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단 까!
“으…….”
정수리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뜨거운 불덩이를 이고 있는 듯한 통증에 이레는 잠에서 깨어났다.
속이 울렁거렸다.
모래라도 한 줌 집어삼킨 듯, 입안이 서걱거렸다.
시원한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머리맡에 놓아둔 자리끼를 찾으려 이레는 팔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하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마음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건 팔뿐만이 아니었다.
다리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불편한 느낌에 뒤늦게 눈을 떴다.
앞이 흐릿했다.
얇은 장막을 뒤집어쓴 듯 사방이 누렇게만 보였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뇌리를 강하게 두드렸다.
이레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찔한 두통과 함께 어지럼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서서히 물러갔다.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이레는 다시 눈을 뜨고 천천히 주위를 더듬었다.
이내 좁은 자루 속에 갇힌 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오소소,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행여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하여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뜨길 반복해봐도 작금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이레는 입안에 고인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여긴 어딜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머릿속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해야 해.
조각조각 흩어졌던 기억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레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
할아버지의 제향일에 맞춰 집을 떠나 양화사로 향했다.
한해도 빠트리지 않고 매년 반복한 여정.
그러나 이번 여정은 여느 해와 달리 난관이 유난했다.
아침부터 새벽 안개가 스산하더니, 급기야 빗줄기가 떨어졌다.
험한 산세에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넘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덕분에 양화사에 도착했을 땐, 집을 떠날 당시의 온전한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입은 옷은 비와 진창으로 엉망이었고, 가져온 여벌 옷도 죄 젖어 갈아입기도 여의치 않았다.
설상가상, 추위마저 몰려왔다.
마을은 완연한 봄빛이지만, 암자가 위치한 깊은 산중엔 여전히 겨울의 입김이 가시지 않았다.
양화사의 비구니가 서둘러 빈 선방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냉골인 방을 따뜻하게 데우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 터였다.
불운에 불운이 끝없이 겹친 날이었다.
다행히 궁지에 몰린 이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어 준 사람이 있었다.
옆방에 기거한 젊은 여인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여인은 지아비의 천도재를 지내려 양화사에 머물던 참이라 하였다.
그녀는 비에 젖은 제 옷을 빌려주고, 따뜻하게 데워진 자신의 방까지 내어주었다.
체면을 차리며 사양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고맙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인이 내준 이부자리 아래로 지친 몸뚱이를 뉘었다.
목 밑까지 이불을 끌어당기자 온몸이 녹지근하게 녹아내렸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방문 밖으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마 밑의 풍경이 맑게 몸통을 떨었다.
나릿나릿한 만수향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이 편안해져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달콤한 과즙 내도 느껴졌다.
기묘한 향내라.
이게 무얼까?
그러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더니, 곧 수마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
지난밤의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분명 빗소리를 들으며 산사의 작고 아늑한 방에서 잠들었건만.
깨어나 보니 자루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자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레는 자신의 상황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좁디좁은 자루 안.
뒷결박을 당한 탓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팔다리.
심지어 입엔 재갈도 물려 있었다.
선방에서 잠들다 이런 꼴로 깨어날 가능성은 오로지 하나였다.
‘납치!’
잠든 사이, 누군가 그녀를 보쌈하듯 납치한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숨소리가 절로 거칠어졌다.
‘침착해. 아직은 짐작일 뿐이다. 할아버지들이 그랬잖아. 어렵고 힘들수록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일단 동정부터 살피자. 놀라는 건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아.’
간신히 두려움을 억누른 이레는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다행히 갇혀있는 보(褓)의 씨실과 날실의 짜임이 엉성하여 군데군데 제법 큰 구멍이 있었다.
고개를 움직여 구멍에 눈을 가져갔다.
바깥의 광경이 동그래진 그녀의 망막 안으로 시리게 파고들었다.
장정 서너 명이 누우면 꽉 찰 듯한 좁은 방.
세간살이라고 할 것도 없는 어두운 방구석에 낯선 사내 두 명이 있었다.
사내들은 박희(博戱)에 열중하고 있었다.
젓가락처럼 길고 얇은 나무 조각에 뼈를 붙이고, 각기 다른 구멍을 파서 겨루는 골패(骨牌)라는 노름이었다.
노름이라는 것이 매양 그렇듯, 사내들은 투전에 푹 빠져 있었다.
승패가 갈리고, 돈이 오갈 때마다 웃음과 욕설이 꼬박 연의 꼬리처럼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낯선 사내들의 존재를 제 눈으로 확인하자 이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상은 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짐작이 틀리길 염원했다.
그저 누군가의 못된 장난이길 바라고 또 바랐건만.
하지만 자루 밖 상황을 보니 우려하던 처지가 되었음이 분명했다.
저자들은 누굴까?
왜 날 납치한 거지?
딱히 짐작되는 일은 없었다.
뉘에게 미움받을 만큼 야살 떤 일도 없고, 원한 살만큼 악독하게 굴었던 기억도 없다.
워낙 엄격하고 야박한 할머니 덕에 별채에 갇혀 지내다시피 살아야 했다.
그러니 누군가와 은원(恩怨)을 맺을 만큼 가까워질 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치된 연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저들에게 물어볼까?
이레의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투전에 열중하던 사내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 안 나?”
“아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패나 보여봐.”
“자루가 움직였어. 계집이 깬 것 같은데.”
“뭐, 잘못 본 거 아녀?”
“아니야. 분명 움직였어.”
사내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이레가 갇혀있는 자루를 발로 걷어찼다.
퍽!
옆구리를 파고드는 둔탁한 통증.
“으읍.”
이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것 봐. 깼잖아.”
“용케 비명도 안 지르고 있었네.”
“수면향을 들입다 마셨으니. 소릴 안 지르는 게 아니라, 못 지르는 게지. 행여 잠이 깼다고 해도 가물가물 제정신이 아닐걸.”
“그럼, 방금 꾸물대던 건 잠꼬대였나?”
“그럴지도 모르겠네.”
납치범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 웃어댔다.
저놈들이!
마음 같아서는 버럭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재갈 물린 입에선 그저 답답한 소리만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납치범은 장난하듯 툭툭 이레를 걷어차며 말을 이어갔다.
“이년아, 얌전히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어르신들이 조금 거칠긴 해도, 알고 보면 천하에 둘도 없는 월하노인이니라. 곧 좋은 짝을 만나 극락을 맛보게 해 주마.”
“암만. 제 년이 잘만하면 남들은 하나밖에 없는 서방, 백은 생길걸.”
“크하하하, 계집의 복 중에 가장 큰 복이 사내 복이라 하였는데. 네년은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왔구나.”
납치범들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이레의 낯빛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갔다.
백 명도 넘는 서방이라니.
이 무슨 어이없는 소리란 말인가.
“읍읍!”
“왜? 서방이 백 놈이나 생긴다니 벌써 좋아 죽겠느냐?”
“몸이 후끈 달아오른 모양이지.”
“기다리기 그리 힘들다면…….”
납치범 중 한 놈이 갑자기 입맛을 다셨다.
“꿈틀거리는 게 어떻게 해달라 애원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 어르신이 먼저 좋은 맛 좀 봬주랴?”
사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면 웃었다.
그러곤 입구를 봉한 자루에 손을 댔다.
밖의 소리에 귀 기울이던 이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아찔한 공포에 전신이 마비되는 듯했다.
왈칵, 흘러나온 뜨거운 눈물이 눈앞을 흐리게 했다.
그러나 황급히 체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럴수록 정신 차려야 해.’
상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고난이 닥쳤을 때 눈물은 무소용이라 하였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저들과 맞설 대책이다.
‘어찌한다? 이럴 때 어찌해야 한다?’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힘으로 맞서야 한다는 뜻인데.
평범한 여인이 장정 두 명을 이겨내는 건 불가능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런 일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이내 오래전 서탁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서탁의 할아버지들은 종종 별것 아닌 일로 다투곤 하였다.
그 날도 서탁의 백귀들은 병법에 대한 일로 언쟁을 나누었다.
-병법의 계책 중 가장 뛰어난 계책은 바로 삼십육계다. 싸움은 어떻게든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
-웃기고 있네. ‘예’의 말은 들을 것도 없다. 매번 피하기만 하면 비겁하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느냐? 아이야. 싸움이 날 것 같으면 일단 먼저 치는 거다. 기선 제압. 병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기세라는 것이지. 힘이 없으면 침이라도 뱉고, 침마저 말라 버리면 거하게 욕지거리 한바탕 하는 것이다. 선공필승(先攻必勝). 생각은 나중이다. 알아들었느냐?
-몰상식한 소리로군. 만약 상대가 나보다 강하면 어찌한단 말이오?
-까짓것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둘 다 틀렸다. 아이야,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말아야 한다. 군자보구 십년불만(君子報仇 十年不晩)이라 하였느니.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 허나, 만약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약점을 공략하여라.
-싸움에 약점이라니. ‘화’옹의 말은 더더욱 허황하오. 당장에 벌어질 싸움을 앞에 두고 언제 약점을 찾아낸단 말이오? 허허, 참.
-약점이라 하니 ‘예’옹은 뒷조사 같은 것만 생각하는 모양이구려. 사람의 몸에도 급소라는 게 있는 법이오. 사내라면 오히려 공략할 곳이 더 많소.
-아이야. 이놈들 이야기 귀담아들을 것 없다. 일단 까! 머리로 까고, 다리 사이를 힘껏 걷어차! 그럼 상대 놈에게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이다. 그거면 다 끝난 거야.
-허허, 어찌 이리 과격하시오.
-왜? 내 말이 틀렸느냐?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고, 나름의 일리는 있는 듯하니……. 아이야, 눈도 잊지 마라.
이레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생각이 분분했다.
머리 위에선 부스럭부스럭 봉인된 자루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이자, 마지막 기회의 순간이기도 하였다.
지금 적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영영 달아날 기회를 얻지 못하리라.
한껏 몸부림을 친 덕인지, 다행히 뒷결박이 풀렸다.
팔다리가 자유로워진 이레는 입에 물린 재갈도 서둘러 끌렀다.
그사이, 납치범들도 자루의 입구를 풀었다.
사내 둘이 음흉한 눈빛으로 이레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고년 참, 머리 모양도 탐스럽게 생겼구나.”
뺨에 큰 점이 있는 사내와 염소수염을 기른 간사한 인상의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왜 그리 쪼그리고 앉은 게냐? 냉큼 일어나 첫 서방 되실 어르신들을 뵈어야지.”
“부끄러운 모양이구먼. 괜찮다. 곧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터이니…….”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바로 그 순간.
자루 안에 웅크리고 있던 이레가 굽은 허리를 쭉 펴며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탐스럽고 동그란 머리가 점박이 사내의 안면을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퍽!
“으아아악!”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점박이가 벌러덩 나자빠졌다.
“뭐야? 뭔 일이야?”
느닷없는 사태에 염소수염 사내는 고함을 내질렀다.
자루 밖을 벗어난 이레는 염소수염의 양다리 사이를 노리고 있는 힘껏 발길질했다.
“어딜!”
염소수염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발을 막았다.
“이년이 어디서 놀던 가락이 있는 모양인데, 어르신에겐 어림도…….”
이레는 화할아버지의 조언대로 눈도 잊지 않았다.
매 발톱처럼 날카롭게 세운 손가락이 염소수염의 눈을 콕 찔렀다.
아랫도리의 참극을 막는 데 집중한 사내는 느닷없이 이어진 공격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으악! 내 눈!”
순간의 기지로 납치범들을 넘어뜨린 이레는 재빨리 문을 향해 달려갔다.
어떻게든 여기만 벗어나면 된다.
밖으로 나가 사람이 있는 곳까지만 가면…….
이레는 문고리를 잡았다.
찰나, 밖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이건 또 뭐야?”
* * *
새로이 등장한 자는 수염을 짧게 기른 탑삭나룻 사내였다.
이레를 발견한 사내는 다짜고짜 목덜미를 잡아채서 인정사정없이 던져버렸다.
거친 손속에 이레는 저항할 틈도 없이 나동그라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뼈마디를 끌개로 깎아내는 듯 고통스러웠다.
고개를 드니 차가운 표정의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하게 자라 얌전한 줄 알았더니. 제법 손톱 세울 줄도 아네.”
이레는 어금니를 악물며 상체를 일으켰다.
“나라엔 엄연히 국법이 존재하거늘.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어이쿠, 손톱만 날카로운 줄 알았는데. 말솜씨도 제법일세.”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친다면…….”
“철없는 소리. 혓바닥은 제법 맵다만, 세상 돌아가는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지금 앞날을 걱정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알고 떠드는 것이냐?”
“…….”
“왜? 당장에라도 구해줄 사람이 몰려올 것 같지?”
“지금쯤 내가 사라진 것을 알고…….”
탑삭나룻 사내가 이레의 말허리를 잘랐다.
“네가 사라졌다는 걸 알고 관청에 신고하는데 하루. 신고를 받고 포졸이 움직이는데 빠르면 하루, 만약 규정대로 한다면 사나흘은 족히 걸리겠지. 어쨌든 신고를 받았으니 골목 어귀마다 포졸이 출동은 할 것이야. 그러나 생면부지인 여인을 찾는 일에 과연 얼마나 성심을 다할까? 탁주 한 사발 거하게 걸치고 오가는 사람들 얼굴 훑는 것이 고작일 터.”
“죄 없는 반가의 여인이 사라졌거늘. 그리 허술하게 할 리 없다.”
“훗, 양반가의 계집이라고 별다를까? 기껏해야 구별도 못 할 얼굴 그림 몇 장 걸릴 테고, 오가는 사람에게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하는 게 전부일 테지.”
사내는 이레의 가까이로 고개를 쓱 내밀었다.
“어떠냐? 우리가 잡혀 국법의 심판을 받는 게 빠를까? 아니면 네가 죽는 게 더 빠를까?”
“내게…… 왜 이러는 것이냐?”
“이유?”
탑삭나룻 사내가 상체를 물리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댁네 집안사람들에게나 물어봐. 아니면 지랄 맞은 운명을 탓하던가. 하필이면 그런 집으로 시집을 간 아씨의 운명.”
이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집이라니.
아직 성혼은커녕, 사내와 손 한 번 잡아보질 못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
문득 이레의 뇌리로 처연한 낯빛의 여인이 떠올랐다.
흔쾌히 갈아입을 옷을 내어주고, 기꺼이 자신의 방까지 비워주었던 옆방의 청상과부.
아무래도 이자들이 그 여인과 자신을 착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사람 잘못 보았다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이레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위기에 몰린 이 순간, 그녀의 머리는 놀랍도록 냉정해져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서탁을 통해 노회한 어른들의 지혜를 얻었더랬다.
그분들에겐 단순히 적적함을 달래기 위한 작은 유희에 불과했을 이야기들.
그러나 동굴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종국엔 거대하고 단단한 석주(石柱)를 이루듯, 오랜 시간 귀담아들은 말씀들은 이레를 비범한 여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평소 또래와 달리 그녀가 침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지금 이 순간 낙담하거나 슬퍼하는 대신 냉정하게 상황을 되짚어 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덕택이었다.
침착한 상황 판단이 잘릴 위험에 놓였던 그녀의 생명줄을 이었다.
지금 진실을 밝혀서는 안 된다.
공들여 납치한 게 전혀 생뚱맞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이자들이 어찌 나올지 불 보듯 뻔했다.
애초에 아녀자 납치를 밥 먹듯 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사람은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라 사고파는 물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쓸모가 없어지면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으리라.
그것도 절대 온전하지 않은 죽음일 터.
갑자기 조용해진 이레의 모습을 겁먹은 것으로 오해한 탑삭나룻 사내는 입아귀를 비틀며 히죽 승자(勝者)의 미소를 지었다.
“쯧쯧, 머저리 같은 놈들. 고작 계집에게 이 무슨 수모냐. 창피하지도 않아?”
“죄, 죄송합니다.”
“곧 삼도천 건널 계집을 왜 건드리려 하고 그래. 꿈자리 뒤숭숭하게.”
“기루에 넘기는 게 아닙니까?”
“내가 언제까지 잔돈푼에 연연할 것 같으냐? 가끔 큰일도 한 번씩 해야지.”
한바탕 수하들을 윽박지른 사내가 이레를 가리켰다.
“일단 저년 입에 재갈부터 물려라.”
점박이가 다가와 이레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탑삭나룻 사내가 소리쳤다.
“간밤에 내린 큰비로 시간이 지체됐다. 더 늦으면 곤란하니, 그만 출발하자. 그리고…….”
탑삭나룻이 이레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저 계집에게 다시 수면향을 써라. 가는 길에 소란 떨면 귀찮아지니까.”
***
딸랑, 딸랑.
바람에 흔들린 풍경(風磬)이 아침을 깨웠다.
밤새 내린 비는 물러갔으나, 미련처럼 남은 잿빛 운무가 산허리를 둘러쌌다.
깊은 산중의 산사는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여인들이 묶는 선방 쪽만은 어째서인지 어수선한 기운이 가득했다.
아침 공양을 마친 젊은 여인이 빈방 앞을 서성거렸다.
이 방은 이틀 전만 해도 그녀가 묶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어젯밤 비를 맞고 낭패한 기색으로 온 여인에게 양보한 방이기도 하였다.
“대체 어딜 간 걸까?”
여인의 불안한 혼잣말에 누군가 대답했다.
“어린 보살님께선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까?”
법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비구니였다.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이군요. 말도 없이 어딜 가실 분이 아니신데…….”
“혹시 산신각에 올라간 건 아닐까요?”
“안 그래도 살펴보고 오는 길입니다.”
“그곳에도 아니 계십니까?”
“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공양간에도 아가씨의 얼굴을 뵌 사람이 없다 합니다. 대체 어딜 간 것일까요?”
비구니가 염주를 굴렸다.
여인이 초조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혹, 급한 볼일로 집으로 돌아간 건 아닐까요?”
“함께 온 행랑 할멈이 무릎 병이 도져 산을 오르지 못하고 산아래 불목하니의 집에 있다 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셨다면 먼저 그쪽에 기별을 넣었을 테지요.”
“부디 큰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젊은 여인의 두 눈에 근심이 차올랐다.
비구니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보살님의 처지가 난처해지셨군요. 오늘 댁으로 돌아간다 하셨지요?”
“천도재가 끝나는 날이라. 오후에 시부모님이 오시면 함께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돌아갈 예정입니다.”
“허어, 사람과 함께 빌려준 옷도 사라졌으니. 시댁에 괜한 오해를 사는 건 아닐까 걱정입니다.”
“사람이 사라졌는데, 그깟 옷이 문제겠습니까? 오해를 산다면 다 제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여인을 바라보는 비구니의 눈에 안쓰러움이 들어찼다.
사고로 지아비를 여읜 여인은 시댁에서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듯했다.
가뜩이나 사내 잡아먹은 계집이라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히는 판국인데.
이대로 옷을 잃어버린 채 돌아가면 어떤 의심과 푸대접을 받게 될는지, 굳이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실례하겠소.”
크고 검은 삿갓을 깊게 눌러쓴 사내가 두 사람에게 말을 걸어왔다.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비구니는 합장하고, 여인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느닷없는 접근에 경계하고 마음 다스리는 것은 당연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은 삿갓 끝을 당겨 제 얼굴을 가린 사내의 태도였다.
묘한 반응에 비구니는 사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갓 아래로 드문드문 보이는 턱선이 참으로 미려하였다.
“방금…… 여인이 사라졌다 하였소?”
사내가 물었다.
잠시간 사내의 태에 미혹되었던 비구니가 불호를 외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만, 뉘시온지?”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삿갓 사내는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사라진 여인의 지인이오.”
“지인이라 하심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 막역한 사이라 할 수 있겠소.”
만난 지 몇 해가 지났으니, 지인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따금 그녀의 일상을 들었으니, 허물이 없다 함도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조부의 제향일이라 이곳을 찾았다 들었는데. 돌아오기로 약조한 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아 어르신들이 걱정하고 있소.”
이 역시도 사실이었다.
걱정하는 어르신이 있었다, 그것도 꽤 여러 명.
다만, 그 어르신들이 백귀라는 것이 아주 사소한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지인이라 하시지만, 증명할 것이 없으니…….”
삿갓 사내의 말에도 비구니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았다.
“우선 이방에 묵은 사람이 내가 찾는 그 여인이 맞는지부터 확인합시다. 어떤 사람이었소?”
비구니가 미적거리자 보다 못해 젊은 과부가 나섰다.
“자태가 유난히 고운 분이셨지요. 말씀도 조용조용 조심스러웠고, 행동 하나하나가 차분했던 음전한 아가씨였습니다. 좋은 곳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신 귀한 분이라는 것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답니다.”
“…….”
칭찬 일색인 평에 삿갓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조용 조심스러웠다?
차분하고 음전해?
‘마냥 다르다고 반박할 수도 없군.’
서탁의 그 여인도 딱히 성정이 거칠다 말할 편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차분하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는 축이었다.
마지막까지 대광통교의 일도 토설치 않았으니, 제법 입도 무겁고 의리도 있다 하겠다.
그러나 하지도 않은 일로 배려 아닌 배려를 받았던 탓에, 그녀에 대한 감정이 온전히 좋을 수만은 없었다.
“아! 머리에 제비꽃 머리꽂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기 드문 고풍스러운 문양이라, 눈에 띄었지요.”
검은 삿갓의 눈빛이 깊어졌다.
“……계속해 보시오.”
“한양에서 양화사로 오는 도중 큰비를 만났다 하였습니다. 입은 옷은 물론 여벌로 가져온 옷도 모두 젖어, 제 옷을 빌려 드렸습니다.”
“장한 일을 하시었소. 그래서 어찌 되었소?”
“다음 날 일어나보니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방을 볼 수 있겠소?”
“그건…….”
과부가 비구니를 보았다.
시선을 받은 비구니가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비었다 하나 여인의 방이었다.
지인이라는 말도 사내가 제 입으로 한 것일 뿐, 증거는 없었다.
어찌 반가의 여인이 머물던 방을 낯선 사내에게 함부로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삿갓 사내가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이런 사람이오.”
구리쇠로 만들어진 둥근 패.
비구니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합장했다.
그녀에게 사내가 다시 말했다.
“이제 방을 보여줄 수 있겠소?”
* * *
좁은 방이었다.
여인이 머물렀던 곳이라 그런지 맑고 청아한 향기가 감돌았다.
삿갓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말간 향기 속에 몇 가지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절에서 곧잘 피우는 만수향에…… 낯선 풀냄새.
이런 곳에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음산한 것의 냄새였다.
냄새는 문을 열기 무섭게 흩어졌지만, 사내의 예민한 후각은 희미하게 남은 잔향을 놓치지 않았다.
‘심상치 않군.’
삿갓 사내는 방 안을 찬찬히 살폈다.
바닥엔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방 한쪽에 젖은 옷가지들이 걸려있다.
대충 걸어놓은 것이 아니라 물기를 제거하고 주름까지 꼼꼼히 잡아놓은 것이었다.
펼쳐진 이부자리 아래쪽엔 여인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작은 보따리도 보였다.
삿갓 사내가 비구니를 돌아보았다.
“함께 온 사람은 없었소?”
“나이 지긋한 몸종이 함께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몸종은 어디에 있소?”
“무릎이 아파 암자까진 동행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일하는 불목하니의 거처에 머물고 있습지요.“
“불목하니의 거처는 어디요?”
“이곳에서 한 시진 거리에 있는 산 아래입니다. 실은 아가씨의 일로 그곳에 소식을 전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내린 비로 개울의 물이 넘쳐 길이 끊겼습니다.”
깊은 산중이라.
느닷없는 천재지변으로 길이 끊기는 일은 흔했다.
삿갓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곳을 훑었다.
사람의 됨됨이는 사소한 행동으로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이 방의 주인은 평소 치우고 정리하는 게 습관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던 이불도 개지 않고 사라졌다.
음산한 냄새, 깔끔하지 않은 뒤처리.
모든 정황이 좋지 않은 방향을 가리켰다.
밖으로 통하는 문 주변엔 더욱 많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좁은 툇마루와 댓돌 위에 난 발자국들.
이틀 전 내린 비로 땅이 질어 생긴 흔적들이다.
비구니들이 이미 청소를 끝낸 모양이지만, 돌과 마루 틈새의 흙마저 털어내진 못했다.
성인 사내의 손바닥보다 큰 크기.
삿갓 사내가 물었다.
“이곳에 스님들도 걸음 하오?”
“주로 보살님들이 거처하는 선방이라. 비구니들만 옵니다.”
“그럼 비구니 중에 키가 사내만큼 큰 분도 계시오?”
“그리 큰 분은 아니 계십니다만.”
비구니의 대답에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납치되었다.’
여인은 제 발로 선방을 나간 것이 아니었다.
사내들에게 끌려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반항한 흔적이 없으니, 잠자는 사이에 납치된 것이리라.
“이 방에 다른 사람은 없었소?”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저와 방을 바꾸었지요.”
과부가 비구니를 대신해 대답했다.
“특별한 연유라도 있었소?”
“아가씨가 묵을 선방이 내내 비어 있던 방이라. 급히 군불을 지폈지만 따뜻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터였습니다. 혹여 고뿔이라도 걸릴까 염려되어 제가 쓰던 방을 양보하였습니다.”
과부의 이야기에서 달리 수상한 조짐은 느낄 수 없었다.
‘큰일이군.’
때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 이상하다 여겼지만, 설마 이리 급박한 상황일 줄은 몰랐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여인이 사라진 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서둘러야 한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증마저 일었다.
“나리.”
부르는 소리에 삿갓 사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를 따르던 두 명의 호위무사 중 하나였다.
“궁으로 돌아가 사람을 부르오리까?”
돌아가는 형세를 눈치채고 물은 것이었다.
삿갓 사내,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없다.”
이곳에서 궁까지 아무리 빠르게 말을 달려도 족히 두 시진은 소요된다.
가고 오고 반나절은 족히 소모될 것이다.
“그럼 어찌할까요?”
형운은 텅 빈 방 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내가 해야겠다.”
“네?”
호위무사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주인께서 무어라 하셨는가?
그런 그의 귀에 다시 한 번 쐐기를 박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한다. 직접.”
비록 글일망정 무려 십여 년을 만난 아이다.
이리 허무하게 잃을 수 없는 존재였다.
‘무사해라. 그리하지 않으면 내 혼쭐을 내줄 것이다. 적어도…….’
형운의 눈동자에 단단한 결기가 맺혔다.
“오해는 풀어야지. 내가 백귀가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