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따르겠습니다
이레는 오늘 밤도 어김없이 붓을 들었다.
-할아버지들, 잘 계신가요? 오늘은 유난히 달이 밝아 할아버지들의 생각이 더합니다. 이리 일찍 붓을 든 까닭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모습을 보인 건 상할아버지였다.
-어쩐 일이냐? 평소엔 묻지도 않은 말을 종알종알 잘도 떠들더니.
서탁의 물음에 서탁이 대답했다.
-벌써 그날이 되었구나.
난을 치듯 부드러운 필체.
화할아버지였다.
-그날이라니?
-저 아이 조부의 제향일이 아니던가.
-제 제향일도 모르는 자가 남의 제향일은 꼬박꼬박 잘도 기억하는군.
팽, 앵돌아진 상할아버지의 말투에 이레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만하십시오. 이러다 또 싸우시겠습니다.
-싸움거리나 되겠느냐?
화할아버지의 느긋한 태도에 상할아버지가 발끈했다.
-싸움? 내 진실한 모습을 알게 되면 진작 삼도천 건너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걸?
-허허. 내가 할 소리다.
두 할아버지의 대화가 격해지자, 싸움을 말리듯 부드러운 필체가 파고들었다.
-어허, 이 좋은 달밤에 어찌 이리 싸우시는 것인지.
이레가 반갑게 맞이했다.
-예할아버지! 못 뵙고 가는가 했습니다.
-양화사에 가느냐?
-네.
매년, 이레는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의 제향일에 맞춰 양화사를 찾았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 한 번도 빼먹지 않은 일이었다.
-가는 길이 제법 험하다 했지? 조심하여 다녀오거라.
-감사합니다.
이레는 제 일상을 기억해주는 할아버지들이 마냥 고마웠다.
그런데…….
뭔가 헛헛했다.
이레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달을 올려보았다.
“미운 정도 정이라 했던가.”
대광통교에서 만나자 당당히 요구하던 불손은 그날 이후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귀신 주제에 낯이 깎이면 얼마나 깎인다고. 불쑥 나타나 사람의 속을 긁어대더니, 또 이리 무정하게 사라져 버리는 거야?”
수시로 출몰할 때는 귀찮기만 하더니, 막상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행여나 늦게라도 오지 않을까 싶어 기다렸지만, 끝내 반듯한 불손의 글은 만날 수 없었다.
이레는 다시 붓을 들었다.
-할아버지들, 저는 이만 자러 가야겠습니다.
-그래, 새벽에 출발하려면 일찍 자야지. 언제 돌아오느냐?
예할아버지의 물음에 이레가 답했다.
-명일 새벽에 출발하여 모레 돌아옵니다. 모레 밤엔 틀림없이 문안 여쭙겠습니다.
* * *
하루가 다르게 날이 푸근해졌다.
봄의 한복판.
방문을 열자 화사한 봄날의 풍경과 함께 푸른 새벽 안개가 밀려들었다.
이레는 서둘러 툇마루로 나섰다.
그러다 오라비를 발견하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버니.”
“이제 나오느냐?”
기대가 이레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이른 새벽에 어인 일이십니까?”
이레는 급히 댓돌 아래로 내려섰다.
“그 괴나리봇짐은 다 뭡니까? 기어이 게으름 떨다 걸린 겁니까? 그래서 귀양살이 떠나시는 거예요?”
“그랬으면 집안이 발칵 뒤집혔겠지. 높으신 분의 청으로 잠시 먼 곳에 다녀오게 되었다.”
“요즘은 전향사에서 그런 일도 합니까?”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내가 뉘더냐? 나는…….”
“중요한 나랏일을 하는 특별한 분이시죠.”
애써 밝은 표정으로 이레는 기대의 말을 받았다.
“알면 됐다. 언제까지 그리 보고만 있을 것이냐? 어서 나서거라. 동구 밖까지 오라비가 길동무해주마.”
이레의 품에 있는 보퉁이를 낚아챈 기대가 앞장서 걸었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비밀이다.”
“언제 오십니까?”
“역시 비밀이다.”
이레가 걸음을 멈췄다.
“솔직히 말하십시오. 어떤 높으신 분에게 밉보이기라도 하신 겁니까?”
“어허,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하려고 경건한 발걸음을 옮기는 오라비에게 그 어인 말이냐. 그보다 무슨 짐이 이리 무거우냐? 이걸 들고 산꼭대긴 어찌 올라가려고?”
때마침 두 사람의 뒤로 행랑 할멈이 따라붙었다.
“걱정 마십시오, 도련님. 쇤네가 이고 지고 올라갈 것입니다요.”
노파의 말에 기대가 웃음을 터트렸다.
“할멈이?”
기대는 이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할멈 무릎이 옛날 같지 않다는구나. 어쩌면 들어야 할 짐이 늘지도 모른다.”
기대의 협박에 이레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혈기 왕성하니 문제없습니다.”
“그 가냘픈 몸피로?”
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린 기대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절을 옮겨라. 듣자 하니 양화사의 불심이 예전만 못 하다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문이 그렇다. 도성 근처 보광사라는 절이 괜찮다던데. 올해부턴 괜히 먼 곳으로 걸음 하지 말고 가까운 곳으로 가거라.”
누이를 걱정하는 속내를 어찌 모를까.
“불심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할아버지를 위해 가는 길이니,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신 곳을 찾는 것이지요.”
“그분이야 워낙에 산을 좋아하셨으니, 부러 산꼭대기에 있는 암자를 찾으셨던 거 아니더냐. 네가 이리 매년 찾을 줄 알았다면, 틀림없이 가까운 곳으로 가셨을 거다.”
기대의 걱정 섞인 만류에 이레는 말갛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라버니는 모릅니다.
할아버지가 제게 남겨준 것이 무엇인지.
서탁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십니다.
그러니 그깟 험한 산세가 무에 문제겠습니까.
“참, 오라버니.”
“그래, 역시 보광사가 낫겠지. 아니면 이 오라비가 좀 더 함께하랴?”
이레는 그런 말이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전에 광통교에서 말입니다.”
“광통교?”
“다음에 물건을 주고받을 땐, 장신구 파는 곳보단 다른 곳이 좋겠습니다.”
“허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장신구 파는 할머니에게서 받은 향갑. 그 속에 무언가 들었지요?”
기대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두 분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범상치 않아 눈여겨보았습니다.”
“어험, 난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구나.”
기대는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이레의 말이 이어졌다.
“무슨 사연으로 은밀히 물건을 주고받는지 모르나, 다음부터 세책방이나 대장간을 이용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책은 의외로 내부에 무언가를 숨기기 맞춤하지요.”
“…….”
“또한, 사내가 세책방을 드나든다고 이상하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대장간은 두말할 것도 없을 거고요.”
“이상한 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래도…… 고려 정도는 하마.”
기대는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오라비를 이레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무래도 자신의 소관이 아닌 남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모양이다.
체면이 걸린 일이나, 떳떳하지 못한 일을 아랫사람에게 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윗사람의 명을 받드는 관원이라,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받지 마십시오.”
“걱정 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느냐?”
“물론 저는 오라버니를 믿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레는 재차 강조했다.
“그래도 그릇된 일은 절대 해선 안 됩니다. 목전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 됩니다.”
“이 녀석아, 어찌 믿는다 하면서도 걱정을 놓지 못해?”
“이런, 말이 길었나 봅니다.”
먼 곳에서부터 동이 터 왔다.
제가 먼저 가지 않으면, 오라비가 내내 곁을 떠나지 않을 모양새라.
이레가 먼저 작별을 고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오냐. 허튼 곳에 눈길 주지 말고.”
“알겠습니다.”
“사내는 아버지와 오라비를 빼곤 다 짐승이다. 인적이 드문 곳을 갈 때면, 지나가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가고, 행여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호의를 보이면 경계하겠습니다. 행여 알은체를 하면 모르쇠로 일관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셔요, 오라버니.”
이레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행랑 할멈이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할멈, 저 녀석 잘 부탁함세.”
“걱정 붙들어 매셔요, 도련님. 제가 누굽니까. 우리 아기씨 태어날 때부터 곁을 지킨 사람이 아닙니까요.”
“내 할멈만 믿을 것이야.”
두 번, 세 번 당부하는 기대를 뒤로하고 이레와 할멈은 봄 아지랑이처럼 멀어져갔다.
“저 제비꽃은 오늘도 저 아이 머리 위에 피었구나. 머리꽂이를 저리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그때 기어이 하나 사 줄 것을 그랬나.”
아쉬움과 아련함이 뒤섞인 혼잣말이 기대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그는 끝내 누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 * *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숨 가쁜 하루를 붉은 여운으로 토해 낸 태양이 마침내 밤의 장막 아래로 떨어졌다.
어둠이 세상을 삼키자, 짙은 그늘 밑으로 하나둘 불이 켜졌다.
사람들은 여름밤의 부나방처럼 불빛 아래로 모여들었다.
간택령이 조선 팔도에 내려진 참이라.
사람들의 화제는 자연 며칠 전의 어가 행차로 기울어졌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대광통교에서의 일이었다.
잠시 잠깐이었으나, 행차가 멈추고 세손이 주렴을 열었다.
그 연유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러는 모여든 백성들을 보기 위함이라 하였고, 또 다른 이는 풍광을 구경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얼핏 보인 세손의 그림자가 늠름하고 고귀하기 이를 데 없다는 이야기가 무성했다.
세손께서 지닌 신비롭고 아득한 아름다움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어지럼증을 느낀 이도 등장했다.
세손의 행차는 그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정작 이 흥겨움의 근원지인 궁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칡꽃 같은 보랏빛 어둠이 처마 밑을 부유했다.
밤을 준비하는 궁인들의 걸음이 회랑을 울렸다.
모두가 부산히 움직이는 그때, 세손궁의 후미진 담벼락 아래로 긴 그림자가 모습을 보였다.
예조의 하급 관원 차림의 그림자는 궁의 심처인 세손궁에 무람없이 발을 들였다.
그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딱히 신경 쓰는 모양이 아님에도, 삼엄한 경계의 눈초리를 무사히 피해갔다.
그림자가 세손 침소의 붉은 중문을 넘어섰다.
문득 위협하는 목소리가 그를 막아 세웠다.
“멈춰라.”
등 뒤로 느껴지는 쇠붙이의 날카로운 감촉.
그림자는 걸음을 멈췄다.
느린 움직임으로 뒤를 돌아보니 낯선 군졸이 창을 겨누고 있었다.
“길을 잃었다면 곧장 몸을 돌려 나갈 것이고, 부름을 받았다면 부름의 연유를 대야 할 것이다.”
엄한 짓누름이 그림자를 압박했다.
때마침 구름을 벗어난 달이 세손궁을 밝혔다.
교교한 달빛 아래.
겁 없이 세손궁을 침범한 그림자의 민낯이 드러났다.
예조의 전향사.
현판도 없는 낡은 전각에서 매일같이 무언가를 필사하던 사내, 이형운이었다.
은자원에선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골샌님 같았던 그가 지금은 제 가슴께에 닿은 창을 보고도 위축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로이 배속된 군졸이 있다더니…….”
“무슨 소리냐?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발길을 돌려라.”
툭툭, 치는 창끝이 제법 매서웠다.
바로 그때였다.
“무엄하다. 감히 무슨 짓이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군졸과 형운 사이로 파고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군졸이 어리둥절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부리나케 달려온 최 내관이 형운을 향해 허리를 조아렸다.
“저하, 납시었나이까.”
***
이 창끝을 내려야 할지, 올려야 할지 군졸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에게 최 내관의 호통이 쏟아졌다.
“뭣 하고 있느냐? 당장 그 무엄한 날붙이를 거두지 않고서.”
혼비백산한 군졸이 들고 있던 창을 떨어트렸다.
무너지듯 바닥에 납작 엎드린 군졸은 두려움에 연신 파르르 떨었다.
사나운 표정을 짓는 최 내관을 향해 형운은 손을 들었다.
“그만하라. 그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을 뿐이니.”
무심히 말한 형운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최 내관이 형운의 뒤를 쫓았다.
“곤하지 않으시옵니까?”
어찌 곤하지 않으랴.
사대문 밖까지 어가를 배웅한 이후, 지난 며칠간 크고 잡다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평소 하던 공부도 줄지 않은 터라.
세손의 얼굴에는 진득한 피로가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저하, 아무래도 아니 되겠나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쉬시옵소서.”
“되었다.”
형운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지켜보는 최 내관의 눈에 안타까움이 안개처럼 번졌다.
하루 세 번의 강연은 둘째치고, 전향사의 일만 아니어도…….
언제나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어른도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작은 어깨에 짊어지고서도 싫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더랬다.
‘따르겠습니다.’
매번 한결같은 대답.
버거운 짐은 순종을 요구하였고, 시간이 더해짐에 따라 습관이 되었으며, 버릇이 되어 종내에는 고집으로 자리 잡았다.
“뉘가 들어 계시는 모양이구나.”
세손궁의 낯선 분위기를 느낀 형운이 물었다.
최 내관이 쥐어짜듯 어렵게 대답을 내었다.
“하궐에서 나와 계시옵니다.”
세손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계시느냐?”
“반 시진은 족히 되었나이다.”
“그분을 오래 기다리게 하였구나. 서두르자꾸나.”
말과 함께 형운은 침소 곁방으로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더이상 예조의 하급관리가 아니었다.
존귀한 세손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형운이 침소로 들어섰다.
주인 대신 홀로 방을 차지한 사내가 빙긋, 미소를 보였다.
“이제 오느냐?”
“기다리시는 줄 몰랐습니다. 늦어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내, 부러 기별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말이렷다?”
“느닷없는 행차에 놀라 여쭙는 것이옵니다.”
사내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보였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세손궁에 한바탕 야단법석이 있었다고?”
세손의 아비이자, 이 나라의 국본인 세자가 느긋한 얼굴로 아들을 살폈다.
“어가의 배웅이라니. 좀처럼 궁 밖으로 나오지 않던 네가 어쩐 일이더냐?”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 말하니, 마치 이 아비를 힐난하는 것 같구나.”
“소자는 다만…….”
세자가 손을 펼쳐 아들의 말을 막았다.
“그 이야기는 됐다. 그보다…… 대광통교에서의 일이나 풀어보아라.”
“별다른 일은 없었사옵니다.”
“연을 멈추었다지? 주렴을 열었다는 이야기도 들리더구나.”
“오랜만의 행차라 어지럼증이 일었을 뿐입니다.”
“정녕 그뿐이냐?”
“그뿐입니다. 소자, 미흡하여 아바마마의 분부 받잡기에도 벅차옵니다. 하잘것없는 것에 마음 쓸 여유가 없사옵니다.”
“그뿐이라…….”
뭔가 기대했던 말이 나오지 않자 세자는 흥미를 잃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술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형운이 아비의 빈 잔에 술을 쳤다.
“전향사 일은 어떠하냐?”
“아바마마의 분부 받들어 힘쓰고 있사옵니다.”
“단순히 힘만 쓴다고 될 곳이 아니지. 듣자하니 누군가 네가 있는 그곳을 은자원이라 부른다더구나.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느냐?”
형운은 잠시 침묵하였다.
세자는 그런 형운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부자(父子)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형운이 입을 열었다.
“그릇되고 어둡고 탁한, 세상의 부정(不正)이 모조리 모여드는 진창과 같은 곳이옵니다.”
“잘 알고 있구나. 그럼, 그곳에서 무얼 배우고 익혀야 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으렷다?”
“늪에 빠지면 응당 전신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사에 조심…….”
“틀렸다.”
“그럼, 소자 오물로 그득한 그곳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협잡과 사기, 권모와 술수, 배신과 모략.”
아비의 말에 형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오나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섞지 말라 하였습니다.”
“헌데?”
“어찌하여 아바마마께서는 소자에게 잘못된 것을 보고 배우라 하시는 것입니까?”
“배우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하오나…….”
툭!
형운의 말을 끊으며 세자는 서탁 위로 둥근 물체를 던졌다.
“챙겨두거라.”
“이것은…….”
여러 마리의 말이 음각된 구리쇠로 만든 둥근 패.
“마패가 아닙니까?”
“먼 길 다닐 때,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아비의 기행에 가까운 행동.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체념하는 세손에게 세자가 말했다.
“기왕지사 바깥바람을 쐤으니, 이참에 며칠 나가 보는 것도 좋겠지.”
“나가라 하심은…….”
“은자원에서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읽었을 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글로 본 것을 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아라.”
“감히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술잔을 비운 세자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나쁜 짓을 배우라고.”
***
“휴우.”
홀로 남은 형운은 내내 참았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언제나 그를 힘들게 하였다.
대체 그분께선 무얼 원하시는 것일까?
예조의 하급 관원이 되라는 명도 별스럽다 여겼거늘, 이젠 마패까지 내어주셨다.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불티 같은 마음인지라 도통 짐작하기 어려웠다.
“대체 무슨 심사이신지.”
궁의 법도와 질서는 지극히 엄격했다.
켜켜이 쌓아 올린 율법은 바위처럼 단단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엔 작은 변화마저도 불가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 세손이 가짜 관원 노릇 하는 것을 조정 대신들이 알기라도 하는 날엔, 작은 소란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조용히 궐 밖으로 나가라 하시니…….
“어찌한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쳤다.
그 좋아하는 서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운은 책을 접어 한편에 가지런히 쌓았다.
서탁 위에 습관처럼 펼쳐 놓은 종이마저 접으려 할 때였다.
-아직도 안 왔느냐?
종이 위에 글이 번져갔다.
직설적인 필체.
그 성격따라 글귀 곳곳에 꼿꼿한 성정이 갈무리 되어 있었다.
“그 여인이 상할아버지라 부르는 백귀로구나.”
눈이 감길 정도로 피곤하여 보지 않으려 했으나, 절로 시선이 갔다.
곧이어 다른 백귀의 글이 나타났다.
-돌아온다고 장담한 날이 오늘이 아니던가.
부드러움 가운데 숨길 수 없는 예리함을 간직한 필체.
“화할아버지라 불린 백귀.”
상(霜)과 화(花)의 대화가 이어졌다.
-이상하군.
-무엇이 이상하다는 겐가?
-예전 같으면 이미 돌아와 종알종알 수다를 떨었을 아이가 여태 조용하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으냐.
상의 물음에 이번엔 새로운 필체가 나타나 대답하였다.
-곤하여 잠이 든 것인지도 모르지 않소.
예할아버지라 불리는 백귀였다.
상이 다시 물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으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간다고 한 절이 어디지?
-분명 양화사라 불리는 곳이었지. 그런데 그대는 어이하여 말이 짧은가?
화가 상에게 따져 물었다.
상 또한 지지 않고 맞섰다.
-그럴 만한 분이니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더냐? 그러는 너야말로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따지는 것이냐?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구나.
-뭣이? 너 어디 사는 누구냐? 어느 집 잡귀냔 말이다.
-알면 어쩌려고?
-무덤을 콱! 아니, 집안 전체를 발칵 뒤집어 주마. 내가 누군지 알면 네놈은 무덤에서 기어 나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허허, 그 또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로다.
그 후로도 화와 상, 두 백귀는 말다툼을 이어나갔다.
평소에도 간혹 다투는 일이 있었지만, 오늘은 말리는 사람도 없어 그 다툼이 오래갔다.
“양화사라…….”
백귀들의 다툼을 지켜보던 형운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서탁에 놓인 둥근 마패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