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어이한다
간밤에 유성이 떨어졌다.
그 때문인지 새벽부터 유난히 안개가 짙었다.
너울처럼 밀려든 안개가 창을 넘어 바닥을 채웠다.
사락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이어지던 실내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서책을 보던 형운이 고개를 들어 무엄한 침입자를 굽어보았다.
얕은 호흡에도 찰랑이는 안개의 흐름이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오가는 것만 같았다.
그 희뿌연 유혹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형운의 마른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날도 이러했지.”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날도 무리한 일정을 간신히 견뎌내고 있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이어진 쉴 틈 없는 일과에 창백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때로, 지나친 정성이 도리어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물을 너무 많이 준 화초가 잎끝부터 노랗게 타들어 가는 것처럼.
그렇게 너울진 침묵 속에 아픈 비명조차 토하지 못하고, 삭풍에 바스라지 듯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창을 타고 넘어오는 밤안개를 보게 되었다.
낮부터 유달리 날이 궂었다.
켜켜이 쌓인 먹구름이 너른 하늘을 온통 메우더니, 끝내 땅속 깊은 곳에 숨은 은자를 끄집어냈다.
안개는 자주 보았다.
그러나 깊은 밤, 창을 되짚어 넘어오는 것은 처음 보았다.
폭포를 거스르듯 높은 창을 넘어오는 모습이 참으로 장하게 느껴졌다.
바닥을 메운 안개가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도화경의 아득한 신비로움이 이러할까?
손을 뻗어 움켜쥐려 하였다.
정작 펼친 손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존재하되, 가질 수 없는 존재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야무(夜霧)야.
형체도 의식도 없는 너일진대, 정작 너의 걸음은 거칠 것이 없구나.
햇살에 허무하게 흩어질 운명을 알면서도 그 짧은 생을 무한한 춤으로 풀어내고 있구나.
야무야, 너는 어디를 가느냐.
어느 곳을 보고 있느냐.
너는 외톨이더냐, 무리이더냐?
함께할 벗은 있느냐?
외롭지 않으냐?
아침이면 스러질 네 삶이…… 허무하지 아니하냐?
부럽구나.
너와 함께 네가 가는 곳으로 함께 흘러가고 싶구나.
밤안개를 거스르다 창밖에 시선이 매였다.
먹구름 가득하여 별조차 찾아볼 수 없는데, 때마침 둥근 달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그 모습이 빠끔 열린 동창 너머로 방안을 훔쳐보는 눈길 같아 수줍고도 또 설레었다.
탄성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달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리하여 시샘하는 구름이 마침내 달의 마지막 자취마저 삼켜버렸을 땐, 탄식하였다.
그렇게 내 작은 일탈이자 유희도 끝이 난 줄 알았다.
서탁으로 돌아와 서책을 정리하다 바닥에 펼쳐놓은 종이 위에 흘려 쓰인 글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오늘은 유난히 안개가 짙습니다. 제 무릎까지 차오른 안개를 보자니, 마치 바다 위를 유영하는 것만 같습니다.
삐뚤빼뚤.
크기도 제각각인 글씨.
분명 아이의 글이었다.
자신도 가르치는 스승에 비하면 많이 미숙하지만, 종이 위에 쓰인 낯선 글귀는 그보다 훨씬 어리고 자유분방하여 읽기 힘들 때조차 있었다.
누군가의 장난이리라.
처음엔 그리 생각했다.
방을 비운 적이 없거늘, 누가 이런 글을 써 놓았을까?
어느 틈에 쓰고 간 것일까?
무슨 의미일까?
종이 위에 쓰인 낯선 글을 그저 누군가의 짓궂은 유희라고만 여겼다.
먼저 쓰인 글이 운무처럼 흩어지고, 새 글이 나타날 때까지는.
-밤안개가 짙어집니다. 예전 같으면 무서워했겠지요. 이젠 다릅니다. 할아버지들과 함께 있다 생각하니, 두렵지 않습니다. 별 뜻이 있어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할아버지들이 계셔서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허깨비로다. 귀신이 농간이 아닌가.”
쓰는 사람이 없다.
갈아놓은 먹은 연못처럼 짙게 가라앉아 있었고, 붓 또한 깨끗하게 빨아놓았다.
쓰는 사람도 없고, 먹을 찍은 붓 또한 쓰이지 않았건만.
종이 위에 절로 검은 흔적이 번지고 춤을 춰, 글을 이룬다.
이것이 귀신의 농간이 아니면 무엇일까.
불길했다.
삿되고 요사하여 가까이하여서는 아니 될 물건이다.
그런데…….
-오늘 할머니께 혼났습니다. 제가 또 무언가 못난 모습을 보인 모양입니다.
알아보기도 힘들 게 쓰인 이름 모를 아이의 이야기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부단히 노력하여도 한없이 부족하니. 이대로 영영 할머니 마음에 들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어이해야 할머니께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담담히 털어놓는 아이의 이야기에 마음이 동하고, 가슴이 아팠다.
백귀야, 너는 할머니가 엄하신 모양이구나. 내게도 무서운 할아버지가 계시느니. 내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와 매번 맞서니. 나는 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구나.
사랑받을 방법을 물었느냐?
어이하면 그분들 마음에 들까 고민하느냐?
나도…… 그러하구나.
나도…… 나도…… 알고 싶구나.
백귀의 글 위에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차마 그 광경을 남이 볼까 두려워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였다.
-구름이 짙어서인지 달님이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네요. 할아버지들의 대답을 듣기 어려운 건 그 때문인 모양입니다.
아. 가려는구나.
아쉽고 또 아쉬웠다.
나도 모르게 붓을 들어 글을 썼다.
-잠깐, 물어볼 것이 있느니.
하지만 서로 사는 세계가 달라, 나의 글은 저 너머에 닿지 않았다.
종이 위에 앞서 적힌 글이 그러하듯, 백귀의 마지막 인사말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가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나직한 호통에도 가버린 글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문 모를 아쉬움과 비통함이 가시처럼 전신을 찔러왔다.
간신히 굴레를 벗고 고개를 들었더니, 방 안을 가득 채운 밤안개도, 아이의 글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꿈을 꾸었나 보다. 피곤하여 망상을 그려냈는가 보다.”
혼잣말로 자위하였다.
그러나 혹여나 하는 마음에 글을 써보았다.
무정한 서탁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너른 여백 위에 크고 거칠게 내려쓴 가지 말란 글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후로, 한동안 백귀를 만나지 못하였다.
태양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달이 둥글어졌다 이지러졌다.
계절은 빠르게 피었다 지길 반복했다.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일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백귀와의 만남은 어린 가슴에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누군가 나처럼 외롭고, 나처럼 아프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마음 한쪽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그리하여 삼 년 후 어느 밤, 밤안개와 함께 서탁의 글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헤어진 동무와 재회한 것처럼 마냥 기쁘고 반가웠다.
아이는 그새 많이 자란 듯하였다.
필체도 안정되었고, 말하는 본새에도 큰 태가 배어 있었다.
귀신은 영영 자라지 않는 줄 알았더니, 그도 아닌 모양이다.
아무렴 어떠한가, 다시 만나 이리 기쁜 것을.
-잘 있었느냐?
안부를 물어도 답은 없었다.
여전히 나의 말과 뜻은 그곳에 닿지 못하였다.
나는 이리 반가운데, 정작 백귀는 나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니.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다.
잠시나마 마음을 빼앗긴 것을 후회하고 반성하였다.
살아있는 자가 귀의 세계를 엿보았으니, 이미 천지간의 이치에서 벗어남이 아닌가.
정신을 다잡아야지.
마음을 경건히 하고, 부동하여 흔들리지…….
-어제 제 오라버니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사모하는 여인이 있다고요. 그 이야기를 친우에게 털어놓은 모양인데, 그만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오라버니와 함께 학당을 다니던 악동이 있답니다. 놀기 좋아하고 방탕한 자인데, 오늘 오라버니가 사모하는 여인에게 연서를 주었다지 않습니까. 소식을 들은 오라버니는…….
……평정은 다음에 찾자.
성현께서 말씀하시길, 때로 휴식도 필요하다 하지 않았던가.
아이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넋을 놓았다.
때로 감탄하고, 때로 탄식했다.
미처 읽지 못한 이야기가 아쉬웠고 만나지 못한 날들은 원통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뒤늦게 후회하였다.
읽어야 할 서책이 산더미요, 익혀야 할 말씀이 하해와 같을진대, 백귀의 희롱에 빠져 그만 금쪽같은 시간을 내어주고 말았구나.
이번은 당하였으나 다음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굳게 다짐하였다.
그 후로 몇 주, 몇 개월에 한 번 서탁의 글을 만났다.
인간의 의지와 신념이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서탁을 통해 배웠다.
서탁은 현혹에 능하여 그 어떤 다짐도 봄 눈 녹이듯 흩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르니, 한편으로는 꺼려지면서도 서탁의 아이를 귀여운 누이처럼 친근히 여기게 되었다.
때로, 아이의 오라비란 사내가 부럽고, 어느 날은 어찌하여 서탁의 글을 매일 볼 수 없는지 초조하고 궁금하였다.
그렇게 남의 이야기에 울고 웃던 날들이었다.
과거를 떠올린 형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설마, 백귀가 죽은 귀신이 아니라 산 자였을 줄이야.”
대광통교의 만남, 양화사의 사건을 거치며 그간 그가 믿은 모든 생각과 관념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말았다.
“서탁의 글이 백귀의 소행이 아니라면, 왕이라 자처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서탁과 관련된 의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저하, 하궐의 명을 따르실 시간이옵니다.”
방 밖에서 조심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형운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벌써 그리되었는가?”
“오늘은 곤하니 쉬시는 게 어떨는지요?”
형운은 문밖에 드리운 최 내관의 굽은 그림자를 응시했다.
“이제는 나만 보면 쉬라쉬라, 노래를 부르는구나.”
“이 늙은이가 그리 아뢰어도 단 한 번도 쉬시질 않으시니. 정말 노래라도 지어 지겹게 부르고 싶나이다.”
내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단단하게 굳은 형운의 눈가가 조금 여려졌다.
그러나 이내 본연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형운은 엄격한 음성으로 명을 내렸다.
“환복하라.”
* * *
형운은 곤룡포를 벗고 예조의 하급 관리로 탈바꿈했다.
“다녀오마.”
엎드린 최 내관에게 말하며 문을 나섰다.
문밖엔 최치성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세손의 곁을 지킨 배동이자, 호위무사였다.
형운이 이곳을 나가면 최치성은 방으로 들어가 그가 벗어놓은 곤룡포에 절을 올린 후, 예를 갖춰 입을 것이다.
그리고 세손이 은자원의 일을 끝낼 때까지 그를 대신해 가짜 세손이 될 것이다.
한 나라의 세손이란 장차 왕이 될 존귀한 존재.
하지만 동시에 다른 왕족의 경계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사방에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고, 헛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세손의 흠결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 자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런 자들이 은자원으로 걸음 하는 것을 눈치챈다면…….
할바마마의 불호령은 당연했다.
온갖 상소가 빗발칠 것이고, 사대문 밖은 읍소하는 유생들로 장사진을 이룰 것이다.
상상만으로 진저리가 쳐졌다.
아바마마께선 이런 사실을 아시는지 모르는지.
그저 무심히 명을 내릴 뿐이다.
명을 내리시되, 자세한 연유와 방법은 아니 말씀하신다.
매번 방도를 계책 하는 것은 형운의 몫으로 돌아왔다.
세손궁을 나선 형운은 은자원으로 걸음 했다.
낡은 전각으로 갈 때마다 매번 신경이 곤두섰다.
떳떳지 못한 걸음인지라.
궁궐을 지키는 호위와 군사들의 동선은 물론이고, 궁인들의 일과까지 고려하여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움직여야 했다.
작은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습관 탓에 그 모든 것을 헤아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규룡의 비늘 같은 처마 아래, 뱀의 허리 같은 길을 걸어 마침내 궁의 경계를 넘었다.
곧 외진 구석에 자리한 전향사 소속의 전각이 나타났다.
은자원.
처음엔 한 사람이 장난삼아 붙인 이름이었지만, 이젠 아는 사람 모두가 이 이름 없는 전각을 은자원이라 칭했다.
형운은 낡은 신음을 흘리는 문을 열고 은자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과 문을 모두 닫았다.
빛이 사라지자 비로소 안식 같은 고독이 밀려들었다.
처음엔 낯설고 싫기만 했던 이곳이 이제는 서탁과 더불어 수옥처럼 갑갑한 일상에 작은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외부와 통하는 모든 통로를 차단한 형운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서책냄새와 함께 파도처럼 서서히 밀려오는 침묵.
이곳에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이곳에선 온전히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
숨 쉬고, 만지고, 걷고, 말하고, 보는 그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요, 온전한 나의 결정이다.
비록,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이라 하나 바람을 타고 나부끼는 것마냥 시원했고, 깊은 바다를 유영하듯 자유로웠다.
오수(午睡)처럼 달콤한 찰나의 유희.
짧은 여유를 만끽한 그가 감은 눈을 뜨고 어둠 속을 더듬었다.
높은 곳에 달린 창으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에 의지해 간신히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유등을 밝혔다.
희미한 빛이련만.
눈동자를 파고드는 노르스름한 등잔 불빛이 불편하였다.
숨어버리듯 곧장 책더미 아래로 고개를 파묻었다.
단 며칠의 부재,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일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추하고 역한 이야기를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꾹꾹 누르며 읽어내려간다.
사내의 노름빚에 처자식이 팔렸다.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벗들이 쌀 한 되 때문에 서로를 죽였다.
자식이 재산 때문에 부모를 독살했다. 어린 여식을 겁간한 상전을 때려죽인 노비는…….
목구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그 모든 불편을 애써 속으로 삭이며 정리를 계속했다.
수북하게 쌓인 일감을 모두 처리하자, 비로소 그가 고대한 사건이 나타났다.
두툼한 두루마리 뭉치.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치자, 그 속에서 낡은 머리꽂이가 나왔다.
연보랏빛 제비꽃 머리꽂이였다.
두루마리는 제비꽃 머리꽂이와 관련한 보고서였다.
탁했던 형운의 눈빛이 맑아졌다.
그는 빠르게 보고서를 읽어내려갔다.
제비꽃 여인이 납치당했던 이유.
착오와 오해로 인한 사고였다.
그러나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명예살인.
집안의 명예를 위해, 가문의 위신을 위해 강요된 자살.
덧없는 욕심과 허망한 욕망이 불러온 잔인한 한 편의 광대놀음.
“제아무리 집안이 중하다고 하나, 죄 없는 며느리를 희생하여 사리와 사욕을 채우려 하다니.”
정식으로 조사해야 할 사안이었다.
형운은 낙관을 찍어 사건을 어사대로 넘겼다.
이것으로 일을 도모한 가문은 뿌리까지 뒤흔들리게 될 것이다.
관련된 자가 관인(官人)이면 삭탈할 것이고, 직접 일을 꾸민 자의 후손은 두고두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일벌백계(一罰百戒).
이번 일이 알려지면, 죄 없는 사람을 이용하여 가문의 영달을 획책하려는 사특한 짓거리도 조금은 수그러들겠지.
운 좋게 살아남은 과부를 배려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사건의 정리를 마친 형운은 남은 두루마리를 꼼꼼하게 살폈다.
일은 잘 마무리되었지만, 궁금증이 모두 풀린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제비꽃 여인에 관한 내용이 궁금했다.
오래 알고 지내는 사이면서도, 매번 엇갈리기만 하는 그녀.
보고서 어딘가에 그녀에 대한 정보가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없었다.
그 어디에도 그가 찾는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십여 년 전에 양화사에 자주 방문하였던 노인의 손녀라는 것이 전부였다.
이름도 집안도 알려지지 않았다.
여인의 조부와 친분이 있었다는 승려는 몇 해 전에 입적하였다 했다.
“그 여인의 얼굴을 본 사람도 있고,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도 있건만. 정작 어디 사는 뉘인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니. 사람인지 귀신인지, 도통 분간할 수가 없구나.”
어깨가 절로 축 늘어졌다.
형운이 맥빠진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삐걱.
새된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빛에 형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그 자인가?’
고요한 은자원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사내.
일하는 모습보다 등 돌린 채 자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던 사내.
행동보다 늘 말이 앞서는 수다스러운 사내.
타인과의 접촉을 조심하는 형운에게 불쑥불쑥 다가와 귀찮게 구는 사내.
불량 관원 김기대.
형운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열린 문을 응시했다.
그의 신경이 곤두섰다.
이내 문이 닫히고 자박자박 차분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볍고 조심스러운 걸음.
김기대가 아니다.
‘그녀다.’
김기대가 몰고 온 불청객.
이름이 이레라 하였던가.
무엄하게도 김기대는 외인(外人)에 불과한 제 누이를 이따금 이 은밀한 공간으로 불러들이곤 하였다.
당장 죄를 묻고 삭탈관직할 일이나, 숨겨야 할 것이 많은지라 여태 잠자코 있었다.
그런 형운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여인은 예의 차분한 음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형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인과의 만남은 그에겐 어색하고 불편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시오?”
“지방을 다녀오신 오라버니께서 급한 용무로 집에 들르지 못하고 곧바로 입궐하신다고 서찰을 보내셨습니다. 하여,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는데…….”
“이곳엔 오지 않았소. 집으로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보고를 위해 다른 곳에 갔을 것이오.”
“그렇군요.”
자분자분 대답한 그녀는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히 걸음을 옮겨 제 오라비의 자리에 앉았다.
오라비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모양새다.
형운의 낯빛이 흐려졌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 둘만 오롯이 있자니, 주위의 공기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다.
숨 쉬는 것조차 신경 쓰였다.
어색함을 풀고자 그는 쥐어짜듯 말을 건넸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이곳은 지독히 어두워, 밝은 곳에 있던 자는 들어와 한참을 헤매는데. 낭자는 어찌 헤매지 않고 바로 자리를 찾는 것이오?”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한 대답이 들려왔다.
“창문에 덧창이 내려져 있으니, 실내가 어두울 것은 자명한 일. 하여, 들어오기 전에 한쪽 눈을 감고 수를 헤아립니다. 꼭 스물을 세고 문을 열고 들어온답니다. 그런 다음 밖에서 감았던 눈은 뜨고, 밖에서 뜬 눈은 감습니다. 그리하면 어두운 곳에서도 바로 앞을 볼 수 있답니다.”
“눈 한쪽을 미리 어둠에 익숙하게 한단 말이로군.”
“그런 것이지요.”
허를 찔린 듯 형운은 잠시 멍해졌다.
어둠을 대비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김기대와 같이 엉뚱하고 무능력한 자에게 어찌 저리 현명한 누이가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하기만 하였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자니,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에 여기까지 왔을까?
저만치 있어야 할 여인이 형운의 바로 등 뒤에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오?”
형운의 입에서 당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거…….”
이레의 시선이 형운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이 머리꽂이, 제가 아는 것과 비슷하여…….”
그녀의 손이 스스럼없이 뻗어왔다.
섬섬옥수가 향한 곳엔 제비꽃 머리꽂이가 있었다.
지난 사건의 유일한 증거이자, 이름조차 모르는 서탁 속 여인의 증표였다.
***
“아니 되오!”
의도는 없었다.
그야말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형운은 제비꽃 머리꽂이로 향하는 이레의 손을 쳐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머리꽂이만은 누구의 손도 타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탁!
차가운 거부(拒否)의 손짓에 이레가 비틀거렸다.
위태롭게 쌓인 책더미가 덩달아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아…….”
외마디 비명이 이레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조심하오!”
무심결에 한 가벼운 손짓이 이리 사태를 키울 줄 몰랐다.
형운은 급히 몸을 던져 이레를 감쌌다.
우르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장과 책들이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렸다.
형운은 등과 머리로 그것들을 온전히 막아냈다.
한바탕 소란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등잔이 넘어지며 희미하게 흔들리던 등불마저 꺼졌다.
희미한 빛마저 사라지자 구석으로 밀려난 어둠이 굶주린 승냥이마냥 주위를 삼켰다.
실내는 이내 농도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침잠한 어둠 속에서 형운의 곤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이…… 한다.”
책과 책장이 어지럽게 뒤섞인 채 무너져 내렸다.
형운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엎드린 채, 그 참상의 하중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힘겹게 버티는 그의 양팔 사이에서 가뿐 숨소리가 맥동하였다.
쌔액, 쌔액.
가뭇없는 열기가 형운의 목 언저리를 간질거렸다.
내뱉는 날숨이 지척에서 맞부딪혔다.
비단 앞섶이 작은 미동에도 사각댔다.
기갈 난 사람처럼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말랐다.
여인이…….
그 낯설고 어색한 존재가…….
형운의 코앞, 입술만 내밀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있다.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지척에서 이레가 여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