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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47)화 (147/149)

아이 아버지의 정체를 받아들인 이후로는 이전까지 크게 관심도 없던 각종 신화를 섭렵했던 여진은 해인을 보며 문득 신화 속 여러 반신 영웅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들도 딱히 인성이 훌륭한 경우는 드물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태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나 싶었는데.’

보통 아이라면 모를까, 굳이 종족을 따져 보면 인간이 아닌 반신이니 신에게 물어보면 무언가 확실한 대답이나 해결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아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물론 도움은 안 됐었다.

그 점은 잘 모르겠지만, 그대가 신경 쓰이거나 감당하기 어렵다면 내게 보내도 돼.

“……어휴.”

벌써 이십 년하고도 한참 더 지난 일이지만 다시 생각해도 한숨밖에 안 나오는 답이었다. 그냥 하는 소리도 아니고, 그의 입장에서는 또 정말 진심으로 배려하고자 하는 소리 같아서 더 싫었다.

아니거든! 내 자식 버리겠다는 소리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소리치고는 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몇 시간 뒤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을 아테나라고 소개했다.

장난 전화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몇 시간 전 통화했던 사람이 포세이돈이라서 그렇게 여길 수 없었다. 여진은 하다 하다 이제는 자신이 다른 신들까지 알게 되는구나 싶어서 어이가 없는 채로 전화를 받았다.

다짜고짜 전화부터 걸어서 미안하네. 내 숙부가 이상한 말을 좀 한 모양인데, 대신 사과할 사이까지는 아니라서 사과하지는 않을 거지만……. 아이에 대해서는 알려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농담으로 한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녀가 포세이돈 대신 사과할 사이인지 아닌지는 별반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시작한 말은 뜻밖에 아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되고 생산적인 내용들이었다.

실은 십몇 년 전쯤 내가 그쪽으로 연구를 좀 해 봤거든. 나야 처녀로 남겠다고 맹세한 신이니 자식이 없지만, 자식을 길러 본 신들은 많고 현대에도 의외로 잘 찾아보면 반신이 몇 명쯤 나오기는 해서 말이야. 반신 아이들은 어릴 때 감이 예민하다네. 본능적으로 자신이 다른 아이들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걸 알아서, 타인이 하찮게 여겨지는 거라고 볼 수 있지.

그러니까 그냥 똑똑해서 그런다는 소리였다.

- 옛날 반신들이 세상에 많이 존재하고,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르던 시대에는 남자아이들의 경우 솔직하고 불꽃같은 성격이 미덕이었어. 겸손함은 가치가 없었지. 그렇다 보니 본성과 가르침이 어우러져서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다들 성격이 나빠 보이기도 해. 여자아이들은 지금처럼 배우고 직업을 가질 수 없었으니, 억눌러 키워져서 이름을 남기지 못했던 것이고 말이야.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나름대로 흥미로워서 여진은 신들에 대한 인상을 조금 좋은 방향으로 고칠 수 있었다. 사실 그날 이후 아테나와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해인이 다 자란 지금도 그녀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남아 있다.

결국 똑똑해서 그렇다는 소리였으니, 잘 키우면 오히려 더 훌륭하게 자랄 수 있다는 확신을 그녀로부터 얻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딸은 어딘가 이상한 아이가 아니라, 예민하고 민감하고 영리해서,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흡수해서 이끄는 방향으로 자라는 아이였다.

그래서 온갖 경험을 다 시키려 노력했다. 아버지를 보고 오라며 해외로도 자주 내보내는 건 예사였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 지원해 줬다.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예의를 가르치고, 신중함과 배려를 말하고, 항상 내뱉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며 여러 번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어릴 적과 같은 위화감은 없어졌다. 없어지다 못해, 어딜 가서도 환영받는 존재로 자라난 건 물론이었다.

‘좀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애가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자식을 키우는 건 무섭고 무거운 일이다.

가르치는 대로 따라오다 보니, 양육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느냐에 따라 자식도 어떤 사람인지가 결정된다. 남들은 여진에게 어떻게 자식을 저렇게 잘 키웠냐고 묻지만, 정작 여진은 자신이 너무 강조한 것이 많아서 해인이 생각이 많아진 게 아닐까 하고 여전히 고민하고는 했다.

품을 떠나 잘 지내는 것을 알아도, 못 해 준 것들만 계속 생각나는 건 부모라면 모두 알고 있는 요소일 것이다.

“……그 어린 애가 엄마라니.”

여진은 내내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실은 딸이 결혼할 때 결혼식장에 있으면서도 실감이 잘 안 났다. 사위 될 사람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뭘 어떻게 만났나 했는데, 여진 자신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머리를 짚기까지 했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조사했던 수많은 신화 가운데 성격 안 좋은 반신 하면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런 사람과 결혼한다기에 기함했다가 예상외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내가 할머니…….”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찍은 듯, 사진 속 아기는 붉은색이었고 쪼글쪼글했다. 하지만 여진은 거기서 딸의 얼굴을, 나아가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아이 아버지의 얼굴이나 아직 좀 낯선 사위의 얼굴까지 모두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자라서, 언제까지고 어릴 것만 같던 해인을 엄마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어떤 연상 작용처럼 포세이돈의 얼굴이 떠올랐다.

“흠.”

여진은 사실 포세이돈에게 대단한 사랑까지 느낀 적은 없었다.

물론 호감이 없었다면 함께 밤을 보내지도 않았겠지만, 그건 젊은 시절 누구나 가져 볼 법한 찰나의 두근거림과 상황이 만들어 낸 호기심에 가까웠다.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여러 번 만났더라면 그 감정이 더 커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연락이 다시 닿은 건 임신 사실을 안 이후부터였다.

연락이 닿았다고 해도 안정을 위해 비행기는 탈 생각도 안 했으며, 해인을 낳고서도 아이가 너무 어려서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기나긴 비행이 필요한 그리스에 갈 생각을 굳이 하지 않았다.

포세이돈은 하필이면 인간도 아니고 신이었던 탓에 본인이 비롯된 땅을 벗어날 수도 없었고, 그러니 그 몇 년의 시간 동안 당사자를 대면한 적도 없으니, 감정은 그대로 싹이 밟혀 끝났다.

어린 해인을 데리고 다시 만났을 때도 반갑기는 했지만 대단히 두근거리지는 않았고 말이다.

그 대신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면서 일종의 전우애 같은 건 쌓인 것 같다. 함께 살지도 않았고, 결혼하지도 않았지만, 아이의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나름의……. 우정을 쌓는 데는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 전우애 때문에, 여진은 가끔 포세이돈이 걱정되고는 했다.

‘인간이 신 걱정하는 게 의미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포세이돈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여진에게 있어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진은 자신이 해인의 어머니인 이상 그에게 있어 자신이라는 인간의 존재가 분명 의미를 갖기는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언젠가, 대체 처음 만났을 그때 왜 그렇게 바다 한가운데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걸어 나온 건지 스치듯 물어본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그때 그는 거의 천 년하고도 몇백 년 만에 다시 육지에 나와 본 것이라고 했었다. 살다 못해 영생에 질려서 무기력하게 지내다가, 그냥 아주 뜬금없이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나왔고, 그러다가 처음으로 마주친 인간이 여진이었다고.

그래서 그냥 운명이 아닐까, 저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 그런 충동이 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중간에 오해가 좀 생기기는 했어도, 어쨌거나 잘 풀린 데다 자식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어 진심으로 기뻤다고도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존재가 그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인간도 죽고, 진심으로 기쁨을 느끼게 만들었던 자식도 죽어서 모두 잃게 되면…….

다시 무기력하고 의미 없는 생을 살아갈까 봐.

인간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죽기 마련이고, 불의의 사고가 벌어져서 순서가 뒤바뀌는 일이 생기지 않으면 자연의 순리대로 여진이, 다음으로는 평생 어릴 것만 같던 딸이, 모두 언젠가는 다시 흙으로 돌아갈 테니까.

‘해인이 예뻐하는 걸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렇다고 또 자식 좋아하는 모습에 대고 너무 정 주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고, 할 생각도 없었으니 그 걱정은 사그라지지 않고 매번 잊을 만하면 종종 튀어나오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사진을 들여다보니 어쩌면 그런 걱정은 크게 의미는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감상이 들었다.

인간은 분명 죽지만, 그렇다고 정말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는다. 머나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와서 지금의 여진이 있는 것이고, 나아가 해인이 존재하고, 어린 손자도 태어난 셈이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포세이돈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도 잊힐 만큼 흐릿해지겠지만, 그래도 세상에 여전히 무언가 남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 것들에서 의미를 찾지 못해 몇천 년 동안 고통 받으며 바닷속에 처박혀 있던 신이기는 했지만, 어쩌면 딸을 키우고 손자까지 보게 되며 다시 깨닫거나, 혹은 새로이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는 해인의 존재를 시작으로, 태어난 손자와 관련된 이야기들로 다시 형제들이나 친척들과 어느 정도 연락도 하고 지내는 듯했으니 더 다행이었다. 그렇게 같은 존재들과 더 교류하다 보면 그들이 포세이돈을 다시 이끌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진은 가볍게 웃고는 사진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세이돈이야 하필 신이라서 본인이 비롯된 땅을 못 떠나는 나머지 자식의 아기 시절을 본의 아니게 놓쳤지만, 여진은 어디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몸이었다. 아기가 어려서 비행기를 못 타면 어른이자 할머니인 자신이 직접 가서 보면 되는 일이다.

“그래도 손자가 아기일 때는 놓치지 않아서 좋겠네, 당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여진은 사진을 협탁 위에 잘 내려놓았다. 어린 해인의 사진이 들어간 액자가 놓여 있던 곳의 바로 옆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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