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6화 (6/215)

#6.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허전한 것

인적이 드문 한갓진 골목길.

이인교 가마 한 대가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가마는 허름했다.

칠도 군데군데 벗겨졌고, 지붕도 누더기처럼 깁고 덧댄 흔적이 역력했다.

그런 허름한 가마를 네 명의 사내가 둘러싸듯 호위하고 있었다.

가마꾼까지 포함하면 무려 장정 여섯이 가마를 지키고 운반하는 셈이다.

각기 다른 복색을 한 가마꾼들의 움직임은 서툴고 거칠었다.

호흡이 맞지 않아 불안하게 흔들리는 건 예사고, 넘어질 듯 한쪽으로 위태롭게 기울어지는 일도 적지 않았다.

“해 지기 전에 일 마치고 돌아가려면 서둘러라.”

선두에 선 탑삭나룻 사내가 일행을 재촉했다.

그렇지 않아도 힘에 부치는데 재촉까지 당하니, 가마꾼들의 입에서 기어이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언제 가마를 져봤어야 빨리 갈 게 아닙니까?”

“어깨가 부서질 것 같습니다.”

탑삭나룻이 혀를 찼다.

“못난 놈들.”

모처럼 뭉치 큰 건을 처리하러 가는 길인데, 다들 하는 짓이 마뜩잖다.

“밤새 술이나 처 마시니 그렇지.”

탑삭나룻 사내가 못마땅하게 중얼거릴 때였다.

한발 앞서 길을 살피러 간 사내가 돌아왔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탑삭나룻이 쌍심지를 세웠다.

“무슨 일로?”

“수레를 옮기던 자들끼리 시비가 붙은 모양인데, 하필이면 좁은 골목이라…….”

“싸움질을 어찌하는데 지나가지도 못한다는 거야? 앞장서라. 내가 직접 봐야겠다.”

탑삭나룻이 수하와 함께 시비가 붙은 곳으로 향했다.

큰길을 코앞에 둔 골목이었다.

흙담을 사이에 두고 낡은 초가와 막집이 얼기설기 엉켜 있는 길목은 개미굴처럼 좁고 어지러웠다.

작은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길이라.

보통은 먼저 골목에 들어선 이가 지나가고 뒤늦게 진입한 자가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도 양보하지 않은 모양이다.

마주 선 두 대의 수레와 짐 더미로 좁은 골목이 꽉 막혀 있었다.

골목에 쏟아진 짐이 워낙 많은 데다, 상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서로 멱살을 잡고 드잡이질을 하고 있어 혼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이 고을에서 나름 경쟁하는 무리인 모양인데, 하필 이곳에서 만나 공연한 시비가 붙은 모양입니다.”

“이리 싸움박질할 시간에 누구 하나 양보했으면 지나가도 한참 전에 지나갔겠구먼. 쯧쯧, 미련한 놈들.”

“어떻게 할까요?”

“금방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아쉽지만 하는 수 없지.”

가마로 돌아온 탑삭나룻 사내가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이쪽으로 가는 건 힘들겠다. 돌아서 다른 길로 가자.”

“다시 돌아간단 말입니까? 어이쿠, 전 못 합니다.”

가마꾼 하나가 기어이 체머리를 흔들었다.

“넌 또 왜 그래?”

“배가 아파 죽겠습니다. 잠시 볼일만 보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죽는소리도 적당히 봐가며 해라. 그러다 진짜 죽는 수가 있다.”

“괜한 엄살 아닙니다. 정말로 이러다 길가에서 큰일 치르게 생겼단 말입니다.”

누렇게 질린 낯빛을 보니, 영 헛말은 아닌 듯싶었다.

“저도 배가…….”

다른 가마꾼도 아랫배를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에라이, 변변찮은 놈들. 싸든, 뭘 주워 먹든, 얼른 해결하고 와.”

“살았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마꾼들은 가마를 내팽개쳤다.

탑삭나룻이 눈매를 매섭게 치떴다.

“물건 망가진다. 살살 다뤄.”

“어차피 곧 물속에 잠길 보따리인데,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가마꾼의 말에 탑삭나룻은 머리를 주억거렸다.

생각해보면 저놈들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물속에 버릴 물건, 조금 상한들 어떠하리.

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휘휘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갈 길이 멀다. 서둘러라.”

“금세 다녀오겠습니다.”

가마꾼으로 변장한 두 사내가 뒷골목으로 꽁지가 빠지라 달려갔다.

탑삭나룻은 볕 좋은 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점박이가 그 옆에 슬그머니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딜 가고 있는 겁니까?”

“이쪽으로 반 시진쯤 내려가면 깎아지른 절벽이 나오지. 그 아래에 폭 좁고 수심 깊은 강이 나온다. 우린 거기로 간다.”

“죽을 계집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대충 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중에 누가 발견해도 자액(自縊)으로 판명 날 터인데…….”

“그럴 거면 애초에 공들여 납치도 안 했지. 다 나름의 의미가 있어서 이러는 거다.”

“죽는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뭘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탑삭나룻은 곰방대를 뻐금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강, 계집의 사내가 죽은 곳이야.”

“아!”

“엊그제 내린 비로 물이 불었으니. 가마의 물건을 물속에 던져넣으면, 사나흘 후쯤 하류에서 발견될 테지. 때마침 실종된 계집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 신원은 금세 밝혀질 테고.”

“그렇겠지요.”

점박이가 탑삭나룻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시신이 발견된 곳을 따라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니, 절벽 위에 계집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 한 짝이 딱 놓여 있는 거야. 알고 보니 그곳이 죽은 계집의 지아비가 실족사한 장소인 거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점박이 사내가 제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터트렸다.

“지아비를 그리워한 계집이 스스로 강에 몸을 던졌다고 생각하겠군요. 아무도 살해당했다고 생각지 않을 겁니다.”

“바로 그런 거다.”

“그래서 굳이 이 먼 길을 가는 거였군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점박이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나무에 목매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단 겁니까? 제가 보기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건 매양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탑삭나룻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곰방대로 점박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처리하는 우리야 물에 빠져 죽건, 나무에 매달려 죽건 무슨 상관이겠느냐? 하지만 이 일과 관련된 양반네에겐 전혀 다른 얘기지.”

“무엇이 다르단 겁니까?”

“명예.”

“네?”

점박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자, 탑삭나룻이 살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중요한 게 있는 법이다. 우리에겐 돈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고, 겉으로는 고고한 척 위선을 떠는 양반네에겐 가문의 영달과 명예가 사람 목숨보다 중한 것이지.”

탑삭나룻이 곰방대로 가마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청상이 제 서방 죽은 곳에서 죽으면, 두고두고 칭송 거리가 될 것이고, 죽은 계집의 시가(媤家)에는 열녀문이 세워지겠지. 그리되면…….”

“아하, 그럼 그 양반네는 열녀가 나온 집구석이 되겠네요.”

“이제 알겠느냐?”

“참으로 별걸 다 아십니다.”

“나야 사람 잡고, 팔고, 죽이라면 죽이는 일만 알지, 이런 복잡한 심사를 어찌 알겠느냐? 의뢰한 놈들이 지시하면 지시한 대로 따를 뿐이다.”

“그렇게 똑똑하면 저희가 직접 할 것이지. 왜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을 시킨 답니까?”

“그 난삽한 심사 또한 어찌 가늠하겠느냐? 우리야 떡이나 보고 제사나 지내면 그만 아니겠어.”

곰방대를 뻐금거리던 탑삭나룻이 인상을 썼다.

“그런데 볼일 보러 간 놈들은 왜 이렇게 안 와?”

“힘들다고 농땡이라도 치는 모양입니다.”

“우라질 놈들. 언제까지 뭉그적거릴 거야? 이러다 포졸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올 때 가마 안도 좀 살펴라. 좀 전에 또 요동치는 것이, 아무래도 계집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에잇, 귀찮게 왜 자꾸 깨는 거여?”

점박이가 투덜거리며 엉덩이를 털었다.

힐끔, 가마를 쳐다보던 그는 곧 다른 이들이 볼일 보러 간 곳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탑삭나룻 사내는 곰방대를 연신 뻑뻑 빨았다.

살담배가 하얗게 재로 변했다.

그러나 볼일을 보러 간 자들도, 그들을 데리러 간 점박이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탑삭나룻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곰방대의 재를 털었다.

“이놈들이 누굴 놀리나. 어째 볼일 보러 가기만 하면 함흥차사야.”

이 정도 목청으로 소리쳤으면 짧은 대거리라도 들려올 법한데, 여전히 골목은 조용했다.

탑삭나룻 사내는 슬그머니 품에 든 칼을 손아귀에 쥐었다.

그는 남아 있는 수하 둘에게 눈짓을 보냈다.

심상찮은 눈빛을 읽은 수하들이 무기를 챙겼다.

탑삭나룻이 다시 소리쳤다.

“점박아, 왜 안 오는 거냐? 얼마나 큰 볼일인지, 내 눈으로 직접 가서 봐야겠냐?”

여전히 점박이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탑삭나룻의 눈매가 사납게 휘어졌다.

“나오라는 놈들은 안 나오고. 엉뚱한 작자들만 쏟아져 나오네. 그런데 내 눈깔이 잘못된 건지, 어째 다들 눈에 익은 분들인 것 같소.”

탑삭나룻이 가늘게 뜬 눈으로 사람들의 면면을 훑었다.

“그쪽의 실눈은 반 시진 전에 산기슭에서 만난 소금장수고, 그 옆의 옹기장수도 한 시경 전에 지나쳤고, 저쪽의 짝눈도 눈에 익네.”

아무리 인적이 드문 길이라 해도 한두 시진 정도 걷다 보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었다.

이들도 그렇게 스쳐 지나간 자들이었다.

“하도 평범하게 생긴 상판대기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보통 분들이 아니었던 모양이네. 그래, 누가 부리는 사람들인가?”

물음의 답은 골목 저편에서 들려왔다.

“나다.”

좁은 골목 너머,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유난히 큰 삿갓을 깊게 눌러쓴 사내, 형운이었다.

* * *

“누구냐?”

탑삭나룻 사내가 물었다.

저녁노을을 등지고 선 형운은 골목에서 나온 자들을 턱짓했다.

“저들을 부린 사람.”

탑삭나룻이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바닥에 퉤, 침을 뱉었다.

“그 짝이 대가리고, 이 짝 놈들이 꼬랑지란 말이야? 난 태가 하도 곱상하기에 영락없이 계집인 줄 알았지. 가만 보자. 여기서 몰이 사냥하듯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고. 저쪽 골목에서 길 막고 발광하던 놈들도 당신 수작질이었어?”

“…….”

형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탑삭나룻의 인상이 구겨졌다.

“어디 사는 뉘신데, 남의 일을 이리 방해하는지 모르겠네. 어디, 그 귀한 면상이나 한번 봅시다.”

“너희 같은 자들에게 아무렇게나 보여줄 얼굴이 아니다.”

“뭐야? 얼굴에 금태를 두르셨나? 어찌 이리 비싸게 굴어? 귀한 양반 나리, 이유나 압시다. 이렇게 앞을 가로막는 이유가 대체 뭐요?”

묻는 탑삭나룻을 향해 형운이 턱짓했다.

“그 가마.”

“가마가 왜?”

“그 가마 안에 내가 잃어버린 요물이 있는 듯한데.”

“요물?”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허전한 것. 매번 황금보다 귀한 시간을 빼앗으니 당연히 멀리해야 옳은데, 그러질 못하지. 곁에 있을 땐 귀찮고 번잡하건만, 정작 없으면 신경 쓰이니. 이런 것을 요물 말고 달리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

“요물이든 요술 방망이든, 내 알 바 아니고. 그 짝이 잃어버린 걸 왜 남의 가마에서 찾는 거야?”

형운이 가마로 시선을 던지며 대답했다.

“그야 훔쳐간 놈이 알지, 잃어버린 사람이 어찌 알겠느냐?”

형운의 눈길을 쫓던 탑삭나룻이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네. 이 가마에 타고 계신 분이 뉘신 줄이나 알고 요물타령인가? 괜한 생트집으로 엉뚱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어서 길을 트시는 게 어떨까?”

“허튼수작은 그쯤 해둬라. 오해라면 가마만 살펴보게 하면 될 것이다. 허나, 만약 그 가마 안에 내가 찾는 것이 있다면…….”

형운은 손끝으로 갓을 슬쩍 들어 올렸다.

“장담하건대, 지금 네가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절실히 깨닫게 해주마.”

삿갓이 그린 검은 격자무늬 아래.

한 쌍의 눈동자가 서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 눈빛을 접한 탑삭나룻은 등골이 송연해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 눈빛은 야수의 흉포함도 살인귀의 냉철함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려웠다.

사람의 속을 훤히 꿰뚫는 염라의 준엄한 시선이 그러할까?

허튼수작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탑삭나룻은 이를 악물었다.

저런 유형의 인간은 준비가 완벽하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움직였다는 건 이미 준비가 끝났다는 이야기.

남은 것은 철저하게 설계된 손바닥 위에서 미친 듯이 발광하는 것뿐.

“일이 사납게 얽혔네.”

탑삭나룻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요동쳤다.

남아 있는 수하의 수는 고작 둘.

그에 반해 저쪽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스물이 넘었다.

정면 승부는 승산이 없었다.

상책(上策)은 달아나는 것인데, 좁은 골목에 앞뒤로 포위된 형국이니.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틈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탑삭나룻 사내가 수하들에게 명했다.

“잠시만 뒤를 막아라. 그사이 내가 저 골샌님을 사로잡을 것이니.”

그의 명령에 수하들이 큰소리로 대답하며 뒤로 돌아갔다.

그들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삿갓 사내를 사로잡는 것임을 직감했다.

탑삭나룻이 칼을 치켜들고 삿갓 사내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시퍼런 칼이 눈앞에서 날을 세우고 있는데도 삿갓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기세는 제법이다만, 서늘한 눈빛만큼이나 실력도 쓸 만할지 모르겠네.”

“…….”

“간혹, 그런 놈들이 있지. 분위기는 그럴싸한데, 정작 빈 쭉정이 같은 놈들 말이야. 내 보기엔 너도 그런 부류 같단 말이지.”

탑삭나룻은 빠른 시선으로 삿갓 사내를 살폈다.

그의 입가에 히죽 비웃음이 걸렸다.

“뭐야? 싸우러 나온 놈이 그 흔한 칼 쪼가리 하나 챙기지 않았잖아. 이래서야 이마에 ‘애송이’ 세 글자만 박히지 않았다뿐이지, 나 실력 없소 하고 고함치는 꼴이잖아. 안 그래?”

탑삭나룻의 허세 가득한 으름장에 형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 그러더냐? 내게 칼이 없다고.”

“뭐?”

혹시 놓친 것이 있는가 하여 탑삭나룻은 다시 삿갓 사내를 위아래로 훑었다.

칼은커녕 작은 쇠붙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헛소리는 염라대왕에게 가서 하거라.”

말과 함께 탑삭나룻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삿갓 사내의 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골목 뒤편에서 검은 바람이 불어왔다.

맹렬하게 달려온 바람은 이내 두 줄기로 갈라져, 한 줄기는 형운의 앞을 지키고 다른 하나는 탑삭나룻의 칼에 맞섰다.

검은 철릭을 입은 무사들.

세손궁의 좌익위(左翊衛) 최치성과 우익위(右翊衛) 홍인모.

그들이 바로 형운의 칼이었다.

형운이 부리는 두 자루의 칼은 탑삭나룻의 무딘 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예리하고 정확했다.

서걱!

섬뜩한 소음과 함께 탑삭나룻이 쓰러졌다.

단 일 합.

그야말로 일방적인 승부였다.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배후를 물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마.”

형운을 지키고 선 최치성의 말에 홍인모가 시원하게 장담했다.

“걱정하지 마라. 숨통은 남겨놓았으니까.”

“확실하냐? 꼴깍꼴깍하는 꼴을 보니, 금방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젠장. 있어 보이는 척을 하도 해서 제법 숨겨둔 수가 있는가 했더니.”

홍인모가 투덜대며 탑삭나룻의 상태를 살폈다.

그 사이 탑삭나룻의 수하들도 상인으로 위장한 역졸(驛卒)들에게 사로잡혔다.

“납치범들을 모두 잡았습니다.”

최치성이 고하는 소리에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

형운은 멀리서 달려온 역졸들을 치하했다.

“고생 많았다.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이들을 이토록 빨리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사 나리.”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사람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들은 역참(驛站)을 관리하는 역졸들로 때에 따라 어사의 일을 보조하였다.

시간이 촉급했던 형운은 마패를 이용하여 역졸을 불러모았다.

어사의 명을 받은 역졸들은 상인으로 변장하고, 가진바 인맥을 총동원하여 수상한 무리를 수색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마를 메고 가는 수상한 자들을 발견한 것이다.

주변을 정리한 최치성이 형운에게 아뢰었다.

“가마를 살펴보겠습니다.”

“잠깐. 그건 내가 하마.”

형운이 가마로 다가가는 최치성을 말렸다.

“네?”

전혀 의외의 명에 최치성은 잠시 당황했다.

가마 안에 있는 자가 절에서 납치된 사람이라면 여인임이 분명했다.

제 주인이 유독 여인과의 대면을 달가워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헤아리는 건 그의 일이 아니었다.

최치성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주위를 물려라.”

형운이 다시 명했다.

납치당한 여인의 매무새가 단정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조치였다.

아무리 허물없이 당당한 여인이라 하여도, 여인은 여인.

어찌 낯선 사내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을까.

그렇게 주위를 물린 형운은 가마로 다가갔다.

이곳에 있다, 서탁의 그 여인이.

대광통교에선 차마 지켜보는 눈이 많아 아는 척하지 못하였으나, 이곳이라면 괜찮으리라.

묘한 두근거림이 심장을 두들겼다.

목 밑까지 숨이 차올랐다.

쿵쿵, 머릿속에서 작은 북이 울려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가마까지 가는 걸음이 천 리 길을 가는 것보다 멀게 느껴졌다.

마침내 가마에 도착한 그는 낮게 헛기침을 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형운은 조심스레 가마문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형운은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런.”

그의 입에서 짙은 날숨과 함께 탄성이 새어 나왔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최치성과 홍인모가 한달음에 제 주인의 곁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곧 그들도 굳어버렸다.

홍인모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군요.”

가마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설마, 이 자들은 눈을 속이기 위한 가짜고, 납치된 여인은 다른 곳에 있는 건…….”

“아니다.”

형운은 가마 안으로 손을 뻗었다.

사람은 없지만,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흐릿한 생강꽃 향기와 함께 매미가 벗어놓고 간 허물처럼 빈 자루가 있었다.

그리고…….

“그래, 여기에 있었구나.”

그가 가마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잃어버린 물건.

제비꽃 모양의 머리꽂이였다.

***

깊은 밤.

서탁 위로 낯익은 필체가 떠올랐다.

-다들 잘 계셨습니까?

-아이야, 왔느냐?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어찌 이리 늦은 것이야?

-화할아버지, 천천히요. 그리 한꺼번에 물으시면 답하는 제가 숨이 찹니다.

-별일은 없었고? 내내 걱정했느니.

-예할아버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왔어? 난 드디어 성불한 줄 알았더니.

-상할아버지, 제가 성불하려면 백 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니까요.

-네가 오지 않아 많이 걱정했단다. 필시 범상치 않은 일이 있었겠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

-네. 예할아버지.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잠시 후, 여인의 글이 다시 떠올랐다.

-제가 겪은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일은 할아버지들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상할아버지. 예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울지 말고 냉정히 생각하라 하셨지요? 화할아버지, 타인의 도움은 내가 가진 재주를 모두 쏟아낸 후에야 비로소 고려하는 최후의 수단이라 하셨지요? 예할아버지,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작은 것부터 살피라 하셨지요? 모두 옳았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인사가 이리 거창한 게야?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요…….

형운은 서탁의 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꽤 먼 길을 달려온 듯, 그의 얼굴엔 고단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 구해준 사람 얼굴도 안 보고 도망가더니. 여기서 잘도 떠들고 있구나.”

불퉁한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여인이 살아 있음에 안도하였다.

그리고 기뻤다.

얼굴도 모르는 여인이거늘…….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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