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46)화 (146/149)

사실 여진은 그때까지도 가게 주인은 안중에 없었고 남자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던 중이었는데, 다시 보니 주인 역시 분위기가 기이한 면이 있었다. 확실히 비슷하다. 저 둘만 세상에서 묘하게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멀쩡하게 보이네.’

남자는 이번에는 아주 멀쩡한 옷차림이었고 젖어 있지도 않았다. 정상적인 옷차림이 얼마나 사람의 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온몸으로 증명하는 듯했다.

전날에도 잘생겼다는 건 알았지만 미친놈을 마주했다는 두려움이 더 컸는데, 저렇게 멀쩡히 앉아 있으니 누가 봐도 감탄할 법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둘 다 잘생겼지?”

순간 여진은 자신이 생각을 입 밖으로 뱉은 줄 알았다.

흠칫하며 친구를 돌아본 그녀는 어이없이 웃으며 되물었다.

“……방금까지 주인은 무섭다며?”

“그래서 들이대지는 않았잖아. 덜 무서웠으면 덤벼 봤을걸.”

“어어, 그래. 근데…….”

여진은 그쪽을 눈짓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귀기에는 나이가 많은 것 같지는 않고?”

“그런가? 사실 나이를 알기 좀 어려운 얼굴이잖아. 생각보다 많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노인은 아니니까. 결혼 안 했으면 됐지.”

듣고 보니 또 그 말대로였다. 나이를 알기 어려운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시간의 흔적이 느껴진다는 인상이었는데, 말을 듣고 다시 보자 얼핏 청년 같은 느낌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많은 것 같지는 않기도 하네.’

서양인들은 단번에 알아보고 기억하기 어려워서 자꾸 느낌이 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끝으로 여진은 정말 저쪽에서 관심을 떼려고 했다. 미친놈이 사실은 그리 미치지 않아 보인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지, 저 남자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밤중 바다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꼴과 마주친 경험으로 호감을 품는 게 더 이상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

‘미친 거 아닌가.’

남보고 미쳤다고 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봤어야 했다.

여진은 이마를 짚었다.

술을 너무 마셔서인지 부분 부분 기억이 끊어져 있긴 했지만, 기억나야 할 것들은 전부 기억이 났다. 주량을 모르는 나이도 아니고, 평상시였다면 적당히 조절해 가며 마셨을 텐데 어쩌다 그렇게까지 휘말렸는지 여진은 자기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그 주인 무섭다며.’

대체 영문은 모르겠지만, 친구와 그런 대화를 하고 나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주인이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친근한 태도로 말을 걸었던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반사적으로 낯을 가리던 여진에 비해 친구는 좋다고 주인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주인은 애초에 이러려고 했다는 것처럼 그 남자를 끌고 오더니 소개시켜 주기까지 했다. 심지어…….

- “첫 만남이 이상했다는 건 들었는데 그렇다고 이분이 진짜 이상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전날 그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마주쳤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 여진에게 대신 해명까지 해 줬다.

거기까지야 사실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래 놓고 주인은 갑자기 그들에게 직접 만든 술을 시음해 볼 사람을 찾고 있었다며 와인을 자꾸 가져다주기 시작했고…….

‘안 마실 수 있었는데 내가 조절을 못 했어.’

그런 걸 보통 휘말렸다고 말한다.

그러는 내내 주인이 옆에 끌어 놓은 대로 와서 앉아 있던 남자도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그는 말수가 좀 없기는 했고, 대화가 약간 서투른 느낌도 있었지만, 목소리가 좋았고 일단 잘생겼었다.

‘얼굴……. 그게 문제였나.’

여진은 지금까지 계속 외면해 오던 곁을 그제야 천천히 돌아보았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내면에 일말의 광기를 품고 살아가는데, 이성이 그것을 억누르고 있지만 술 같은 매개를 통해 그 광기가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일, 이제는 날이 바뀌었으니 몇 시간 후 이 섬을 떠날 예정인 주제에 처음 보는 사람과 뜬금없이 밤을 보낸다는 선택을 내리지는 않을 테니까.

다행히 남자는 아직 자고 있었다. 얼굴 앞에서 손을 몇 번 흔들어 봤지만 깨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여진은 천천히 시간을 확인했다. 섬에는 작은 공항이 있어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공항 규모가 작은 만큼 비행기도 그렇게 자주 있는 건 아니었다.

‘……얼굴이 맘에 들었던 거지, 그렇다고 계속 볼 건 아니니까.’

깨어나기를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이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날 밤에야 물론 다정했고 나쁘지 않았지만, 같이 자는데 불친절한 게 더 이상했다. 여진이나 이 남자나, 이제는 이틀 전이 된 밤중에 처음 마주쳤고 알게 된 지는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전날 기억을 되짚어 보면, 이 남자도 특별히 계속해서 여진과 연락을 이어 가려는 티를 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는 하지만…….’

옷을 입고 자신이 머물던 숙소로 향하려던 여진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민 끝에 종이를 찾아 짧게 연락처를 남겼다.

‘오면 오는 거고 아니면 정말 하루로 끝인 거지.’

어쩌면 이것도 미련일지도 모른다. 아무 감정 없다고 말하면서 사실 마음속은 그렇지 않은 걸 수도 있다. 쓰게 웃은 여진은 곧 등을 돌리고 그 장소를 벗어났다.

***

그리고 돌아온 한국에서 좀 후회하고 말았다.

“내 걸 남겨 놓는 게 아니라 연락처를 뜯어냈어야 했나.”

여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작은 물건을 응시했다. 선명한 붉은색 줄 두 개가 보였다.

“아니……. 안전한 날이었던 것 같은데…….”

최근 몇 달간 관계를 가졌던 건 그 남자 한 명뿐이었으니 누구의 아이인지는 모를 수 없었다. 둘 다 술에 취해서 도구를 쓰지 않았던 기억도 났기 때문에 틀릴 리 없었다…….

하지만 분명 안전한 날이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업보를 맞이할 줄은 몰랐다. 안일함의 대가치고는 좀 크지 않나? 혼자 중얼거렸지만 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멍하니 임신 테스트기를 내려다보던 여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긴, 굳이 알릴 필요가 없기는 하지.”

범죄의 피해인 것도 아니고, 안일하게 굴었던 게 문제지 서로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이를 지우든지, 낳아서 기르든지, 어느 쪽이 되었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만큼 사정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결혼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식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쩌면 그 바람이 약간 뜬금없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돌아갔다. 여러 가지 생각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물러나고, 뒤섞였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고 여진의 선택이 최우선인 문제였다.

그리고 조금씩, 낳아서 기르겠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쯤.

아주 뜬금없게도 메일 알람이 울렸다.

“……어.”

맥락에 맞는 생각은 아니었고, 왜 갑자기 그 사실이 떠오르는지도 모르겠지만, 여진은 그 순간 자신이 그 남자에게 남겨 놓고 왔던 연락처가 제 메일 주소였던 걸 기억해 냈다.

***

과거의 일을 회상하던 것을 접으며 여진은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이후로 있었던 일들은 여러모로 평범하지 않았다.

뒤늦게 연락이 닿았던 이유는 하룻밤 잔 걸로 사실혼이 성립되는 게 아니라는 걸 늦게 알아서였고, 대체 왜 그런 정신 나간 것 같고 옛날 사람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나 했더니 실은 고대 그리스의 신이라서 그렇다는 답을 듣지를 않나, 정말 미친 건가 생각하고 연락을 끊으려 했는데 꿈에서…….

“어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고 나서 겨우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 이전까지는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여진에게는 제법 고난의 나날들이었다.

그래도 그 끝에 안아 보게 된 딸은 예뻤다.

눈동자 색이나 머리카락 색은 그 남자를 닮았지만,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자신을 닮아 있었다. 자신의 이목구비가 보이는 조그마한 생명체가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다.

성은 여진의 것을 따르는 대신, 아버지 되는 존재가 바다의 신이기에 그 흔적이라도 남겨 주려고 이름을 해인으로 지었다. 어딘지 번들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똑바로 마주 보기 어려운 그의 것과 달리 딸의 눈은 그저 새파란 바다 같아서 이름과 잘 어울렸다.

해인아, 하고 부르면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배시시 웃는 아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현대에 와서는 유명무실해졌다 해도 일단은 신의 핏줄을 이은 반신이라서인지, 해인은 성장도 빠르고 머리도 좋았다. 다른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빨리 걸었고, 더 빨리 말이 트였으며, 아는 것도 많고 기억하는 것도 많았다.

그때까지는 그 점을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예쁜 짓 하는 걸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남겨 놓기도 시간이 모자랐다. 아이 아버지도 해인의 성장이 빠르다는 말에 기뻐하기나 했지, 특별한 말을 남기지는 않았으니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던 건,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간 이후부터였다.

‘눈빛이 점점 아빠를 닮아 갔었지.’

더 어릴 때까지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쯤이 되어 보니 또래 아이들과 해인은 조금씩 더 눈에 띄게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발달이 빠른 정도가 아니었다.

분위기가 고요했고, 가끔은 무료해하는 것 같았으며, 어린아이를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그 눈빛이 서늘하게까지 보였다.

어쩌면 어린 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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