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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신은 시간을 건넌다 (145)화 (145/149)

외전chap3. 옛날과 미래

여진은 최근 들어 자주 옛날을 떠올린다. 주로 딸에 대한 기억들이다.

시기는 매번 달랐다. 기억 속의 딸은 아주 아기일 때도 있고, 허리까지 오는 어린아이일 때도 있고, 교복을 입고 있을 때도 있고, 다 자란 어른일 때도 있다.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거쳐 오는 동안 여진은 멀쩡한 본인의 이름이나 직책이 있음에도 ‘해인이 엄마’로 불리는 데 익숙해졌다.

새삼스러울 만큼 익숙한 얼굴이지만 매번 떠올릴 때마다 애틋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정말로 딸을 품에서 떠나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허공을 보며 여진은 손에 들린 사진 모서리를 매만졌다.

‘평생 어릴 것 같았는데.’

그렇지만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꽤 젊은 나이에 딸이 생겼었다. 지금 딸의 나이와, 그 딸을 임신했을 적 자신의 나이가 그리 많이 차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식은 왜 이렇게 어리게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무 정성껏 길러서 그런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제 자식은 정성 들여 기르겠지만, 여진은 그중에서도 자신이 꽤 많이 노력한 축에 들 거라고 당당하게 자신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냐면, 일단 그 사랑하는 자식이 평범한 존재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진은 이 ‘평범함’에 맺힌 게 좀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 말하려면, 딸이 태어나기보다 더 이전, 언젠가의 가을로 되돌아가야 했다.

***

젊을 때, 아니, 사실상 어릴 때부터 너무 일만 한 나머지 번아웃이 왔다.

이대로면 죽을 것 같아 고민 끝에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온 여행지였다.

애초에 외국에 오래 있을 생각으로 떠나왔기 때문에, 여진은 관광객은 맞지만 관광객이 아닌 척 도시 하나에 오래 머무르며 마치 그곳에 사는 사람처럼 지내고는 했었다. 심지어는 큰 도시가 아니라 일부러 작은 도시로 향하기도 했고, 하다못해 그리스까지 가서는 관광지라기에는 다소 부족한 섬에 숙소를 잡기도 했다.

인종 차별이야 어디든 있었지만, 어차피 제정신이 아닌 자들은 세상 어느 곳에나 항상 엇비슷한 비율로 존재한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진을 반겼으니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지내다 보면 자연히 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 친구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만이 알 법한 명소를 소개해 주기 마련이다.

그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지중해의 작은 섬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던 여진은, 그곳에서 사귀었던 친구의 추천으로 인적 드문 바닷가에 산책을 나갔다. 늦은 밤이었기에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고, 여진은 그 상황이 꽤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화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그 어두컴컴한 바닷속에서 검은 파도를 헤치고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미친놈을 마주치고 만 탓이다.

‘……인적이 드물다는 게 사실 미친놈 출몰 가능성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야?’

너무 놀라면 몸이 안 움직이고 말도 안 나온다고, 여진은 걸음을 멈춘 채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 같은 그 남자를 아연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파도가 밀어 주는 대로 육지를 향해 걸어오는 남자는 키가 컸고 체격이 좋았다.

그리고 무서웠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 그랬다.

물에 젖은 검은색 머리카락은 이마에 가닥가닥 달라붙은 채였는데, 그 아래에 위치한 새파란 눈이 무슨 도깨비불처럼 선명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이 어둠 속에서 눈동자는 흡사 맹수의 것처럼 홀로 빛나고 있는 것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여진이 그렇게까지 삶을 길게 살아왔던 건 아니지만, 그렇대도 이제까지 쌓아 왔던 데이터가 반짝이며 외쳤다.

저 번들거리는 눈은 결코 ‘정상적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분이 나쁜 것인지, 약간 아래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눈동자는 대체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좀 정신이 없어 보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더 미친 것 같았다.

심지어 계절은 여름도 아닌 가을이었다. 늦은 밤에는 외투를 걸치지 않으면 춥다고 느껴질 법한 기온이었건만, 저 사람은 옷이라고 할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옷 같지도 않은 천을 몸에 둘둘 두르고 있었는데, 그 천마저 젖어서 수건으로 쓰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떠야지. 눈치 못 채고 있을 때 뛰어야 더 멀리 가잖아.’

여진은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발이 안 움직였다.

그렇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은 몇 초가 지났다. 길게 느껴졌지만 남자는 키가 큰 만큼 보폭도 넓었기에 금세 바다 깊은 곳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종아리까지만 물에 담근 채였다.

그 정도로 육지와 가까워지면 아무리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거나, 혹은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해도 누군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결국 여진은 그 상황이 되기까지 채 자리를 뜨지 못했고, 남자의 눈이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왔다.

넋 나간 것 같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뜻밖에 그 새파란 눈동자 안으로 떠오른 건…….

어떠한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그저 단순하고 희미한 일말의 당혹감이었다.

“……그.”

기다리기라도 한 듯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뺨을 스쳐 지나갔다. 여진은 뜬금없게도 그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침착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운 덕분에 남자의 얼굴이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아까까지 미친놈이라느니, 무섭다느니 했던 평가가 무색하게도 그는 신이 있다면 이렇게 생겼으리라는 감탄을 들게 만드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갑자기 두르고 있는 천도 옛날 신화 속 옷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제정신은 아니겠지.’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보통 사람이면 이 날씨에 바다에서 이상한 천을 두르고 불쑥 솟아 나오지 않으니까.

다만 안심이 되는 건, 이제야 상대의 눈이 조금쯤은 사람 같다는 사실이었다. 최소한 말이 통하기는 할 것 같은, ‘사람’ 말이다.

그리고 상대가 갑작스레 달려들거나 위협을 가할 낌새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여진을 발견한 이후부터는 그 자리에 가만히 굳어 얼어붙은 채, 눈만 몇 번 깜박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도망칠 기회다.’

진짜 맹수는 아니니까 등을 보인다고 쫓아오지는 않겠지. 평화롭던 밤 산책이 어째서 이 꼴이 되었는지는 둘째 치고, 여진은 어색하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며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 바다에 들어갔다 나오시는 취미가 있으신 모양인데 제가 본의 아니게 봐 버렸네요. 실례했고요……. 제가 갈 테니까 할 일 있으시면 마저 하시길 바랍니다…….”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물러나면 충분히 거리가 벌려진다. 그때까지도 그 남자는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었기에, 여진은 조금씩 더 안심했다.

‘이만하면 됐겠지’ 싶을 정도로 거리를 띄우는 데 성공하고 여진이 뒷걸음질을 멈춰 다시 슬쩍 눈을 들었을 때, 새파란 눈동자와 마지막으로 스치듯 시선이 마주쳤다. 지레 놀란 여진은 흠칫하는 스스로를 감추며 빠르게 뒤돌았다.

사고 혹은 범죄가 벌어질지도 몰랐지만, 다행히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닌 듯했고, 문제 상황에 엮이지 않고 어떻게든 잘 빠져나온 일.

그 정도로 기억될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바에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

마을 사람들만 찾는다는 구석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듣기로는 주인이 와인 애호가인지라 와인 종류가 신기할 만큼 다양했고, 심지어 주인이 직접 만든 와인도 있었는데, 그렇다 해도 인테리어가 너무 난해해서 잠깐 들렀다 가는 관광객들에게는 잘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대로였다. 간판에 쓰인 가게 이름이 라서 그런 건지 내부 모퉁이에는 표범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표범을 너무 사실적으로 만들어 놔서 지나가다 보면 순간 흠칫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대도 여진은 이 가게가 나름 마음에 들었지만, 별개로 전날 보았던 저 남자와 가게가 어울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남의 일이니 신경 쓸 바는 아니었지만 다소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본인 자리가 아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계속 힐끗거리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애써 시선을 돌렸지만 신기했다. 그리고 그건 새로 사귄 친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이 섬에서 본 적 없는 사람인데.”

친구는 바 주인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남자를 힐끗 보며 말했다.

“사실 여기 주인도 몇 년 전에 섬에 와서 정착한 거지, 여기가 고향인 사람은 아니거든. 친구나 친척인가?”

이 친구에게는 저 남자가 한밤중에 바다에서 미친놈처럼 걸어 나오더란 소리를 아직 하지 않았다. 했다면 이 반응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조금 궁금했지만 당장은 말을 아꼈다.

“궁금하면 나한테 말 걸던 것처럼 물어보면 되잖아.”

“하지만 이 가게 주인은 어딘지 어려워. 성격은 좋은 것 같은데 눈을 똑바로 보기 힘들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게 분위기가 가끔 무섭다고 해야 하나……. 마을 사람 대부분과 말은 하고 지내지만 정말 친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그런 사람이야.”

슬쩍 눈을 굴려서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는 듯한 가게 주인과, 그 앞에서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남자를 힐끗 본 친구가 이어서 속삭였다.

“저 남자도 느낌이 비슷하기는 하네. 친척 같기도 하다.”

그 말에 여진은 애써 돌렸던 시선이 무색하게도 다시 그쪽을 짧게 바라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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