

하루가 안절부절못한 채로 지나갔다.

거머리처럼 질기게 달라붙는 기억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

그저 부끄럽고, 낯뜨거워 쥐구멍에라도 숨고만 싶었다.

단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인지라.

가슴이 답답했다.

늦은 밤, 이레는 동창을 열고 서탁 앞에 앉았다.

밝은 달빛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그녀는 붓을 들었다.

-오늘은 여쭙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곧 상할아버지의 대답이 돌아왔다.

-넌 뭐 이리 궁금한 것이 많은 것이냐?

상이 말하자, 곧 화의 글도 뒤따랐다.

-필체가 흔들리는 걸 보니,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예가 자상하게 화의 글에 덧붙였다.

-무언데 그러느냐? 말해보아라.

이레는 잠시 붓을 들고 망설였다.

은자원의 일을 어찌 전할까 고민되었다.

아무리 할아버지들이라도 모든 일을 고스란히 전하기에는 부끄러움이 컸다.

-실수하고 잘못한 일이 자꾸만 떠올라,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할아버지들께선 어찌 대처하시나요?

이번에도 상의 대답이 가장 빨랐다.

-난 실수 따윈 하지 않는다. 실수가 있다면 그건 날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누군가의 잘못이겠지.

화가 못 말리겠다는 듯 낮게 혀를 찼다.

-그것이 나의 실수로 기인한 것이면 내 성장의 초석으로 삼을 것이고, 남의 고의로 그리된 것이면 뒷일을 준비하여야겠지.

예할아버지가 점잖게 조언했다.

-아이야, 부적을 쓰거라.

“하아.”

이레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언제나 원하던 답을 내어주던 할아버지들도 오늘만은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신다.

애초에 하고픈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답을 구할 리 만무했다.

이레의 고심이 깊어질 때였다.

종이 위에 어지럽게 휘갈겨 쓴 글이 나타났다.

-사내 문제냐?

이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필체였다.

대체 이 서탁엔 얼마나 많은 백귀가 깃들어 있는 걸까?

그보다 이 글은…….

-처음 뵙습니다. 한데, 흘겨 쓰신 글귀라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어라 쓰신 것인지요?

다른 할아버지들과 달리 이분의 글은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필이라 알아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글이 사라지기 무섭게 답이 달렸다.

-눈은 제대로 달린 것이냐? 이걸 어찌 못 알아봐?

따지는 듯한 글에 대답한 것은 이레가 아니었다.

상할아버지였다.

-내 살다 살다 이런 악필은 처음 본다.

-어디다 대고 악필이라는 것이냐? 내 살다 살다 악필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구나. 이 호랑 말코 같은 놈. 너 누구냐?

-어르신께 존함을 물을 때 자신의 이름부터 밝혀야 한다고 배우지 못하였더냐? 글만 바르지 못한 게 아니라, 심성도 바르지 못하구나. 고얀 놈. 너야말로 누구냐?

-나? 내가 누구냐고?

서탁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이레도 긴장한 얼굴로 종이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새로 나타난 백귀의 정체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잠시 후, 천하의 둘도 없을 악필이 다시 떠올랐다.

-왕.

-왕?

상이 물었다.

-이 조선의 왕이다.

악필의 대답에 이레는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휴우.”

곧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예와 화의 글이 종이 위에 떠올랐다.

-또 왕이로군.

-개나 소나 다 왕이라지.

상의 투덜거림이 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내 이놈의 서탁질을 끊든가 해야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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