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말 아무 일 없었습니다
청아한 햇살이 별채 지붕에 간잔지런하게 내려앉았다.
별채의 담벼락 위로 생강나무가 노란 꽃가지를 길게 늘어뜨렸다.
오가는 발길로 분주한 안채와 달리 별채는 고요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을 깬 것은 느닷없는 한숨이었다.
“어찌한다.”
이레는 날숨을 내뱉으며 서탁을 노려보았다.
서탁 위엔 간밤의 종이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 종이에 문제의 글이 담겨 있었다.
완벽하고 흠 잡을 데 없는 군자의 필체.
긋고, 흘리고, 누르고, 솟구침이 강샘이 날 정도로 절묘했다.
“몹쓸 귀 같으니. 얼마나 독한지, 글도 사라지지 않네.”
이 글의 주인은 불손이었다.
밤이 몸을 부풀리고 달빛이 선명해지면, 서탁엔 어김없이 백귀가 찾아온다.
텅 빈 백지 위로 검은 흔적이 번지고, 흔적은 곧 글이 되고 문장을 이룬다.
그러나 이레가 접하는 백귀들의 글귀는 영원하지 않았다.
안개처럼 부윰하고, 신기루처럼 흐릿하다 종래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하였다.
할아버지들의 글도 매한가지였다.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시진을 넘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금껏 서탁의 비밀이 지켜진 것엔 그런 숨은 규칙이 크게 한몫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밤새 백귀와 대화를 주고받아도,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백귀와 필담을 나눈 이레의 글조차 그러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이유에선지 불손의 글귀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밤이 지나 낮이 되어도 불손의 글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심지어 며칠 전 처음 대화를 나눈 내용도 그대로였다.
“분명 독종일 거야. 타고난 성정이 가을 독사보다 독하고 지독한 것이 틀림없어. 그러니 글마저 제 주인을 닮아 저리 독하게 남아 있는 게지.”
자신의 글은 하나 남김없이 사라졌거늘, 불손의 글은 여전히 남아 생기를 띄고 있다.
서탁의 주인은 분명 나인데, 어째 객이 주인 노릇을 하는 느낌이다.
“귀한 종이를 이렇게 써 버리면 어쩌잔 것인지.”
투덜거리며 이레는 종이를 들었다.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치워버리려 함이었다.
제일 확실한 것은 태워버리는 것인데.
어쩐지 마지막 글귀 때문에 차마 그러지도 못하였다.
-널 만나러 가마
“참으로 두둑한 배짱이네.”
감히 귀신 주제에 사람의 얼굴을 보잖다.
그것도 다른 때도 아닌 벌건 대낮에.
만나자는 제안도 황당하건만, 장소는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대광통교.
오가는 생낯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다.
“뻔한 수작이지. 날 골탕 먹이려 셈속을 부리는 게 분명해.”
코웃음을 친 이레는 서탁이 보이지 않게 돌아앉았다.
보면 마음 부대끼니, 아예 보질 말자.
서책을 뒤적이고, 만들다 만 베갯모의 수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채 반 식경도 버티지 못하고 슬그머니 서탁 앞에 앉고 말았다.
이러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내가 정녕 미쳤구나.”
서책 사이에 넣어둔 종이를 다시 펼치며 이레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귀신에 홀린 모양이다.
이깟 백귀의 말장난, 눈 딱 감고 무시하면 그만인 것을.
며칠 서탁을 멀리하고 모른척하면, 못된 불손도 흥미를 잃고 가버릴 터인데.
하지만…….
“사실이면 어찌한다. 정말로 대광통교로 날 만나러 나온다면 어쩌지?”
서탁에 깃든 귀니 실체가 있을 리 만무.
음기가 횡행한 달밤이라면 모를까.
양기 현현한 벌건 대낮에 백귀가 시장통을 떠돈다는 소리는 고금을 막론하고 들어 본 적도, 읽은 적도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내 한 번 속아주마.”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이레는 씨름하듯 맞잡이 한 서탁을 물렸다.
“그저 호기심일 뿐이야. 불손이 더는 놀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음이야.”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괜한 핑곗거리를 입에 올렸다.
관심 없다 하면서도 나갈 채비하는 몸짓이 어쩐지 흥겨웠다.
채비는 금세 끝났다.
딱히 채비랄 것도 없었다.
고작해야 귀신을 만나는 일인데, 깨끗한 입성이면 족하리라.
치장은 더욱 할 게 없었다.
이레가 막 문고리를 잡고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안에 있느냐?”
낮은 헛기침 소리와 함께 오라비인 기대가 들어왔다.
“오라버니, 이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내가 못 올 데를 왔다더냐?”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들어오시니 놀라 여쭙는 겁니다.”
“인기척이 없었다니. 지금껏 밖에서 내뱉은 헛기침이 한 소쿠리는 족히 넘을 것이다.”
“그랬습니까?”
불손의 글에 정신이 팔려 밖의 기척을 살피지 못했다.
“너야말로 대체 뭘 하는데 그토록 꼼짝하지 않은 게냐?”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이게 다 그 못된 불손 때문이다.
“딴생각이라.”
누이를 보는 기대의 눈빛이 가늘고 깊어졌다.
무에 은밀한 것이라도 말하는 듯 그는 낮게 속닥였다.
“어떤 사내냐?”
“뜬금없이 무슨 말씀입니까?”
“네 나이에 할 딴생각이 달리 무엇이 있겠느냐. 당연히 사내겠지. 뉘 댁 도령이냐? 내 예전부터 말했지만, 사내는 사내 눈썰미로 살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다.”
“…….”
“걱정 마라. 너도 알다시피 이 오라비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도성 제일이지.”
이레는 잔뜩 기대하는 오라비를 무덤덤하게 응시했다.
“아니냐?”
“아닙니다.”
“조금도?”
“없습니다.”
“그럼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라 사람이 온 것도 모른단 말이냐?”
오라비의 물음에 잠시 주춤한 이레가 대답했다.
“불필지.”
“뭐?”
“오라버니는 모르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 말하니 정녕 수상하구나.”
“어쨌든 사내 생각은 절대 아닙니다.”
단호한 대답에 기대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겨울 가면 봄이 오고, 봉오리 생기면 꽃 피는 게 이치거늘. 넌 어찌하여 사시사철 겨울이냐. 망울진 봉오리 언제 피울 생각인 게야?”
“어찌 뜨거운 여름만 날이겠습니까. 겨울도 그만의 정취가 있는 법. 활짝 핀 꽃은 우아하나, 화무십일홍이라 덧없이 질 일만 남았으니. 피지 않은 봉오리는 비록 수수하나, 겨울을 이기고 났으니 참으로 장하고 고아하지 않습니까.”
“거참.”
이레의 청산유수에 기대는 혀를 내둘렀다.
저 또래의 여인들은 모였다 하면 담벼락 너머의 사내들에 대해 속닥속닥, 잘도 하건만.
저 아이는 도통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입에 올리는 이야깃거리는 서책이고, 기물(奇物)이며, 산술이었다.
누이의 입에서 사내 얘기하는 것은 좀처럼 보지 못했다.
문득 기대는 서탁을 턱짓했다.
“너 또 밤새 저것을 붙들고 있었느냐?”
따박따박, 잘도 하는 대거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긍정의 침묵.
기대가 눈썹을 세웠다.
“저것이 요물이구나. 저 귀물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모르니. 저것이 네 정신을 빼앗고 바깥 일에 무심하게 만드는 원천 아니더냐. 아니 되겠다. 내 저놈의 서탁을 없애야겠구나.”
“안 됩니다.”
이레는 당장에 서탁을 버릴 듯 짓시늉 하는 기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서탁입니다. 아무리 오라버니라도 서탁에 손을 대시면 다신 보지 않을 겁니다.”
“너…….”
“오라버니!”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려던 기대는 걷어 올린 소매를 주춤주춤 내리고 말았다.
“녀석도.”
서슬 퍼런 누이의 눈빛.
저런 눈을 할 때의 이레는 누구도 말릴 수 없다는 걸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쯧, 저깟 서탁이 무어라고 그리 애지중지하는 것인지.”
불퉁한 오라비의 말에 이레는 속으로 웃었다.
‘오라버닌 모르십니다. 저 서탁엔 저만의 세상이 있습니다. 백귀일망정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조언하는 훌륭하신 벗들이 있습니다. 저 높은 담벼락, 그 너머의 세상이 저 속에 있습니다. 밖으로 통하는 저만의 유일한 통로가 있습니다.’
활짝 열어놓은 창밖에서 선선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서탁 위에 올려놓은 서책 사이로 팔랑, 종이 한 장이 나풀거렸다.
불손의 글이 적힌 종이었다.
***
벽오동 나무 끝에 매달린 구름이 담벼락 저편으로 물러갔다.
붉은 태양이 정수리 위로 자리를 옮겼다.
정오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각.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슨 큰 볼거리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어째 여느 때보다 더 붐비네요.”
오가는 인파에 시달리던 이레는 쓰개치마를 잡쥐었다.
“그렇구나.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앞장서 걷던 기대가 대답했다.
이레가 대광통교로 걸음 한다 하자 기대가 따라붙었다.
마침 이곳에 볼일이 있다 하였다.
덕분에 집안 어른들의 눈총을 피할 수 있었다.
반가(班家)의 젊은 여인들에게 바깥나들이는 호락호락한 일상이 아니었다.
“예상했다 하셨습니까? 사람이 붐비는 이유에 대해 들은 것이라도 있으신 모양이군요.”
이레가 묻자 기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엊그제 세손빈 간택을 위해 조선 팔도, 열네 살 이상의 여인들은 혼인을 금한다는 금혼령이 내려졌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주상전하께서 처녀단자를 독려키 위해 행궁으로 행차하시겠다 하셨느니. 그리고 세손 저하께서 그 행차를 배웅하시러 납신다더구나.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세손 저하라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는 바로 그분이시지.”
이제야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수다한 생낯들이 저리 구름처럼 몰려든 까닭.
일생에 다시 없을 진귀한 구경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일까?
모인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여인이었고, 좀처럼 바깥출입 않던 규중의 처자들도 다수 보였다.
권력 있는 양반가의 여인들은 일찌감치 대로변의 집을 차지했다.
그네들은 차양을 내리고 한가로이 앉아 어가의 행렬을 기다렸다.
고만고만한 반가의 처자들과 중인의 아낙들은 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길갓집을 세웠다. 빽빽하게 들어찬 길갓집마다 뽀얀 분내가 진동했다.
여기저기 챠르르챠르르 여인네의 장신구가 몸통 떠는소리를 자아냈다.
눈길 닿는 곳마다 팔랑팔랑 비단 댕기가 봄 나비처럼 날갯짓했다.
여인들의 화사하기가 여름꽃보다 더했고, 향기롭기가 구하기 어려운 사향 같았다.
어가 행차라는 보기 드문 장관에 세손의 갑작스러운 출현이 더해져 거리는 팽팽한 긴장감과 묘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나저나 여기인 듯한데.’
붐비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레는 발끝을 세웠다.
까치발을 한 채 목을 빼 내봐도 수두룩 빽빽하게 몰린 인파인지라.
눈에 보이는 것은 틀어 올리고 땋아 내린 사람들의 뒤통수뿐이었다.
이래서야 불손이 이 자리에 나온다고 해도 찾을 수 없으리라.
“누굴 찾는 것이냐?”
어느새 떡전에서 시루떡을 사 온 기대가 한 덩이를 이레에게 건넸다.
“이 북새통에서 그건 또 어찌 사 오셨습니까?”
“내가 없어진 사람과 물건 찾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니라. 자, 먹어라.”
기대는 싫다는 이레의 손에 기어이 떡을 쥐여주었다.
“찾는 사람이 누구냐? 이름만 대면 내가 한 시진 내에 오늘 입은 속곳까지 죄 알아다 주마.”
“갑갑하여 나왔을 뿐입니다. 그러는 오라버니야말로 볼일이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레는 말머리를 은근슬쩍 기대에게 돌렸다.
“난 이미 찾았다. 마침 예서 멀지 않으니 함께 가자꾸나.”
어느새 누이의 손목을 낚아챈 기대가 거침없이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광통교 다리 근처.
비녀와 머리꽂이, 댕기 등을 파는 잡화전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대는 그중 가장 한산한 곳으로 향했다.
“목이 참 좋군. 이런 곳에 좌판을 부리려면 부지런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릿세를 많이 내야 하는가?”
잡화전의 주인 노파가 주름진 눈을 지그시 뜨며 대답했다.
“당연히 부지런해야 합지요.”
“목이 좋다 보니 자리를 노린 무뢰배들도 여럿일 듯한데…….”
“많지요.”
“예닐곱은 되는가?”
“어제 술시(戌時)에 꺼드럭꺼드럭한 왈짜 둘이 치덕거리더니, 오늘 사시(巳時)에도 사나운 놈들이 괜한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런, 몹쓸 것들을 보았나.”
“먹고사는 것이 다 그렇습죠.”
묘한 대화를 주고받던 기대와 노파는 서로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던졌다.
“요즘 무엇이 쓸 만한가?”
“비녀도 좋고, 노리개도 쓸 만하나 선비님께 어울릴 법한 물건은 이것입지요.”
노파가 뒤편의 짐에서 푸른 향갑을 꺼내 보였다.
기대의 눈에 이채가 반짝 떠올랐다.
그는 향갑에 코를 댔다.
“단향(檀香)이군.”
“백단(白檀)입지요.”
“……마침 필요한 물건이었네. 값이 어떻게 되는가?”
“닷푼입지요.”
“깎아주게나. 내 녹봉이 워낙 시원찮은지라.”
“닷푼입지요.”
“……주게.”
기대는 떨떠름한 얼굴로 값을 치르고 향갑을 받았다.
볼일을 마친 노파가 뒷정리하려는데, 기대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장신구는 무엇인가?”
노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무에 더 필요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내가 아니라 내 어여쁜 누이에게 하나 주고 싶어 그러하네.”
“저리 희고 말갛게 고운 분이시니. 어떤 것인들 아니 어울리겠습니까? 그래도 꼭 하나를 꼽자면…….”
노파는 붉고 투명한 산호로 만들어진 머리꽂이를 추천했다.
“어떠하냐?”
기대가 누이의 동그란 머리에 붉은 장신구를 가져다 댔다.
“내 보기엔 좋아 보이는데. 네 보기엔 흡족하냐?”
노파의 좌판에서 가장 화려하고 값비싼 물건이었다.
화려하게 단장한 여인들 틈바구니에서 유난히 소박한 누이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당연히 어여쁜 장신구를 주면 좋다, 곱다, 해사하게 웃을 줄 알았건만.
“되었습니다.”
이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이것이면 족합니다.”
그녀는 제 머리에 꽂힌 제비꽃 모양의 머리꽂이를 어루만졌다.
불뚝한 못마땅함이 오라비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 제비꽃은 네 머리통에 뿌리를 내렸다더냐? 언제까지 그것만 꽂고 다닐 것이냐?”
“뿌리는 없지만, 여린 것이 장하게 피어 있는 모양이 참으로 곱지 않습니까.”
“매번 같은 패물이 지겹지도 않으냐?”
“매번 같은 것이라 정겹습니다.”
이레의 웃음 끝에 무지갯빛 햇살이 영글었다.
*
-널 보러 가마.
-광통교라 하면 사람의 왕래가 잦을 터인데. 그 혼잡한 곳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 표식을 하면 되겠구나. 널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하거라.
-제비꽃은 어떠한지요.
-제비꽃?
*
제비꽃 머리꽂이.
오래되어 낡고 바랬지만, 이레가 지닌 유일한 패물이었다.
또한, 요양 떠나던 어머니가 남겨주신 각별한 물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대는 그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지 말고 한번 골라보거라. 이 오라비의 녹봉이 아무리 소박하기로서니. 네 머리꽂이 하나 장만 못 해 주겠느냐?”
“저는 참말로 이것이 좋습니다.”
또한, 이것이어야 합니다.
불손과 약조한 표식이란 말입니다.
그때였다.
“세손 저하 납시오!”
먼 곳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모두가 기다린 어가의 행차이자 세손의 출현이었다.
“이런!”
행차 소리에 화들짝 놀란 기대가 불현듯 좌판 뒤로 몸을 숨겼다.
오라비의 돌연한 행동에 이레는 의아함을 떠올렸다.
“왜 그러십니까?”
죄지은 사람처럼.
“내가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 아니더냐. 나와 같은 위치의 사람은 자고로 높은 사람의 눈에 안 띄는 게 좋은 법이다.”
“오히려 눈에 띄어야 좋지 않습니까?”
“물색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본디 높은 사람은 아랫사람의 곤궁함을 알지 못하니. 유능해 보이면 어려운 일을 맡기고, 부족해 보이면 허드렛일을 던져주는 법이다.”
“…….”
“눈에 띌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을 맡기니, 차라리 안 보이게 숨는 것이 상책 아니겠느냐?”
“어째 일하기 싫은 관원의 궁색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명한 처세술이지.”
그 사이, 다시 예의 외침이 들려왔다.
“세손 저하 납시오!”
일사불란한 발소리와 함께 창을 앞세운 병사들이 나타났다.
“물러서시오! 세손 저하십니다!”
멀리서 들리는 취타대의 음악 소리와 함께 기치를 앞세운 행렬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장엄한 어가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
이른 새벽, 창덕궁을 떠난 어가 행렬은 미리 계획한 대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장소를 지났다.
돈화문을 출발하여 돈녕부 앞길을 지나, 통운교를 건너 마침내 대광통교에 이르렀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대광통 돌다리 끝자락을 막 지날 즈음이었다.
“멈춰라.”
아청색저사를 층층으로 겹쳐서 드리운 휘장(垂幨) 안에서 날카로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연(輦)의 곁을 지키던 최 내관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깃들었다.
언제나 예정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던 분이신데.
갑자기 연을 멈추라 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최 내관은 서둘러 주렴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잠시 후.
세손의 명을 받은 늙은 내관이 매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군중을 훑던 그의 주름진 눈매가 꿈틀거렸다.
“있사옵니다, 저하.”
“있어?”
단정한 음성 사이로 잔물결이 일었다.
“네, 분명 저하께서 말씀하신 그것이옵니다.”
주렴 안쪽의 그림자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어디 있는 것이냐?”
“오른쪽으로 다섯 보 떨어진 곳에 있나이다.”
세손은 푸른 실을 엮어 만든 주렴을 살짝 벌렸다.
머리를 조아린 수백의 백성들 사이로 낡은 머리꽂이를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한껏 숙이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으나, 제비꽃 모양의 머리꽂이만은 확연하게 보였다.
언제나 무표정이던 세손의 얼굴에 짜르르한 전율이 비쳤다.
어찌 보면 놀란 것으로 비치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손의 변화에 최 내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뭍에 오른 물고기처럼 펄떡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리고 물었다.
“어찌 하올까요? 가까이 부르오니까?”
“…….”
숨 막히는 공기가 주위를 잠식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집요한 고요.
경직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열린 주렴이 닫혔다.
휘장 너머 검푸른 그림자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윽고 고저 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가자.”
멈추었던 어가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최 내관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떠올랐다.
“대체 어떤 여인인데…….”
세손께서 저리 놀라는 모습일랑은 오늘 처음 보았다.
특히, 그 상대가 여인이라는 점에 더욱 대경실색했다.
주상전하를 배웅하는 길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 여인을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아찔한 흥분마저 들었다.
“여인에게 관심이라니. 우리 저하께서 건곤(乾坤)의 이치를 깨치신 게로구나.”
사리분별 잘하시고, 이치 밝으신 세손껜 남들 모를 흠결이 하나 있더랬다.
모든 것에 능통하신 분이건만, 여인에게 유독 수줍음이 많으시니.
차고 냉정하여 여인에겐 마음결 두지 않는 분이라 오해 아닌 오해도 받지만.
어린 시절부터 내내 곁을 지킨 최 내관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부끄러움 때문이라는 것을.
이래서야 빈궁전에 주인이 든다 한들, 어디 얼굴이나 제대로 보시려나.
세손 저하를 잘 알기에 아쉬움 또한 컸다.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대체 어떤 여인인지 궁금하였다.
최 내관은 호위를 불러 여인이 뉘인지 알아오라 서둘러 명했다.
하지만 돌아온 호위는 빈손이었다.
여인은 이미 모습을 감추고 난 뒤라 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망설이지 말 것을.”
뒤늦은 한탄이 최 내관의 발등을 내리찍었다.
제 주인의 등을 바라보는 최 내관의 뇌리로 연보랏빛 꽃 한 송이가 선연하게 떠올랐다.
엎드린 여인의 머리에 꽂힌 제비꽃.
이른 새벽, 제 주인이 기어이 찾아오라 하명한 꽃.
세손 저하의 관자에 조각된 것과 똑 닮은 꽃이었다.
* * *
밤이 깊었다.
갑갑했던 것일까.
서책을 보던 세손은 닫힌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맑은 밤하늘에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물색없이 밝은 달빛에 눈이 시렸다.
“너는 속도 없이 환하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세손이 서탁에 시선을 던졌다.
“……잡귀가 아니었단 말인가.”
서탁을 통해 자기 일상을 종알거리던 그 아이.
그저 이승에 미련이 남은 백귀라 여긴 여인이다.
가엾은 마음에 성불하기를 기원했건만.
진실로 살아있는 존재라니.
분명 제비꽃 머리꽂이를 하고 있었다.
대광통교.
고개 숙인 수많은 백성 중에, 오직 그 여인만이 제비꽃을 머리에 꽂고 있었다.
굳이 최 내관이 가리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렴을 걷자마자 한눈에 들어왔으니.
“귀신에 홀린 기분이구나.”
서탁은 불길한 귀물이다.
귀신이 깃들어 못된 장난을 친다.
헛헛한 번민이 만들어낸 허망한 꿈.
그저 그렇게 여겼다.
그럼에도 부정 탄 귀물을 버리지 못한 건, 그들의 대화를 엿보며 잠시나마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금으로 만든 새장에 갇혀 지내는 그의 작은 일탈이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그 글이.
그 이야기가.
지금껏 서탁을 통해 오고 간 그들의 대화가.
신기루처럼 헛된 것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사실이었고, 실존하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고작 제비꽃 머리꽂이 하나로 온 넋이 이리 뒤엉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여인이 실재한다면, 서탁의 다른 백귀들도 귀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이란 말인가?”
무어가 어찌 돌아가는 사정인지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반듯하던 그의 이마에 주름이 그려졌다.
그때였다.
서탁 위, 반듯하게 펼쳐진 하얀 종이에 검은 흔적이 번져갔다.
흐리고 진한 농담(濃淡)은 이내 글이 되어 그를 불렀다.
-불손!
“그리 부르지 말라 하였거늘.”
무람없이 자신을 불손이라 부르는 존재를 향해 세손은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들을 리 만무.
백귀…… 아니, 여인과 소통하는 길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다.
세손은 서탁 앞에 앉았다.
마치 그가 앉길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다시 글이 떠올랐다.
-오늘 왜 아니 나왔습니까?
세손은 서둘러 붓에 먹물을 묻혔다.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다시 떠오르는 글귀.
-이것으로 불손이 귀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성격도 급하구나.”
세손은 종이 위에 선명한 뜻을 그려 넣었다.
-아니다, 나갔다. 나는 분명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종이 위의 글씨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반면, 여인의 글은 쉼 없이 떠올랐다.
-불손, 다 이해합니다. 미련이 남았던 것이지요.
“나갔느니.”
혼신을 다해 다시 글을 썼지만, 이번에도 그의 말은 전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먼 길 떠나는 게 두려웠던 것이지요. 그래서 괜히 저를 강샘하고 괴롭혔던 것일 겁니다.
“틀렸다. 내가 왜 널 강샘하고 괴롭힌단 말이냐?”
-괜찮습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오죽 미련이 많으면 저승에도 못 가고 이승을 떠돌겠습니까? 남은 한이 있다면 차라리 제게 푸십시오. 제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너에게 무슨 한을 푼단 말이냐!”
세손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외쳤다.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을 제비꽃 여인이 어찌 생각할까 미뤄 짐작하니, 답답하여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글을 써도 서탁은 그의 뜻을 전하지 않았다.
그저 철저한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어찌 이런…….”
세손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 사이, 상황은 더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뭘 들어준다는 거냐?
-아, 상할아버지!
서탁의 여인과 자주 대화하던 백귀가 나타났다.
-그간 조용하여 드디어 갈 길 떠났구나 안심하였거늘, 어째 이것이 또 나타난 것일꼬.
-어찌 그리 매정하게 말씀하십니까. 저는 그간 할아버지들을 못 뵈어 눈에 진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붓끝에 먹물 대신 엿이라도 묻혔느냐? 오늘따라 끄적이는 글마다 달콤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진심입니다. 정말로 할아버지들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사이 또 다른 백귀들도 나타났다.
-허허,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예할아버지도 오셨네요.
-나도 왔단다. 잘 지냈느냐?
-화할아버지 오셨습니까? 모두 이리 보이시니, 이 감동을 어찌 글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입에 발린 소린 그만 되었다.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말해봐라. 불손은 뭐고, 남은 한은 또 뭐냐?
“하지 마라.”
상할아버지라는 백귀의 물음에 세손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나는 사기 치지 않았다.
너를 속인 게 아니란 말이다.
세손은 종이를 검게 물들일 만큼 필사적으로 붓을 놀렸다.
그러나 서탁은 무정하였다.
그의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서탁 저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렷다.
세손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여인은 언제나 그렇듯 그간의 일들을 고스란히 서탁에 옮겨 적을 테지.
또한,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그를 약조를 지키지 않는 백귀라고 평가를 내릴 것이다.
그러나…….
-아닙니다. 별일 없었습니다.
예상과 달리 제비꽃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래도 제법 의리(義理)를 아는 모양이구나.”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기묘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어냐? 내가 왜 죄지은 사람처럼 이리 안절부절못해야 하는 것인가? 애초에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사태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별일 없었다고? 오늘 쭉 적어놓은 것을 보니, 우리와 만나지 못한 사이 불손이라는 마귀 같은 녀석에게 잔뜩 시달린 모양인데. 굳이 감추지 말고 다 털어놓거라.
눈치 빠른 화할아버지가 진실을 요구했다.
-아닙니다. 정말로 아무 일 없었습니다.
제비꽃 여인은 이번에도 불손에 대한 일을 감췄다.
그런 배려가 오히려 세손의 속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해 목구멍이 뜨뜻해졌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성화를 억누르며 세손은 중얼거렸다.
“배려할 필요 없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그 장소에 갔었다.
내 너를 만나지 못한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는 배려치 마라.
-어허, 우리 사이에 감출 일이 무에 있겠느냐. 숨기지 말고 말해 보아라.
예할아버지가 부추겼다.
-누가 안 나왔다고 하던데, 그 불손이란 녀석이 만나자 했더냐? 고약한 놈이로고. 먼저 만나자 하고선 코빼기도 안 내 비춰? 다음에 또 그러면 내 허락부터 받으라 해라.
상할아버지의 말에 화할아버지가 맞장구쳤다.
-내 허락도 잊지 마라.
“내가 누구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기어이 세손의 입 밖으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순간, 반응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서탁이 아닌 엉뚱한 곳이었다.
드르륵.
침소의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왕손을 돌보는 전각의 내시와 궁녀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바닥에 엎드려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저하.”
“…….”
“저하께서 심기 불편하시니, 그 모두가 저희의 불찰이옵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무슨 잘못을 지었는지 알려주시옵소서.”
시리고 고요하기가 초겨울 호수 같은 분이시라.
좀처럼 마음을 드러내 보인 적이 없으셨다.
그런 분이 저리 울화증을 내는 모습을 보아, 분명 무슨 일이 있음이렷다.
그러나 그 원인과 까닭을 알 수 없기에 세자궁의 궁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모습에 세손은 창밖의 달을 보며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