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화 (1/215)

#1. 말(書)하는 서탁

일곱 살 겨울,

나는 말(書)하는 서탁과 만났다.

***

“여행 중에 참으로 귀한 인연을 만났지 뭐냐.”

오랜 여행에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가족들 앞에 큰 보퉁이를 꺼내놓았다.

무명 보퉁이 안에서 나온 것은 낡디낡은 서탁이었다.

“이게 대체 무어예요?”

어린 이레가 할아버지께 물었다.

“이 할아비가 금강산 구경 떠났던 건 알고 있지?”

“당연하죠. 할아버지가 벼르고 벼르다 떠나신 여행이잖아요.”

“그래. 내 죽기 전에 금강산은 꼭 보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더랬지. 그런데 하필이면 금강산에 도착한 것이 겨울이라. 겨울 산의 변덕은 춘삼월 봄바람보다 더하지 뭐냐. 분명 활짝 갠 하늘을 보고 산으로 올랐는데, 중턱에 다다르기도 전에 눈발이 펑펑 날리더구나.”

“그래서요?”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산을 내려오는데, 아뿔싸! 급한 마음에 발을 헛디뎠지 뭐냐.”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할아버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할아버지는 다시 마른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꼴이었지. 날은 춥지, 넘어지는 와중에 발목까지 접질렸지. 또, 어디서 긁혔는지 어깨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는 거야. 아차 싶었지. 아니나 다를까 피 냄새를 맡고 범이 나타났단다. 집채만 한 놈이었지. 놈을 본 순간 이제 정말 죽었구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구나.”

“그래서요? 그래서 어찌하셨어요?”

일곱 살의 이레는 잔뜩 긴장된 얼굴로 이야기를 재촉했다.

할아버지는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그때 귀인이 나타난 게야.”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점점 흥을 더해갔다.

“범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나를 위협하고 있을 때였지.”

“…….”

“다 잡은 먹이라고 생각했던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던 녀석이 어느 순간 내 머리 위를 덮쳐 왔단다. 바로 그때! 내 비명을 듣고 달려온 귀인께서 귀신같은 솜씨로 화살을 쏘았단다.”

“와!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칼바람을 뚫고 날아온 화살이 그놈의 미간 한복판에 정통으로 꽂혔지 뭐냐. 화살을 맞고 놀란 호랑이가 이렇게 펄쩍 크게 한 번 뛰더니 그대로 쓰러져 죽고 말았단다. 즉사였지.”

“화살 한 발에 호랑이를요? 정말 대단하네요!”

“아무렴. 대단하고말고. 내 평생 명궁으로 소문난 사냥꾼을 여럿 보았지만, 맹세코 귀인만큼 신출귀몰한 궁술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단다.”

“귀인 덕분에 할아버지께서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으셨군요.”

“그래. 네 말대로 그이 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단다. 천운이었지.”

할아버지의 주름진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마음이 통하는 벗을 만났단다. 몇 날 며칠을 그 벗과 함께 범고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나누었지. 내 평생 살면서 그리 즐거웠던 적이 없었어. 그렇게 밤이 지나고 그 벗이 내게 준 것이 바로 저 서탁이란다.”

“정말 엄청난 분을 만나셨네요, 할아버지.”

어린 이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자 손뼉까지 치며 감탄했다.

그때 두 사람 사이로 이레의 아비가 끼어들었다.

“아버님, 설마 그분께 돈을 빌려주시진 않으셨죠?”

아들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가 산에서 돈을 잃어 난감한 상황이라지 뭐냐. 하여, 내 남은 여행경비를 다 털어 주었지.”

“그 대신에 저 서탁을 맡겼을 테고요.”

“어찌 그리 본 것처럼 잘 아느냐. 빌린 돈을 갚으러 꼭 오겠다고 하였단다. 그때까지 저 서탁을 잘 보관해 달라고 했지.”

이레의 아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버님, 또 당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사기꾼의 농간에 걸려든 겁니다.”

“네가 무얼 안다고 귀인을 그리 깎아내리는 것이냐?”

“…….”

“저 서탁이 어떤 것인 줄 아느냐? 벗의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가보라고 하였다. 그 귀한 것을 내게 맡긴 것이야.”

“답답합니다. 사기꾼은 다들 그리 말하는 걸 어찌 모르십니까.”

“그럴 리 없다. 얼마나 선한 눈빛을 가진 사람인 줄 아느냐. 게다가 아는 것은 또 어찌나 많은지. 그야말로 박학다식한 선비 중의 선비였느니. 그런 사람을 사기꾼이라니. 당치도 않다.”

할아버지가 말했지만, 집안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람 좋아하고, 무턱대고 아무나 믿었던 할아버지.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 선한 성정 때문에 곧잘 못된 사람들의 표적이 되곤 하셨다.

그러니 거금을 빌리고 그 대가로 고작 서탁을 맡겼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좋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다.

냉랭하게 방을 나가는 가족들을 향해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나는 내 벗을 믿는다. 나와 약조를 했느니라. 그러니 그 약조를 지키기 위해 꼭 올 것이야.”

할아버지의 장담과 달리 벗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보다 벗에게 무슨 딱한 사정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하셨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끝내 벗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던 봄날.

상중(喪中)임을 알리는 등이 내걸렸다.

평소 인품이 훌륭하고 인심 또한 넉넉하신 분이라.

문턱이 닳도록 문상객이 드나들었다.

살아생전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하셨는가, 칭송하는 목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할아버지께서 애지중지하시던 낡은 서탁은 대문 밖에 버려졌다.

가족들은 근본을 알 수 없는 물건이 집안으로 들어와 할아버지의 명을 재촉했다고 원망했다.

버려진 서탁 위로 거센 빗줄기가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작은 그림자가 낡은 서탁 위에 그려졌다.

이레였다.

물끄러미 서탁을 바라보던 이레는 고사리손으로 서탁 위의 빗물을 닦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서탁을 제 방으로 들였다.

“할아버지.”

이제는 떠나고 없는 할아버지의 유품.

낡은 서탁의 모서리를 만지니 그 앞에서 서책을 읽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탁의 나뭇결을 따라 할아버지의 자상한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 더 각별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던 할아버지.

행여 무서운 꿈을 꾼 날이면 ‘괜찮다, 괜찮다’ 작게 속삭이며 다독여주시던 그분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고 뒤돌아보면 그 자리에 계실 것 같았던 분의 부재가 이리도 크게 다가올 줄은 미처 몰랐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작은 흐느낌이 쉼 없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울다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이레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캄캄한 밤이었다.

밤하늘엔 유백색의 달과 함께 하얀 별 무리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열린 동창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이레는 버릇처럼 서탁을 쓸어내렸다.

할아버지께 글을 배우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레는 종이를 꺼내 서탁 위에 펼쳤다.

무얼 쓸까?

고민도 잠시.

눈 속에 피어난 매화꽃처럼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종이 위로 쓰였다.

-할아버지.

비록 받을 수 없는 곳에 계신 분이지만…… 이렇게라도 불러보고 싶었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이레는 서신을 이어갔다.

-할아버지. 잘 계신가요? 할아버지께서 떠나시고 벌써 여러 날이 흘렀어요. 그곳은 어떤가요? 고요하고 평화로운가요? 하늘과 땅, 바람과 구름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인가요? 그곳이 어떤 곳이든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곳일 거라 믿어요.

좋은 곳에서 더는 아프지 않으실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아련함과 표현 못 할 서러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조용히 슬픔으로 젖어가던 종이 위에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슷.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의 여백에 검은 흔적이 번져갔다.

먹이 떨어진 듯 유려하게 흐르던 검은 자국은 어느 순간 글자가 되고, 문장을 이루었다.

-아이야, 무슨 일이냐?

“어?”

놀란 이레의 입술이 열없이 벌어졌다.

심장이 쿵쾅 뛰고 머릿속이 혼미해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생각을 수습하기도 전에 또다시 글씨가 떠올랐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이냐? 걱정 말아라. 좋은 곳으로 갔을 터이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종이 위에 절로 글이 써지다니.

내가 헛것을 보았나?

이레는 손등으로 제 눈을 마구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비비고 또 비벼도 종이 위의 글씨는 여전했다.

“할아버지…….”

자상한 문장에 어린 이레의 눈가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차분하게 어르고 달래주는 글귀가 마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것인 듯 느껴졌다.

***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레에게 닥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바뀐 거처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사랑채에 기거하던 이레는 쫓겨나듯 별채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할머니의 명이었다.

‘저 아이 태어나고 나선 집안에 망조가 들었다’는 할머니의 입버릇 때문일까?

어린아이를 버려진 별채로 내치는 할머니의 모진 처사에 누구도 감히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시 여러 날이 흘렀다.

산과 들에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연초록 잎들은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밤마다 서탁 앞에 앉는 것은 어느덧 이레의 일상이 되었다.

스스로 글을 쓰는 서탁이라.

어른들이 보았다면 귀신 들린 물건이라며 기함했으리라.

무릇 범상치 않은 귀물(貴物)은 사람에게 경외와 동시에 두려움을 주는 법.

그러나 아직 어린 탓일까?

이레에게 서탁은 두려움보단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처럼 서탁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마냥 기쁘고 즐거웠다.

혹여 이 기쁨을 빼앗길까 두려워 어린 소녀는 서탁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은 달이 밝구나.”

습관처럼 밤하늘을 올려다본 이레는 얼굴 가득 해사한 웃음을 떠올렸다.

한동안 장맛비로 달이 뜨지 않았다.

지난 몇 개월, 서탁에 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서탁은 귀물이되 언제 어느 때나 답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밤에만 답을 하였다.

그것도 꼭 달이 뜬 달밤에만 호응했다.

그믐이나 먹구름이 가득하여 달이 보이지 않으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답은 없었다.

두 손으로 열심히 먹을 갈고, 붓에 먹물을 찍은 이레는 종이 위에 또박또박 글을 적었다.

-오늘은 온종일 방에만 있었답니다.

이레가 문장을 완성하자 모래에 떨어진 물처럼 글이 사라졌다.

이윽고 답하는 글귀가 떠올랐다.

-왜 방 안에만 박혀 있었느냐?

위엄 가득한 필체.

“오늘은 상할아버지네.”

서탁에 대해 이레가 알아낸 두 번째.

바로 서탁에 깃든 백귀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자상한 느낌의 백귀와만 대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 분, 또 한 분 늘어나 이제는 세 분과 대화하게 되었다.

처음 만난 할아버지를 이레는 화(花)할아버지라 불렀다.

화할아버지는 세상 만물, 모르는 것이 없었다.

특히 꽃에 대해서라면 들판의 작은 들꽃마저도 그 이름과 기원을 알고 있을 만큼 박학다식한 분이셨다.

무엇보다 다정다감하셨더랬다.

두 번째로 만난 할아버지는 칼 자르듯 단호한 성격에 위엄 가득한 필체를 지닌 분이었다.

말투에 시린 기운이 뚝뚝 묻어나는 백귀를 이레는 상(霜:서리)할아버지라 불렀다.

세 번째 할아버지는 유달리 부드럽고 예의가 바른 분이셨다.

어린 이레에게도 함부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이레는 이분을 예(禮)할아버지라 칭했다.

오늘 이레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어오신 분은 어투가 딱딱하고 필체가 강했다.

상할아버지가 분명했다.

-오늘 큰댁에 가셨던 할머니께서 오셨어요.

곧바로 대답이 왔다.

-그 망할 할망구가 또 널 못살게 굴더냐?

-할머니를 그렇게 부르면 나빠요.

-널 그리 업신여기는데도 여전히 감싸고 도는구나.

-어른은 공경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잘 들어라, 아이야. 자고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짐승과 다르지 않다. 약하면 괴롭힘당하고, 먹히는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짐승이 아닌걸요?

-그럼 짐승만도 못한 위인이구나.

-말씀이 지나치세요.

-짐승이 아닌데도 제 손주를 그리 박대하니, 짐승만도 못한 게지.

-할머니 욕 그만하셔요. 자꾸 그리하시면 상할아버지와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

-마음대로 해라. 대신 한 가지는 알아두어라.

-뭘 알아야 하나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부채(負債) 같은 것이다. 뭐든 받은 대로 돌려줘라.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거 아닌가요?

-선의도 악의도 받은 대로 갚아주라는 소리다. 자고로 선의를 베푸는 자는 의심하고, 악의를 품은 자는 곁에 두어야 하는 법이다.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악인은 멀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내게 나쁜 마음을 품은 놈이면 아예 저승으로 치워버리든가, 가까이 두고 감시해야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잊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그래야지. 그나저나 이제 너도 성불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상할아버지는 자꾸 나보고 성불하래.”

이레는 서탁 위로 떠오른 글씨를 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상할아버지뿐만 아니라 화할아버지와 예할아버지도 이따금 이런 말을 하신다.

“분명 아니라고 했는데 왜 다들 날 귀신 취급하시는 걸까? 정작 귀신은 할아버지들이면서.”

서탁에 대해 알아낸 세 번째.

서탁의 백귀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덕분에 이레는 할아버지들로부터 성불하라는 소릴 종종 들어야 했다.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뾰족 내민 이레는 열심히 붓을 놀렸다.

-전 아직 어려서 성불하려면 백 년은 더 걸릴 거예요. 그러니 상할아버지 먼저 성불하세요.

-네가 정녕 혼꾸멍이 나고 싶은 게냐?

-어허, 어린아이에게 그 무슨 겁박이시오?

-예할아버지 오셨군요.

-그래, 잘 지냈느냐?

별채의 불은 밤이 깊도록 꺼지지 않았다.

서탁의 할아버지들은 그녀에게 서책을 읽어주었고,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때때로 접하기 어려운 세상의 내밀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어린 이레는 서탁을 통해 세상을 배워나갔다.

***

밤 4경 3점(새벽 2시 30분), 바람이 많이 불었다.

둥, 둥, 둥…….

멀리서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어둠에 잠긴 이른 새벽.

고요한 궁궐 회랑을 최 내관은 종종걸음쳤다.

여느 날보다 세손궁의 문턱을 늦게 넘은 까닭이다.

늙으면 잠이 준다더니.

그 말도 다 헛말이다.

요즘 들어 아침잠이 부쩍 많아졌다.

잠깐 긴장을 풀었더니 기어이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세손궁의 침소 문을 여니 어느새 정갈한 자세로 앉아 있는 주인의 옆모습이 보였다.

“저하, 벌써 일어나시었사옵니까?”

최 내관은 고개를 조아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조선에서 가장 높은 담벼락 안, 그 안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의 공간.

만물을 뒤덮고 있는 검푸른 새벽공기도 차마 이곳은 범접하지 못하는 듯했다.

고작 문하나를 사이에 두었건만.

문 바깥의 세상과 문 안쪽의 세상은 전혀 달랐다.

방을 채운 작은 가구 하나에도 장인의 숨결이 깃들어 있었다.

천장을 받친 붉은 기둥은 무거운 위압감을 자아냈고, 자로 잰 듯한 격과 식에 맞춰 치장한 모든 것이 이 방의 주인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 특별한 존재의 변함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파루가 치기 전에 시작되는 세손의 하루는 지켜보는 이가 숨이 찰 만큼 벅찼다.

밤 4경에 눈을 떠 밤 2경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세손의 손에서 서책이 떠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쩌다 몸이 아플 때도 정해진 분량의 공부를 마친 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어디 그뿐일까?

숨결 한 자락, 손짓 하나도 궁의 법도와 예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허튼 잠꼬대도 없었다.

모든 행동이 원칙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어쩌면 꿈마저도 절차에 따라 꾸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예법으로 만든 갑옷이라도 입은 듯 세손의 행동은 반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 살, 어린 주인을 모시기 시작한 이후로 꼬박 7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저분께선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린 시절부터 저분이 크게 웃는 것도 본 적 없다.

우는 모습은 더더욱 보지 못했다.

주상전하께선 그 모습을 흡족해하시는 듯하지만.

마치 감정을 잃어버린 석상처럼, 하루하루 메말라가는 세손의 표정을 볼 때면 최 내관은 가슴이 아려왔다.

“저하, 주상전하께서 금일 아침 경연은 쉬자 하시옵니다. 그러니 좀 더 주무셔도 되나이다.”

“…….”

그러나 그의 주인은 서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하…….”

한번 서책을 잡으면 곁에서 벼락이 쳐도 꿈쩍도 않는 분인지라.

더는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 최 내관은 마지 못해 침소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모처럼 쉬시게 하라 하셨는데.”

전각 뜨락으로 내려서는 최 내관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상선 아시는 날엔 또 한 소리 듣겠구나.”

낮은 한숨과 함께 최 내관은 회랑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내관이 떠난 세손의 방엔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한동안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내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던 세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 갈등하는 빛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세손은 허리를 꼿꼿이 하고 뒷짐을 진 채 굳게 닫힌 창 앞에 섰다.

그러고는 무에 해서는 안 될 큰 부정(不正)을 저지르는 듯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는 천천히 창문을 열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처마 끝에 매달린 구름을 서쪽 하늘 끝으로 몰고 갔다.

비로소 구름에서 벗어난 새벽 달이 수줍게 민낯을 드러냈다.

빠른 걸음으로 제자리로 돌아온 세손은 서탁 위의 서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내내 차갑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바로 웃음.

그것은 지금껏 세손의 곁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켰던 최 내관조차도 본 적 없던 웃음이었다.

잠시 후.

익숙한 동작으로 서탁 위에 하얀 백지를 펼친 세손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은 또 무슨 얘기를 하려나?”

텅 빈 백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묘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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