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48)화 (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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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 두 명의 자식은 적어도 현대에는 하나뿐인 존재였다.

그렇다 보니 이 아이의 탄생부터 성장까지, 그 모든 과정에 참견하고 싶어 하는 인간 아닌 존재들이 묘하게 많은 점이 하나의 문제가 될 지경이었다. 신들은 근본적으로 제멋대로인 경향이 큰 데다, 너무 오랜 세월 관심을 가질 거리가 부족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해인의 표현에 따르면, 속된 말로 그들은 ‘뉴비를 발견한 고인물처럼’ 굴어 댔다. 친할아버지 되는 신이나 외할머니가 되는 신이 나서서 막아설 수 있는 문제였기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새로운 컨텐츠를 원하는 신들의 호소야 테티스와 포세이돈의 알 바가 아니었다.

“임신하고 출산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모르는 놈은 꺼져. 내 딸은 쉬어야 해.”

“아니 나는 걔랑 인사도 했다니까?”

“뭐? 언제?”

……어쨌든 그랬다.

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열심히 나서는 사이, 한때 영생을 얻었지만 현재는 엘리시움에 잠들어 있는 탓에 연락조차 불가능한 친할아버지를 대신해 외할머니인 여진은 손자가 자라나는 것을 평화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평범하고 또 평범한 인간이었으므로 누가 참견하는지는 역시 그녀의 알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두 반신의 아이는 부모 둘을 모두 골고루 닮아 있었다.

눈매는 아빠를 닮았고, 코와 입, 턱 선 같은 것은 엄마를 닮았는데,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지만 눈동자는 새파랗다기보다는 조금 엷고 더 밝은 푸른빛이었다. 남자아이치고는 정말 예쁜 얼굴이어서, 아이의 엄마인 해인은 왜 아들에게 원피스를 입히는 부모가 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해인. 정 입혀 보고 싶으면 애가 기억하지 못할 때 하는 게 낫겠어.”

“……아니, 안 해.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이 아버지가 여자 옷을 입는 것에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관계로 실행은 하지 않았다.

아이는 태어나서 한두 달이 지날 때까지 이름을 채 지어 주지 못했다.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참견하려는 존재들이 어떻게든 그 작명 과정이나 결과물에 한 발 걸치고 싶어 한 탓이었다.

그들을 전부 치우고 본격적으로 이름을 지어 보려니 이번에는 포세이돈과 테티스가 부딪쳐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일찍이 양보하고 물러난 여진은 그런 그들을 내심 흥미롭게 지켜봤다.

결국 출생지가 그리스인지라 복수 국적이라는 근거로 이름을 두 개 짓기로 한 뒤, 한국 이름은 해인이 선수 쳐서 지어 버렸고 그리스 쪽 이름을 짓는 것은 결론이 날 때까지 보류하는 걸로 임시 결론이 나고 말았다.

해인은 여진을 닮아서 작명 수준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그녀는 여진이 해인의 이름을 지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주 직관적인 방법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바다 해와 밝을 성을 써서 해성이었다.

“왜 밝을 성이야?”

“눈 색이 밝잖아요.”

한국어로 이루어진 여진과 해인의 문답은 그들 모녀만 평화롭게 납득하고 끝났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누군가 들었다가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을 대화들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삼 년쯤이 흘러서야 아이의 그리스 이름이 에반젤로스로 정해졌다. 문제는 그 이름을 위해 삼 년을 소모한 탓에, 아이에게 익숙한 이름은 해성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에반젤로스가 자기 이름인 걸 인정하질 않네.”

“안 익숙해서 그런가 봐요. 가끔 고집이 세더라고요.”

결국 그 이름은 아이가 조금 더 자라고 고집을 내려놓은 뒤 넓은 마음을 가지게 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만 사용하지는 못하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천천히 시간이 흐르고 아이는 계속해서 자라났다.

태어날 때부터 꽤 무거웠던 아이는 자라며 점점 더 체력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해인은 그런 아들이 감당이 안 됐지만, 다행히 아킬레우스가 아들보다 더 세서 괜찮았다.

다만 아들은 놀아 주는 아빠보다는 엄마를 더 좋아했는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따위를 떠올리며 갸웃하는 해인과 달리 아킬레우스는 별달리 신경도 쓰지 않았고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것만은 궁금하다는 듯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엄마가 좋아?”

“엄마는 바다 같아.”

오히려 아킬레우스는 어린아이가 하기에는 묘하게 철학적으로 들리되, 사정을 아는 사람이 들으면 더없이 직관적인 그 대답을 듣고서야 약간 멈칫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도 좋아.”

“바다 같아서?”

“응. 엄마 닮았잖아.”

사실 그 반대였지만, 아킬레우스는 일단 주체가 해인이라는 점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한편 그 ‘할아버지’는 아이가 커서도 변함없이 손자를 몹시 예뻐하는 중이었다.

자식들이 결혼했어도 별달리 교류하지 않던 포세이돈과 테티스는 어린아이의 존재 하나로 뜻밖에 교류를 늘리기 시작했다. 손자가 가족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가족 모임이라는 명목하에 그들은 예전 포세이돈이 해인을 데리고 머무르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는 했다.

멀찍이 서서 앞서 나가는 자식 내외와 그 사이의 손자를 바라보던 포세이돈은 마침 근처에 있던 여진에게 무심코 말을 건넸다.

“자식은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분명 있었는데, 손자는 그게 덜하니 마음 놓고 예뻐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군.”

“신이나 인간이나 느끼는 점은 비슷한가 보네요.”

“그대도 비슷한가 봐?”

“해인이 키울 때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지 좀 내려놓은 느낌이에요. 뒤에서 몇 마디 조언이나 하면 되는 게 편하긴 하네요.”

사실이 그랬다.

짧게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여진이 익숙하게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포세이돈은 굳이 뒤따라가지는 않은 채 희미하게 웃었다.

테티스와 여진은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예의하에 잘 지냈다.

그들이 별장 안에서 쉬는 동안, 아킬레우스는 아들을 거둬 가 해변에서 놀아 주며 넘쳐나는 아이의 체력을 익숙하게 소모시켰다. 멀찍이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들과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며 해인은 선 베드에 등을 기댔다.

“……아버지.”

그리고 어쩌면 꽤 오랜만에, 바로 곁에 있는 포세이돈을 불렀다.

“왜 그러니?”

손자를 예뻐하기는 하지만 포세이돈에게 있어 항상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해인이라는 사실은 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부름에 돌아보는 시선 속에서 해인은 여전히 어린 딸이고 그의 약한 자식이었다.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그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해인은 꺼내려던 말을 채 꺼내지 못하고 멈칫했다.

아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해인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들이 먼저 죽는 걸 보게 되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불멸하는 신인 포세이돈은 그 모습을 이미 수없이 봐 왔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싫고 힘들어서 무료함을 이유로 바닷속에 가라앉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심지어 언젠가, 몇십 년이 지난 뒤에는…….

‘또 겪게 될 텐데.’

해인은 언제가 되었든 결국 필멸자였으니 말이다.

‘또다시 모든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하시게 되면…….’

먼저 불러 놓고 머뭇거리는 딸을 가만히 지켜보던 포세이돈은 침묵 끝에 먼저 슬쩍 웃었다.

그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거짓말 같겠지만, 딸의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내가 걱정되느냐?”

“……제가 무슨 말 할지 알고 계셨어요?”

“너도 부모가 되었으니, 한번쯤은 그런 걸 물어볼 것 같았거든.”

항상 마음이 약해서 이것저것 걱정하고는 했잖니, 하고 덧붙인 포세이돈은 조용하고 느리게 말을 이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게 알다시피 한두 번 있던 일은 아니었지. 심지어 먼 옛날에는, 내 아들딸들은……. 네 누이나 오라버니들은 대부분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거든.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 애들을 많이 죽이고는 했으니 말이다.”

포세이돈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뭐, 그런 시대였지. 사실 제 잘못으로 죽은 녀석들도 많았고.”

그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거야 제 운명이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분명 힘들기도 했고 고통스럽기도 했단다. 어쩌면 그래서 전부 내려놓고 깊이 침잠했던 것 같기도 하구나. 하지만 그렇게 단절된 채 지내다, 이렇듯 다시 삶을 살아가 보니…….”

그런 고통도 삶의 일부인 것 같구나.

내가 가지고 태어난 운명의 길일 것이고,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겠지.

“그리고 외면하지 않으면 거기서 분명 무언가 남아 있을 거라고, 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더군.”

약간 놀란 듯 눈을 깜빡이는 해인을 보며 포세이돈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딸의 머리카락을 쓸어 정리해 주었다.

“그러니 네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은 없을 거란다. 이 약속도, 내 딸인 너의 존재도 평생 잊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맹세하마.”

“……맹세하지 않으셔도 아버지가 저를 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요.”

“그렇지?”

큰 손에 얼굴을 기대며 해인은 한숨처럼 웃고 말았다.

‘감히 걱정할 주제가 아니었구나.’

그 사실이 정말 다행스럽고 기꺼웠다.

앞으로도 모든 게 괜찮을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기분이었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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