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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나 아킬레우스 모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바깥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먼저 안으로 들어와 커피 테이블 의자에 걸터앉은 해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망했다.’
얼굴을 보고 있는데 자꾸 의문이 솟았다…….
이런 의문을 품게 만든 아폴론에 대한 평가가 수직으로 하락했다. 원래도 좋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드러내 놓고 하향선은 아니었다. 해인은 자신이 들었던 그 예스러운 발음의 문장들을 떠올렸다.
[살아나는 걸로도 모자라 저렇게까지 같은 인격과 기억을 가지고 똑같은 ‘존재’로 원하는 시대를 골라잡는 게 과연 선택만으로 가능할까?]
듣고 보니 그렇기는 했다. 그냥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기에 잘된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굳이 그 점을 콕 집은 말을 듣고 나니 너무 안일한 반응이었던 느낌이 들었다.
[크로노스 님이 무언가를 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당사자인 저 녀석이 했다는 선택이 단순히 이것 아니면 저것 중 하나를 고르는, 말 그대로의 선택에 불과할까?]
말 그대로의 선택이 아니면 뭘까?
[혹시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기로에서 결론을 내린 건 아닐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그쯤 생각하던 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폴론이 노린 게 이런 것이었겠거니 싶어진 탓이었다. 아주 노골적으로 장난을 좀 쳐 볼까 하던 그 표정……. 장난의 신도 아닌 존재가 왜 그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못마땅하다지만 잘못한 건 그쪽 아닌가?
가까이 다가온 아킬레우스가 허리를 숙여 뺨에 슬쩍 입술을 대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왜 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이 시대에서는 심각할 일이 없기는 했죠…….”
“음.”
아킬레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지금 심각한 건 그 시대에 살던 이들을 만나서 그런가?”
“……네, 뭐. 진짜 싫어요, 사촌.”
대체 뭘 했기에 온화한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싫다는 말을 하지? 그자가 무례했느냐고 캐묻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그는 일단 웃는 낯으로 답했다.
“그렇지? 나도 싫어.”
“그분도 당신이 싫다던데요.”
“그러라고 해.”
해인이 피식 웃었다. 겨우 웃음을 보이는 걸 확인하고서야 아킬레우스는 어깨를 조금 늘어트렸다. 기원전에서 해인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심각하게 있었고, 가끔은 더 심각해져서 거의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탓인지 재회한 이후 그는 해인이 그때와 비슷한 낯을 하는 꼴을 죽어도 보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고난 끝에 행복을 맞이하듯 동화처럼 재회했으니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문장으로 결론짓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 순간 들려온 말에 다시 조금 긴장하고 말았다.
“사실 말이에요. 아까 그 사촌에게 들은 말이 있는데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게 있어요.”
“……뭔데?”
그건 어쩌면 본능에서 비롯된 반응이었다. 아폴론이 결코 자신에게 이로운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직감에서 근거한…….
[혹시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기로에서 결론을 내린 건 아닐까?]
아킬레우스는 순간 멈칫했다.
“……라고 하시던데.”
천천히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는 해인을 보자 어쩐지 등 뒤가 약간 서늘해지는 것도 같았다.
“주어가 당신이더라고요.”
해인은 아킬레우스를 가만히 바라보며 문득 아폴론이 했던 말을 스치듯 떠올렸다.
‘오늘 여기 오기 전에 잠깐 본 게 있는데, 아까 내가 말한 점에 있어 저 녀석이 너에게 털어놓지 않은 게 있고 너는 그걸 저 녀석에게 물어보는 장면을……. 봤다, 라고 말하려 했겠지.’
지금 같은 질문을 안 하려면 아예 옛날 언어로 말을 시작했을 때부터 자리를 박차고 떠났어야 했던 것 같다. 시간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에게 시달린 경험이 있어서인지, 해인은 이 상황 역시 일련의 운명과 비슷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웃고 있던 아폴론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금 그에 대한 평가가 하향 곡선을 그리기는 했지만, 일단 눈앞에 있는 건 아폴론이 아닌 아킬레우스였으므로 그녀는 아폴론에 대한 생각은 다시 멀리 밀어 두며 입을 열었다.
“몰랐으면 그냥 모르는 채로 살았겠는데 듣고 나니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제 사촌도 이런 걸 바랐던 것 같아서 정말 안 내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안 물어보면 계속 생각나서 더 신경 쓰일 것 같고…….”
“그.”
“그런데 표정을 보니까 뭔가 중대한 게 있기는 한가 보네요…….”
아킬레우스는 속으로 아폴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
멀쩡히 잘 살라며 말하고 떠났던 사람 앞에서, ‘사실은 그 말 안 들었고, 나는 스스로 죽는 걸 선택해서 그렇게 됐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건 더 말할 것 없이 자살행위였다.
심지어 행위만으로 그친 게 아니라 실제로 행했다.
‘현재가 그 행동의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과가 좋다고 그 과정까지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게 세상에는 존재한다. 이미 질문을 받은 이상 더 감추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질문을 들은 직후 당황해서 반응을 채 숨기지도 못했다.
하지만 말할 거면 진작 말했어야지, 지금은 솔직히 조금 늦어 버렸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자는 이걸 어떻게 알았지?’
아니,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대체 아폴론은 왜 현대에서까지 이렇게 사방으로 민폐를 끼치는 것인지 아킬레우스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제 사제가 기도 좀 했다고 연합군 전체에 역병을 퍼트리던 성질은 그렇게 기나긴 세월을 거쳐 오면서도 전혀 바뀌지를 않은 모양이다.
침묵이 길어졌지만 해인은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포기하지도 않은 듯, 대답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없이 맞은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맞아.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심각해요?”
“들으면 화날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듣겠다고 하겠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기에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해인이 입꼬리만 슬쩍 올리며 웃었다.
“가능한 이해해 볼게요.”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약간의 위안이 됐다…….
“말 그대로의 선택이기는 했지. 다만 그게 그의 말대로……. 그대가 느끼기에 가벼운 선택은 아닐 거야.”
“제가 느끼기에?”
“난 간절했어. 이렇게 말하면 듣기 싫겠지만,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단어 하나가 내려앉았다.
“……목숨이.”
그리고 머뭇거림보다 훨씬 긴 침묵이 이어졌다.
별로 길지도 않은 설명이었지만 해인은 어렵지 않게 자신이 몰랐던 게 뭐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살 만큼 살고 선택을 할 기회를 얻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목숨이 아깝지 않아서 가볍지 않은 선택을 했다는 건…….
“대가가 죽음……?”
아킬레우스는 드물게도 시선을 조금 내리며 약간 빨라진 투로 설명했다.
“내게 남았던 시간을 사용해서, 이 일로부터 비롯되는 역설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하시더군. 사실 그 설명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듣지도 않았지만. 그냥……. 그랬어. 어차피 거기엔 가치 있다고 여겼던 게 더는 없었으니까.”
다시 천천히 시선이 들어 올려진다.
“이렇게 말해서 유감이지만, 후회하지 않아.”
그래 보였다.
해인은 조금 아연한 낯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반응이든 단단히 각오한 것 같은 눈빛을 보고 있으려니 역으로 화가 나려다가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 화가 나긴 하는데.’
그리고 화낼 주제도 충분히 되기는 할 것이다.
분명한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결국 자살이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구나.’
과연 단순한 선택이겠느냐는 질문의 뜻이 비로소 완전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금세 마음이 무거워진다. 몰랐더라면 그저 편했을 정보이기도 했다. 해인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걸 당신도 아니고 사촌에게 들었다는 게 싫긴 하네요…….”
그래도 알기 전으로 되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그러지는 않겠지. 현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 몰라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눈앞의 사람에게 집중해야 할 순간이지만, 해인은 아폴론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알려 주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가 문득 궁금해진 탓이다. 눈가에 서렸던 장난기나, 누가 들어도 ‘저 사람 이간질 시도하는 것 같은데’라고 말할 법한 말투도 같이 떠올랐다.
‘……원래 누굴 사랑하는 걸 못 한다더니.’
분명 화가 좀 나는 건 사실이고, 지금도 대놓고 화내지 않기 위해 말을 고르는 중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폴론이 기대했던 것 같은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도 하나의 갈림길일지 모른다. 화를 내느냐, 내지 않느냐로 뒷일이 달라지는 갈림길 말이다.
‘본인 연애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이런 부분에서 생각이 넓을 수는 없겠지.’
이걸 아킬레우스로서는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모르겠지만, 해인은 조금 더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의문의 진정 효과였다. 진정하게 되자 조금 더 상대를 깊게 이해할 마음도 생겨났다.
“화가 안 나는 건 아닌데요.”
“응.”
“……또 그러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렇겠죠?”
애초에 이 시대에서는 자연스럽게 생을 다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 말고는 다시 못 만날 상황에 처할 일이 없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는 있겠지만, 명색이 반신이었다. 현대의 반신은 모험을 떠나고 괴물과 싸우지도 않으니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할 이유가 없지.”
슬쩍 손을 뻗어서 해인의 손을 끌어온 아킬레우스가 손바닥 위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유해서인지, 어디까지 괜찮을까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이 버렸던 건 당신의 것이었으니까, 후회하지 않는다면 내가 거기에 말을 더하는 게 과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건.”
제 모든 걸 상대에게 주겠다고 혼자 중얼거렸던 적이 있는 아킬레우스로서는 찔리는 발언이었지만, 해인은 계속 말을 잇느라 그의 멈칫거림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일부러 말 안 한 건 맞죠.”
“놀랄까 봐.”
“놀랄 문제기는 했어요.”
쓰게 웃은 해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일찍 말했어야 했다는 생각은 들어요. 안 듣는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시대도 아니고, 무언가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겠지만, 그냥 그렇게 하는 게 나에 대한 예의였어요.”
“내가 미안해.”
“그래요. 그럼 아까 그것도 다시 약속해요. 또 그러지 않겠다고.”
“그렇게 안 할게.”
잡혀 있던 손을 틀어 뺨을 쓰다듬으며 해인은 상황을 정리했다. 들을 말은 다 들었으니 무거운 분위기를 오래 끌고 가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문제였던 건 두 개인데, 사과했고 안 한다고 했으니 믿을게요.”
“……다행이야.”
“화를 안 내서?”
“며칠 안 보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어.”
진심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손목을 잡고는 손바닥 위에 연신 입을 맞추는 걸 보며 해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며칠?”
아킬레우스가 멈칫했다.
“이건 운명이랑 시간의 균열 같은 문제까지 얽혀 있어서 사과 받고 넘어가는 거예요. 진짜 문제 생기면 며칠로 안 끝날 거야.”
“……유념해 두지.”
원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다시금 그는 제 연인을 화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손목 위에도 키스했다. 다시 평화로워진 분위기가 진정으로 다행스러웠다…….