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널 보러 가마
주위는 아직 까만 어둠이었다.
문풍지 사이로 스미는 바람이 칼날처럼 매서웠다.
훅 들이마시는 들숨 한 자락에도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계절인지라.
선뜻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내처 아침까지 자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다.
그러나 이레는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아늑한 온기를 애써 떨치고 이불 밖으로 나섰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냐?”
동창 너머로 새벽바람보다 곱절은 시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할머니였다.
“일어났습니다.”
서둘러 매무새를 정돈한 이레는 동창 문을 열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이레의 하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도 모르게 팔을 감싸고 떨자니, 쯧쯧 나직하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게을러서야, 원.”
힐난 가득한 음성과 푸르게 날 세운 눈빛이 이레를 향했다.
이른 새벽부터 무에 그리 못마땅한 것이 많은지.
할머니의 일그러진 표정은 좀처럼 풀릴 줄 몰랐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느냐.”
“……송구합니다.”
“서둘러라. 네 오라비 생일상 받다 허기져 쓰러지겠구나.”
서늘한 지청구가 검푸른 새벽공기를 채 가르기도 전에 할머니는 안채 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물끄러미 할머니의 자취를 좇던 이레의 입가에 풀썩 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음력, 섣달 열사흘 밤 5경 3점(새벽 4시 30분)
오늘은 세 살 터울인 오라비 기대의 생일이었다.
또한…….
열일곱 살, 이레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였다.
***
세상 만물이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驚蟄).
창덕궁의 돌담길을 따라 한 여인이 걷고 있었다.
이레였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마른 넝쿨로 뒤덮인 쪽문 앞에 이르렀다.
작은 수레나 잡부들이 드나드는 작은 문임에도 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인지라.
어김없이 지키는 사람은 있었다.
“서라!”
삼엄한 목소리가 이레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 아가씨군요.”
문 앞을 버티고 선 문지기는 이레를 보고 옆으로 비켜섰다.
이레는 고개를 꾸벅하며 그의 곁을 지나갔다.
몇 달을 봤음에도 문지기는 여전히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레가 갈 때마다 꼬박꼬박 길을 열어주는 것을 보면 속은 생각보다 따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 녹지 않은 눈 사이로 드문드문 디딤돌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레는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 한 곳에 다다랐다.
현판도 걸리지 않은 낡은 전각.
그녀의 오라비 기대는 이곳을 은자들의 낙원, 은자원(隱者園)이라 불렀다.
그러나 오라비가 붙인 그럴듯한 이름과는 달리 이곳은 제사와 연회, 의약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전향사(典享司) 아래의 이름도 없는 작은 조직이었다.
낡은 전각의 문은 한 치 빈틈없이 꽉 닫혀 있었다.
밝은 낮임에도 창까지 모두 닫혀 있는 것을 보니…….
“그분께서 계시는 모양이네.”
이레는 잠시 눈을 감고 차분히 숫자를 헤아렸다.
꼭 스물을 세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낡은 소리를 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기 무섭게 짙은 묵향이 코를 찔러왔다.
환한 대낮이었지만, 은자원의 실내는 밤처럼 어두웠다.
창문을 닫은 것은 물론이고 덧창까지 내려둔 까닭이다.
그나마 높은 곳에 난 작은 창이 열려 있어 사위를 조금이나마 분간할 수 있었다.
열 평 남짓한 공간.
벽이며 바닥이며 사방이 책으로 빼곡했다.
드문드문 사람이 간신히 앉을 만한 빈 곳이 보였는데, 그중 한 곳에 사람이 있었다.
아쉽게도 오라버니가 아니었다.
사내는 높게 쌓인 책더미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얼핏 엎드려 자는 듯 보였지만, 어깨너머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붓이 보였다.
이레는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책상에 엎드려 붓을 놀리던 사내가 고개만 까딱해 보였다.
몇 번의 경험으로 그것이 그 나름의 인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오라버니가 보이지 않습니다. 혹, 어디에 가신지 알고 계시는지요?”
“김기대라면 동궁전에 갔소.”
여전히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채 사내가 대답했다.
종이 위를 흐르는 그의 붓은 마치 한바탕 춤사위라도 펼치는 듯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동궁전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내의 붓이 춤을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종이 위에 붙잡아 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대는 갈 수 없는 곳이오.”
“네?”
“동궁전은 이곳과 달리 경비가 삼엄한 곳이라,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가려 하다간 큰일을 당할 수도 있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이니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알겠습니다.”
서늘한 사내의 말에 이레는 오라비를 찾아가려는 마음을 접었다.
그나저나 무슨 말을 저리 차고 시리게 할까?
다정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만 말해주어도 좋을 텐데.
이레가 이곳을 드나든 지 서너 달이 지났건만.
저 사내는 한결같이 이레를 차갑게 대했다.
심지어 고개조차 들지 않아 그의 생김이 어떤지 여전히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은 가끔 들려오는 음성뿐이다.
무안해진 이레는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다 안쪽 깊은 곳의 빈자리를 보았다.
책의 배열과 붓의 모양이 얼마 전에 왔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여기 계시던 분은 어디 먼 곳에라도 가신 모양입니다.”
이레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 사내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아주 먼 곳으로 갔소.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오.”
쌀쌀맞은 그의 대답에 이레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아예 돌아오지 않으면 더 좋겠고.”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혼잣말이오. 신경 쓰지 마시오.”
“…….”
대화는 다시 맥없이 끊겼다.
좁은 공간에 사내와 둘만 있자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밖에서 기다릴까?
이레의 고민이 깊어질 찰나.
“어이쿠, 춥다. 그런데 여긴 또 왜 이리 어두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편한 사내와 있던 터라.
오라비의 출현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오라버니!”
“이 목소리는 어여쁜 내 누이의 것이 아닌가?”
“네, 오라버니. 접니다, 오라버니.”
“오냐. 그리 부르지 않아도 내 어디 안 간다. 잠깐 기다려라. 일단 어두운 것부터 어떻게 좀 해보자.”
기대가 덧창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두운 실내로 빛살이 쏘아 들었다.
사내가 눈을 찌푸렸다.
“너무 밝다.”
“이런, 지금 보니 형운, 자네가 있었군. 어쩐지 어두컴컴하더라니. 웬일인가? 일이 있다 하더니.”
“……급하게 할 일이 생각나 처리하는 중이었다.”
“그런가? 그보다 혼자 있을 때마다 문이란 문은 죄다 닫아버리는 그 버릇 좀 어떻게 하게.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서 어디 살겠는가?”
이형운은 대꾸도 않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기대도 그의 무심한 태도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기대는 이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추운 날 예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이거부터 받으세요.”
“어이쿠. 무겁구나. 이걸 들고 오느라 내 누이의 어깨가 다 빠졌겠어. 그런데 이게 다 무어냐?”
“보면 모르십니까? 오라버니 생일상이잖아요.”
“그렇구나. 어디 보자. 뭐가 들었나.”
김기대가 보따리를 풀었다.
보퉁이에 담긴 음식을 확인한 그는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생일상은 오직 한 사람, 기대의 몫뿐이었다.
“할머님도 대단하시구나. 이쯤 되었으면 네 몫도 준비해 주시련만.”
“저는 괜찮습니다.”
“너도 함께 먹자.”
기대는 이레에게 숟가락을 건넸다.
그러다 생각난 듯 건너편에 있는 형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도 한술 들겠는가?”
“되었다.”
사내의 무심한 대답에 기대는 주춤하는 이레를 재촉했다.
“어서 먹자.”
마지못해 숟가락을 건네받은 이레는 미역국을 한술 떠 입에 넣었다.
“맛있다.”
이레의 입가에 말간 미소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커다란 눈동자.
석류처럼 붉고 매초롬한 입술.
동그마니 솟아오른 콧날.
말간 얼굴은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열일곱, 한창 만개하여 피어오를 시기.
그러나 어릴 적부터 숱한 잔병치레에 시달린 탓일까?
이레에게서는 또래의 여인들이 갖는 화사함 대신 병약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어째 입성이 그리 부실한 것이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대가 누이의 입성을 타박했다.
“날이 이리 궂으면 오지 마라. 행여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겸사겸사입니다. 오라버니도 보고, 나들이도 하고. 게다가…….”
이리 제 몫의 생일상도 받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입안에 맴도는 말을 꿀꺽 삼킨 이레는 습관처럼 웃음을 지었다.
이레를 낳은 직후, 산후열을 다스리지 못한 어머니는 자리보전하여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겐 어미의 생(生)을 갉아먹고 태어난 자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어린 이레를 향한 세상의 눈초리엔 언제나 매서운 가시만 가득했다.
누구 하나 따스한 품을 내어주지 않았다.
외롭지 않다면 거짓이리라.
봄은 봄이라 서럽고, 여름은 화사하여 시샘이 솟구쳤다.
가을엔 곱게 물든 단풍이 아릿하여 눈가가 붉어졌다.
시린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밤엔 옹송그린 몸을 펼 수도 없었더랬다.
그 외로운 삶에 작은 의지처가 되어 준 것이 할아버지와 오라비 기대였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론 기대만이 이레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기대가 예조소속의 종 9품 관원이 된 것은 3년 전 가을이었다.
그는 이따금 이레를 은자원으로 불러들였다.
또한, 매년 자신의 생일이면 숙직을 자청하고 이레에게 생일상을 부탁했다.
별채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누이에 대한 배려였다.
“하늘이 심상치 않구나. 눈이 많이 내릴 것 같아.”
식사를 끝낸 이레를 보며 기대가 말했다.
“가자. 내 궁문 밖까지 배웅하마.”
기대를 따라 은자원을 나서던 이레가 뒤를 돌아보며 작별을 고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사내는 여전히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레는 그의 머리가 위아래로 조금 끄덕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정말 한바탕 요란하게 쏟아질 모양이구나.”
하늘엔 먹장구름이 가득했다.
나란히 걷던 기대가 뒤늦게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지난번엔 도움이 컸다.”
“도움이요?”
“산학문제 말이다.”
“아하, 그 일 말이군요. 워낙 물어보는 게 많아 어느 도움을 말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 네 덕분에 내가 간신히 쫓겨나지 않고 은자원에라도 붙어있구나.”
“왜 사람들은 오라버니의 능력을 몰라볼까요? 은자원에만 있기엔 오라버니의 능력이 아깝습니다.”
“은자원이 어때서? 난 저곳이면 족 하느니.”
이레는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기대는 미련조차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보다…….”
기대가 은근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이제 슬슬 비결을 알려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
“무슨 비결 말입니까?”
“네 박식함의 비결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김기대, 그를 가리켜 수재라 하였다.
하지만 그가 지닌 지식의 방대함과 지혜는 누이인 이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떤 어려운 문제도 누이는 손쉽게 풀어내곤 하였다.
간혹, 그 자리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라도 다음 날이 되면 언제 고민했냐 싶게 해답을 내놓곤 했다.
“모든 답은 서책 속에 있습지요.”
“서책이라면 나도 남 못지않게 읽었다.”
“사실 비밀입니다만…….”
“그래, 이제야 네 비법을 가르쳐 줄 마음이 생긴 모양이구나.”
“제겐 비밀 스승님이 여럿 계십니다.”
“비밀 스승?”
“네. 달이 뜨는 밤이면 어김없이 오셔서 가르침을 주시지요.”
이레의 말에 기대는 콧방귀를 끼었다.
“또 그 허무맹랑한 소리구나. 됐다, 말하기 싫으면 관둬라.”
이레는 입가를 길게 늘였다.
오라버니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생각하는 그 일이 단순히 둘러대는 말이 아니란 걸 알면 얼마나 놀라실까?
달이 뜨는 밤이면 찾아오는 백귀.
직접 보여주기 전에는 절대 믿지 못하겠지.
아니, 설사 보여주어도 귀신 붙은 물건이라며 서탁을 불길하게 여기리라.
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 서탁을 부수거나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분들이 있어 외로운 날들을 버틸 수 있었노라 말한다면 오라버닌 이해해 주시려나.
말하는 서탁과 만난 지도 어느새 10년이었다.
서탁에 깃든 백귀들은 성격도, 필체도 모두 달랐다.
자상한 분도 계시고, 엄한 분도 계셨고, 비위 맞추기 어려운 까다로운 분도 계시지만, 이레는 서탁의 귀인들이 무척이나 좋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상념에 빠진 이레를 기대의 목소리가 깨웠다.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동궁전에 가셨다면서요? 어쩐 일로 그런 귀한 곳까지 가셨습니까?”
“그건 말이다.”
주위를 살핀 기대가 비밀이야기 하듯 속삭였다.
“실은 이 오라비가 나라의 중차대한 일을 담당하고 있느니라.”
“중차대한 일요?”
“그렇지. 그 일로 동궁전의 주인을 뵙고 오는 길이다.”
이레는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 대단하신 분께서 어찌 은자원에 계십니까?”
“어허, 다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라니까.”
기대가 소맷자락에서 불그스름한 동패(銅牌) 아랫부분을 슬쩍 보였다.
워낙 찰나 간의 일이라, 자세한 모양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특별한 패다. 이것이 있으면 조선 팔도 못 가는 곳이 없고, 못 만날 사람이 없다.”
“그리 대단한 겁니까?”
“당연하지. 내가 굳이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신분을 딱 드러내면…….”
“내면?”
“산천초목이 두려워할 만큼 엄청난 사람이니라.”
“지금 보니 오라버니께선 참으로 대단한 분이셨군요.”
“그렇지. 그러니 명심해라. 이 일은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물론이지요. 그런데 오라버니.”
“그래, 말해봐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비밀을 알고 있는 누이야. 내 네가 궁금한 것이라면 뭐든 대답하마.”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시는 분께서 녹봉은 어찌 그리 소박하십니까?”
“사내가 큰일을 하는데, 그깟 돈이 무에 중요하겠느냐. 그깟 녹봉 따윈 연연하지 않겠노라 내 소탈하게 말하였느니라.”
“소탈하다 못해 허탈할 지경입니다. 그러니 다음에 세자저하를 뵈오면 녹봉 좀 올려달라 부탁해 보십시오. 그리 중한 일을 하는데 그깟 녹봉, 안 올려 주시겠습니까?”
“너 어째 내 이야기, 믿지 않는 눈치구나?”
서로를 마주 보던 오누이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입니다. 오라버니도 제가 말한 비밀 스승님 얘기, 안 믿잖아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오라버니의 농도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너의 이야기는 이제 식상하구나. 그만 다른 핑계를 찾을 때가 된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나도 사실이니라. 그러니 내 농은 꼭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제 입에 천근의 추가 달렸음을 오라버니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라버니께서 오늘 제게 하신 농은 절대로 발설치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참, 오늘 동궁전에 갔다가 궁인들이 속닥거리는 걸 들었단다.”
“재밌는 얘기라도 하더이까?”
“당연하지.”
“무슨 얘깁니까?”
“바로 세손 저하에 관한 이야기였다.”
“세손이시라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고 소문 난 바로 그분 아닙니까.”
“그렇지. 반듯하길 자로 잰 듯하고, 진지하고 또 진지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단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사신다는 바로 그분 말이다.”
“항상 어제와 같은 오늘을 지내시는 분께 어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단 말입니까?”
주위를 몇 번이나 살핀 기대가 귓속말로 전했다.
“그분께 남모를 기벽이 있으신 모양이다.”
“기벽이요?”
“그렇다는구나. 듣자 하니 시작은 몇 해 전부터였는데, 최근에야 외부로 새어 나온 모양이더구나.”
“그래요? 대체 어떤 기벽이랍니까?”
“그게 말이다…….”
***
궁에서 돌아온 이레는 창을 열고 하늘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눈을 쏟아내던 먹장구름은 멀리 흘러가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난히 달무리가 짙었다.
어쩌면 오늘은 할아버지들을 뵐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아 종이를 펼쳤다.
연적에 물을 채워 벼루에 붓고, 먹을 들어 정성스레 갈았다.
모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쓰시던 물건이었다.
준비를 마치자 비로소 이레는 붓을 들었다.
-화할아버지, 예할아버지, 상할아버지.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십니까? 바로 제가 세상의 빛을 본 날입니다.
열일곱 번째의 생일.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단 한 번의 축하도 받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받고 싶었다.
지금껏 잘 자랐다, 고생하였다, 장하다…….
그런 따듯한 말이 듣고 싶었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새겨넣은 글은 곧 안개처럼 흩어졌다.
이레의 표정이 밝아졌다.
날이 좋지 못해 오늘은 힘들다 여겼는데, 누군가 글을 본 모양이다.
어느 분께서 보셨으려나.
엄한 상할아버지일까, 자상한 화할아버지일까, 아니면 점잖은 예할아버지이려나.
그러나 어찌 된 이유에선지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이레는 고개를 숙여 창밖을 확인했다.
비스듬히 비쳐 보이는 밤하늘엔 흐릿한 달과 검은 구름이 어우러져 있었다.
구름이 달을 가리진 않았지만, 달무리가 여느 날보다 짙었다.
글이 사라져 누군가 답하겠구나 여겼는데.
아무래도 안 될 모양이다.
오늘만은 꼭 할아버지들의 글을 보고 싶었는데.
기운이 쭉 빠졌다.
종이를 치워버릴까 하던 이레는 다시 붓을 들었다.
그런 날이 있었다.
대거리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하릴없이 수다를 떨고 싶은 날.
아무 말이나 늘어놓고 싶었다.
이레의 붓이 다시 깨끗한 화선지 위를 미끄러졌다.
-오늘은 어떤 이야길 들려드릴까요? 아, 맞다. 오늘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왕손께 특이한 기벽이 있다 합니다. 그 기벽이 무엇이냐 하면…… 아! 그 전에 이 일은 절대 비밀입니다. 어디에서도 발설하면 아니 됩니다. 할아버지들께선 입이 무거우시니 믿겠습니다.
이레가 막 세손의 특이한 기벽에 대해 적으려 할 때였다.
-기벽? 말도 안 되는 소리.
빈 여백에 떠오른 글씨.
“대답이 왔어!”
받아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답신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반듯한 미간에 고랑이 패였다.
유척(鍮尺 : 자)을 대고 쓴 것처럼 지나치게 반듯한 글귀.
낯선 필체였다.
-기벽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처음 뵙는 분 같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새로운 할아버지인가?
궁금증과 기대감에 가슴이 다 설레었다.
그러나 물음에 되돌아오는 것은…….
-설마…… 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이냐?
답이 아니었다.
반듯한 필체와 어울리지 않는 어리둥절함.
이레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분, 처음이시구나.
이런 반응, 익숙했다.
화할아버지처럼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오시는 분도 계셨지만, 상할아버지처럼 대뜸 역정을 내시는 분도 계셨다.
예할아버지는 또 어떠하셨던가.
한동안 대답 대신 부적 그림만 열심히 전해져왔더랬다.
이번에도 그런 분이신 게 틀림없었다.
-네. 읽을 수 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아마도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하신 모양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처음엔 다들 놀라시니까요. 곧 적응하게 되실 겁니다.
곧바로 답이 왔다.
-처음이 아니다. 당황하지도 않았다. 다만…… 아니다. 아무래도 내가 잡귀의 대화에 너무 빠진 모양이다. 되었다. 이제 더는 필요치 않으니 그만 물러가라.
난데없는 축객령.
“누가 누굴 보고 잡귀라 하는 거야?”
이레는 다시 붓을 들었다.
불편한 마음을 대변하듯 그녀의 붓이 빠르게 움직였다.
-잡귀라니요. 오히려 제가 할 말인 것 같습니다. 저도 굳이 할아버지와 대화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물러가 주십시오. 전 다른 할아버지들을 뵙고 싶습니다.
사라지는 글씨.
곧바로 토해내듯 반듯한 필체가 종이를 검게 물들였다.
-미련이 많은 귀로구나. 이승의 연이 다하였으면 저승길을 찾는 것이 순리이거늘. 내 그간 적적함을 덜까 하여 너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으나, 더는 못 하겠구나. 세손의 기벽이라니. 어디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듣고 와 허풍을 떠는 것이냐? 더는 듣기 싫구나. 그만 떠돌고 성불하여라.
성불?
뭐야, 이 잡귀.
-그쪽이야말로 극락왕생하시지요.
-감히! 내가 뉘인 줄이나 알고 막말이더냐?
글자 하나하나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의 오만불손함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살아생전 제법 위세 등등하였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레의 미간에 주름이 가득 그려졌다.
-뉘신대요?
뉘시기에 그리 오만불손하십니까?
차마 뒷말은 쓸 수 없어 참았다.
한참이 지나도록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여백 위로 글자가 떠올랐다.
-불필지(不必知).
-네?
-너는 알 필요 없다는 뜻이다.
“……!”
***
여러 날이 흘렀다.
밤이 되자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준비를 마치고도 한참을 망설인 이레는 그리움을 담아 붓을 놀렸다.
-할아버지들, 모두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요? 요즘 저는 매일 밤이 지옥 같습니다. 기다리는 할아버지들 대신 정신 나간 미친 마귀만 나타나니. 하루하루가 외롭고 번잡하여, 속상하기 그지없습니다.
먹이 번지듯 이레가 쓴 글이 사라지고 얼마 후.
-그 미친 마귀가 설마 나는 아니겠지?
하얀 종이 위로 반갑지 않은 글씨가 떠올랐다.
-불손(不遜) 오셨습니까?
열일곱 번째 생일 이후, 오라는 할아버지들은 아니 오시고 오지 말라는 오만불손한 잡귀만 불쑥불쑥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레는 요즘 부쩍 자주 만나는 이 미친 귀에게 불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상함과 배려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귀(鬼)에겐 할아버지라는 칭호조차 아까웠다.
그런 속내를 알지 못한 듯 불손은 불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불손이라 부르지 말라 하였다.
-정히 싫으시면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네가 감히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불손이라 불러야겠습니다.
-네가 간덩이가 부었구나. 하긴, 잡귀인지라 부을 간도 없겠군.
-잡귀, 아니라 했습니다. 왜 자꾸만 사람을 귀신 취급합니까?
따지는 글귀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서탁 위로 단정한 글씨가 떠올랐다.
-귀신이 아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증명해 봐라.
-무얼 증명하란 겁니까?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해봐.
이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하다하다 서탁에 깃든 귀신에게 사람임을 증명하란 소리까지 들었다.
오기가 난 이레가 빠르게 글을 적었다.
-좋습니다. 하지요. 어찌하면 제가 사람이라는 걸 믿겠습니까?
-만나자.
-네, 좋아요. 만나…….
잠깐!
지금 저 잡귀가 날 만나자고 하는 거야?
설마, 서탁 안으로 들어오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이레의 눈에 다시 선명한 글씨가 박혔다.
-내일 정오, 대광통교 앞.
-…….
-널 만나러 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